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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야고보서 2 : 14~26)

by 【고동엽】 202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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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야고보서 2 : 1426)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에서 말하기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악한 자와 속하는 자는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한 말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속이고 속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세대에는 이런 괴로운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속임을 당하는 괴로움은 흔히 있는 일이겠지만,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속는 일처럼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아마도 없는 줄 압니다. 스스로 속이고자 하여 속는 일도 있겠지만, 나도 모르게 내가 나에게 속고 있었던 결과를 맺을 때가 더욱 많은 것입니다.

가령 나는 무엇을 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얼마 후에 보니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무엇을 좀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가진 것도 없고, 또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사건에 부딪혀 보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남들과는 다르며 남보다 훨씬 나은 줄 알고, 또한 결백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며 그리고 가장 우수한 어떤 자기만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는데 어느 시간에 깨닫고 보니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더욱 비참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절감하게 될 때 마치 깊은 함정에 빠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떤 사업하시는 분들을 보면 사업에 너무 바쁘고 복잡하다 보니 돈이 얼마나 벌어졌는지도 모르고서 그래도 무언가 좀 남는 것이 있겠지 하면서 부지런히 뛰다가 언제 한번 장부 정리를 해 보니 적자 투성이었습니다. 진작 그만두었어야 할 사업이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것은 참으로 낙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될 문제가 있습니다. 돈이야 있다고 생각했다가 없으면 그만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으면 망신 한번 당하면 됩니다. 잘난 줄 알았다가 못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한번 크게 울어 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없는 날이면 이건 큰 일입니다. 더욱이 자기가 남보다 더 잘 믿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가서 보니 그렇지 않고 도대체 믿은 바가 하나도 없는 것을 알았을 때 이건 정말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를 날마다 점검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진단하는 데는 야고보서를 빼 놓을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을 진단하는 거울과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서는 오랜 세월 동안 성서신학적으로 많은 수난을 겪은 책입니다. 중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그 믿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본서에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이 몇 마디 있다고 해서 본서의 별명을 "지푸라기 복음"이라고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난을 겪은 책이지만 자신의 믿음이 어느 지경에 있는가를 진단할 때에는 결코 야고보서를 외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서를 몇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마치 거울을 보듯이 자기의 믿음이 어느 수준에 있는가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지만 때로는 무엇을 어떻게 믿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간혹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찾아오는 본인들에게는 물론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속에는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본인들에게는 섭섭한 말이 될지 모르는 실례를 범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목사님은 자기가 아니니까 그 당한 입장을 모른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목사가 그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의 내용 중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어디 한 곳에도 믿음이 있을 만한 곳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에는 걱정과 근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모두 믿음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었기에 그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요. 누구를 믿고 살았는데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울어야 하며, 어떻게 믿었기에 돈 좀 잃어버렸다고 해서 생명에까지 지장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사람과 돈을 믿었다는 결론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며 믿는 바를 확실히 해야 될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믿을 것인지 재점검해 보아야 될 줄 압니다.

첫째로 우리는 믿음과 신념을 혼돈하여 이 믿음에 대하여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어적 문제로서 일반적으로 쓰는 "믿음"이라는 말과 우리가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용어는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인 용어로 쓰이는 "믿음"이란 신념을 뜻하는 것인데 이 신념은 극히 주관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마음의 결단입니다. 이 신념이 좀더 과장되고 고집되면 자기 우상이 되며 흔히 신념의 사람들이 자기를 우상화하여 남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념은 좋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지나칠 때에는 이와 같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신념을 이데올로기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결코 이데올로기에 대한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에 대한 순종이며,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바른 자세이며 진실한 응답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과 종교심 혹은 종교 심성에 대한 혼돈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하여 그 품속을 그리워하는 것과 또한 사람이 마음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무엇엔가 의지하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 이것은 종교 심성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적 믿음을 모르는 분들이 흔히 말하기를 사람은 본래부터 무엇엔가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니까 그저 아무 종교든지 하나 믿으면 든든하고 좋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아주 무식한 사람의 소위이며 바로 이것이 큰 문제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에 생명을 걸고 순교까지 하는데 고작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쉽게 한다는 것은 지극히 몰상식한 처사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의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마음 이것이 기독교의 믿음은 아닙니다. 이 종교 심성과 믿음을 혼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믿음을 추상화하는 그런 개념이 있습니다. 믿음을 실생활과 분리하여 하나의 정신적 문제이며 마음의 문제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족적인 종교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가 가졌던 그 간의 모든 종교들이 모두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추상화하고 극히 관념화해 버려서 그것과 현실 생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종래의 종교에 대한 개념이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서도 이런 추상적인 개념의 종교관을 버리지 못하고 두 세계를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믿음을 지식화하든가 혹은 서구적으로 말하면 철학화하는 것, 이것 또한 잘못된 믿음입니다. 교리적 지식을 믿음으로 오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또 성경 귀절을 많이 외우고 교리에 대한 익숙한 지식을 가졌으면 잘 믿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성경의 권수가 몇 권인지도 모르고 성경 한번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수가 많이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헬라 철학적 개념으로 이원론적 신앙입니다. 기독교에서 이런 개념은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정신 세계와 실제의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지식과 마음과 의지와 또 우리의 실생활이 언제나 직선상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생명이며 생명력입니다.

