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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이 없는 사람(고전 9:11~17)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過)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權)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凡事)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賞)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사람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디 사람은 누구나 충분히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한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랑도 그렇습니다. 본디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 나름의 자랑이 없는 사람은 곧 죽은 사람입니다. 다만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랑거리를 스스로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도 사람이 그것을 모르고 있는 한 보화로서의 값어치가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자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랑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합니다. 도덕성도 포기하고 종교마저 포기합니다. 인간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을 포기하게 되어 마치 키 없는 배와 같이 위험에 처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는 인간이 됩니다. 결국에는 인간파멸의 길로 치닫습니다.
자랑은 떠드는 마음이 아닙니다.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교만하지 않은 조용한 긍지, 곧 존재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자랑을 둘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과 신령한 것입니다. 우리는 헛되고 거짓된 것을 자랑할 때가 많습니다. 자랑할만한 것이 못되는데도 자랑합니다.
자랑할 가치가 없는 것을 긍지로 삼고 있다가 오랜 시간이 흘러 환경이 달라지고 나면 비로소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심지어는 자신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야고보서 1장 9절 이하를 보면 허탄한 자랑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간다고 말씀합니다. 건강을 자랑하고, 젊음을 자랑하고, 머리가 좋은 것을 자랑하고, 지식을 자랑합니다. 더구나 앞으로 할 일을 장담하며 허황된 계획을 미리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헛된 자랑, 곧 악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참된 자랑은 무엇입니까? 신령하고 영원한 자랑입니다. 한가지 예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봅시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진실함, 거룩함, 도덕적 정결, 순결은 자랑거리입니다. 나 자신에 대하여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진실함은 자랑거리지만, 아무리 큰 것을 이루었다 해도 거룩함을 잃어버렸다면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다 해도 그가 진실함을 잃어버렸다면 생명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자기 의, 자기 노력, 자기 의지에 매이지 않고 은혜로 행하는 것만이 참된 자랑임을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랑을 가지고 삽니까? 자기자랑을 합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자랑합니까? 훌륭한 간증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리스도로써 자랑하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자랑 --- 헬라어로 '카우하오마이'라고 하는 이 말은 신약성경에만도 59회에 걸쳐 나옵니다. 그 중에서 55회를 바울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자랑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전용 용어나 다름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하는 근본적인 구원론 외에도 구원받은 심령의 심리학적 현상까지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 영혼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깊은 가치관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자랑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내립니다. 기쁨, 보람, 겸손한 자기 존재의식 --- 이것이 자랑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지식이나 물질에 있지 않고 참된 자랑에서 비롯됩니다. 마음 속에 긍지가 없는 사람은 용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말씀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세 차원의 자랑을 말합니다.
먼저 바울은 자기자랑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자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 자랑하는 바는 이것이다, 내 긍지의 근본은 이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4절 이하에서 옛날에 자랑으로 여겼던 바를 피력합니다.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순종 유대인이요, 베냐민 지파로 왕족이요, 정통 히브리 문화에 익숙한 개종치 않은 히브리인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으로 인생관이 뚜렷하였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주를 알기 전에 그는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까지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나서는 평생 예수를 증거하며 마침내 예수를 위하여 죽게 됩니다.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흐리멍텅하게 산 것이 아니요, 획이 분명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바리새인으로 예수를 핍박하기도 했지만 예수를 만난 뒤로는 예수들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뚜렷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참으로 자랑할만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다시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과거에 자랑하던 것을 분토와 같이 여긴다고 합니다. 배설물로 여기고 더럽고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모두 털어버렸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 : 1)." 십자가만 알기로 하였습니다. 자랑이 중생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 15절에서 그는 자기자랑에 대하여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반절을 봅시다. "…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자랑이 무엇을 뜻합니까?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그 자랑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참된 자랑은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의 자랑은 '주는 자'--'giver'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에게는 자랑이 있고 받는 자에게는 부끄러움만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받는 것만을 좋아해서 얻어먹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창피한 줄 알아야 합니다.
