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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우선의 신앙(마가복음 7장 5절~14절)

by 【고동엽】 2023.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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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우선의 신앙(마가복음 7장 5절~14절)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 하였으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서양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면서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유교 사상과 효를 근본으로 하는 도덕 윤리와의 갈등이었다고 합니다. 곧 신앙과 효의 갈등이었습니다.
어느 고집스런 노인은 선교사의 전도에 끈질기게 반대를 했습니다. '우리는 효를 근본으로 여기는데 너희들이 전하는 서양 종교(기독교)는 효를 무시하고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른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짤막한 지식만으로 겁 없이 대들곤 합니다. 하다못해 선교사가 성경을 펴가며 성경에서 가르치는 효를 구구절절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은 대인(對人) 계명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효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십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계명과 사람을 향한 계명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사람을 향한 계명 가운데 첫째가 바로 효인 것입니다. 불효죄를 살인죄보다 더 크게 치고 있습니다. 선교사는 불효자에 관하여 언급해놓은 성경구절을 일일이 찾아가면서 열심으로 설명을 해나갑니다. 부모를 치는 자는 가차없이 돌로 쳐죽여라,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쳐죽여라, 부모더러 미쳤다고 말하는 자는 쳐죽여라,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자는 성문에 나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부모의 말을 거역한 자라고 증거하라, 그러면 사람들이 돌을 들어 그를 죽이고 이 성에서 악을 제할 것이니라----성경구절을 하나하나 예시하면서 설득해 나갑니다. 그제야 노인은 '내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르구먼' 하고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효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효를 근본으로 하는 우리의 도덕 윤리에도 불효자를 죽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효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가 가르치는 효의 윤리는 이토록 대단합니다. 그대로 돌로 쳐죽이라고 합니다. 선교사의 설명을 들은 이 노인은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고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죽을 사람 많습니다. 당연한 효의 윤리가 오늘에 와서 왜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만 것입니까? 물질주의와 실용주의철학의 팽배 때문입니다. 효가 그다지 이롭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비생산적이요 낭비라는 사고 때문입니다. 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놀랍게도 효가 이렇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전통사회의 제도 속에는 부모에게 효도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첫째는, 신분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양반의 자식은 양반이요, 귀족의 자식은 귀족이요, 왕족의 자식은 왕족입니다. 부모로부터 엄청난 신분을 물려받았기에 당연히 효도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상놈은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습니다. 상놈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도 분한데 무슨 효도입니까? 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가 저주스럽습니다. 둘째는, 모든 기술을 부모로부터 배웠기에 그러합니다. 농사 짓는 법, 물고기 잡는 법, 집 짓는 법을 비롯하여 부부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배웠습니다. 학교나 사회로부터 배운 것은 아주 적은 편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를 존경하고 당연히 효도해야 했습니다.
셋째는 땅을 물려받아서입니다. 농경시대에는 땅 없이 살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부지런히 일해도 내 땅이 없이는 다 헛일입니다. 땅은 부모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는 것입니다. 평생 머슴살이를 해보았자 손바닥만한 땅뙈기 하나 얻을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땅을 물려받으려면 부모한테 잘 보여야 했습니다.
