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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야 나오너라(요 11:28-44)

by 【고동엽】 2023. 4. 28.
 
 
나사로야 나오너라
(요 11:28-44)


아주 유명한 차이코프스키라는 러시아의 음악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주 유명한 음악을 작곡을 했습니다. 1812년 서곡입니다.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묘사한 겁니다. 나폴레옹이 60만을 이끌고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들어가서는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와 군사전략에 휘말려서는 모스크바에서 퇴각을 합니다. 그때의 장면을 차이코프스키는 이 음악에 실어서 발표를 합니다. 이 작품은 5개의 주제곡조가 나오는 데 하나는 프랑스의 국가인 라마르세예즈이고 하나는 4개의 러시아민요와 국가입니다. 전체적으로 프랑스의 국가가 점점 줄어들면서 러시아의 민요와 국가가 점점 살아나는 그런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은 포탄소리가 나면서 음악은 끝이 납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사실은 이게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얼마나 사랑을 하시는 지를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을 한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읽지를 못 한다는 겁니다. 이 본문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이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시 살아났다 해도 또 어차피 죽어야 하고, 또한 새로운 삶이 주어져도 전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생을 엮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만 보더라도 (그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다시 살아났으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재판을 받으실 때, 적어도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위해 한 마디 정도는 변호했어야 합니다. 가령, "나는 불과 얼마 전에 죽었었다가 장례한 지 나흘 만에 이 분으로 말미암아 살아나 지금 여기에 서 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이 이곳에도 많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나사로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다시 살아나도 보람 있고 뜻 있는 생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살아난 것이 무슨 의의가 있습니까?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사건은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앞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믿게 하기 위한 서론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사건 하나하나에서 조금씩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장님이 눈 뜬 것을 보고 믿게 되고, 바람을 잔잔케 하신 것을 보고 믿게 되고, 오천 명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시는 것을 보고 믿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믿게 되고, 이렇게 믿음을 더해서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를 믿게 되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믿음을 더하게 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향한 성장 과정으로서 나사로의 사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별로 멀지 않은 베다니에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엄청난 기적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계시적 암시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집에 있는 마리아를 부르십니다.(요 11:28) 아직도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 이르시지 않았고 동네 밖에서 마리아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함께 나가서 맞이하지 않고 언니만 마중을 나갔고, 동생인 마리아는 집에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자매 사이에 예수님을 놓고 약간의 질투가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음식 대접하느라고 분주한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말씀 듣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이것을 질투한 마르다는 예수님께 자기 바쁜 일을 마리아가 도와주도록 부탁했지만, 예수님은 대단히 섭섭한 대답을 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것을 선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니라." 즉, 말씀 잘 듣는 것이 더 훌륭한 대접이니 음식 준비하느라고 부산할 것 없다는 뜻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때 마르다는 대단히 불쾌해서 부엌에서 그릇 소리를 요란하게 내었다고 합니다. 아마, 몇 개의 그릇을 깨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화가 나 있는데, 때마침 거지가 와서 음식을 좀 달라서 하자, "예수님 대접하느라고 바빠 죽겠는데 재수 없이 지금 왔느냐"고 소리를 질렀고, 거지는 "대단히 미안합니다. 그런 줄 몰랐습니다" 하고 그냥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낸 것이 편치 않아 마르다가 곧 뒤따라 나갔더니 저만큼 가는 뒷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어서 그녀는 무릎을 꿇고 울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만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간 것은 자매간의 미묘한 문제가 있은 듯합니다. 상상하기로는, 예수님이 오셨다 했을 때 분명히 마리아가 혼자 뛰어나가려 했을 것입니다. 이때, 언니인 마르다는 "넌 여기 있어" 하고 먼저 나가고 마리아는 양보해서 집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남아 있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뛰어나갑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픈 마음을 아시고 사람을 시켜서 개인적으로 부르신 것 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간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자 언니와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11: 32) 이 원망은 누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거나, 오십사고 사람을 보내었을 때에 급히 오시기만 했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모두가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원망을 하고 마리아는 울었고, 함께 있던 유대인들도 울었으며,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도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요 11 : 33) 여기서 '통분히 여기셨다'라는 말을 좀 생각하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통분히 여기셨다라는 말이 33절과 38절 두 곳에서 연이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가볍게 생각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통분히 여겼다'라는 말이, 원문으로는 '엠브리마오마이'라고 하는데, 분한 마음과 슬픈 마음이 합쳐진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른 번역성경에서는 이 말을 '꾸짖었다', 즉 꾸짖는 마음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통분하다'라고 옮겨서 원뜻에 가장 가깝게 잘 번역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셨을까요? 이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마음이 움직였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통분은 유대 사람들의 위선적인 위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해설자들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집에 와서 슬퍼하면 위로하는 그 모든 것이 위선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누구를 위로할 때, 정말 충심에서 위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형식을 좋아하는 유대인들의 위로는 전부가 외식적이요, 의례적으로 하는 위로였기에 예수님은 마땅치 않게 생각하셨으므로 통분히 여기신 것입니다. 