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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성탄의 표적(누가복음 2장 1절~14절)

by 【고동엽】 2023.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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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표적(누가복음 2장 1절~14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 ---- 2천 년 전의 그 성탄일을 생각해봅시다. 마음눈을 높이 들어 베들레헴 높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리던 그 별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귀를 크게 열어 목자들이 들었던 천사의 소식을 들어봅시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베들레헴 사건을 다시한번 생각해봅시다. 젊은 부부가 호적하러 올라왔습니다. 부인은 만삭입니다. 이 여관 저 여관, 이 집 저 집 다니며 유할 곳을 찾습니다마는 거절을 당하고 마침내 한 마구간에 듭니다. 부인은 거기서 아기를 낳아 말구유에 뉘었습니다.

들에 있던 목자들이 천사의 음성을 듣고 첫 번째로 찾아와 아기 주님께 경배드립니다. 여기에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2천 년 전 한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 속에, 그 사건 하나하나에 말씀이 있고 계시가 있고 뜻이 있습니다. 말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읽을 줄 알며 또 응답할 줄 아는 성탄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급격한 변화를 기대할 때가 많습니다. 기적적이요 마술적이요 천지개벽같은 일이라도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세계 여행을 자주 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유럽의 유적들을 즐겨 찾습니다. 로마로 파리로 영국으로, 혹은 성지(聖地)로 찾아다니는데, 생각 깊은 사람이면 반드시 한번은 꼭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로마의 남쪽, 나폴리 항 근처에 있는 '폼페이'라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는 집 같은 것은 한 채도 없습니다. 옛날에 도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만 있을 뿐이지요. 이 잔흔(殘痕) 위에서 옛 모습을 상상해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가 여기에 있었던가, 얼마나 계획적으로 구획이 정리된 도시였던가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운동경기장, 연회장, 호텔, 그리고 술집들, 거기에 공중목욕탕까지 완벽하게 갖춘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신전(神殿)이 있었던 자리도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에 이미 상수도 시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본다면 까마득한 삼국시대라고 해야 고작 1,500년 전인데, 2천여 년 전의 그사람들이 상수도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폼페이가 얼마나 화려한 문명의 도시였던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죄악의 도시를 하루아침에 심판하셨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용암 분출물이 이 도시 전체를 순식간에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죽은 사람이며 웅크리고 앉아 죽은 개의 모습 따위가 고스란히 미이라가 된 채 남아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침실에서 그때의 몰골 그대로 돌이 된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실 때에는 때로 이처럼 무섭게 역사 하십니다. 노아 때 홍수로 온 생물을 다 쓸어버리셨습니다. 소돔․ 고모라에 유황불을 내려 죽음의 바다 사해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때에는 이렇게 급격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일들이 일순간에 나타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役事)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살리는 것은 아주 어렵게, 긴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저 베들레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게 마구간에서 주님이 태어나시는 말구유 사건에서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말씀이요, 이것은 계시입니다. 인간의 수중(手中), 인간의 문화, 인간의 도덕적 상황 ---- 바로 거기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는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저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선교사(宣敎史)에서 읽은 실화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봅니다. 인도에서 선교하던 한 미국인 선교사가 뜻한 바가 있어 그곳의 스님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어느날 선교사가 한 스님과 함께 길을 갑니다. 선교사가 어쩌다 개미굴을 밟았습니다. 스님이 깜짝 놀란 눈으로 선교사를 쳐다봅니다. "어쩌자고 이 많은 생명을 살상하였소? 당신은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죽은 개미 가운데는 우리 할아버지가 계시는지도 모르오." 윤회설(輪廻說)을 믿는 스님인지라 오만상을 찌푸리며 혀를 찹니다.

선교사는 적이 무안해졌습니다. "발바닥에 눈이 없어서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어찌해야 좋겠소? 개미한테 사죄를 할 방도는 없겠소?" 그러자 스님이 대답합니다. "한 가지 길은 있소. 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는 것이오." 순간 선교사는 '옳거니!'하고 정색을 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되어 사람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선교사는 때를 만난 듯이 그렇게 전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죄인의 수준으로 낮추셔서 우리와 대화하시고, 우리와 인격적 관계, 교육적 관계, 생명적 관계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존재와 인격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한계를 공유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피주관자(被主管者)의 나약함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이하에 보면, '그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시험을 체휼(體恤)하신 자'라고 말씀합니다. 유한자(有限者)로, 모든 고통을 다 겪으신 자로 나타납니다.

