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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일일청산의 지혜(에베소서 4장 25절~32절)

by 【고동엽】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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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청산의 지혜(에베소서 4장 25절~32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동화 한 편의 줄거리를 소개하겠습니다. 한창 사랑에 빠진 장끼와 까투리가 서로 결혼을 할까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이모저모로 생각해보니 문젯거리도 많고해서 걱정하던 끝에 둘은 동물의 사제(司祭)격인 올빼미한테 충고를 들으러 왔습니다. 올빼미가 그들에게 묻습니다. "서로 다투어본 적이 있는가?" 장끼와 까투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다투다니요, 왜 다툽니까? 지금 우리는 열심히 사랑을 하고 있는데요. 사랑하니까 결혼하려고 하는 것이지 싸우면 왜 결혼하겠다고 하겠습니까요?" "그렇지가 않느니라." 올빼미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싸워본 적이 있어야 한다." "왜요? 왜 싸워야 한단말입니까요? 사랑하는 사이라야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요?" "잘 듣거라." 올빼미는 점잖게 충고합니다. "누구나 사랑한다는 말은 하기 쉽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은 쉽게 하지 못한다. 서로 '사랑해'하는 것만으로는 결혼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싸워도 보고, 그래서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도 아는 사이라야 결혼할 자격이 있다." 올빼미가 너무도 의젓하게 충고하므로 장끼와 까투리는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났다는 사연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마는 여기서는 유대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볼까 합니다. 유대사람들이 사람을 평가할 때에 기준으로 삼는 것에 '키스 코스 카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히브리말입니다. '키스'라는 말은 '돈주머니'를 뜻합니다. 즉 돈쓰는 법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잘 버는 것도 중요하고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쓰는가 남을 위해 쓰는가, 나를 위해 더 많이 쓰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많이 쓰는가---이런 씀씀이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의 노예, 수전노(守錢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도덕성이 없이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돈의 노예가 된다면 그처럼 비참한 인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돈이 얼마나 있고, 학벌이 얼마나 높고, 이런 것은 상관없이 격(格)이 낮은 사람이다---이렇게 평가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코스'는 '잔,' 곧 '술잔'을 의미합니다. 술마시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술도 일종의 음식입니다. 어디까지나 음식으로 점잖게 마시고 점잖게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술만 들어가면 정신이 우왕좌왕하는 사람, 곧 술의 노예가 되고 마는 사람은 틀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음식에든 언동에든 사람이란 모름지기 절제능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카스'라는 말은 분노와 관련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내력을 지닌 사람, 제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 감정을 올바로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바람직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이렇다하는 사람이라도 제 감정을 올바로 처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인격자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 하나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 기대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키스 코스 카스'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하는 유대사람들의 생각은 참으로 일리있는 생각이라 하겠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분노'는 겨우 20퍼센트 정도가 주위 환경이나 외부적 사건 때문에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다시말해서 분노의 80퍼센트 정도가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분내는 것은 환경 탓이라느니 누구 탓이라느니 상황이 그래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느니 하여 나 아닌 딴것에 원인을 돌리기 쉽습니다마는 그실은 분노의 80퍼센트가 그 책임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표현이 좌절된다거나 자존심이 위협을 당한다거나 공격을 받을 때, 이에 대하여 불합리하게 비논리적으로 반응하는 현상이 곧 분노라고 합니다. 분노가 치받을 때에 내가 화를 내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상대방에게 해(害)가 되나 이(利)가 되나, 나에게는 득(得)이 될까 손(損)이 될까---이런 것을 생각해보고 터뜨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헤아릴 줄 안다면 이미 분노는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노는 어디까지나 충동적입니다. 비합리적인 발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참고할만한 통계자료가 없으므로 부득이 외국의 통계자료를 빌려 말씀드릴까 합니다. 미국에서는 살인사건이 많이 납니다. 그런데 그 살인사건의 60퍼센트 이상이 분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돈 때문에, 무슨 이권(利權) 때문에, 무슨 피치못할 까닭이 있어서라기보다도 거의 대부분의 살인사건은 발작적인 충동에서, 충격에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같이 충동적으로 발생하는 살인사건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부자(父子)간에 언쟁을 하다가 아버지를 죽였다든지, 부부가 싸우다가 아내가 남편을 죽이게 되었다든지 하는 일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의가 충동적으로 저질러지는 사건들입니다. 이렇게 범죄를 하고나면 으레 후회가 따릅니다. '내가 죽일놈이지. 뭐가 씌었던 게지'---'순간'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본디 장사를 잘한다고 평가받던 민족은 유대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들이 침투하고부터는 이 평가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유대사람들도 한국사람들에게는 두 손을 든다고 합니다. 어찌나 일찍 일어나고 어찌나 바지런하고 억척스러운지 몹시 지독한 사람들로 소문이 났고, 그래서 한국사람들을 가리켜 'Jew in Asia'라고까지 말한답니다. '유대사람들은 너 죽고 나 살자 하는데 한국사람들은 너 죽고 나 죽자 한다'---이렇게 평가받을 정도라고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참으로 미련한 심사입니다.

