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해산하는 수고(갈라디아서 4:15-20)

by 【고동엽】 2023. 4. 8.
목차
 

해산하는 수고(갈라디아서 4:15-20)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산모는 자기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간호원에게 "우리 바깥양반에게 빨리 전화를 걸어서 아무 일류대학 부속 유치원 근처에 땅을 사라고 말해 주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세계문학 전집을 사다 주고, 당장 어른이 되고 당장 위인이 되기를 바라는 교육에 대한 극성은 알아줄 만합니다.
어쨌든 가르치고 배워야 사람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훌륭하게 가르쳐 보겠다고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말을 하면 가르치는 것이 됩니까?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귀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배웁니다. 그리고 가슴으로 배웁니다. 단순한 귀를 통해서 교육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어린이는 어른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어른들의 악세사리도 아닙니다. 어른에게 속한 존재도 아닙니다. 잘 길들여진 애완 동물처럼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가라면 가고, 오라고 해서 오면 그것이 효자입니까 효녀입니까?
도대체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내 앞에서 어떻게 되기를 바랍니까? 내게 불만이 있다면 어떤 성격의 불만입니까? 누가 묻기를 자녀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느냐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부모의 소원을 다 이루어 드림으로써 그 부모의 생애의 연장으로 살아가고, 부모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변인으로 살아가는 자녀가 정말 그 가문의 훌륭한 자녀이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세기의 문제아가 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카알 마르크스요, 또 하나는 프로이드입니다.
카알 마르크스는 유물사관을 말하는 유물주의자로 물질로 모든 것이 통한다. 물질이 근본이다. 물질이 모든 해결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유물사상의 대표자입니다.
또 한 사람 프로이드는 모든 것을 성으로 보았습니다. 전부 섹스로 보아 버렸습니다. 문제도 성에 있고 해결도 성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성으로 본 나머지 성 개방의 문제가 나오고 성의 문란이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다 한 세대의 위인이요 세기를 흔들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대가 흔들흔들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 세기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는 둘 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둘 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신을 입었습니다. 물질을 가졌습니다. 성의 충동도 받고 행위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라고 선고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창세기 6:3에 보면 노아의 홍수로 그 많은 사람들을 쓸어버리기 그 이전에 벌써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 심판인즉 '내가 저들과 함께 하지 않으리라. 내 영이 저들과 함께 하지 않으니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미 저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물질도 있었습니다. 번영도 있었습니다. 강한 성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인간 아닌 인간, 곧 하나의 동물들을 쓸어버린 것입니다.
인류학을 세 가지고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리학적 인류학입니다. 여기서 공산주의가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세뇌 공작을 할 때에 첫 번째 가르치는 것이 뭐냐 하면 진화론입니다. 동물의 세계에 있는 단세포 동물로부터 진화해 나가는 하나의 동물의 성격과 그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인간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사회가 발전해 나간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을 아는 방법이 생물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자의 교과서입니다.
두 번째는 문화 인류학입니다. 요새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는 학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문화적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정신 문화적 차원에서 인간을 보겠다는 것이 자유 세계의 철학의 근본입니다.
이제 또 하나의 인류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적 인류학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인간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인간을 보는 그러한 인간관을 신학적 인류학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관한 것은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동물을 보고 사람을 보면 사람은 동물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볼 때 사람이 사람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고 나를 보고 너를 볼 때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현대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이상이 없다는 점입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지금도 네가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나 하면 누구누구라고 좀 얘기합니다만 고등학생만 되어도 네가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말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져서 존경할 것이 못되고 미래에 대해서는 암담하고 불안하기만 하니 미리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현대는 존경하는 사람이 없고 모델이 없고 이상이 없는 교육을 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던 말을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고쳤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던 부모들이 이제는 유능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누구를 위해 유능하며 무엇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까?