창피한 것도 모르니 문제입니다. 주는 기쁨, 대접하는 기쁨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부모에게, 형제에게, 가난한 자에게,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선뜻 내주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항상 빼앗기는 마음, 강도 만난 기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게조차 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마저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하니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주는 자의 기쁨은 엄청납니다. 사도 바울은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주는 자, 영생을 주는 자입니다. 으뜸가는 자랑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신령하고 영원한 것을 주는 자가 되었으니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줄 때는 주는 것으로 끝나야지 주고받으려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고받으면 자랑이 없어집니다. 주고받으려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에 자랑이 없어지고 그간의 노력도 그만 다 무효가 되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나 고아원 같은 곳에 봉사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제게 전화를 걸어 보고하곤 합니다. '잘했소'하고 한마디 해줍니다마는 한 일에 칭찬을 기다리면 봉사도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봉사하러 가기도 전에 미리 떠들어댑니다. 보나마나 안갈 것이 뻔한 사람입니다.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베풀고 나서 몇십 년이 가든 좀 비밀로 덮어두면 안됩니까? 자랑을 축적해야 합니다. 주고 나서 되돌려 받았으니 준 게 없어졌습니다. 주는 자의 감격과 자랑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주는 것이 많아야 합니다. 주는 자랑을 쌓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는 자에게는 받을 권리도 있는 법입니다. 이 받을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는 데서부터 진정한 자랑이 형성됩니다. 본문말씀 중에 9장을 읽어보면 '권(權)'이라는 말이 자그마치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권(authority of right)'은 권세, 권능, 권리를 뜻합니다. 다시말하여 자유의식입니다. 주었으니 당연히 받을 권리도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그 당위성을 말씀합니다. 첫째, 1절로 6절에서는 내가 사도이기 때문에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둘째, 7절에서는 인간적 경험으로 보아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셋째, 8절 이하에서는 구약의 율법을 보더라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넷째, 구약의 관행에 따르면 제사장은 제사를 드림으로써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보아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면에서 받아 마땅하고 받을 권리가 당당합니다마는 안 받겠다고 합니다. 자랑을 헛된 데로 돌리지 않겠다고 못박습니다. 끝까지 자랑을 보수(保守)하겠다는 각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해될까봐 안 받겠다는 것이요, 받지 않음으로써 복음과 선교를 보다 효과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심플 마인드(simple mind)--단순한 마음, 처음부터 주는 마음이므로 주는 것으로 끝내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는 자이기 때문에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의 마음에, 그 명예에 손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받지 않는 것이 자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자랑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 -- 자랑을 지키는 가운데에 복음을 순수케 하며 인내하고 소망을 가지려는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자랑을 남에게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자랑을 알고 지키는 것보다 높은 차원의 자랑입니다. 주기만 하고 받지는 않겠다는 마음에서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자랑을 주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2절의 말씀과 빌립보서 1장 26절의 말씀에서 '자랑할 기회'를 남에게 주려고 하는 깊은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어리석어져서 다른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고, 내가 약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강하게 만들고, 내가 받는 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이 주는 자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생각입니까? 주고서 받지 않을 뿐더러 더 나아가 높은 긍지와 자랑과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시무 하던 교회는 아닙니다만 감리교 장로님 한 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업에서도 은퇴하고 교회에서도 은퇴한, 칠십이 넘은 노인인데 돈을 여간 잘 쓰지 않았습니다. 부자도 아니건만 돈 씀씀이가 재벌 이상입니다. 어쩌다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늘 대접을 받습니다. "목사님, 시간 있으세요? 차 한잔하시지요." 점심도 여러 차례 얻어먹었습니다. 저한테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점심 대접을 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늘 후하게 대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은퇴하셔서 특별한 수입이 없으실 텐데 돈이 어디서 생깁니까?" "제 주머니에는 돈 마를 날이 없어요. 아들 삼형제한테서 타내거든요." "어떻게 해서 타내십니까?" "이놈들아! 내가 돈을 잘 쓰고 다녀야 너희가 효자된다는 사실을 알아라, 번듯한 아들 삼형제를 두고서 비실비실 얻어먹고 다니면 욕은 너희에게 돌아가니 알아서들 하거라! 이렇게 말하지요." 돈 달라기는 싫지만 너희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넉넉하게 쓰고 다녀야 아무개는 효자를 두었구나 해서 너희들에게 복이 돌아간다 --- 참으로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좀 비굴해지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을 좀 높일 수는 없습니까? 실은 저도 참 대접을 많이 받는 사람입니다. 평생 얻어먹고 산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제가 궁해서 얻어먹는 것이 아닙니다. 설마 소망교회 목사가 밥 굶겠습니까? 대접하는 기쁨, 대접하는 즐거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것도 큰 봉사입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맛이 없는 것도 맛있다고 감탄하면서 먹어야 합니다. 작은 대접을 큰 대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대접하는 본인을 기쁘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제가 구질구질하게 차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소망교회 사람들은 못됐구나, 어떻게 목사님을 저 모양으로 만들었나 하고 흉을 봅니다. 제가 넉넉히 베풀고 다녀야 소망교회가 복을 받습니다.
