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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아담의 현주소(창세기 3:7-13)

by 【고동엽】 202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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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현주소(창세기 3:7-13)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어떤 젊은 의사가 갑자기 체중이 줄면서 몸이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고 동료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 결과는 위암이었습니다. 더욱이 앞으로 1개월 정도밖에는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위암을 전공한 의사였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그가 지난 10년 동안 단 한번도 암에 대한 진찰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암에 걸린 지 벌써 3년이나 되어 이제는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6개월 전에만 알았더라도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진단에 모두들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세요. 자신은 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진단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몰랐겠습니까? 그 많은 사람을 진찰하면서 왜 자기는 진찰할 생각을 못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정작 자기는 예외시 했기 때문입니다. 환자를 보면서 나도 환자요,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 나도 죽을 것이요, 다른 사람이 죄지은 것을 보면서 나도 죄인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본다고 진정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종일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나를 알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 속에 자신을 투사시켜,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나를 알고 역사를 보고 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보고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객관적 시각이 없다면,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여 오히려 자기 자신을 알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담은 우리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이야기를 통하여 오늘의 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을 신학적으로 조명해줍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아담의 대표성에 비추어 제 1아담, 제 2아담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13절에 보면 아담에 대한 신학적 이론이 논리 정연하게 전개됩니다. 우리는 아담을 통해서 원초적 인간, 본래적 인간, 대표적 인간의 정체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생명성에서 그러합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저 간단하게 '인간은 흙덩이로 지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함께 계신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흙이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복합적 존재입니다. 흙에서 나고 흙에서 난 것을 먹고 팔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떠날 때에 인간은 원상태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함께 하실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인간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삶의 형상도 보여줍니다. 인간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공동체를 이루어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또한 만물을 다스리며 살도록,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이 책임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속에 행복의 뿌리가 있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라'하신 말씀에는 정치적 욕망, 정치적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지배와 자유와 특권 속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쉽게 풀이하자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네가 죽고 사는 것은 네가 책임지거라'---이 엄청난 특권과 자유를 우리에게 주심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라. 이 모든 것을 네가 다스리라. 모든 생태적 현상에 대해서도 네가 책임지거라'----요새 흔한 말로 이것을 환경이라고 합니다만 '환경도 네 책임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과 그 주변 이야기는 분명 우리 모든 것의 대표성을 띠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담은 범죄에 있어서도 인간의 대표성을 띠고 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와 그 죄지음으로 인하여 오는 결과 또한 우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범죄한 아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범죄했으니 죽으면 그만이겠으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십니다. 여기에 종말론적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이 은총적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대해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히브리말인 '아담'은 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이것의 형용사인 '애돔'은 '붉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명사로 쓰일 때에는 '흙'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담아'라고 부르시는 이 말씀은 '흙덩이야'로, '인생아'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현문우답(賢問愚答)입니다. 여기에 하나의 넌센스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담에게 장소를 물어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상태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네 영혼이, 네 인생이 어떤 형편에 있느냐'하는 것을 물어보심입니다.

또한 몰라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범죄한 그 형편을 모르시겠습니까? 이미 알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 스스로 자기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대단히 깊은 뜻을 가진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를 네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넌센스가 있습니다. 숨은 자가 대답하면 어떡합니까? 어린아이들이 숨바꼭질할 때에 '어디 있니? '하면 '나 여기 있다'하고 대답하는 것 보셨습니까? 숨어 있으면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니, 아담이 '내가 여기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넌센스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물으심에 아담의 대답은 너무 복잡합니다. 생각이 제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원래 진실이 담긴 말은 단순한 법입니다. 심플합니다. 설명이 길고 복잡한 말은 거짓말입니다. 생각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기에 변명이 많고 말이 많은 것입니다. 사실적인 이야기란 아주 간결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성모마리아, 요셉, 사도 바울 등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납니다.