이러한 기대심리로 효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문제될 소지가 다분히 있는 이론입니다. 물려받을 특권 신분도 없고, 땅도 없는 오늘입니다. 효도를 한다고 해서 특별히 덕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나에게 돌아오는 이득도 하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효하게 된다는 사회학자의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어느 돈많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늘그막에 이르러 재산을 다 자손들에게 골고루 분배해줍니다마는 주지 않고 지니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도 주지 않습니다. 밤톨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딱 끼고 앉아서는 세계적인 보석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며느리들이 와서 아양을 떱니다. "돌아가실 때에 저를 주세요." "그래, 생각해보자." 딸들이 와서 갖은 아양을 떱니다. "네가 하는 것을 봐서 네게 줄지도 모르지." 모두에게 이렇게 언질을 주었습니다. 딸이고 며느리고 모두가 이 할머니를 극진히 받듭니다. 아들들과 사위들도 잘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효도를 잘 받았지만 할머니는 끝내 그 반지는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반지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손들에게 효도 받고 싶으면 유리조각으로 된 반지라도 끼고 있으십시다. 무엇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효도 받을 세상입니다. 이 얼마나 타락한 윤리입니까? 완전히 변질되었습니다. 효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더 큰 일을 해야 한다면서 효를 등한시합니다. 부모에게 효도는 하고 싶지만 공부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나라도 생각해야 하고, 세계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효도를 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홀로 외아들을 키운 할머니가 있습니다.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내외가 모두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어서 유학을 간다고 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해야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홀어머니를 생각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렸습니다. 정 가야 하겠으면 아내와 아이들은 두고 혼자 다녀오는 것이 낫겠다고까지 했습니다마는 어머니를 먼 친척이 사는 동네의 산기슭에 조그마한 방 하나 얻어서 모셔놓고는 아이들까지 데리고 유학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제가 그 할머니를 찾아보았더니 참으로 비참하게 사십디다. 그런데도 그저 아들만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있습디다. 그 아들, 그렇게 떠나서 공부가 잘될 리 있겠습니까? 공부는커녕 솜 공장에서 죽도록 일만 하다가 끝났다고 합니다. 부모를 버리고, 효를 저버리고는 출세를 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은 집에서 십리 밖을 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전화도 없던 때라 언제 돌아 가실는지 모르기에 멀리 여행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혹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모름지기 가까이 있으면서 자주 뵙는 것이 효도입니다. 어쩌다 전화 한번하고는 다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효를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돈 몇푼 드리는 것으로 할일 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살게 해드렸으면 되었지 않느냐고 합니다. 효란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이어야 합니다.
가끔 고급식당에 가보면 부모를 모시고 나와서 식사하는 것을 봅니다. 곁에서 보기에는 참 좋아보입니다마는 가만히 보십시다.
부모들은 익숙치 않은 나이프와 포크로 썰어서 먹는 비싼 양식(洋食)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게다가 구박까지 합니다. 비싼 것이니 많이 잡수시라고 다그칩니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비싼 것이라고 좋아할 부모입니까? 도대체 정성이 없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따르지 않습니다. 나의 주관, 나의 생각대로 하는 효도는 효도라는 구실로 오히려 부모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놓고도 스스로는 할 만큼 다했다고 자족하고 있는 것이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는 데에 필요한 신앙과 정의감과 인내심은 부모의 유산이라고 합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머리도 좋고 실력도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있어야 할 인내심이 없습니다. 성품이 못되었습니다. 부모로부터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효도하는 사람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기도 쉽습니다. 신앙과 정의감, 그리고 인내심은 부모의 유산일 뿐더러 효의 마음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을 봅니다.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무지스러움이 오히려 낫습니다. 모르면서 아는 줄로, 불효하면서 효도하는 줄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망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생각을 바로 고쳐먹어야 하겠습니다.
중국 고사에 '반의지희(斑衣之戱)'라는 것이 있습니다. 노래자(老萊者)라고 하는 사람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노래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초(楚)나라 현인이자 유명한 효자입니다. 그는 칠순이 되어서도 어머니 앞에서 아이들이나 입는 색동저고리를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피우고 응석을 떨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칠순의 아들이라도 어머니의 눈에는 한낱 어린아이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로 돌아가 색동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똑똑한 체하지 마십시다. 어린아이가 되십시다. 좀 바보스러워지십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효도다, 저렇게 하는 것이 효도다' 하고 저마다 나름대로 주장을 합니다마는 효도란 나의 개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세계관 속에서 행해지는 효가 진정한 효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름난 효가(孝家)를 방문해보았더니 나이 많은 어머니가 예순 넘은 아들의 얼굴을 씻겨주더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기뻐하시니 그렇게 하시도록 해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머니가 무엇 좀 하다가 조그마한 실수라도 하게 되면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릇을 왜 깨뜨렸냐는 둥 청소가 잘못되었다는 둥 소란을 피웁니다. 실수 좀 하시면 어떻습니까?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대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효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런 효가 참된 효입니다. 제 선친께서 누누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소금 섬을 물로 끓이라면 끓여라'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효가 진정한 효입니다.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늘 똑똑한 사람들이 말썽입니다. 아는 체해서 큰일입니다. 부모님들은 그분들의 연륜 만큼의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가까이서 모실 때에 그 엄청난 지혜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유전과 계명을 첨예하게 대립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해석하여 소위 종교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순수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예컨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그런데 뱀과 대화하던 중에 하와는 뭐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하나님의 계명과는 관계없이 하와가 지어낸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안식일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하였으면 그렇게 할 일이지 왜 불을 켜느니 마느니, 옷고름을 매느니 푸느니, 지팡이를 드느니 마느니 합니까? 안식일의 소중한 근본 뜻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계율에 얽매여서 지켰다고 교만해지고, 못지켰다고 남을 정죄하려드니 이 얼마나 형식적입니까? 본문에서는 이런 형식주의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인간의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저버리는가를 확연히 드러내보이기 위하여 구체적인 실례를 드십니다.