철저하게 날 때부터 고난을 경험하는 자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구원의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경험하셨습니다. 함께 누리셨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식민 백성으로 태어나십니다.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고난이 있어서 강도같은 것이 들끓는 사회였습니다. 종교는 썩을대로 썩었습니다. 당시의 성전이라는 것은 헤롯이 정치적 목적으로 지은 것입니다. 신령한 눈으로 본다면 한낱 건물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한낱 목수의 아들이셨습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한 인간으로서 고생을 치르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마구간에서 태어나십니다. 태어나시자 마자 해치려는 사람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길을 나서기도 합니다.

고난과 함께 태어나 철저하게 고난을 체험하시고,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인간 그 누구도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쫓겨나셨습니다. 구유는 마소의 먹이를 담는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세계보다도 오히려 더 낮추셔서 짐승의 세계, 바로 그 처지에서 우리 인간을 만나주셨습니다.

가장 비천한 곳, 맨 밑바닥으로 낮추사 거기에서 시작하십니다.

일본의 크리스찬인 우찌무라 간소(內村鑑三)는 말했습니다. "성탄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기념일이다." 신학자 몰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픔의 표현이다."

성탄(聖誕) ----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말구유 사건은 이처럼 귀한 뜻으로, 이다지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일대(一代)의 인생을 경험하시면서 새로운 인간상,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를 계시해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씀이요, 말씀으로 보아야 할 신앙 사건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라고 우리는 쉽게도 말합니다.

이것은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소식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이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촛불입니까, 아니면 무지개입니까? 영광이 무엇입니까? 쉬운 말로 바꾸어 생각해보십시다. 칭찬입니다.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가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 돌아갑니까? 내가 성공했을 때입니까, 내가 실패했을 때입니까? 행복할 때입니까, 고난을 당할 때입니까?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잘 참고 끝내 신앙으로 승리하는 그 때에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갑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예수님 이름으로 참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돌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로 원수를 용서하는 스데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모든 역경 중에도 신앙을 지키는 그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갑니다. 하나님께 영광 ---- 있는 자가 없는 자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종이 되시고 죄인이 되사 마구간에 태어나십니다. 창조주가 사람 대접조차 받기는커녕 말구유에 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있습니다. 땅에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너무 성급하게 요구합니다. 시쳇말로 '화끈하게' 뭔가 이루어졌으면 해서 폭력도 써보고 혁명도 일으킵니다. 파업을 하고 전쟁도 벌여봅니다. 서로가 죽이느니 살리느니 합니다. 그러나 말구유 사건은 그런 것을 부정합니다.

조용하게 시작합니다. 베들레헴에서부터 그 말구유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시고 자라시고 사역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적어도 30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목자들이 예수를 만났다고 합니다. 메시야를 경배했다고 하지마는 실인즉 아기 예수입니다. 그들이 무슨 유익을 얻겠습니까? 적어도 30년은 기다리고 나서야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한번 보게 되지 않습니까? 교훈 한마디라도 그 때에 가서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생명의 역사는 이처럼 조용히 시작됩니다.

사도가 되기 전에 바울이 예수를 만납니다.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마는 바울이 그 즉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당장에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그는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를 하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복음을 전하는데, 그 전하는 과정에서도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까? 아덴 전도에서 실수하고 고린도교회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귀한 진리를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는 말년에 로마 감옥에 갇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오묘하신가! 내가 당한 이 고난, 내가 겪는 이 고생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알기 바라노라.' 구원이 순간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화(聖化) 되는 것은 일생을 통해서입니다. 한 생명이 성장하듯 긴 세월을 두고 수많은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탄의 표적이 말구유라는 것을 다시한번 명심합시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를 경배합니다. 그 아기의 손바닥에 메시야라고 하는 표징이 있습니까? 얼굴에 광채가 납니까? 면류관을 쓰고 태어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이심을 알아보았을까요? 베들레헴으로 가라 예수가 나셨느니라. 유대나라 왕이 나셨도다, 표징은 오직 하나 말구유에 누우셨다 ---- 하기야 그렇습니다. 세상에 말구유에 낳은 아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뿐이지요. 말구유가 예수님의 표징이었음을 잊지 맙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악의 타락입니다.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몰인정 몰상식의 사건이요 인간 파괴입니다. 만삭된 여인을 마구간으로 몰아내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게 하다니, 막가는 세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것부터 참으십니다. 배척을 받으시되 배척하시지 않고, 욕을 당하시되 욕하시지 않고, 다 참으시면서 조용히 역사 안에 들어오십니다. 베들레헴 그 마구간에 하나의 씨앗처럼 조용히 오셨습니다. 이제 자라고 자라서 불과 300년 안에 온 세계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최대의 겸손이요, 최대의 희생입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갑부가 한 분 있습니다. 제가 인천에 있을 때에 오래도록 가까이서 살았기 때문에 그분의 지난날에 대해서도 꽤 알고 있습니다. 이분의 부인이 한때 술집에서 일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탓인지 지금도 말투가 좀 거친 편이지요. 화가 나면 마구 욕을 해댑니다. 한번은 제가 있는 자리인데도 남편을 두고 낯뜨거운 욕설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놈의 사업, 몽땅 망해 없어져라! 썩어 문드러져라!" 속이 아무리 상했기로니 저주가 지나치구나 싶은데, 저보고 하소연을 합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는 죽 한 그릇 쑤어서도 오손도손 서로 권하던 남편이 돈푼깨나 생기니까 싹 변하더랍니다.