다음 38절에서 통분히 여기신 것은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37절에 보면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요 11 : 37)는 이 말에 대해 예수께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그가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지는 않고 지금에 와서 울면서 조문을 하고 있느냐고 예수님을 비웃고 있는 것으로, 일종의 비판이요 비방으로써, 나사로의 죽음을 예수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죽은 사람의 원인을 산 사람에게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지나치게 많이 울 경우, "저 애가 저렇게 우니까 자기 엄마가 죽었지" 하고 죽은 엄마의 원인을 살아 있는 아이에게 돌려버리는, 즉 누구 탓으로 돌리는 일을 쉽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도 나사로가 죽은 책임을 예수님께 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했고 그를 위하여 우시며 지금 오셨는데, 유대 사람들은 오히려 원망하며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느냐고 예수님을 비웃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속으로 통분히 여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좀 각별한 사이가 이들의 사이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죽는 다는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통분히 여기신다는 말을 우리가 깊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도 나의마음을 모르겠니 그러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 지는 이유를 그들이 누누이 예수님이 강조를 하시고 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기억을 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또한 35절에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는데, 어떤 마음으로 흘리신 눈물입니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절망적인 눈물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물은 이제 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감정의 표현이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병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며, 죽은 것이 잘된 일이라고 오히려 당신이 그곳에 있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분명히 다시 살리겠다고 하셨는데, 왜 우셨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의견과 같아지기를 요구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말씀하셨지만, 믿지 않는 그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이제 끝났다고 슬퍼하고 있는 그 마음을 그대로 공감하셨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였습니다. 남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무슨 이론으로 그를 위로할 수 있습니까? 다리 하나 부러진 사람에게 두 개 다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위로하겠습니까? 상대방의 아픈 마음과 같음 마음으로 공감대를 이루어야 위로가 될 수 있는데, 사실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감정이 격해 있는 상태에는 어떤 말도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이론이나 교훈으로 그를 설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욥기에서 보면, 욥의 친구들이 일주일 동안 침묵으로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욥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친구들이 입을 열어 "잘 생각해 보라, 무슨 죄가 있었는가?" 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서 위로하려 할 때, 욥은 위로는커녕 오히려 짜증을 냅니다. 슬픔을 당한 그 시간에 무슨 변론이 필요하고 이론이 필요하겠습니까? 교훈이나 충고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디를 가서 위로를 한다고 어줍잖은 말을 하려거든 그냥 입을 다무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좋은 겁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조금 후에 나사로를 살릴 것이지만 저들이 울 때에 함께 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어떤 위로의 말보다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만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제 곧 나사로를 살릴 것인데, 너희들은 불신하여 우는구나"라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마음 상한 자와 함께 공감대를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참 사랑이 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깊이기억을 해야만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늘 잊어버려요. 마르다가 무덤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거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그러니 그만 수고를 하시지요.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그럽니다. 이제 무덤을 향하여 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대개가 돌을 쪼아 만든 굴로써, 굴속에 시체를 넣고는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습니다. 돌이 없는 곳에서는 벽돌이나 대리석으로 집을 지어서 시체를 넣고 돌문을 잠급니다. 예수께서는 무덤에 도착하시어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에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 : 39) 하고 거절을 합니다. 아마, 마르다의 마음속으로는 "주님, 여기까지 오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차피 죽었는데 이제 와서 열어 볼 것 있습니까?"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마르다는 분명히 자기 오빠가 살아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고하면 무엇인가 이루어지리라고 막연하게 믿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내 사건으로 믿지 못해 절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방문하시어 자기들을 위로하고 계시는데, 마르다는 예수님을 다른 조문객들과 같이 취급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는 섭섭하신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그저 와서 울고 한 마디씩 속수무책으로 의례적인 인사를 하지만 예수님이야 다르지 않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지 못하고 일반 조문객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지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무덤의 돌을 열어 보자고 했으면, 당연히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돌문을 한번 움직이기도 힘들거니와 이미 시체는 썩어서 냄새나는데, 열어서 뭐하느냐고 더 이상 동정은 필요 없다고 거절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 : 40)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를 받는 그릇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받지 않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으로 이 그릇이 깨끗하고 온전해야지 더럽고 깨어져 있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실 때, 마르다가 고집에 세고 믿음이 없는 여자라면, 한 번 더 필요 없다고 거절했을 것이고 그러면 일이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돌아 옮겨 놓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대단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이런 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도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장님인 사람에게 침을 뱉아서 진흙을 짓이겨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 때 실로암까지 가야 합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보통 생각으로는 흙을 짓이겨 눈에 바르니 기분도 나쁘고 장님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아 거친 말이 나오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하고 지팡이를 짚고 오리 길을 걸어가서 눈을 씻는 여기까지가 믿음입니다. 즉, 믿음은 순종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실 때, 내 생각으로는 옮길 필요가 없을찌라도, 또는 옮겨야 할 이유를 모르더라도 일단 옮겨 놓는 것이 믿음입니다. 순종 그 자체가 믿음으로써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의 현장은 우리가 그 현장의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중심론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다른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교회에 기적은 여기서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중심인 생각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내 생각에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 그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봐야 합니다. 돌을 옮겨 놓자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 41-42)라고 기도를 하십니다.