'고르반'은 본디 하나님께 바쳐진 선물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양은 고르반 되었다' '이 곡식은 고르반 되었다'라고만 말하면 아무도 손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곧 사적 용도로 쓰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것이 이기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왜곡되었습니다. 부모에게 당연히 드려야 할 것도 '고르반'하여 드리지 않고 심지어 부모 모시기를 거부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율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섬길 뿐 내적으로는 경건을 배반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7절에서 '디다스콘테스'---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친다고 책망하십니다. 8절에서 '아펜테스'---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9절에서 '아데테이테'---reject, 곧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렸다고 하십니다. 13절에서는 '아쿠론테스'---하나님의 계명을 폐해버렸다, 인간적인 윤리와 인습을 따라서 소중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무섭게 책망하시고 계십니다.
왜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소중한 하나님의 계명 때문입니다. 다른 해석은 더는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보다도 최우선입니다. 이유도 결과도 물을 것이 없습니다. 내게 돌아올 이득이 무엇이냐 하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나를 위한 명령이요 복 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대로 지킬 것입니다. 여기에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인습에 위배된다, 내 철학과 다르다---다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그대로 받을 것입니다.
저는 30여 년의 목회생활을 통하여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본인들에게 실례가 되기에 굳이 누구라고 이름은 꼽지 않겠습니다마는 성공한 사람으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다들 효자입니다. 나이 많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알고보면 효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존경받고 삽니다. 가만히 보면 건강하다고 오래 사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병들어 비실비실하면서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과 건강은 별개인 것 같습니다. 오래 사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공통적으로 노부모를 모시고 있습니다. 반드시 효자가 장수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 그리하면 땅에서 장수하리라, 존귀하게 되리라'---이 말씀이 사실인 것입니다.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래 살고 싶습니까? 효도하십시다. 제아무리 좋은 약을 찾아 먹고 안간힘써보아도 소용없습니다. 불효자는 오래 살지 못합니다. 불효하면서 장수하기를 바라지 마십시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성공하기를 바라지 마십시다. 이것은 성경적 진리이자 우리의 체험입니다. 부모 마음 아프게 해드리고 마음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두고 사는 사람이 어느 하늘 아래에서 복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엄연한 안전에서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과 효도는 절대로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로 효성이 지극한 젊은 부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데 그 어머니가 믿지를 않습니다. '나 죽으면 제사 안 지내려고 그러지?' '나는 제삿밥도 못 얻어먹겠구나' 원망하면서 교회에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와서 제가 세 가지를 가르쳐주고 가서 어머니께 그대로 말씀드려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지요? 제가 잘되기를 바라시지요? 제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시지요? 어머니의 그 소원대로 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저는 어머니께서 오래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시고 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실 텐데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망령이 되어 구천을 헤매다가 1년에 한 번씩 제삿밥이나 얻어먹는 불쌍한 영혼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그 부부는 제 충고를 그대로 실천에 옮겼고, 그 어머니도 아주 똑똑한 분이었는지 '네 말이 맞다'하고는 망설임 없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효도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국 선교사 한 분도 참으로 효자가 되고 싶으면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였습니다. 참으로 복 받는 길은 이 길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참된 신앙과 참된 효는 절대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 신앙에 참 효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축복은 이 효의 길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장수와 형통과 존경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귀한 말씀,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그 길을 통하여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받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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