슬픈 것은, 저러한 악평에 대하여 우리는 딱히 아니라고 부정할 용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 찻길에만 나가보아도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사가 난무하는 현장을 볼 수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 살기 위해 차타고 다니는 것 같지가 않아요. 살자는 것이 아니요, 너는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릴없이 너 죽고 나 죽자며 기를 쓰는 악다구니의 현장 속에 나날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 무슨 꼴입니까? 이 백성이 어이하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세계적으로 소문난 '지옥'이 되고 말았습니다. 낯뜨거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입니다. 가만히 보면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이요 점잖아보이는 사람인데도 어느 경우를 당하면 예외없이 못돼먹은 행티가 나오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의분(義憤)과 분노를 우리는 엄격하게 구별하여야 합니다. 의분은 객관적입니다. 불의와 부도덕에 대한 의(義)의 반응입니다.

합리적인 반응입니다. 깊이 생각해보고, 기도를 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한 연후에 나타나는 반응이 의분입니다. 그러나 분노는 주관적입니다. 이기심과 자기사랑이 침해받을 성싶으면 반사되는 비합리적, 비논리적 충동이 분노입니다. 둘에다 둘을 더하면 다섯이 된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런 소리 듣고 화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애당초 말이 안되니까요. 둘에다 둘을 더하면 넷이지 왜 다섯이냐 하고 대들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自信)이 만만한데 왜 분노하겠습니까? 오히려 딱하게 여길 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화가 나느냐? 불확실할 때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나 자신부터가 바보스럽거든요. 불확실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으로 발동하는 것입니다. 결국 분노란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으로 비롯되는 문제입니다. 큰일을 당해도 참을 수 있을 때가 있는가 하면 지엽말단의 사소한 일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터지는 때가 있습니다. 내 영이, 내 인격이, 내 속사람이 허(虛)하기 때문입니다.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결과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하버드대학 의학팀의 한 보고서를 보면 사람의 질병치고 강박관념과 관계없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질병이 강박관념 내지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와 두려움이, 억제된 정서(情緖)가 육신의 질병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누적된 분노, 쌓이고 쌓인 한(恨)이 병이 되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내과의사입니다. 이분이 참으로 심각한 이야기를 합니다. 환자를 진찰하고 나서 "당신은 암(癌)이오. 이대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소"하고 '사형 선고'를 해야 할 때,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다고 합디다. 이런 경우, 별도리 없이 그 당사자를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 저런 격려를 해보는데, 삼십 년 의사 생활을 해오는 가운데 겪은바 통계적으로 이렇다할 수 있는 내용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암으로 죽게 되어 있는 그 사람은 예외 없이 얼마전이건 몇 해 전이건, 몹시 심적 충격을 받은 적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극복하지 못하여 밤새워 속을 끓이거나 억울해하고 분해한 때가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외국의 한 암 전문의가 밝힌 바에도 '분노'가 암의 한 원인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암 치료의 결정적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분노를 풀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약을 쓴다 해도 암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우리는 스스로의 체험으로 이미 그 주장을 납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면 소화기(消火器)가 발작을 합니다. 혈압이 치솟습니다. 심장에 이상(異狀)이 옵니다. 협심증이 생깁니다. 당뇨환자들을 보면 끈질긴 참을성을 가지고 식이요법을 쓴 결과 당도(糖度)를 어느만큼 떨어뜨리는 데 성공하지만 어쩌다 불쑥 화를 내는 일이 있으면, 그 한순간의 분노로 인하여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당도가 분노와 함께 치솟고 마는 것입니다. 무릇 질병이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 현대의학에서 얻은 결론인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드레날린 분비가 촉진되어 암세포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어지고 만다---이것이 결론입니다. 아드레날린이란 호르몬의 일종으로, 혈압을 높이고 심장 박동수를 늘리며 혈액 중의 당량(糖量)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미국 듀크대학 의학팀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분노로 인한 사망률은 흡연이나 고혈압으로 인한 사망률보다도 2배 내지 5배나 높다고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분노의 결과는 이토록 무섭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오늘의 분문 26절 말씀입니다.