한 달에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렵게 되었고 툭하면 탈을 잡는다고 합니다. "이런 꼴이니 욕을 하지 않게 생겼어요?"

여러분, 어느 때에 참사랑이 있습니까? 어느 때가 가장 진실합니까? 말구유로 내려가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깨고 저 미물의 자리에까지 내려가는 겸손이 있어야, 저 마구간까지 내려간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십니다.

크리스마스의 사건은 구원의 사건입니다. 구유가 그 표적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바로 이 순간에도, 진실한 구유가 마련될 때에야 거기서 예수님은 탄생하십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구유같이 마음을 비워놓고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계시적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1950년의 일입니다마는 중국에서 교회의 문이 닫힐 그 때, 우리는 그곳에 교인이 하나도 남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당시 중국에는 3백만 기독교인이 있었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팔천 만 명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묘하십니다.

독일은 또 어떻습니까? 동서 독일의 개방을 보고 모두들 굉장한 기적이라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벌써 20여 년 전부터 서독의 교회들은 예산의 40퍼센트를 동독의 교회를 보조하는 데 썼습니다. 서독 정부가 이 일을 금하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비밀리에 왕래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서 은밀히 수행해야 합니다. 보석금을 주고 감옥에 갇힌 목사님들을 석방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해서 연간 7백 명 이상의 목사가 순교했습니다. 아주 조용하게, 구유에서 시작된 이 일이 마침내 동서독의 담을 헐어버리고 화해의 역사를 이루어놓은 것입니다.

어릴적에 저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크리스마스 때에는 연극을 하곤 했습니다. 잠깐 하는 연극을 위하여 한 달 남짓 연습을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연극이라 주제가 늘 똑같습니다. 천사, 마리아, 말구유…… 이런 정도입니다. 여자 어린이들은 마리아 되기가 소원이고, 또 어떤 아이들은 천사가 되어 날개 한번 달아보고 싶어합니다.

몇 년 전 「가이드포스트」지(誌)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윌리라는 소년이 크리스마스 연극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조금 떨어져 4학년에 다녀야 할 나이에 2학년에 다니는 아이입니다. 키도 크고 마땅한 배역이 없어 여관집 주인 역을 맡았습니다. 문 앞에 턱 버티고 섰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오면 "방 없어요" 하고 들어가 버리는 역입니다.

한 달이나 연습한 끝에 성탄절이 되어 공연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왔습니다. "주인님, 방 하나만 주세요.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무 데서도 안 받아줍니다. 부탁합니다." 윌리는 퉁명스럽게 "빈 방 없어요. 딴 데나 가 봐요!" 하고 맡은 역을 잘 소화해 냈습니다.