그 때에 나눈 얘기들이 대체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개야"하고 부르실 때에 대답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입니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모습 이대로, 이 상태대로 여기 있습니다'하고 진실하게 자기를 주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실 때에 "나 여기 있습니다"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아담도 하와도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현주소를 모릅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읽으면 아담의 모습이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으나 그 원인은 모릅니다. 벌벌 떨고 있으면서도 그 원인을 모릅니다. 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기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또한 죄에 대한 결과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죄의 결과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죄 자체를 회개하려는, 다시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인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결과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설화 중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술사가 쥐새끼 한 마리를 자세히 관찰합니다. 가만히 보니 이 놈은 항상 두려움에 벌벌 떨기만 하고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면서 괴로워합니다. 마술사가 "너는 왜 그렇게 늘상 떨고만 있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그랬더니 "고양이 때문이예요. 언제 어디서 고양이가 나타날지 몰라서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 그까짓 고양이 때문이라면 내가 네 모양을 바꿔주마." 마술사는 쥐에게 마술을 걸어서 고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되어서도 이놈은 여전히 벌벌 떨고 다닙니다.

"왜 그러느냐?" 물어보니 고양이는 "개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개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전보다 더욱 벌벌 떱니다. "또 왜 그러느냐?" 마술사가 물어보니, 호랑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술사는 "그렇다면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호랑이로 만들어주지"하고 사나운 호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이젠 좀 평안해지겠지.' 마술사는 마음을 놓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보다 몇 배는 더 떨더랍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저를 잡으러 다니는 사냥꾼 때문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 어이가 없어진 마술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할 수 없다. 너는 쥐새끼밖에는 못되겠다. 어차피 두려워할 바에야 타고난 데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결국 마술사는 호랑이를 원래의 쥐새끼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합니까? 무엇 때문에 두려워합니까? 이것 한 가지만 해결되면 될 것이라고, 돈만 벌면 될 것이라고, 지위만 얻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실 우리는 끝없는 두려움에 쫓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현주소를 다시 생각해보세요. 무엇 때문입니까? 불안과 공포에 떠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존 엘 비커스토크는 훌륭한 학자요 뛰어난 정치가입니다. 비커스토크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책상을 살펴보았습니다.

책상서랍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책상 위에 커다란 글씨로 씌어있는 기도문만이 있었습니다. '오, 주님. 오직 주님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를 내게 주시옵소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것은 그가 평생 드리던 기도인 동시에 그의 좌우명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에 쓸데없는 일, 시시한 일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보세요. 아담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담은 변명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잘못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말씀에 보는 것처럼 선악과를 왜 먹었노라고 하나님께서 물어보실 때에 제 아내가 주어서 먹었노라고 대답합니다. 여자에게로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여자'라고 감히 말합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여기에 좀더 설명을 붙이면 '하나님께서 저 여자를 주셔서 나를 행복하게 하신 것이 문제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 여자가 못생겼다든지 막돼먹은 행동을 한다든지 하면, 아무리 선악과를 주려 해도 아마 '너나 먹고 죽어라'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담은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며 하와를 사랑합니다. 홀딱 반해 있습니다. 그래서 따로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왜 따먹었느냐?"고 책망하니까, 하와가 한다는 말이 "나는 이미 선악과를 먹었으니 곧 죽을 목숨이지만 당신은 다른 여자하고 행복하게 잘사셔야 해요" 합니다. 그러자 아담은 "차라리 우리 같이 죽자"하며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죄를 짓고 나서 아담은 허둥지둥 나 아닌 다른 데로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내 때문이요, 하나님 때문이요, 가정 때문이요, 행복 때문입니다.-----이렇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결국은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이외의 다른 어떤 환경에 원인을 귀속시키고 싶어하는, 무책임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노예된 것입니다. 노예성을 말하는 것이요, 종속적 인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어째서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변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영원히 자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납시다. 오늘날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누구 때문이요, 정치 때문이요, 무엇 때문이요…… 하고 그 책임을 서로에게 미룹니다. 스스로는 그냥 피해자라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확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가해자다'라고 말입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 사이에도 마주 앉아서 얘기할 때에 '당신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하는 따위의 소리일랑 하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한 당신 자신은 결코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다 모아놓고 한번 얘기해보세요. "미안하다.