배고프고 추워서 절대 빈곤에 사는 때는 그런 대로 가난과 싸우는 재미에 삽니다. 이것이 철학입니다. 그러나 먹을 만큼 먹고 입을 만큼 입고 나니 이제 문제입니다. 할 일이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포카를 해 버리고 맙니다. 조금 더 돈이 있으면 아편쟁이가 되어 버립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교육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생산품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 없는 교육은 미래 없는 현재와 다름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교육은 소망 없는 훈련입니다. 하나의 생산 부품을 만드는 데 불과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길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숙련공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컴퓨터처럼 돌아가는 그런 인간을 지금 만들고 있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문제는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사람을 생각하고 그를 키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필요한 것은 신령한 출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출생을 성경에서는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있는 사람의 인간성을 계발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 다 비뚤어지고 다 타락되어 버린 인간성, 아무리 뒤져봐야 나올 것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생명이 객관적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중생이라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신 기원을 말합니다. 옛 것의 최선이나 옛 것의 발전이 아니고 교양과 수양이 아닙니다. 옛 사람이 죽어 버리고 다시 나는 위로부터의 새로운 생명의 신 기원적 차원을 말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재창조를 말합니다.
이 생명적 문제는 언제나 의식 이전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봉적인 창조의 역사입니다. 그런고로 생명을 따라 난 자가 있고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어느 사형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안 믿고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던 철저한 무신론자인데 사형 집행을 며칠 앞두고 목사님을 부르더랍니다. 그래서 제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이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고마운 마음에 어떻게 성경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며, 예수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다닐 때 교회에 가면 상 준다고 해서 친구를 따라서 몇 번 가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들은 이야기를 아무리 지워 버리려 해도 지워 버릴 수가 없고, 그 이야기는 죽음을 며칠 앞둔 이 시간에 내 마음을 꽉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장난꾸러기 그 나이에 상 준다고 해서 친구 따라 한번 갔던 교회, 그 때 들은 하나님의 한마디 말씀이 겨자씨와 같이 그 마음에 떨어졌다가 이제 사형수가 되어서 사형 집행을 받기 며칠 전에 싹이 나서 세례를 받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사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참 인간상입니다. 그에 따라서 생각할 문제는 누군가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고 본문은 증거 합니다.
유대 사람들의 세계관으로 볼 때 이것은 생리학적인, 또는 의학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세계관이나 관념으로는 이렇습니다. 생명은 남자로부터 옵니다. 그 생명을 받아서 여자의 몸 안에서 키우고 해산의 고생을 하여 낳고 다시 그것을 젖 먹여 키워 가는 것입니다. 생명은 근본으로 아버지에게서 오고 어머니는 이를 위해 수고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생명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왔고, 말씀으로부터 왔으며, 성령의 역사에 의해 신비하게 겨자씨처럼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서 키우는 데는 그 누군가가 산고를 치러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설 때에도 성모 마리아 한 여성의 희생이 요구되었습니다. 한 여성이 희생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납니다. 생명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나 이를 위한 산고가 뒤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오늘도 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본인의 선택과 의식 이전에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말씀의 역사와 그 누군가의 산모적인 고통을 치르는 자가 있어져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어머니 모니카의 13년의 눈물 어린 기도가 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나 한 사람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는 내가 알든 모르든 그 누군가의 눈물 어린 기도가 있었고 희생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수고가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좀더 심각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한다.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법상으로는 이것은 현재사입니다. 즉 반복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속 계속 산고를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출산의 수고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속 사람을 위한 수고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육체에 대한 산고란 몇 시간에 끝납니다. 요새는 그것도 싫어서 제왕절개 수술을 하니까 어머니의 어머니 된 고통을 모르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산고란 가장 어려운 고문이요, 생명을 출산하는 극치의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계속 하겠다는 말입니다.
육체적인 산고는 몇 시간에 끝나지만 그 영을 키우는 일, 그 혼을 키우는 일에는 일생을 통한 존귀한 희생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희생하겠다는 이 말을 얼마나 귀중한 얘기입니까!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다가 율법주의로 기울여지고마는 불쌍한 심령들을 바라보면서 바울은 이 갈라디아서 편지를 썼습니다.