자 예구님의 초점이 언제든지 하나님을 향하여 있다는 겁니다. 언제나 거기에 눈길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기도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알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이적이 일어남에 있어서 감사 기도는 반드시 동반됩니다. 예수님은 5천 명을 먹이실 때도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부족해서 어찌합니까 하는 걱정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감사 기도를 하셨으며, 이 때에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본문에서도 엄청난 일을 벌여 놓으시고 먼저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정말,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인간적인 걱정이 앞서는데, 주님은 "하나님, 내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하며 감사하셨고, 이적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감사 기도에는 이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기적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마술적이 요란한 행사나 어느 특정인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 기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기적이 있는데, 이것 역시 믿음을 돕기 위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도의 응답과 기적의 궁극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바로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나사로의 사건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부활 신앙을 바로 가지게 하기 위하여 있어야 했단 말입니다.
45절에 보면 믿음의 전염적이 효과를 드러내기 위하여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그의 죽음이 그의 고난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역사를 이룬다는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윌리엄 캐리라는 인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인도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그는 타밀어 활자를 만들기도 한 그런 분입니다. 또 선교사들을 위해서 인도 문법책을 만들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뱅갈어 사전과 텔르구어로 문법책을 만들기도 한 선교사요 학자입니다.
1812년 3월 12일 그의 처소에 불이 났습니다. 불이 나서는 순간에 그의 수고가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20년간의 수고가 하루아침에 날아 가버립니다. 그런 순간에 선교사들이 모여서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의 위로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읽은 성경이 로마서입니다. 8장28절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드리고 그리고 헤어집니다.
자 하나님은 그때 일을 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아니 그전에 먼저 하셨습니다. 영국에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당깁니다. 그렇게 해서 선교에 헌신한 사람들이 3천명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인도로 간 사람이 500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야의 전문가들이 50명이 합세를 합니다. 그리고 윌이엄의 20년을 그들이 2년에 끝을 냅니다. 여기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기적은 그 뒤에 일어난다는 겁니다.
감사 기도를 끝내시고 이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요 11: 43)고 부르십니다.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여기서 늘 이런 생각을 납니다. 만일에 나사로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은 사람을 향해 소리를 지르셨는지,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었는지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향하여 명령하신 것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단지, 생명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육적으로 숨이 붙어 있다 없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나사로를 불렀음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왜 이름을 지명하셨느냐 하면, 만약 무덤을 향하여 이름 없이 그냥 "나오너라" 했을 때, 죽었던 사람들이 다 살아나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는 그럴듯한 유머가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조금도 의심치 않으시고 나사로에게 명했을 때, 나사로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살아난 나사로에게 얼굴에 싸인 수건을 풀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1 : 44) 수건을 풀어 주라 또는 무덤에 놓인 돌을 옮겨 놓으라는 등, 이적을 행하실 때에 사람이 할 수 있는 부문은 사람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왕이면 기적을 행하실 바에는 나사로가 무거운 돌문을 박차고 나오면 더 웅장하고 스릴이 있어서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에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왕이면 다시 살리셨으니, 그가 죽을 때까지 먹지 않고 살게 하실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람들이 할 수 없으므로 그 부분만 이적을 행하시고 결코 이적을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을 옮기고 수건을 푸는 것은 당연히 우리가 하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살리시는 것만 예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충실히 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거들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순종 속에 믿음이 있으므로 말씀대로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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