본문에 옛사람과 새사람을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이 구원을 받고 이제 새사람으로 살고자 하는데, 아직도 조금 남아 있는 옛사람으로 말미암아 발작적으로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의분이라는 이름으로 분노를 정당화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분노를 의분인 양 합리화하려고 한다면 이중삼중으로 죄를 짓는 짓입니다.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인 양 합리화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라고 말씀한 데는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분을 내더라도~하라'라고 하는 조건적 명령입니다. '분을 내어서는 안되지만 만일에 분을 내고 말았거든'하고 한발 양보한 입장에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아직은 내 속에 옛사람의 잔재가 있어서 어쩌다 분을 내게 되었더라도 어찌어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더라도' 너희는 이렇게 하라---이것입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과 인격이 두루 건강할 수 있는 비결은 분을 가라앉히는 데 있다고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신학대학 동창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일종의 친목회였습니다. 나이많은 선배님들부터 차례로 나와서 한마디씩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황(黃)모 목사님이라고 아흔이 넘으신 분도 있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아흔두 살입니다. 이분이 나와 서서 좌중의 후배들을 둘러보고 인사말을 하는데, 간단하게 딱 한마디였습니다.

"화내지 말어. 화내면 일찍 죽어요. 화를 내지 않으면 나만큼 살 수 있어." 여러분, 한 사람의 인격의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건강의 비결이 결국 어디에 있겠습니까?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분노는 내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분노하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후회하고…… 이러는 가운데서 후회성 체질이 되고 맙니다. 일마다 후회요, 일마다 자신이 없어집니다. 마침내는 자기불신에 빠지고 자기환멸에 빠지고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인격파탄이 옵니다. 분노할 때마다, 후회할 때마다 인간성은 점점 퇴보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분노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일을 점점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내가 분노할 때 상대방이 받아들이던가요? 아무리 내용이 좋은 말이라 해도 분노로 하는 말이면 의미가 없습니다. 개를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럽게 "나는 너를 미워한다"라고 말하면 개는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며 꽥 하고 소리를 지르면 개는 '깽'하고 사납게 덤벼듭니다.