나 하나가 부족해서 모두에게 불행을 주었다. 참으로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 순간 여러분의 마음 속에 엄청난 자유와 평안이 깃들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남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두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왕을 보십시오. 그는 변명이 없습니다. 분명히 밧세바 때문에 실수는 했습니다만, 다윗의 그 많은 참회록 속에는 '그 여자 때문'이라는 말이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야곱은 라헬 때문에 신세를 망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생동안 한번이라도 라헬을 나무라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자기를 배신한 사람들의 이름을 아무개 아무개 열거하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버렸노라고 말씀은 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6)"라고 말씀할 뿐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내 허물을 남에게 돌리며 어두운 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현주소를 바로 찾으세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변명하고 있는 한 나는 내 진실을 회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 보면 아담은 숨었다고 합니다. 숨었다고 숨겨지는 것입니까?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도대체 숨겨진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더구나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도피는 불가능합니다. 양심을 속일 수 없고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벗은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마는,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영국에 와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옷가게에 들어가서 주인 부부를 살해하고 많은 돈을 빼앗아서는 미국으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도 낳고 돈도 벌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와인은 고향 생각이 간절해져서, 꿈에도 그리던 런던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런던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실컷 구경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백화점 안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소매치기가 진열대에서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순경이 뒤쫓아가면서 "저놈 잡아라!" 소리칩니다. 다들 어떻게 될까 하고 그 쪽을 바라보는데 유독 와인 혼자만이 그 자리에서 꼼짝못하고 벌벌 떨기만 합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순경이 와인을 경찰서로 데리고 가서 문책한 결과 20년 전에 지은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와인은 체포되고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체포는 오늘 되었습니다만, 지난 20년 동안 그가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피는 불가능합니다. 변명도 불가능합니다. 다 헛된 일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저 사람의 죄도 내 책임입니다"라고 말했더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그랬다면 하나님께서는 'try again'---다시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불행도 아마 없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디에 여러분의 진실이 있습니까? 언제 내 모습을 바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어느 때에 내 현주소를 바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고 오늘도 물으시고 계십니다. 위선과 거짓을 활짝 벗어버리고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바로 응답할 때, 하나님의 더욱 부드럽고 더욱 은혜롭고 더욱 놀라운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 들려올 것입니다------"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아담의 현주소(창세기 3:7-13)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어떤 젊은 의사가 갑자기 체중이 줄면서 몸이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고 동료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 결과는 위암이었습니다. 더욱이 앞으로 1개월 정도밖에는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위암을 전공한 의사였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그가 지난 10년 동안 단 한번도 암에 대한 진찰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암에 걸린 지 벌써 3년이나 되어 이제는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6개월 전에만 알았더라도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진단에 모두들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세요. 자신은 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진단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몰랐겠습니까? 그 많은 사람을 진찰하면서 왜 자기는 진찰할 생각을 못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정작 자기는 예외시 했기 때문입니다. 환자를 보면서 나도 환자요,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 나도 죽을 것이요, 다른 사람이 죄지은 것을 보면서 나도 죄인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본다고 진정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종일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나를 알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 속에 자신을 투사시켜,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나를 알고 역사를 보고 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보고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객관적 시각이 없다면,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여 오히려 자기 자신을 알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담은 우리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이야기를 통하여 오늘의 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을 신학적으로 조명해줍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아담의 대표성에 비추어 제 1아담, 제 2아담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13절에 보면 아담에 대한 신학적 이론이 논리 정연하게 전개됩니다. 우리는 아담을 통해서 원초적 인간, 본래적 인간, 대표적 인간의 정체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생명성에서 그러합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저 간단하게 '인간은 흙덩이로 지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함께 계신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흙이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복합적 존재입니다. 흙에서 나고 흙에서 난 것을 먹고 팔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떠날 때에 인간은 원상태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함께 하실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인간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삶의 형상도 보여줍니다. 인간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공동체를 이루어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또한 만물을 다스리며 살도록,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이 책임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속에 행복의 뿌리가 있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라'하신 말씀에는 정치적 욕망, 정치적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지배와 자유와 특권 속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쉽게 풀이하자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네가 죽고 사는 것은 네가 책임지거라'---이 엄청난 특권과 자유를 우리에게 주심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라. 이 모든 것을 네가 다스리라. 모든 생태적 현상에 대해서도 네가 책임지거라'----요새 흔한 말로 이것을 환경이라고 합니다만 '환경도 네 책임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과 그 주변 이야기는 분명 우리 모든 것의 대표성을 띠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담은 범죄에 있어서도 인간의 대표성을 띠고 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와 그 죄지음으로 인하여 오는 결과 또한 우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범죄한 아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범죄했으니 죽으면 그만이겠으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십니다. 여기에 종말론적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이 은총적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대해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히브리말인 '아담'은 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이것의 형용사인 '애돔'은 '붉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명사로 쓰일 때에는 '흙'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담아'라고 부르시는 이 말씀은 '흙덩이야'로, '인생아'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현문우답(賢問愚答)입니다. 여기에 하나의 넌센스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담에게 장소를 물어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상태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네 영혼이, 네 인생이 어떤 형편에 있느냐'하는 것을 물어보심입니다.

