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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억지 못하느냐(마가복음 8장 14절~21절)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유하면서도 스스로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눈감은 소경보다 눈뜬 소경이 더 불쌍한 것과 같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깨달음이 없고 은혜를 은혜 그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병든 심령은 참으로 보기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를 전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들에 따르면, 그 전체 중 4분의 3에 해당하는 시간을 열두 제자를 가르치는 데에 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위해서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그들을 가르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님께서 가르친 그 열두 제자를 통하여 오늘날의 세계적인 교회를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열두 제자를 앞에 놓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보이십니다. 성경 말씀대로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물 한방울, 풀 한포기 없는 드넓은 광야에 오천 명이 모였습니다. 이제 저들이 목마르고 배고플 때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셨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시장할까'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까' 염려하시면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이적을 보이십니다.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오늘날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도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될 것입니다. 굉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들 모두 엄청난 감격을 얻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어서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큰 사건들은 이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 능력이 이적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표적(表蹟)입니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먹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표적 속에는 중요한 말씀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큰 사건에 직면하고도 깨달음이 없고, 본 것도 들은 것도 이해한 것도 없다면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적어도 이 표적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저들이 배고파한다는 사정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너그러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개별적인 돌보심, 임마누엘의 역사를 이 사건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감탄과 놀라움, 감사와 찬양 -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깨달음이 없어서 그런지 불과 하루 이틀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배를 타고 디베랴 바다를 건너가시는데, 마침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 안에는 떡이 한 개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중에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하고 말씀하시자, 저들은 누룩이라는 말에 떡을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16절)"하여 서로 의논합니다. '의논'이라는 말로 순하게 번역되었습니다마는 '디에로기조마이'라는 헬라어는 본래 '이성에 호소하며 변론을 벌인다'하는 뜻입니다.
바로 책임 소재를 추궁한 것입니다. '왜 떡이 하나밖에 없느냐' '회계를 맡은 가롯 유다, 너는 왜 준비하지 않았느냐' '베드로, 당신은 수제자가 되어 그것도 못 챙기었느냐' -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로 변론을 벌입니다. 식사시간이 되었는데, 예수님께 드릴 떡이 없으니 꾸중을 듣게 되었다고 좌중이 시끄럽고 어지럽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의논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책망하시며 교육하십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떡 다섯 개로 오 천 명을 먹인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적어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하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참으로 미련합니다. '밥걱정 안 해도 되겠다' '경제 문제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 이것만 깨달았어도 변론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떡 다섯 개로 오 천 명을 먹였는데 한 개로 열두 명을 못 먹이겠습니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변론을 벌이는 답답한 제자들을 향해서 다섯 마디의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 어찌 의논하느냐 -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 왜 깨닫지 못하느냐. 셋째, 어찌하여 마음이 그토록 둔하냐 - 바위덩이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넷째,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느냐. 다섯째, 왜 기억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말씀을 하나하나 깊이 생각해보면 미련하고 우둔한 오늘날의 우리 인간에게도 똑같이 주시는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본문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면 그 요지가 세 가지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아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보고 깨닫고, 듣고 깨달아야 하지만 정 안되면 매맞으면서라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깨달음이 없는 자는 때려도 소용없습니다.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을 때려서 무엇합니까? 고문할 때에도 정신을 잃으면 중단한다고 합니다. 징계도 깨달음이 있는 자에게 유효하지 감각이 없는 둔한 자에게는 무효합니다. 우리가 가끔 자녀들을 향해서 징계를 합니다. 그것도 받아들일 때의 이야기이지 바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징계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하느라고 좀 때렸답니다. 처음에는 고분고분하게 잘 맞다가 심하게 때리니까 벌떡 일어나서 '맘대로 때려, 네 아들 죽지 내 아들 죽냐'하고 대들더랍니다. 때릴 필요도 없습니다. 때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깨달음이 없는 자를 때리고 책망하고 잔소리하는 것은 헛일입니다. 깨달음이 없는데, 보면 뭘하고 들으면 뭘합니까?