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높으냐 낮으냐, 눈빛이 사나우냐 부드러우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신경질적으로, 짜증투로, 성난 음성으로 하는 부모의 말은 자식들 교육에 효과가 없습니다. 분노 속에 교육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철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분노가 일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흔히 회의라는 것을 할 때에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의제(議題)를 놓고 처음에는 점잖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누군가가 내놓은 어떤 안(案)에 대하여 찬반(贊反)이 갈라집니다. 이 때부터는 피차간에 목소리들이 높아집니다. "반대를 하다니, 네가 나를 무시했어?" "감히 내 의견에 반대를 해?" 이런 소리들이 시끄럽게 오갑니다. 이렇게 시비가 붙고 보면 나중에는 회의의 목적은 간데 없고 분노의 목소리들만 요란하게 오갑니다. 판단력이 흐려지고들 마는 것입니다. 억울해하고 분해하면 창의력이 없어집니다. 지혜가 없어집니다. 총명이 없어집니다. 한 맺힌 마음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분을 품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분노하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에서는 분을 다스리는 비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체(肢體)의식을 가지라고 합니다. 네가 분을 낼 때, 그 상대가 누구더냐? 그 사람이 곧 네가 사랑해야 될 사람이 아니더냐---사랑 안에 분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저와 나는 서로가 하나의 지체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이러한 지체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것이 본문말씀의 원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라고 말씀합니다. 도덕성의 제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이 나더라도 말로 행동으로 드러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이럴 때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슬픔은 서서히 사라져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쩌다 그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분한 생각은 더욱 커지고 슬픔은 더욱 복받칩니다. 누가 있어 울지 말라고 위로라도 할라치면 한층 더 슬퍼집니다. 이제는 울어야 할 이유를 찾아가면서 웁니다. 중얼중얼하면서 엉엉울게 됩니다. 적어도 어릴적에는 이런 현상을 누구나 몇 번씩 겪어보았을 줄 압니다. 분을 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언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분은 더욱 끓어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우리는 분이 있어도 쉽사리 행동으로 말로 드러내버리지는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침착하게 분을 가라앉히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는 요지부동, 말도 말 것이요 행동도 말 것입니다. 오직 기도하고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분에서 비롯된 것은 어떠한 언동(言動)도 다 죄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함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 합니다. 분(忿)이란 가슴 속에 오래 묻어둘수록 에스컬레이팅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돗수가 점점 올라갑니다. 자주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온갖 꼬투리가 다 잡힙니다. 쓰잘데없는 옛날일까지 다 생각납니다. 이를 갈 일들만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쳐듭니다. 당연히 분노는 더욱더 못견디게 끓어오릅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반드시 일일청산(日日淸算)해야 합니다.

그날의 분은 그날로 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도덕적인 결산은 당일로 끝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25절에서도 말씀합니다. "급히 사화(私和)하라." 만일에 사화하지 못한 채 넘긴다면 내가 죽어도 문제가 되고 저가 죽어도 이젠 사화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러 나온다 해도 그 예물 드리는 것보다 이웃과 사화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날의 일을 마감해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오늘 일은 오늘로 끝낼 것입니다. 결코 오늘 일을 내일로 끌고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함입니다. "두고보자"---안될 말입니다. "내가 이 원한을 잊을소냐"---안될 말입니다. 길게 끌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 그리고 본문은 다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분이 끓어오를 때에는 으레 어디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꼬드김이 있습니다. '잘한다, 때려부숴라,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어라.'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참으라, 경망되이 굴지 말라'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못된 길로 꼬드기는 것은 마귀의 소립니다. '참으면 등신이지, 배알도 없나?' 마귀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래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함입니다. 쉽사리 마귀의 노예가 되고 마는 사람이야말로 등신이요 배알이 빠진 사람인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수고하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라 함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함입니다. 말로가 아닙니다. 감정으로가 아닙니다. 몸으로 선을 행하라 함입니다.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모름지기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인내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용서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사랑을 하고야 분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행동적인 사랑으로입니다. 사랑해버려야 합니다. 본문은 한걸음 나아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라고 가르칩니다.

내 마음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르라, 사랑의 마음, 진리의 마음인 성령을 따르라, 내 마음을 성령으로 채우라, 그리하면 분을 쉬게 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16장 32절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잠깐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사울 왕은 제 아들을 죽일 뻔했습니다.

