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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노래(이사야 60장 1절~9절)

by 【고동엽】 2023. 4. 8.
목차

해방의 노래(이사야 60장 1절~9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 느바욧의 수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저 구름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지난 주일 오후 두 시쯤이었습니다. 16년 동안 병석에 계시는 어느 분을 방문했습니다. 신앙적인 이유로 고문을 많이 당해서 하반신이 마비되고 손발이 다 부러져서 걸을 수도 없는 상태로 16년 동안을 꼼짝없이 누워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는 제가 방송으로 인도하는 새벽 성경공부를 매일 아침 듣고 있었습니다. 평생 음성만 들으면서 꼭 한번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면서 너무도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으로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를 보고 놀란 것은, 그의 말대로 그에게는 아무 소원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얼굴에서 피어나는 천사같은 미소는 다른 데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만족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들으니 단 한마디도 간구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주세요, 어떻게 해주세요 하는 청구서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이러해서 감사하고 저러해서 감사합니다-감사하다는 말로 시작해서 감사하다는 말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저 '내 발로 걸어서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밖에는 아무 소원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참 감사로 충만한 모습을 제가 보았습니다. 사십여 년 동안을 압박과 구속, 속박 속에 지냈으며, 16년 동안이나 병석에 있으면서도 그 심령에 가득한 영혼의 자유, 그 신앙적인 행복, 그 기쁨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었다는 것을 그는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자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더 가져야 자유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형편에 놓여져야 자유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조건이 주어져야 감사할 수 있습니까?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살아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6)."
귀신들린 여자-마음대로 돌아다닙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뛰어다니지만, 그러나 그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정신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본인이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도 모르는, 그러한 속박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정치적인 억압, 구속, 감시, 연금, 그리고 경제적인 가난, 교육적인 빈곤-이러한 것들도 다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부자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노예 상태에 철저하게 길들여져서 내가 속박 속에 있는 줄도 모르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부자유한 상태입니다. 비참한 노예 상태입니다.
가장 무서운 노예 상태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 : 34)" 하십니다.
가난의 노예는 의식하고, 육체적 질병의 속박은 의식하면서도, 정치적인 억압은 의식하면서도,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속박입니다. 그 형벌과 저주, 죄지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 - 이것보다 더 무서운 함정은 없습니다. 개를 보십시오. 목을 가죽끈으로 비끄러매 놓았는데도 개는 평화스럽게 잠을 잡니다. 배불리만 먹여주면 목이 묶인 상태로도 아무 불편이 없습니다. 때때로 주인이 부르면 뛰어나가려다 목에 걸린 개목걸이에 탁 잡아채입니다. '아 지금 붙들려 있나보다'-그때 가서 생각합니다. 노예생활에 길들여진 인간이 꼭 그렇습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인들의 속박에서, 그 정치적인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45년 동안이나 자유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는 비로소 자유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유라는 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정치적 자유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천만에요, 굶어보니까 그것은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경제적 자유가 없으면 정치적인 자유도 소용없음을 알았습니다. 지적인 자유도 필요합니다. 무식하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사상적으로 속박되면 그것 역시 자유가 아닙니다. 자칫 잘못해서 어떤 위험한 사상에 한번 붙들리기라도 하면 거기에서 헤어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세계관에 붙들릴 수도 있고, 우상과 미신에 붙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고 자유를 잃어버린 적이 많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지,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비로소 배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배우고 있고, 앞으로도 더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유의 가치를 모르면 자유하지 못합니다. 자유를 지키지 못합니다. 참 자유는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실 때에 라야 자유 할 수 있고, 하나님의 그 능력과 은총에만 자유 함이 있음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함으로 자유하고, 진리를 따라 삶으로 자유 합니다. 진리의 노예가 됨으로 자유하고, 사랑에 매임으로 자유 하는 것입니다. 자유의 참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유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투쟁을 통해서 자유를 얻으려고 합니다.
이를 가리켜 변증법적 유물사관(辨證法的唯物史觀)이라 합니다.