은혜 중심의 생활, 오직 은혜에 의해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는 생활, 자기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이 귀중한 생활이란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는 누군가가 산모의 고통을 치러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훌륭했던 그리스도인들의 뒤에는 반드시 이같은 귀한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루포의 어머니를 가리켜 곧 내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나 사도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내 믿음의 어머니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자기를 위한 그만한 희생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하고 천거하게 된 줄로 압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히브리 사람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노동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니라." 벌어먹을 수 있는 노동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르치지 못했다면 남의 것을 도둑질해 먹으라는 말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서는 법을 못 가르쳤더라면 어떻게 살아가라는 얘기입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교육은 약삭빠른 악마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 말은 조금도 지나친 얘기가 아닌 줄 압니다.
어느 때 여대생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한 반에 40명되는 학생에게 앙케이트를 내어 보았습니다. "너희 가운데 아버지 같은 남자를 만난다면 대학 졸업하기가 무섭게 바로 결혼하겠다는 사람을 손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한 반에 셋밖에 없었습니다. 10퍼센트가 안 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물어 보았습니다. "세상 남자가 다 아버지 같다면 노처녀로 죽어도 시집 안 갈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한 반에 열 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가정 교육은 완전히 부도가 났습니다.
남학생들이라면 세상에 우리 어머니 같은 여자를 만난다면 20살만 넘으면 결혼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면 일생 결혼 안 한다니 이게 무엇인가 잘못 되지 않았습니까? 교육이 말로 되는 문제입니까?
여러분,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4:16에서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그리스도를 닮은 부모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닮은 그리스도를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목사로서 나는 교인들에게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그 청원은 이렇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올 때 여러분의 자녀와 함께 교회에 나와 주세요. 예배 마친 다음에 돌아갈 때에 손목 잡고 같이 돌아가 주세요. 돌아가서는 반드시 점심만은 아이들과 함께 해 주세요. 일주일 중에 가장 좋은 메뉴로 아이들이 기다릴 만큼 맛있는 음식을 해 놓고 주일날 점심만은 아이들과 함께 잔치를 해 주세요. 그 다음에는 반드시 오늘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느냐, 무슨 말씀 들었느냐고 물어서, 그걸 놓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설명을 하고, 또 아버지, 어머니가 들은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서 재탕 설교를 하고, 이렇게 해서 자녀들과 함께 성경을 중심한 이야기를 하면서 세 시간을 보내 주세요.
주일날 교회에서 여전도회나 남전도회를 절대로 못하게 합니다. 그 두 단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안 해도 괜찮아요. 당회, 제직회고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가정에 있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일 중 이보다도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다시없습니다. 이렇게 세 시간을 꼭 보내 달라고 부탁합니다. 설사 저녁 예배에 못 나와도 관계없습니다. 이 일이 더 중요합니다.
언젠가 [뉴욕타임즈]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유대 사람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회당에 가는데 그 어린애가 친구집에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하니까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회당에 가보니까 안 왔습니다. 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오니까 냉장고를 열어 놓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어요. 그 어머니가 그 아이를 얼마나 때렸는지 죽었습니다. 어린아이를 심하게 때려서 죽였다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 한 시간 나가지 아니한 것을 어떻게 책망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이런 정도의 얘기 가지고 될 것입니까? 한번 회당에 안 나갔다고 자식을 때려죽인 어머니의 근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용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말로 교육을 할 것입니까? 자녀들은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귀중한 선물은 시간입니다. 주일날 오후만은 절대로 딴 시간 내지 마시고 자녀들과 함께 하시고 자녀들과 함께 지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돌아가서 자녀들과 함께 지내고 저녁에 잠자리를 들 때에 주일날 예배가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를 키웁시다. 요새 아이들은 텔레비젼을 봐서 그런지 너무 머리가 좋아요. 놀랄 정도로 머리가 빨리 돌아갑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무서운 얘기입니다.
자녀를 얻었다고 기뻐할 것만은 아닙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맡았습니다. 이제 그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중에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믿음이 성장할 것이며, 거룩해질 것이며,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자녀들을 그들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입시다. "내 이름으로 이 소자중 하나를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영접한 것이니라."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에게 가정을 주시고 자녀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바른 본을 보여 주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며, 이제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키울 수 있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 된 저희들이 자라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저들을 사랑하며 저들의 손목을 잡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가정에서 이루고 교회에서 이루어 나가게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