여러분, 분을 그칩시다. 기독교 윤리에 '분'이란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한(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선을 위하여 살 것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여 살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살 것입니다. 내 분도 그치고 남의 분도 그치게 하는 사람, 오로지 노(奴)를 쉬게 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사람---평화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일청산의 지혜(에베소서 4장 25절~32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동화 한 편의 줄거리를 소개하겠습니다. 한창 사랑에 빠진 장끼와 까투리가 서로 결혼을 할까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이모저모로 생각해보니 문젯거리도 많고해서 걱정하던 끝에 둘은 동물의 사제(司祭)격인 올빼미한테 충고를 들으러 왔습니다. 올빼미가 그들에게 묻습니다. "서로 다투어본 적이 있는가?" 장끼와 까투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다투다니요, 왜 다툽니까? 지금 우리는 열심히 사랑을 하고 있는데요. 사랑하니까 결혼하려고 하는 것이지 싸우면 왜 결혼하겠다고 하겠습니까요?" "그렇지가 않느니라." 올빼미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싸워본 적이 있어야 한다." "왜요? 왜 싸워야 한단말입니까요? 사랑하는 사이라야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요?" "잘 듣거라." 올빼미는 점잖게 충고합니다. "누구나 사랑한다는 말은 하기 쉽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은 쉽게 하지 못한다. 서로 '사랑해'하는 것만으로는 결혼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싸워도 보고, 그래서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도 아는 사이라야 결혼할 자격이 있다." 올빼미가 너무도 의젓하게 충고하므로 장끼와 까투리는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났다는 사연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마는 여기서는 유대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볼까 합니다. 유대사람들이 사람을 평가할 때에 기준으로 삼는 것에 '키스 코스 카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히브리말입니다. '키스'라는 말은 '돈주머니'를 뜻합니다. 즉 돈쓰는 법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잘 버는 것도 중요하고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쓰는가 남을 위해 쓰는가, 나를 위해 더 많이 쓰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많이 쓰는가---이런 씀씀이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의 노예, 수전노(守錢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도덕성이 없이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돈의 노예가 된다면 그처럼 비참한 인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돈이 얼마나 있고, 학벌이 얼마나 높고, 이런 것은 상관없이 격(格)이 낮은 사람이다---이렇게 평가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코스'는 '잔,' 곧 '술잔'을 의미합니다. 술마시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술도 일종의 음식입니다. 어디까지나 음식으로 점잖게 마시고 점잖게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술만 들어가면 정신이 우왕좌왕하는 사람, 곧 술의 노예가 되고 마는 사람은 틀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음식에든 언동에든 사람이란 모름지기 절제능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카스'라는 말은 분노와 관련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내력을 지닌 사람, 제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 감정을 올바로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바람직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이렇다하는 사람이라도 제 감정을 올바로 처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인격자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 하나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 기대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키스 코스 카스'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하는 유대사람들의 생각은 참으로 일리있는 생각이라 하겠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분노'는 겨우 20퍼센트 정도가 주위 환경이나 외부적 사건 때문에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다시말해서 분노의 80퍼센트 정도가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분내는 것은 환경 탓이라느니 누구 탓이라느니 상황이 그래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느니 하여 나 아닌 딴것에 원인을 돌리기 쉽습니다마는 그실은 분노의 80퍼센트가 그 책임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표현이 좌절된다거나 자존심이 위협을 당한다거나 공격을 받을 때, 이에 대하여 불합리하게 비논리적으로 반응하는 현상이 곧 분노라고 합니다. 분노가 치받을 때에 내가 화를 내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상대방에게 해(害)가 되나 이(利)가 되나, 나에게는 득(得)이 될까 손(損)이 될까---이런 것을 생각해보고 터뜨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헤아릴 줄 안다면 이미 분노는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노는 어디까지나 충동적입니다. 비합리적인 발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참고할만한 통계자료가 없으므로 부득이 외국의 통계자료를 빌려 말씀드릴까 합니다. 미국에서는 살인사건이 많이 납니다. 그런데 그 살인사건의 60퍼센트 이상이 분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돈 때문에, 무슨 이권(利權) 때문에, 무슨 피치못할 까닭이 있어서라기보다도 거의 대부분의 살인사건은 발작적인 충동에서, 충격에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같이 충동적으로 발생하는 살인사건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부자(父子)간에 언쟁을 하다가 아버지를 죽였다든지, 부부가 싸우다가 아내가 남편을 죽이게 되었다든지 하는 일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의가 충동적으로 저질러지는 사건들입니다. 이렇게 범죄를 하고나면 으레 후회가 따릅니다. '내가 죽일놈이지. 뭐가 씌었던 게지'---'순간'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본디 장사를 잘한다고 평가받던 민족은 유대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들이 침투하고부터는 이 평가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유대사람들도 한국사람들에게는 두 손을 든다고 합니다. 어찌나 일찍 일어나고 어찌나 바지런하고 억척스러운지 몹시 지독한 사람들로 소문이 났고, 그래서 한국사람들을 가리켜 'Jew in Asia'라고까지 말한답니다. '유대사람들은 너 죽고 나 살자 하는데 한국사람들은 너 죽고 나 죽자 한다'---이렇게 평가받을 정도라고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참으로 미련한 심사입니다.