사유(思惟), 정신, 역사 등의 발전은 언제나 싸워서, 투쟁을 통해 얻어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늘 따라다니는 용어가 있고 철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혁명'입니다. 혁명이라니, 보십시오. 수십 년을 두고 혁명 혁명 해왔는데 아직도 혁명입니다. 40년이 넘도록 혁명한답시고 이사람 저사람 다 잡아죽이고 추방했지만 아직도 날만 새면 숙청입니다. 도대체 언제 가야 끝날 버릇입니까? 입만 벙긋하면 '투쟁'입니다. '투쟁'이 체질화했습니다. 투쟁으로 얻어진다고 하던 자유는 온데간데없고 투쟁만이 계속됩니다. 싸움의 연속, 피의 연속입니다. 남은 것이라곤 증오뿐입니다. 증오와 분열, 싸움, 파괴가 저들의 사회에서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투쟁 자체가 목표인 양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유주의, 소위 자본주의는 어떻습니까? 자본주의 철학은 경쟁을 통해서 자유를 얻자고 하는 것입니다. 끝없는 소유욕, 끝없는 경쟁이 그 생활 철학입니다. 공부도 더 열심히, 돈도 더 많이, 집도 더 좋은 집, 자동차도 더 좋은 자동차…… 그저 잘살아 보겠다고, 더 잘살아 보겠다고 경쟁에서 경쟁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쓰러지는 사람들을 봅니다. 여러분,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겠습니까? 죽으라고 벌어놓고는 써보지도 못하고 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끝없는 소유욕과 경쟁의 악순환 속에서 영혼들이 지쳐 쓰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투쟁과 경쟁-이 잘못된 방법 때문에 목적마저 잃었습니다. 목적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입니까? 인간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그 투쟁과 경쟁 때문에 우리의 체질이 변하고 속박받게 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함께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는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목적은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없었습니다. 방법이 미련했습니다. 스스로 지혜로운 체했지만 어리석었습니다.
이제 결론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만든 함정, 자기가 만든 굴레에서 스스로 노예가 되었으나 그 속박에서 벗어날 재간은 없습니다.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무서운 함정 속으로 깊이 잠겨버립니다. 죄에서 자유하는 길 말고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영혼이 자유하지 못하면 참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예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는, 그 자유케 하시는 역사가 근본이요, 이에 뿌리를 두지 않는 한 자유함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사회, 어느 제도의 틀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시는 그 자유 안에 참자유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그리고 자유의 노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빛이 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빛, 구원의 빛, 계시의 빛, 지혜의 빛이 임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영적으로 어둡고 지적으로 어두운 것, 그리고 생활의 어두움처럼 무섭고 답답한 속박은 없습니다. 빛 안에 깨달음의 자유가 있고, 식별의 자유가 있고, 행함의 자유가 있고, 지혜의 자유가 있습니다. 어두워지면 모든 지식, 모든 능력, 모든 소유가 다 무효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빛을 누리라, 자유케 하라는 말씀입니다. 빛 안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에는 허무가 있고 저주가 있을 뿐입니다.
둘째, 이렇게 영적으로 자유할 때에 회복케 하시는 자유가 있습니다. 관계성을 회복케 하시는 것입니다.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흩어졌던 가족이 다시 모입니다. 다시 만나게 되고 반가워하게 됩니다. 증오하는 곳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하고서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샬롬-그 평화, 그 화평 속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가출(家出)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를 찾겠다고 집을 나가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나가는 순간 무서운 속박에 매입니다. 타락의 속박에 매이고, 고독의 속박에 매이고, 허무의 속박에 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해보겠다고 이혼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를 찾음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입니다. 분쟁이 자유일 수 없습니다. 모여서 하나 되고 화목하는 데에 자유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주녀석과 손잡고 다니는 정겨운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러한 정경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 봐주는 것을 귀찮아한다고 합니다. 서구화되어 가는 우리들의 생활 습관, 문화적 변화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집 봐주는 거, 손주 봐주는 거 귀찮다고 독신자 아파트에 가서 혼자 사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그저 자유 좀 누리겠다고 혼자 나서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얻었느냐고요?
