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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부의 탄식(사 5:1~7)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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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부의 탄식(사 5:1~7)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슬픔 중에는 배신과 실망 그리고 허탈 등이 있습니다. 내가 미워하고 그리고 미움을 받았다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했는데 미움받고, 사랑했는데 배신을 당한다면 거기에 진한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지 아니하고 실패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수고하고, 희생하고, 정성을 다하고 그리고 실패했다면 여기에 괴로움이 있습니다. 심지 않는 것을 기대했다면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이기에 열매가 없어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의 수고를 하고 심고 가꾸었는데 열매가 없다면 이것은 참으로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농사를 짓고 있지 않지만 역시 농사한 것을 먹고살기 때문에 농사에 대한 관심은 많습니다. 모내기를 해야할 때, 제 때에 비가 오지 아니하면 당장 가뭄으로 죽느니, 사느니 하고 걱정들을 합니다. 제 때에 모내기를 못하고 논바닥이 갈라져 논바닥에서 먼지가 푹푹 일게 되면 농부의 마음은 아픕니다. 이렇게 되면 가을에 추수가 없습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요. 심은 것이 없으니 거둘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초가을에 겪은 일처럼 봄에 제 때에 비가 왔습니다.
열심히 가꾸었습니다. 거름도 주었습니다. 이제 눈앞에 추수를 바라보며 풍년을 미리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홍수가 나서 삽시간에 다 쓸어버리고 맙니다. 한여름 동안에 땀흘려 수고한 것이 그저 몇 시간 동안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와 시편의 여러 곳에서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수고한 대로 먹는 것, 바로 그것이 축복입니다. 성경은 수고 없이 먹는 것을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로소득은 복이 아닙니다. 땀흘려 수고한 대로 거두어 지는 그것이 참 복인 것입니다. 그러면 저주는 무엇입니까? 수고하고도 거둘 것이 없는 것, 즉 아무리 수고했어도 하나님께서 그 기운으로 불어버려서 그 모든 수고가 헛되고 마는 것입니다. 거기에 심판이 있고 저주가 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한 농부의 탄식이 있습니다. 농사하는 예대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땅을 팠습니다. 깊이 갈았습니다. 그리고 돌을 치우고, 잡석을 다 걷어서 제하고, 땅을 고르고, 옥토를 만든 다음 거기에다가 극상품, 가장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가꾸었습니다. 가을이 되어서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리며 술 짤 젖틀도 만들고 망대도 만들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포도가 맺힌 다음에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이것은 극상 포도가 아니고 정반대의 들포도가 맺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농부는 실망을 했습니다. 처음 잎이 나올 때는 들포도나 참포도가 비슷했습니다. 넝쿨이 뻗어나갈 때에도, 꽃이 필 때에도 비슷합니다. 그 과정에서 비슷하기 때문에 정성껏 거름을 주고 애를 썼는데 정작 열매를 맺고 보니 다른 종자입니다. "들포도를 맺고 말더라." 그래서 농부는 여기에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더욱 한탄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것이 있었더냐?" 최선은 은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물주고, 가꾸고, 애를 써서 정성을 다해 키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더해 주랴" 이 이상 더해 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여러 가지로 불만이 있습니다. 불평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에는 충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진실하게 살기 위해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은사를 넘치도록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좀 겸손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수고에 비해서 결과는 너무 큽니다. 우리의 진실에 비해서 주신 은사는 넘칩니다. 우리가 가진 의에 비하면 받은 축복이 너무 많습니다. 믿음으로 생각해 봅시다. 열매 맺기에 필요한 최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들포도를 맺어놓고 변명을 합니다. 그래서 변론을 벌이는 것입니다. 들포도를 맺은 자들이 오히려 불만이 많습니다. 농부를 탓하고 환경을 탓합니다. 다른 것에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처럼 간단한 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심고 내가 거둔다고 긍정하고 계십니까? 인생은 추수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히 대하거든 내가 남에게 친절히 대했다고 생각하여도 좋겠습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내가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처럼 맹랑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며 살아갑니다. 친절을 심으면 친절을 거두고, 증오를 심으면 증오를 거두고, 미움을 심고 원한을 심으면 또 하나의 원한을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받는 이 모든 대우 이대로가 내가 뿌리고, 내가 심고, 내가 거두고 있다고 그렇게 공평하게 공의롭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적어도 그렇게만 생각되어 진다면 이 세상은 조용한 것입니다. 대개 지혜로운 자는 어쨌든 나보다 낫게 사는 사람들을 일단 존경합니다. 얼마나 수고했을까, 젊었을 때 공부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을까, 얼마나 수고해서 땀을 흘려서 저렇게 사는가 하고 긍정적인 면을 보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어수선한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좋지 못한 사람들은 꼭 어두운 면을 봅니다. 불로소득한 것을 보고, 복부인을 보고, 수고 없이 공짜로 잘 사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가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땀흘리는 사람에게는 실패가 돌아가고 오히려 수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가 아니냐 그래서 불평이 많고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고 없이 잘 사는 사람이 눈에 보일 때 세상은 어수선해집니다. 그래서 한탕 철학이 나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수고한 대로만 살아가며,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 원리가 통하고 이것이 내 생의 철학이 되고 나면 무슨 변명이 있겠습니까? 근시안적으로 보면 불로소득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공평함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보다 멀리 보다 깊이 생각하면 심은 대로 거두는 것에 예외가 없습니다.