다섯째로 믿음을 시작으로만 생각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주로 갈라디아서에 이 문제가 많이 취급되어 있고 또한 갈라디아서의 주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행함으로 마치고,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는 이런 신앙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로 시작하였다가 어느 정도 나아가서는 자기의 의를 내세우게 되고 자기의 선행을 통해서 그 공로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이러한 율법주의에 빠지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출발은 했지만 그 생활 전체에서는 믿음을 배제하는 그러한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끝까지 믿음으로 행해야 됩니다. 믿음은 행함에서 떠난 의미에서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동이요 믿음은 실생활에서의 능력입니다. 즉 믿음으로서의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몇 가지 잘못된 믿음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유명적인 믿음, 이름만의 믿음, 마치 십자가 배지를 달고 다니든지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녀서 겉으로 나타나는 명목상으로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둘째로는 두려움의 신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만을 생각하여 벌벌 떠는 믿음, 무엇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죄를 지어서 벌받는 줄 알고, 감기만 걸려도 저주 의식에 사로잡히고, 감사 헌금을 하지 않았더니 장사가 안 되고 하는 이런 식의 액운에 쫓겨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만 믿고 저주와 공포 의식으로 벌벌 떠는 그런 믿음을 잘 믿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주와 공포 의식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 말씀은 이것에 대하여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니라." 마귀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을 알고 벌벌 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공포에 쫓기는 것은 마귀들이 하는 짓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죽은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성장이 없다는 뜻입니다. 무의식 상태에서 아무 생각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죽은 줄도 모르는 믿음, 이미 죽어서 냄새가 난지도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자기가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어려운 지경에 이른 상태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바로 믿는 것인지 전혀 의식이 없는 믿음, 이것은 죽은 믿음 즉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를 믿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은 물론 없는 것입니다.

넷째는 비생산적인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아주 예리하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 이 믿음은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될 수 없는 믿음 즉 유익이 없는 믿음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익한 믿음이란 죄로부터 구원을 얻고, 혈기와 자기의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고, 허무와 절망과 교만과 자존심으로부터 자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런 믿음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믿음은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지 3년이 된다는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자기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을 한번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남편과 온 집안 식구가 예수를 믿으려면 이혼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믿음 생활 시작할 때 나온 말이 아니라 3년이 지난 후에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3년이란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를 잘 믿었으면 왜 3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현재 이 문제에 부딪힌 사람들이 많은 줄 압니다.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꼭 있어야 할 아내가 집에 없습니다. 철야 기도, 산기도, 심방 등등의 핑계로 항상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는데 어느 남편이나 어느 집안 식구가 좋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좋은 믿음 생활은 가정에서도 좋은 아내요 좋은 며느리요 좋은 어머니며 직장에서는 자기 일에 충실하여 모범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종교 의식을 노려가면서 필요 없는 것까지 열심히 하는 그것이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열매는 나의 나됨에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감상적 문제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격의 문제입니다. 신령한 지식으로 인하여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졌고 그 뜻이 주님을 향하고 온 행위가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거룩한 제사의 한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온 인격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십자가 밑에 있으며 부활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믿음이 되고 또한 남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역사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행함과 분리된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믿음 됨을 행함 속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행함을 믿음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행함이 믿음을 말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몇 가지 실수를 범하는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면 전부라고 생각하여 행함을 필요 없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과 혹은 행함을 공로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적 혹은 공로적 의미에서 자기의 의를 쌓아 나가는 그런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그의 생활 속에서 열매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응답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실수는 행함을 믿음으로 오해하게 되면 마침내 자기 교만에 빠지기도 하며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 모두 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의 선진들의 예를 들어서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믿음으로 바쳤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행위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행위로 나타난 믿음 곧 행동으로 순종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또한 기생 라합이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의 사자들을 대접한 것도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행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60만 대군을 40년 동안이나 끝없는 광야의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이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순종하는 믿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곧 생명이요 능력이요 진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산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겸손한 순종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주신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행위 없는 죽은 믿음에 있지 않게 하시고 살아서 항상 성장하는 믿음으로서 우리의 생활 안에서 열매 맺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믿음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야고보서 2 : 1426)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에서 말하기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악한 자와 속하는 자는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한 말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속이고 속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세대에는 이런 괴로운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속임을 당하는 괴로움은 흔히 있는 일이겠지만,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속는 일처럼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아마도 없는 줄 압니다. 스스로 속이고자 하여 속는 일도 있겠지만, 나도 모르게 내가 나에게 속고 있었던 결과를 맺을 때가 더욱 많은 것입니다.