슬픈 것은, 저러한 악평에 대하여 우리는 딱히 아니라고 부정할 용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 찻길에만 나가보아도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사가 난무하는 현장을 볼 수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 살기 위해 차타고 다니는 것 같지가 않아요. 살자는 것이 아니요, 너는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릴없이 너 죽고 나 죽자며 기를 쓰는 악다구니의 현장 속에 나날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 무슨 꼴입니까? 이 백성이 어이하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세계적으로 소문난 '지옥'이 되고 말았습니다. 낯뜨거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입니다. 가만히 보면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이요 점잖아보이는 사람인데도 어느 경우를 당하면 예외없이 못돼먹은 행티가 나오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의분(義憤)과 분노를 우리는 엄격하게 구별하여야 합니다. 의분은 객관적입니다. 불의와 부도덕에 대한 의(義)의 반응입니다.

합리적인 반응입니다. 깊이 생각해보고, 기도를 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한 연후에 나타나는 반응이 의분입니다. 그러나 분노는 주관적입니다. 이기심과 자기사랑이 침해받을 성싶으면 반사되는 비합리적, 비논리적 충동이 분노입니다. 둘에다 둘을 더하면 다섯이 된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런 소리 듣고 화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애당초 말이 안되니까요. 둘에다 둘을 더하면 넷이지 왜 다섯이냐 하고 대들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自信)이 만만한데 왜 분노하겠습니까? 오히려 딱하게 여길 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화가 나느냐? 불확실할 때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나 자신부터가 바보스럽거든요. 불확실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으로 발동하는 것입니다. 결국 분노란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으로 비롯되는 문제입니다. 큰일을 당해도 참을 수 있을 때가 있는가 하면 지엽말단의 사소한 일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터지는 때가 있습니다. 내 영이, 내 인격이, 내 속사람이 허(虛)하기 때문입니다.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결과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하버드대학 의학팀의 한 보고서를 보면 사람의 질병치고 강박관념과 관계없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질병이 강박관념 내지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와 두려움이, 억제된 정서(情緖)가 육신의 질병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누적된 분노, 쌓이고 쌓인 한(恨)이 병이 되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내과의사입니다. 이분이 참으로 심각한 이야기를 합니다. 환자를 진찰하고 나서 "당신은 암(癌)이오. 이대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소"하고 '사형 선고'를 해야 할 때,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다고 합디다. 이런 경우, 별도리 없이 그 당사자를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 저런 격려를 해보는데, 삼십 년 의사 생활을 해오는 가운데 겪은바 통계적으로 이렇다할 수 있는 내용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암으로 죽게 되어 있는 그 사람은 예외 없이 얼마전이건 몇 해 전이건, 몹시 심적 충격을 받은 적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극복하지 못하여 밤새워 속을 끓이거나 억울해하고 분해한 때가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외국의 한 암 전문의가 밝힌 바에도 '분노'가 암의 한 원인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암 치료의 결정적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분노를 풀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약을 쓴다 해도 암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우리는 스스로의 체험으로 이미 그 주장을 납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면 소화기(消火器)가 발작을 합니다. 혈압이 치솟습니다. 심장에 이상(異狀)이 옵니다. 협심증이 생깁니다. 당뇨환자들을 보면 끈질긴 참을성을 가지고 식이요법을 쓴 결과 당도(糖度)를 어느만큼 떨어뜨리는 데 성공하지만 어쩌다 불쑥 화를 내는 일이 있으면, 그 한순간의 분노로 인하여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당도가 분노와 함께 치솟고 마는 것입니다. 무릇 질병이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 현대의학에서 얻은 결론인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드레날린 분비가 촉진되어 암세포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어지고 만다---이것이 결론입니다. 아드레날린이란 호르몬의 일종으로, 혈압을 높이고 심장 박동수를 늘리며 혈액 중의 당량(糖量)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미국 듀크대학 의학팀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분노로 인한 사망률은 흡연이나 고혈압으로 인한 사망률보다도 2배 내지 5배나 높다고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분노의 결과는 이토록 무섭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오늘의 분문 26절 말씀입니다.