그러면 왜 깨닫지 못할까요? 깨달음이 없는 이유, 무감각의 이유, 무관심의 이유, 그리고 말씀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교만과 잘못된 선입견과 편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회개 없는 마음 때문입니다. 도대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 안에서 물러날 줄을 모릅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지식을 수용하는 만큼 발전하게 됩니다. 대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무식한 것 같습니다. 평생을 두고 배워도 늘 자기 생각만 옳고 남의 말은 들을 줄 모릅니다. 평생을 듣고 살아도 정작 듣는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어둡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듣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말씀을 하시면서도 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결론을 맺으십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듣습니다. 마음이 없는 자는 들어도, 보아도, 맞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켄 블랑카드(Ken Blancard)라는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 변화에 대한 호기심, 즉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첫째, 지식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둘째, 자세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셋째, 행동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넷째, 조직의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 국민 중에는 생각이 보수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지나치게 보수적입니다. 한번 가지게 된 생각을 바꾸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가진 경험과 지식이 전부입니다. 아집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깨달음이 없습니다. 점점 우둔하게 됩니다. 망할 때는 귀부터 먼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듣는 귀가 없으면 망합니다.
큰 농장을 경영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몇 년을 두고 농사를 지었는데, 잘 되지도 않고 또 싫증도 났습니다. 농장을 팔아버리리라 생각하고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아, 그랬더니 며칠 사이에 수백 명이 나타나 너도나도 사겠다고 신청을 합니다. 청년은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팔지 않는다는 광고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별로 신통치 않은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이 이를 부러워하자 비로소 내 것이 소중한 것임을 자각한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하는데 나는 나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 처지가 가장 좋다고 하는데 나는 내 생에 대한 긍지가 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의미를 모르면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은 깨달음과 정비례함을 알아야 합니다. 선물도 보십시오. 거기에 담겨 있는 마음을 읽을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과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선물이란 무용지물입니다. 뇌물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큰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이요, 표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깨달음이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천 명을 먹인 자리에서 그 떡을 얻어먹은 사람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점을 모릅니다. 사람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 행복을 깨닫지 못해서 불행할 뿐입니다.
깨달은 다음에는 그 은혜를 기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한은 잊어야 하고 은혜는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쁜 일은 빨리 잊고 좋은 일은 오래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한은 모래 위에 쓰고 은혜는 바위 위에 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꾸 정반대로 살려고 합니다. 은혜는 물위에 쓰고 원한은 가슴에 파묻습니다. 죽을 때까지 못 잊는 게 아니라 죽어서까지도 못 잊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떡하겠다는 말입니까? 이 원한 때문에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다 깨달음이 없고 끝 모를 불행에 시달립니다. 은혜는 기억해야 합니다. 깨달음 자체가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성령의 역사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건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 말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고 기억나게 하리라' - 성령은 깨닫게 하고 기억하게 합니다. 기억함으로써 오늘에 그 기억한 바를 효력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열 가지 제앙이 내리는 가운데서 기적적으로 출애굽합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채 두 주일도 못되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어떻게 원망할 수 있었을까요? 받은 바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곧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빨리 잊어버렸습니다.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가끔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들을 위로하려고 병문안을 가면 오히려 그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고 옵니다. '위중한 병에 걸려 얼마나 마음이 심란할까'하는 생각을 하며 환자를 만나보면 벌써 믿음으로 다 소화하고 은혜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병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일이 가장 바쁘고 중요한 줄 알고 있었는데 신령한 생활, 즉 신앙생활이 더 중요함을 알았다고 합니다. 또 아내의 속을 어지간히 썩이던 사람도 병중에서 회개하여 자기 아내 소중한 줄 알게 됩니다. 병원에서 모처럼 다정한 사랑을 나눕니다. 이런 장면, 아름답고 신령한 장면들을 보면서 저는 마지막으로 결론을 지어 말합니다.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공부한 것이니 쉽게 잊어버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원에서 가졌던 생각과 그 아름다운 추억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퇴원해서 사흘도 못되어 옛날로 돌아갑니다. 문제가 생기고 또 불행해집니다. 병원에 있을 때에는 그 아무것도 필요없이 단지 두발로 걸어다닐 수 있는 건강만 회복할 수 있으면 더는 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그 마음이 며칠 가지 못합니다. 이 같은 건망증 때문에 참으로 걱정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쥐의 기억력의 한계는 3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고양이가 뒤따라와서 구멍으로 들어갔으면 한동안은 가만히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금방 밖으로 나옵니다. 맹랑한 일입니다. 들어가서는 3분내에 잊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밖을 내다봅니다. 고양이가 있지만 잊어버리고 또 나옵니다.