또한 몰라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범죄한 그 형편을 모르시겠습니까? 이미 알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 스스로 자기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대단히 깊은 뜻을 가진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를 네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넌센스가 있습니다. 숨은 자가 대답하면 어떡합니까? 어린아이들이 숨바꼭질할 때에 '어디 있니? '하면 '나 여기 있다'하고 대답하는 것 보셨습니까? 숨어 있으면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니, 아담이 '내가 여기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넌센스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물으심에 아담의 대답은 너무 복잡합니다. 생각이 제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원래 진실이 담긴 말은 단순한 법입니다. 심플합니다. 설명이 길고 복잡한 말은 거짓말입니다. 생각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기에 변명이 많고 말이 많은 것입니다. 사실적인 이야기란 아주 간결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성모마리아, 요셉, 사도 바울 등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납니다.

그 때에 나눈 얘기들이 대체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개야"하고 부르실 때에 대답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입니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모습 이대로, 이 상태대로 여기 있습니다'하고 진실하게 자기를 주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실 때에 "나 여기 있습니다"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아담도 하와도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현주소를 모릅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읽으면 아담의 모습이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으나 그 원인은 모릅니다. 벌벌 떨고 있으면서도 그 원인을 모릅니다. 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기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또한 죄에 대한 결과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죄의 결과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죄 자체를 회개하려는, 다시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인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결과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설화 중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술사가 쥐새끼 한 마리를 자세히 관찰합니다. 가만히 보니 이 놈은 항상 두려움에 벌벌 떨기만 하고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면서 괴로워합니다. 마술사가 "너는 왜 그렇게 늘상 떨고만 있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그랬더니 "고양이 때문이예요. 언제 어디서 고양이가 나타날지 몰라서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 그까짓 고양이 때문이라면 내가 네 모양을 바꿔주마." 마술사는 쥐에게 마술을 걸어서 고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되어서도 이놈은 여전히 벌벌 떨고 다닙니다.

"왜 그러느냐?" 물어보니 고양이는 "개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개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전보다 더욱 벌벌 떱니다. "또 왜 그러느냐?" 마술사가 물어보니, 호랑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술사는 "그렇다면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호랑이로 만들어주지"하고 사나운 호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이젠 좀 평안해지겠지.' 마술사는 마음을 놓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보다 몇 배는 더 떨더랍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저를 잡으러 다니는 사냥꾼 때문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 어이가 없어진 마술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할 수 없다. 너는 쥐새끼밖에는 못되겠다. 어차피 두려워할 바에야 타고난 데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결국 마술사는 호랑이를 원래의 쥐새끼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합니까? 무엇 때문에 두려워합니까? 이것 한 가지만 해결되면 될 것이라고, 돈만 벌면 될 것이라고, 지위만 얻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실 우리는 끝없는 두려움에 쫓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현주소를 다시 생각해보세요. 무엇 때문입니까? 불안과 공포에 떠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존 엘 비커스토크는 훌륭한 학자요 뛰어난 정치가입니다. 비커스토크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책상을 살펴보았습니다.