본문에 옛사람과 새사람을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이 구원을 받고 이제 새사람으로 살고자 하는데, 아직도 조금 남아 있는 옛사람으로 말미암아 발작적으로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의분이라는 이름으로 분노를 정당화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분노를 의분인 양 합리화하려고 한다면 이중삼중으로 죄를 짓는 짓입니다.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인 양 합리화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라고 말씀한 데는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분을 내더라도~하라'라고 하는 조건적 명령입니다. '분을 내어서는 안되지만 만일에 분을 내고 말았거든'하고 한발 양보한 입장에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아직은 내 속에 옛사람의 잔재가 있어서 어쩌다 분을 내게 되었더라도 어찌어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더라도' 너희는 이렇게 하라---이것입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과 인격이 두루 건강할 수 있는 비결은 분을 가라앉히는 데 있다고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신학대학 동창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일종의 친목회였습니다. 나이많은 선배님들부터 차례로 나와서 한마디씩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황(黃)모 목사님이라고 아흔이 넘으신 분도 있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아흔두 살입니다. 이분이 나와 서서 좌중의 후배들을 둘러보고 인사말을 하는데, 간단하게 딱 한마디였습니다.

"화내지 말어. 화내면 일찍 죽어요. 화를 내지 않으면 나만큼 살 수 있어." 여러분, 한 사람의 인격의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건강의 비결이 결국 어디에 있겠습니까?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분노는 내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분노하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후회하고…… 이러는 가운데서 후회성 체질이 되고 맙니다. 일마다 후회요, 일마다 자신이 없어집니다. 마침내는 자기불신에 빠지고 자기환멸에 빠지고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인격파탄이 옵니다. 분노할 때마다, 후회할 때마다 인간성은 점점 퇴보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분노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일을 점점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내가 분노할 때 상대방이 받아들이던가요? 아무리 내용이 좋은 말이라 해도 분노로 하는 말이면 의미가 없습니다. 개를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럽게 "나는 너를 미워한다"라고 말하면 개는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며 꽥 하고 소리를 지르면 개는 '깽'하고 사납게 덤벼듭니다.