이제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가만히 구멍 속에 엎드려 있었으면 괜찮을 것을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잡혀 먹히고 맙니다. 건망증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드리기 죄송한 이야기지만 노인들의 기억력은 30분 정도라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해놓고는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했던 말을 잊고 또 합니다. 물어보고 또 물어봅니다. 그래서 잔소리가 됩니다. 노인 가운데도 간혹 정신력이 좋은 사람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그 기억은 전부 젊었을 때에 입력된 것입니다. 옛이야기가 많은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옛날에 있었던 일은 시시콜콜 다 기억하는데, 오늘보고 들은 것은 하나도 기억을 못합니다. 30분밖에 기억을 못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모름지기 은혜를 오래도록 기억해야 합니다.
너무 쉽게 잊어버릴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들이 군에 입대하여 몇 달 동안 모진 훈련을 받고 첫 휴가를 나왔습니다. 본인이나 가족이나 얼마나 기쁩니까?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이불을 다 개어놓고 청소까지 말끔히 해놓았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그 변화에 놀랍니다. '군대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거기서는 모든 음식을 다 잘 먹으니 이제 음식투정은 안할랍니다'하고 철든 이야기들을 늘어놓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좋아합니다. 그런데 집에서 지낸 지 사흘도 못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더라고 합디다. 비상한 결심을 했으면 적어도 몇 달은 가야 하지 않습니까? 금방 옛 버릇이 나타나니 문제입니다.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큰 감격과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결심한 일이 있습니까? 또 단 한가지라도 일생을 두고 그대로 실천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다면 문제입니다.
얼마나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릴까요? 얼마나 거듭하여 사건을 당해야만 됩니까? 얼마나 충격을 받아야 비로소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의 상실, 감사의 망각 - 불행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 기적을 믿어야 합니다. 예전에 기적이 있었다면 오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기적의 현재성(現在性)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았으면 나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병들었으면 내가 병든 것과 같이 생각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이제 나를 부르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역사가 그저 옛날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까? 결코 옛날 이야기일 수만은 없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그 기적을 보고 또 믿고 깨달아야 합니다. 어제의 사건이 오늘에 있습니다. 내게도 똑같은 기적이 나타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과거의 그 큰 기적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기적 속에서 살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 은혜 가운데에 살 것입니다. 사람마다 근심 걱정하는 것은 어제의 기적의 뜻을 몰랐고, 설사 기적의 뜻을 알았다 하더라도 망각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사건을 과거의 역사로 돌리고, 현재의 기적을 믿지 못하고, 능력의 현재성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인도로 살아왔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욥이 신앙고백 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모릅니다. 오직 주께서 아십니다. 모르는 길을 오늘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주님의 인도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사죄의 은총과 그 놀라운 능력과 그 구체적인 사랑 안에서 살아왔기에 똑같은 역사가 오늘도 내일도 있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체험을 나의 것으로 보고, 깨닫고, 듣고, 기억한 바가 현실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기적은 있습니다. 오늘도 깨달음은 있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감격에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고 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지도 못하느냐' -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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