연극을 지도했던 선생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안으로 퇴장해야 할 윌리가 처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요셉과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각본에도 없는 대사를 갑자기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님, 마리아님, 가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 안방이 비어 있어요. 그 방을 쓰시란 말이에요!" 순간, 관객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처럼 뜻 깊은 성탄 연극은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안방을 그리스도께 내어드립시다. 내 가장 소중한 마음의 방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말구유에 오심은 무능해서가 아니고 천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온유하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생명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구원은 이처럼 값비싸게 시작됩니다. 이토록 어렵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탄에 주님을 마음 가득히 영접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그 능력을 올바로 체험하는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의 표적(누가복음 2장 1절~14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 ---- 2천 년 전의 그 성탄일을 생각해봅시다. 마음눈을 높이 들어 베들레헴 높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리던 그 별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귀를 크게 열어 목자들이 들었던 천사의 소식을 들어봅시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베들레헴 사건을 다시한번 생각해봅시다. 젊은 부부가 호적하러 올라왔습니다. 부인은 만삭입니다. 이 여관 저 여관, 이 집 저 집 다니며 유할 곳을 찾습니다마는 거절을 당하고 마침내 한 마구간에 듭니다. 부인은 거기서 아기를 낳아 말구유에 뉘었습니다.

들에 있던 목자들이 천사의 음성을 듣고 첫 번째로 찾아와 아기 주님께 경배드립니다. 여기에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2천 년 전 한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 속에, 그 사건 하나하나에 말씀이 있고 계시가 있고 뜻이 있습니다. 말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읽을 줄 알며 또 응답할 줄 아는 성탄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급격한 변화를 기대할 때가 많습니다. 기적적이요 마술적이요 천지개벽같은 일이라도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세계 여행을 자주 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유럽의 유적들을 즐겨 찾습니다. 로마로 파리로 영국으로, 혹은 성지(聖地)로 찾아다니는데, 생각 깊은 사람이면 반드시 한번은 꼭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로마의 남쪽, 나폴리 항 근처에 있는 '폼페이'라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는 집 같은 것은 한 채도 없습니다. 옛날에 도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만 있을 뿐이지요. 이 잔흔(殘痕) 위에서 옛 모습을 상상해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가 여기에 있었던가, 얼마나 계획적으로 구획이 정리된 도시였던가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운동경기장, 연회장, 호텔, 그리고 술집들, 거기에 공중목욕탕까지 완벽하게 갖춘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신전(神殿)이 있었던 자리도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에 이미 상수도 시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본다면 까마득한 삼국시대라고 해야 고작 1,500년 전인데, 2천여 년 전의 그사람들이 상수도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폼페이가 얼마나 화려한 문명의 도시였던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죄악의 도시를 하루아침에 심판하셨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용암 분출물이 이 도시 전체를 순식간에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죽은 사람이며 웅크리고 앉아 죽은 개의 모습 따위가 고스란히 미이라가 된 채 남아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침실에서 그때의 몰골 그대로 돌이 된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실 때에는 때로 이처럼 무섭게 역사 하십니다. 노아 때 홍수로 온 생물을 다 쓸어버리셨습니다. 소돔․ 고모라에 유황불을 내려 죽음의 바다 사해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때에는 이렇게 급격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일들이 일순간에 나타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役事)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살리는 것은 아주 어렵게, 긴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저 베들레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게 마구간에서 주님이 태어나시는 말구유 사건에서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말씀이요, 이것은 계시입니다. 인간의 수중(手中), 인간의 문화, 인간의 도덕적 상황 ---- 바로 거기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는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저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선교사(宣敎史)에서 읽은 실화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봅니다. 인도에서 선교하던 한 미국인 선교사가 뜻한 바가 있어 그곳의 스님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어느날 선교사가 한 스님과 함께 길을 갑니다. 선교사가 어쩌다 개미굴을 밟았습니다. 스님이 깜짝 놀란 눈으로 선교사를 쳐다봅니다. "어쩌자고 이 많은 생명을 살상하였소? 당신은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죽은 개미 가운데는 우리 할아버지가 계시는지도 모르오." 윤회설(輪廻說)을 믿는 스님인지라 오만상을 찌푸리며 혀를 찹니다.

선교사는 적이 무안해졌습니다. "발바닥에 눈이 없어서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어찌해야 좋겠소? 개미한테 사죄를 할 방도는 없겠소?" 그러자 스님이 대답합니다. "한 가지 길은 있소. 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는 것이오." 순간 선교사는 '옳거니!'하고 정색을 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되어 사람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선교사는 때를 만난 듯이 그렇게 전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죄인의 수준으로 낮추셔서 우리와 대화하시고, 우리와 인격적 관계, 교육적 관계, 생명적 관계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존재와 인격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한계를 공유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피주관자(被主管者)의 나약함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이하에 보면, '그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시험을 체휼(體恤)하신 자'라고 말씀합니다. 유한자(有限者)로, 모든 고통을 다 겪으신 자로 나타납니다.