들포도를 맺음이 어쩐 일입니까? 농부는 극상품 포도를 심었는데 어째서 이런 들포도가 맺혔느냐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여 근원으로 돌아가서 회개하라" 즉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하라고 지적합니다. 재촉하고 있습니다. 비가 적었습니까? 거름이 적었습니까? 정성이 모자랐습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 종자가 바뀌는 예를 보았습니까? 열매가 많다 적다 라는 문제는 있을 수 있지만 종자가 둔갑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간단한 상식입니다. 문제는 주인이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있습니다. 오늘도 주인의 관심은 포도 열매가 적었다는데 있질 않습니다. 극상품 좋은 포도를 심었는데 어째서 들포도로 바뀌었느냐는 것입니다.
물량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입니다. 한여름 동안 땀흘린 것이 들포도를 위해 흘린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양을 묻지 않습니다. 오직 질이 문제입니다.
인생은 질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그 종자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포도는 변명이 많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병원에서 귀한 집 외며느리가 첫애기를 낳았습니다. 어느 나라 여왕이 부럽지 않게 대우를 받으며 병원이 떠들썩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애기의 혈액형이 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마침내 이 문제는 심각해져서 상담을 담당하신 전도사님이 이 사실을 애기 엄마에게 알렸습니다. 처음에 산모는 생사람 잡는다고 딱 잡아떼며 야단을 하더랍니다. 남편은 B형이고 아내는 O형인데 어째서 아이는 A형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전도사님은 산모에게 "나도 모르는 일이니 당신 양심에 물어 보시오"했습니다. 그때서야 울면서 자기 실수를 고백하고 어찌하면 좋으냐고 살려달라고 했답니다. 심는 것은 마음대로 심어도 거두는 것은 마음대로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심은 대로 거두어야지요. 무슨 변명이 있습니까? 잠깐 숨겨졌다고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잠깐 남이 모른다고 도도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본질로, 근본으로 돌아가서 회개를 촉구하라는 말입니다.
들포도 이야기도 간단합니다. 다른 종자가 들어온 것 아닙니다.
남을 탓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신의 문제이며, 깊이 감추인 죄의 문제로 오랫동안 숨겨진 해묵은 죄가 열매를 맺은 것뿐입니다. 실패는 사생아라고 합니다. 실패하면 모두가 나 때문이 아니라고, 모른다고 하니 실패의 부모는 누군지 모르는 것이지요.
여러분, 여기서 깊이 생각하십시다. 하나님은 공평과, 의로움과, 사랑을 바라셨다고 본문 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심으며 사랑을 원했고, 공의를 심으며 공의의 열매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미움의 열매를 맺고, 공의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불의의 열매 맺고, 진리를 바랬는데 이제 거짓 열매를 맺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내 불의의 이유가 가난 때문입니까? 부함 때문입니까? 내 미움과 고민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이 적어서 입니까? 그것들이 많다 적다는 할 수 있지만 종자가 바뀌는 원인은 아닙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재난의 원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은 두 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쪽 집의 닭 한 마리가 담을 넘어 저쪽 집에 가서 알을 낳고 꼬꼬대 하고 나왔습니다. 이쪽 집 아이가 그것을 보고 우리 집 닭이 너희 집에 계란을 낳았으니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 집 아이가 들어가 보더니 없다고 했습니다. 이 아이들끼리 싸웠습니다. 알이 있다, 없다 하고 터지게 싸웠습니다.
이것을 보고 엄마들이 싸웠습니다. 아버지들이 싸웠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저쪽 집에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바람이 획 돌아 불어서 이쪽 집도 다 타버렸어요. 그래서 잿더미에 앉아서 별을 쳐다보며 하룻밤을 지냈는데 이제 반성을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나 하고 생각합니다. 계란 하나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계란 하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깊이 들어있는 자존심, 교만, 오만, 즉 죄의 원인되는 죄, 그것이 이와 같은 엄청난 사고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돌아가서 욕심과 불신과 정욕과 교만을 찾아내어 뿌리채 뽑아버려야 할 것입니다. 실패한 원인이 있다면 지나친 욕심 때문이요, 고민이 있다면 쓸데없는 교만 때문이요, 불의의 원인이 있다면 불신앙 때문입니다. 열매로써 그 나무를 압니다.
한국교회는 옥토가 틀림없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씨앗을 뿌릴 때 4종류의 밭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길가도, 돌작밭도 아닙니다. 분명히 옥토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옥토만은 아닙니다.
가시덤불이 있고 잡초가 많이 우겨졌습니다. 이제 어는 것이 원 종자인지 알아보기가 힘들게 됐습니다. 뿌리가 다릅니다. 종자가 다릅니다. 도대체 이 욕심은 어디서 왔으며, 이 교만은 어디서 왔으며, 이 분쟁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은혜가 모자라서 입니까? 비가 모자라서 입니까?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목적의 문제요, 가지의 문제가 아니라 뿌리의 문제입니다. 열매가 크냐 적으냐가 아니란 말입니다. 종자가 틀렸습니다. 우거진 잡초 다 제거하고, 뿌리채 뽑아내고 깨끗하고 순결한 나무가 되어야겠습니다. 깨끗한 포도나무만 되면 주께서 권고하시는 어느 날에 참 열매는 자연히 맺혀질 것입니다. 결코 열매를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순수한 깨끗한 주인의 소원대로 극상품 포도나무만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젠가는 좋은 열매가 맺혀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들포도와 같은 저희들을 오늘까지 인내해 주시고 사랑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우거진 잡초처럼 참 열매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이렇게 혼잡하게 되었사온데 이제 모든 잡초를 제거하고 깨끗한 포도나무로 다시 성장하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우리 마을 밭에 극상품 좋은 포도나무를 심어서 이제 주께서 권고하시는 날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말씀의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만이 우리 마음에, 우리 인격에, 우리 생활에, 우리 교회에 충만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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