가령 나는 무엇을 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얼마 후에 보니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무엇을 좀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가진 것도 없고, 또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사건에 부딪혀 보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남들과는 다르며 남보다 훨씬 나은 줄 알고, 또한 결백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며 그리고 가장 우수한 어떤 자기만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는데 어느 시간에 깨닫고 보니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더욱 비참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절감하게 될 때 마치 깊은 함정에 빠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떤 사업하시는 분들을 보면 사업에 너무 바쁘고 복잡하다 보니 돈이 얼마나 벌어졌는지도 모르고서 그래도 무언가 좀 남는 것이 있겠지 하면서 부지런히 뛰다가 언제 한번 장부 정리를 해 보니 적자 투성이었습니다. 진작 그만두었어야 할 사업이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것은 참으로 낙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될 문제가 있습니다. 돈이야 있다고 생각했다가 없으면 그만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으면 망신 한번 당하면 됩니다. 잘난 줄 알았다가 못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한번 크게 울어 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없는 날이면 이건 큰 일입니다. 더욱이 자기가 남보다 더 잘 믿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가서 보니 그렇지 않고 도대체 믿은 바가 하나도 없는 것을 알았을 때 이건 정말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를 날마다 점검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진단하는 데는 야고보서를 빼 놓을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을 진단하는 거울과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서는 오랜 세월 동안 성서신학적으로 많은 수난을 겪은 책입니다. 중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그 믿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본서에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이 몇 마디 있다고 해서 본서의 별명을 "지푸라기 복음"이라고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난을 겪은 책이지만 자신의 믿음이 어느 지경에 있는가를 진단할 때에는 결코 야고보서를 외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서를 몇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마치 거울을 보듯이 자기의 믿음이 어느 수준에 있는가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지만 때로는 무엇을 어떻게 믿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간혹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찾아오는 본인들에게는 물론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속에는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본인들에게는 섭섭한 말이 될지 모르는 실례를 범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목사님은 자기가 아니니까 그 당한 입장을 모른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목사가 그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의 내용 중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어디 한 곳에도 믿음이 있을 만한 곳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에는 걱정과 근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모두 믿음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었기에 그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요. 누구를 믿고 살았는데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울어야 하며, 어떻게 믿었기에 돈 좀 잃어버렸다고 해서 생명에까지 지장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사람과 돈을 믿었다는 결론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며 믿는 바를 확실히 해야 될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믿을 것인지 재점검해 보아야 될 줄 압니다.

첫째로 우리는 믿음과 신념을 혼돈하여 이 믿음에 대하여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어적 문제로서 일반적으로 쓰는 "믿음"이라는 말과 우리가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용어는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인 용어로 쓰이는 "믿음"이란 신념을 뜻하는 것인데 이 신념은 극히 주관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마음의 결단입니다. 이 신념이 좀더 과장되고 고집되면 자기 우상이 되며 흔히 신념의 사람들이 자기를 우상화하여 남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념은 좋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지나칠 때에는 이와 같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신념을 이데올로기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결코 이데올로기에 대한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에 대한 순종이며,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바른 자세이며 진실한 응답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과 종교심 혹은 종교 심성에 대한 혼돈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하여 그 품속을 그리워하는 것과 또한 사람이 마음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무엇엔가 의지하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 이것은 종교 심성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적 믿음을 모르는 분들이 흔히 말하기를 사람은 본래부터 무엇엔가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니까 그저 아무 종교든지 하나 믿으면 든든하고 좋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아주 무식한 사람의 소위이며 바로 이것이 큰 문제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에 생명을 걸고 순교까지 하는데 고작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쉽게 한다는 것은 지극히 몰상식한 처사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의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마음 이것이 기독교의 믿음은 아닙니다. 이 종교 심성과 믿음을 혼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믿음을 추상화하는 그런 개념이 있습니다. 믿음을 실생활과 분리하여 하나의 정신적 문제이며 마음의 문제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족적인 종교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가 가졌던 그 간의 모든 종교들이 모두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추상화하고 극히 관념화해 버려서 그것과 현실 생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종래의 종교에 대한 개념이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서도 이런 추상적인 개념의 종교관을 버리지 못하고 두 세계를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믿음을 지식화하든가 혹은 서구적으로 말하면 철학화하는 것, 이것 또한 잘못된 믿음입니다. 교리적 지식을 믿음으로 오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또 성경 귀절을 많이 외우고 교리에 대한 익숙한 지식을 가졌으면 잘 믿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성경의 권수가 몇 권인지도 모르고 성경 한번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수가 많이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헬라 철학적 개념으로 이원론적 신앙입니다. 기독교에서 이런 개념은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정신 세계와 실제의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지식과 마음과 의지와 또 우리의 실생활이 언제나 직선상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생명이며 생명력입니다.