철저하게 날 때부터 고난을 경험하는 자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구원의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경험하셨습니다. 함께 누리셨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식민 백성으로 태어나십니다.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고난이 있어서 강도같은 것이 들끓는 사회였습니다. 종교는 썩을대로 썩었습니다. 당시의 성전이라는 것은 헤롯이 정치적 목적으로 지은 것입니다. 신령한 눈으로 본다면 한낱 건물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한낱 목수의 아들이셨습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한 인간으로서 고생을 치르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마구간에서 태어나십니다. 태어나시자 마자 해치려는 사람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길을 나서기도 합니다.

고난과 함께 태어나 철저하게 고난을 체험하시고,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인간 그 누구도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쫓겨나셨습니다. 구유는 마소의 먹이를 담는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세계보다도 오히려 더 낮추셔서 짐승의 세계, 바로 그 처지에서 우리 인간을 만나주셨습니다.

가장 비천한 곳, 맨 밑바닥으로 낮추사 거기에서 시작하십니다.

일본의 크리스찬인 우찌무라 간소(內村鑑三)는 말했습니다. "성탄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기념일이다." 신학자 몰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픔의 표현이다."

성탄(聖誕) ----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말구유 사건은 이처럼 귀한 뜻으로, 이다지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일대(一代)의 인생을 경험하시면서 새로운 인간상,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를 계시해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씀이요, 말씀으로 보아야 할 신앙 사건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라고 우리는 쉽게도 말합니다.

이것은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소식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이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촛불입니까, 아니면 무지개입니까? 영광이 무엇입니까? 쉬운 말로 바꾸어 생각해보십시다. 칭찬입니다.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가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 돌아갑니까? 내가 성공했을 때입니까, 내가 실패했을 때입니까? 행복할 때입니까, 고난을 당할 때입니까?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잘 참고 끝내 신앙으로 승리하는 그 때에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갑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예수님 이름으로 참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돌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로 원수를 용서하는 스데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모든 역경 중에도 신앙을 지키는 그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갑니다. 하나님께 영광 ---- 있는 자가 없는 자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종이 되시고 죄인이 되사 마구간에 태어나십니다. 창조주가 사람 대접조차 받기는커녕 말구유에 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있습니다. 땅에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너무 성급하게 요구합니다. 시쳇말로 '화끈하게' 뭔가 이루어졌으면 해서 폭력도 써보고 혁명도 일으킵니다. 파업을 하고 전쟁도 벌여봅니다. 서로가 죽이느니 살리느니 합니다. 그러나 말구유 사건은 그런 것을 부정합니다.

조용하게 시작합니다. 베들레헴에서부터 그 말구유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시고 자라시고 사역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적어도 30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목자들이 예수를 만났다고 합니다. 메시야를 경배했다고 하지마는 실인즉 아기 예수입니다. 그들이 무슨 유익을 얻겠습니까? 적어도 30년은 기다리고 나서야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한번 보게 되지 않습니까? 교훈 한마디라도 그 때에 가서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생명의 역사는 이처럼 조용히 시작됩니다.

사도가 되기 전에 바울이 예수를 만납니다.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마는 바울이 그 즉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당장에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그는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를 하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복음을 전하는데, 그 전하는 과정에서도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까? 아덴 전도에서 실수하고 고린도교회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귀한 진리를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는 말년에 로마 감옥에 갇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오묘하신가! 내가 당한 이 고난, 내가 겪는 이 고생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알기 바라노라.' 구원이 순간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화(聖化) 되는 것은 일생을 통해서입니다. 한 생명이 성장하듯 긴 세월을 두고 수많은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탄의 표적이 말구유라는 것을 다시한번 명심합시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를 경배합니다. 그 아기의 손바닥에 메시야라고 하는 표징이 있습니까? 얼굴에 광채가 납니까? 면류관을 쓰고 태어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이심을 알아보았을까요? 베들레헴으로 가라 예수가 나셨느니라. 유대나라 왕이 나셨도다, 표징은 오직 하나 말구유에 누우셨다 ---- 하기야 그렇습니다. 세상에 말구유에 낳은 아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뿐이지요. 말구유가 예수님의 표징이었음을 잊지 맙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악의 타락입니다.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몰인정 몰상식의 사건이요 인간 파괴입니다. 만삭된 여인을 마구간으로 몰아내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게 하다니, 막가는 세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것부터 참으십니다. 배척을 받으시되 배척하시지 않고, 욕을 당하시되 욕하시지 않고, 다 참으시면서 조용히 역사 안에 들어오십니다. 베들레헴 그 마구간에 하나의 씨앗처럼 조용히 오셨습니다. 이제 자라고 자라서 불과 300년 안에 온 세계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최대의 겸손이요, 최대의 희생입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갑부가 한 분 있습니다. 제가 인천에 있을 때에 오래도록 가까이서 살았기 때문에 그분의 지난날에 대해서도 꽤 알고 있습니다. 이분의 부인이 한때 술집에서 일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탓인지 지금도 말투가 좀 거친 편이지요. 화가 나면 마구 욕을 해댑니다. 한번은 제가 있는 자리인데도 남편을 두고 낯뜨거운 욕설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놈의 사업, 몽땅 망해 없어져라! 썩어 문드러져라!" 속이 아무리 상했기로니 저주가 지나치구나 싶은데, 저보고 하소연을 합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는 죽 한 그릇 쑤어서도 오손도손 서로 권하던 남편이 돈푼깨나 생기니까 싹 변하더랍니다.