책상서랍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책상 위에 커다란 글씨로 씌어있는 기도문만이 있었습니다. '오, 주님. 오직 주님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를 내게 주시옵소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것은 그가 평생 드리던 기도인 동시에 그의 좌우명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에 쓸데없는 일, 시시한 일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보세요. 아담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담은 변명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잘못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말씀에 보는 것처럼 선악과를 왜 먹었노라고 하나님께서 물어보실 때에 제 아내가 주어서 먹었노라고 대답합니다. 여자에게로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여자'라고 감히 말합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여기에 좀더 설명을 붙이면 '하나님께서 저 여자를 주셔서 나를 행복하게 하신 것이 문제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 여자가 못생겼다든지 막돼먹은 행동을 한다든지 하면, 아무리 선악과를 주려 해도 아마 '너나 먹고 죽어라'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담은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며 하와를 사랑합니다. 홀딱 반해 있습니다. 그래서 따로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왜 따먹었느냐?"고 책망하니까, 하와가 한다는 말이 "나는 이미 선악과를 먹었으니 곧 죽을 목숨이지만 당신은 다른 여자하고 행복하게 잘사셔야 해요" 합니다. 그러자 아담은 "차라리 우리 같이 죽자"하며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죄를 짓고 나서 아담은 허둥지둥 나 아닌 다른 데로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내 때문이요, 하나님 때문이요, 가정 때문이요, 행복 때문입니다.-----이렇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결국은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이외의 다른 어떤 환경에 원인을 귀속시키고 싶어하는, 무책임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노예된 것입니다. 노예성을 말하는 것이요, 종속적 인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어째서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변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영원히 자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납시다. 오늘날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누구 때문이요, 정치 때문이요, 무엇 때문이요…… 하고 그 책임을 서로에게 미룹니다. 스스로는 그냥 피해자라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확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가해자다'라고 말입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 사이에도 마주 앉아서 얘기할 때에 '당신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하는 따위의 소리일랑 하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한 당신 자신은 결코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다 모아놓고 한번 얘기해보세요. "미안하다.

나 하나가 부족해서 모두에게 불행을 주었다. 참으로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 순간 여러분의 마음 속에 엄청난 자유와 평안이 깃들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남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두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왕을 보십시오. 그는 변명이 없습니다. 분명히 밧세바 때문에 실수는 했습니다만, 다윗의 그 많은 참회록 속에는 '그 여자 때문'이라는 말이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야곱은 라헬 때문에 신세를 망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생동안 한번이라도 라헬을 나무라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자기를 배신한 사람들의 이름을 아무개 아무개 열거하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버렸노라고 말씀은 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6)"라고 말씀할 뿐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내 허물을 남에게 돌리며 어두운 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현주소를 바로 찾으세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변명하고 있는 한 나는 내 진실을 회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 보면 아담은 숨었다고 합니다. 숨었다고 숨겨지는 것입니까?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도대체 숨겨진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더구나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도피는 불가능합니다. 양심을 속일 수 없고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벗은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마는,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영국에 와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옷가게에 들어가서 주인 부부를 살해하고 많은 돈을 빼앗아서는 미국으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도 낳고 돈도 벌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와인은 고향 생각이 간절해져서, 꿈에도 그리던 런던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런던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실컷 구경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백화점 안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소매치기가 진열대에서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순경이 뒤쫓아가면서 "저놈 잡아라!" 소리칩니다. 다들 어떻게 될까 하고 그 쪽을 바라보는데 유독 와인 혼자만이 그 자리에서 꼼짝못하고 벌벌 떨기만 합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순경이 와인을 경찰서로 데리고 가서 문책한 결과 20년 전에 지은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와인은 체포되고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체포는 오늘 되었습니다만, 지난 20년 동안 그가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피는 불가능합니다. 변명도 불가능합니다. 다 헛된 일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저 사람의 죄도 내 책임입니다"라고 말했더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그랬다면 하나님께서는 'try again'---다시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불행도 아마 없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디에 여러분의 진실이 있습니까? 언제 내 모습을 바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어느 때에 내 현주소를 바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고 오늘도 물으시고 계십니다. 위선과 거짓을 활짝 벗어버리고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바로 응답할 때, 하나님의 더욱 부드럽고 더욱 은혜롭고 더욱 놀라운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 들려올 것입니다------"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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