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높으냐 낮으냐, 눈빛이 사나우냐 부드러우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신경질적으로, 짜증투로, 성난 음성으로 하는 부모의 말은 자식들 교육에 효과가 없습니다. 분노 속에 교육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철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분노가 일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흔히 회의라는 것을 할 때에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의제(議題)를 놓고 처음에는 점잖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누군가가 내놓은 어떤 안(案)에 대하여 찬반(贊反)이 갈라집니다. 이 때부터는 피차간에 목소리들이 높아집니다. "반대를 하다니, 네가 나를 무시했어?" "감히 내 의견에 반대를 해?" 이런 소리들이 시끄럽게 오갑니다. 이렇게 시비가 붙고 보면 나중에는 회의의 목적은 간데 없고 분노의 목소리들만 요란하게 오갑니다. 판단력이 흐려지고들 마는 것입니다. 억울해하고 분해하면 창의력이 없어집니다. 지혜가 없어집니다. 총명이 없어집니다. 한 맺힌 마음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분을 품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분노하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에서는 분을 다스리는 비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체(肢體)의식을 가지라고 합니다. 네가 분을 낼 때, 그 상대가 누구더냐? 그 사람이 곧 네가 사랑해야 될 사람이 아니더냐---사랑 안에 분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저와 나는 서로가 하나의 지체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이러한 지체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것이 본문말씀의 원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라고 말씀합니다. 도덕성의 제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이 나더라도 말로 행동으로 드러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이럴 때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슬픔은 서서히 사라져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쩌다 그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분한 생각은 더욱 커지고 슬픔은 더욱 복받칩니다. 누가 있어 울지 말라고 위로라도 할라치면 한층 더 슬퍼집니다. 이제는 울어야 할 이유를 찾아가면서 웁니다. 중얼중얼하면서 엉엉울게 됩니다. 적어도 어릴적에는 이런 현상을 누구나 몇 번씩 겪어보았을 줄 압니다. 분을 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언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분은 더욱 끓어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우리는 분이 있어도 쉽사리 행동으로 말로 드러내버리지는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침착하게 분을 가라앉히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는 요지부동, 말도 말 것이요 행동도 말 것입니다. 오직 기도하고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분에서 비롯된 것은 어떠한 언동(言動)도 다 죄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함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 합니다. 분(忿)이란 가슴 속에 오래 묻어둘수록 에스컬레이팅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돗수가 점점 올라갑니다. 자주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온갖 꼬투리가 다 잡힙니다. 쓰잘데없는 옛날일까지 다 생각납니다. 이를 갈 일들만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쳐듭니다. 당연히 분노는 더욱더 못견디게 끓어오릅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반드시 일일청산(日日淸算)해야 합니다.

그날의 분은 그날로 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도덕적인 결산은 당일로 끝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25절에서도 말씀합니다. "급히 사화(私和)하라." 만일에 사화하지 못한 채 넘긴다면 내가 죽어도 문제가 되고 저가 죽어도 이젠 사화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러 나온다 해도 그 예물 드리는 것보다 이웃과 사화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날의 일을 마감해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오늘 일은 오늘로 끝낼 것입니다. 결코 오늘 일을 내일로 끌고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함입니다. "두고보자"---안될 말입니다. "내가 이 원한을 잊을소냐"---안될 말입니다. 길게 끌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 그리고 본문은 다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분이 끓어오를 때에는 으레 어디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꼬드김이 있습니다. '잘한다, 때려부숴라,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어라.'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참으라, 경망되이 굴지 말라'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못된 길로 꼬드기는 것은 마귀의 소립니다. '참으면 등신이지, 배알도 없나?' 마귀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래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함입니다. 쉽사리 마귀의 노예가 되고 마는 사람이야말로 등신이요 배알이 빠진 사람인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수고하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라 함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함입니다. 말로가 아닙니다. 감정으로가 아닙니다. 몸으로 선을 행하라 함입니다.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모름지기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인내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용서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사랑을 하고야 분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행동적인 사랑으로입니다. 사랑해버려야 합니다. 본문은 한걸음 나아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라고 가르칩니다.

내 마음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르라, 사랑의 마음, 진리의 마음인 성령을 따르라, 내 마음을 성령으로 채우라, 그리하면 분을 쉬게 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16장 32절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잠깐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사울 왕은 제 아들을 죽일 뻔했습니다.

여러분, 분을 그칩시다. 기독교 윤리에 '분'이란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한(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선을 위하여 살 것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여 살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살 것입니다. 내 분도 그치고 남의 분도 그치게 하는 사람, 오로지 노(奴)를 쉬게 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사람---평화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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