다섯째로 믿음을 시작으로만 생각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주로 갈라디아서에 이 문제가 많이 취급되어 있고 또한 갈라디아서의 주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행함으로 마치고,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는 이런 신앙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로 시작하였다가 어느 정도 나아가서는 자기의 의를 내세우게 되고 자기의 선행을 통해서 그 공로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이러한 율법주의에 빠지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출발은 했지만 그 생활 전체에서는 믿음을 배제하는 그러한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끝까지 믿음으로 행해야 됩니다. 믿음은 행함에서 떠난 의미에서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동이요 믿음은 실생활에서의 능력입니다. 즉 믿음으로서의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몇 가지 잘못된 믿음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유명적인 믿음, 이름만의 믿음, 마치 십자가 배지를 달고 다니든지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녀서 겉으로 나타나는 명목상으로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둘째로는 두려움의 신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만을 생각하여 벌벌 떠는 믿음, 무엇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죄를 지어서 벌받는 줄 알고, 감기만 걸려도 저주 의식에 사로잡히고, 감사 헌금을 하지 않았더니 장사가 안 되고 하는 이런 식의 액운에 쫓겨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만 믿고 저주와 공포 의식으로 벌벌 떠는 그런 믿음을 잘 믿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주와 공포 의식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 말씀은 이것에 대하여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니라." 마귀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을 알고 벌벌 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공포에 쫓기는 것은 마귀들이 하는 짓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죽은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성장이 없다는 뜻입니다. 무의식 상태에서 아무 생각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죽은 줄도 모르는 믿음, 이미 죽어서 냄새가 난지도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자기가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어려운 지경에 이른 상태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바로 믿는 것인지 전혀 의식이 없는 믿음, 이것은 죽은 믿음 즉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를 믿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은 물론 없는 것입니다.

넷째는 비생산적인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아주 예리하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 이 믿음은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될 수 없는 믿음 즉 유익이 없는 믿음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익한 믿음이란 죄로부터 구원을 얻고, 혈기와 자기의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고, 허무와 절망과 교만과 자존심으로부터 자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런 믿음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믿음은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지 3년이 된다는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자기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을 한번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남편과 온 집안 식구가 예수를 믿으려면 이혼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믿음 생활 시작할 때 나온 말이 아니라 3년이 지난 후에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3년이란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를 잘 믿었으면 왜 3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현재 이 문제에 부딪힌 사람들이 많은 줄 압니다.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꼭 있어야 할 아내가 집에 없습니다. 철야 기도, 산기도, 심방 등등의 핑계로 항상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는데 어느 남편이나 어느 집안 식구가 좋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좋은 믿음 생활은 가정에서도 좋은 아내요 좋은 며느리요 좋은 어머니며 직장에서는 자기 일에 충실하여 모범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종교 의식을 노려가면서 필요 없는 것까지 열심히 하는 그것이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열매는 나의 나됨에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감상적 문제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격의 문제입니다. 신령한 지식으로 인하여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졌고 그 뜻이 주님을 향하고 온 행위가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거룩한 제사의 한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온 인격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십자가 밑에 있으며 부활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믿음이 되고 또한 남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역사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행함과 분리된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믿음 됨을 행함 속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행함을 믿음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행함이 믿음을 말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몇 가지 실수를 범하는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면 전부라고 생각하여 행함을 필요 없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과 혹은 행함을 공로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적 혹은 공로적 의미에서 자기의 의를 쌓아 나가는 그런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그의 생활 속에서 열매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응답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실수는 행함을 믿음으로 오해하게 되면 마침내 자기 교만에 빠지기도 하며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 모두 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의 선진들의 예를 들어서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믿음으로 바쳤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행위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행위로 나타난 믿음 곧 행동으로 순종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또한 기생 라합이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의 사자들을 대접한 것도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행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60만 대군을 40년 동안이나 끝없는 광야의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이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순종하는 믿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곧 생명이요 능력이요 진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산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겸손한 순종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주신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행위 없는 죽은 믿음에 있지 않게 하시고 살아서 항상 성장하는 믿음으로서 우리의 생활 안에서 열매 맺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믿음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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