고독은 자유가 아닙니다. 분열은 자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혼이 자유할 때에 이산 가족이 다시 모이게 되고 다시 사랑하게 되고 다시 반가워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사람과 사람 만나는 것이 반가워야 합니다. 자꾸 도망하고, 되도록 안 만나려 하고…… 그래서는 안됩니다. 내가 참으로 자유하다면 사람 만나는 것이 반가운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는 자유는 화평 자체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자유함은 이렇게 정신적으로만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셋째로 풍부함을 말합니다. 자유할 때 풍부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마는 세계 여러 나라를 볼 때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잘살 것 같은데 실은 대체로 못삽니다. 그리고 천연자원이 없는 나라, 기름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 나라가 오히려 잘사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잘살고 못살고는 결코 천연자원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은 지식의 문제요, 지식의 문제는 교육의 문제요, 교육의 문제는 사상의 문제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에는 풍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온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사회주의 국가는 지긋지긋하리만큼 못삽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마 이만큼 못살겠지 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못합니다. 그렇게 못살 수가 없어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못 삽니다. 왜 못사느냐고요? 사회주의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거지주의'라고도 풍자합니다. 그 주의가 사람을 변질시켰습니다. 일을 해도 육체 노동만 고무(鼓舞)했지 정신 노동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탐구하고 연구하지 않으니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사과나무 한 그루를 키우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서 작고 맛없는 사과를 크고 당도(糖度) 높은 사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사과도 제대로 공부해야 사과가 되는 것이지, 노동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기 위해서는 정신이, 바로 이데올로기가 바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면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고생을 합니다.
북경대학생들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쓰레기통에 내다버린 사회주의를 한국대학생들은 쓰레기통을 뒤져가면서 찾고 있다"라고,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온 세계가 쓸 수 없는 물건이라고 폐기 처분한 사회주의를 어찌되어 한국의 대학생들은 그처럼 동경하고 있는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역사가 분명히 말 해주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가지고는 안됩니다. 사람도 문화도 경제도 다 망칩니다. 신앙이 바로될 때에 교육이 바로 되고, 사상이 바로 되고, 나아가 풍부함이 있는 것입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해보면 참 불쌍하게 못삽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이 자동차를 타고 뒤로 후진하다가 그만 실수로 아이 하나를 치어 죽였습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차에 치였으니 얼마나 당황하고 두려워했겠습니까? 어쨌든 죽은 아이의 부모부터 찾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백방으로 애쓴 끝에 아이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사고를 낸 분은 그 어머니를 붙들고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만 부주의해서 댁의 아이를 치어 죽였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보상을 해 드려야 되겠습니까 하고 애가 타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아이의 어머니는 전혀 태연한 얼굴로 그애 말고도 자식 많은데 뭘 그러시느냐고, 괜찮다고, 그냥 가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가난하고 왜 이렇게 비참해졌겠습니까?
저들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숫제 정신적으로도 기아(飢餓)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찌 천연자원의 문제입니까? 신앙의 문제입니다. 종교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잘못되고 종교가 잘못되면 사상이 잘못됩니다. 사상이 잘못되면 교육이 잘못되고, 교육이 잘못되면 인간이 잘못됩니다. 인간이 잘못되면 거지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는 것은 마침내 물질에까지도 풍부하고 여유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상적으로 잘못되고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될 때에 가난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넷째 단계는 "영화롭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의를 회복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안쳐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롭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시는 역사,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지난주일, 바로 이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중국 강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 강단에서 목사가 설교한다는 것은 40년만에 처음 있는 일로, 저는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제가 한 25분쯤 설교를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는 한 시간을 설교했습니다. 한 시간 했는데도 자꾸 더 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소망교회에서 한 시간 설교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아마 다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언젠가 처음 우리 교회에 나오신 분이 있어서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소망교회에 나오시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그분 대답이 설교가 짧아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저 공산주의 나라 중국에 계신 그리스도인들은 한 시간 이상 설교해도 또 하고 또 해달라고 합니다. 끝난 다음에도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악수할 때는 또 어떤지 아십니까? 악수라는 것은 두 사람이 한 손을 잡고 흔드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분들은 그게 아닙니다. 두손으로 붙잡고 놔주지를 않습니다. 마치 유치원생들이 선생님한테 매달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제가 잠깐 가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그때까지도 마당 앞에 잔뜩 모여 서서 자리를 뜰 줄 모릅니다. 개중에는 12시간을 기차 타고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한 번 예배드리자고 그처럼 간절할 수가 없습니다. 얼굴이 그렇게 밝고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감사와 찬송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는 이리도 끝없는 불평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어떤 환경에까지 가야 행복하겠습니까? 얼마나 살아야 행복하겠습니까? 얼마만큼 가져야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까? 이제는 그만 이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투쟁으로도 아니요 경쟁으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때에, 바로 거기에 자유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자유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할 수 없습니다. 자유의 값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를 지키지 못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받은 바 자유를 하나님께 반납할 때, 그리하여 사랑에 매이고 진리에 매이고 하나님께 매일 때에 오히려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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