주는 자의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높은 차원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주는 자의 기쁨을 알고 지킬 뿐만 아니라 이것을 남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대접을 받을 줄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거절만이 은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명예와 긍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침내 더 높은 차원의 자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 눈물겨운 말씀입니다. 부득불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은혜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는 행위에는 기쁨이 따라야 합니다. 행복이 수반되지 않으면 봉사가 아닙니다. 여자 분들의 경우 평생동안 부엌에서 일했다고 해도 기쁨 없는 봉사였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였다 해도 기쁜 마음으로 하지 않았다면 끝내 그 사랑은 부도가 나고 맙니다. 징징 울면서 평생 봉사하면 무얼합니까? 팔자타령, 신세타령이나 해가면서 수고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도 그렇습니다. "참 잘 자라주니 고맙구나. 너희들을 볼 때마다 기쁘다." 진정한 기쁨이 우러나야 합니다. "공연히 많이 낳아서 이 고생이야. 에고, 지겨운 내 팔자야!" 불평불만으로 자식을 키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슨 은혜가 있고 무슨 자랑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유와 기쁨과 감사 속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처음으로 예수 믿은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예수 믿고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셋째는 자랑이 없어졌습니다. 일하고도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좀더 잘해야 되는데, 좀더 잘 섬겨야 되겠는데 하는 생각으로 죄송할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바로 믿는 사람입니다"하고 크게 칭찬해 주었습니다.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그 가치관에 중생이 왔습니다. 억지로는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부득불 하였노라' -- 여기서 그의 솔직한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진실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했다. 늘 기쁜 마음으로 섬겼다" --- 대사도(大使徒)로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득불 하였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화를 당했을 것이다." 그지없이 솔직하게 토로합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극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큰일날 일입니다. 더구나 바울에게는 고질병(痼疾病)이 있었습니다. 간질병도 있고, 주기적으로 오는 말라리아병도 있고, 안질도 있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나태해질 때나, 사명감에서 떠나 낙심할 때에 그 병들이 가시가 되어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비틀거리며 쓰러졌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 부득불 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일했습니까? 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인천에서 16년, 여기서 13년, 이렇게 두 교회를 섬겼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한 교회에 그리 오래 있느냐고 물어옵니다. 갈 곳이 없었으니 오래 있었던 것뿐입니다, 또 매번 즐거운 마음으로 강단 위에서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강단에 서기가 죽는 것보다 싫기도 합니다. 그래도 부득불 해야 됩니다. 1년 4계절을 하나같은 마음으로 설교하는 줄 아십니까? 그실 부득이해서 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 자랑도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매사를 좋은 마음, 기쁜 마음으로만 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정 안에서도 정말 남편과 아내를 기쁜 마음으로만 사랑했습니까? 아닙니다. 이혼하고 싶은 마음도 몇 번이고 생겼지만 아이들도 있고, 체면도 있고, 가문도 있고 해서 부득이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아무 자랑이 없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평생을 살지만 자랑이 없노라 --- 억지로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득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해봅시다. 흔쾌한 마음으로 자원하여 봉사한 것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뜨거운 사랑에서 행한 일이 과연 몇 번이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자랑이 없습니다. 연약하였고, 게을렀고, 교만하였고, 낙심하였고, 은혜에 충실하지 못한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노예로 살았고, 하나님의 강한 능력에 붙들리어 살아왔습니다. 기쁨으로 순종할 때가 있었지만 억지로 복종한 적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부득이하여 굴종한 때도 있었기에 자랑이 없습니다. 자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 자랑마저 모두 반납해야 합니다. 이제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뿐입니다. 그가 내게 베푸신 긍휼과 인내하심과 능력만을 자랑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신령한 자랑과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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