한 달에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렵게 되었고 툭하면 탈을 잡는다고 합니다. "이런 꼴이니 욕을 하지 않게 생겼어요?"

여러분, 어느 때에 참사랑이 있습니까? 어느 때가 가장 진실합니까? 말구유로 내려가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깨고 저 미물의 자리에까지 내려가는 겸손이 있어야, 저 마구간까지 내려간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십니다.

크리스마스의 사건은 구원의 사건입니다. 구유가 그 표적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바로 이 순간에도, 진실한 구유가 마련될 때에야 거기서 예수님은 탄생하십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구유같이 마음을 비워놓고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계시적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1950년의 일입니다마는 중국에서 교회의 문이 닫힐 그 때, 우리는 그곳에 교인이 하나도 남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당시 중국에는 3백만 기독교인이 있었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팔천 만 명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묘하십니다.

독일은 또 어떻습니까? 동서 독일의 개방을 보고 모두들 굉장한 기적이라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벌써 20여 년 전부터 서독의 교회들은 예산의 40퍼센트를 동독의 교회를 보조하는 데 썼습니다. 서독 정부가 이 일을 금하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비밀리에 왕래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서 은밀히 수행해야 합니다. 보석금을 주고 감옥에 갇힌 목사님들을 석방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해서 연간 7백 명 이상의 목사가 순교했습니다. 아주 조용하게, 구유에서 시작된 이 일이 마침내 동서독의 담을 헐어버리고 화해의 역사를 이루어놓은 것입니다.

어릴적에 저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크리스마스 때에는 연극을 하곤 했습니다. 잠깐 하는 연극을 위하여 한 달 남짓 연습을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연극이라 주제가 늘 똑같습니다. 천사, 마리아, 말구유…… 이런 정도입니다. 여자 어린이들은 마리아 되기가 소원이고, 또 어떤 아이들은 천사가 되어 날개 한번 달아보고 싶어합니다.

몇 년 전 「가이드포스트」지(誌)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윌리라는 소년이 크리스마스 연극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조금 떨어져 4학년에 다녀야 할 나이에 2학년에 다니는 아이입니다. 키도 크고 마땅한 배역이 없어 여관집 주인 역을 맡았습니다. 문 앞에 턱 버티고 섰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오면 "방 없어요" 하고 들어가 버리는 역입니다.

한 달이나 연습한 끝에 성탄절이 되어 공연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왔습니다. "주인님, 방 하나만 주세요.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무 데서도 안 받아줍니다. 부탁합니다." 윌리는 퉁명스럽게 "빈 방 없어요. 딴 데나 가 봐요!" 하고 맡은 역을 잘 소화해 냈습니다.

연극을 지도했던 선생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안으로 퇴장해야 할 윌리가 처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요셉과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각본에도 없는 대사를 갑자기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님, 마리아님, 가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 안방이 비어 있어요. 그 방을 쓰시란 말이에요!" 순간, 관객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처럼 뜻 깊은 성탄 연극은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안방을 그리스도께 내어드립시다. 내 가장 소중한 마음의 방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말구유에 오심은 무능해서가 아니고 천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온유하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생명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구원은 이처럼 값비싸게 시작됩니다. 이토록 어렵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탄에 주님을 마음 가득히 영접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그 능력을 올바로 체험하는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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