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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행위를 가져라(계2:1~7)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치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사람의 유형을 나누는 데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만 어떤 일을 앞에 놓고 볼 때에는 대략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피자형입니다. 이들은 생각이 많고 말이 많으나 행동은 소극적인 편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의 뒤에 서서 그들을 비판하고 부정적인 측면으로 생각을 이끌고 가서 가능하면 잘 안 되는 쪽으로 일을 기피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무관심한 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서, 비유하기를 마치 남자들의 양복 소매 끝에 있는 단추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 단추는 있으나마나한 것으로 용도가 없는 것 같은데, 그 단추가 떨어지면 보기 흉합니다. 아무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입니다. 셋째는 열심히 일하는 형입니다. 이들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고, 또 그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을 만드는 일꾼형입니다. 오늘은 이 일꾼형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적극적이고 신앙적인 인격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의 첫째는 본래성으로부터 떠나기 쉬운 점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아름다운 목적이 어느 사이에 없어져서 엉뚱한 방향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시험은 상대적 비판에 귀를 기울이다가 스스로 약해지는 시험입니다. 즉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일에만 충성하던 사람이, 세상을 보고 사람들의 일을 보고 비교하는 중에 어느 사이엔가 변해 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베드로도 요한과 자기를 비교하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앞으로 받을 많은 고난과 순교까지 해야 할 그런 뜻의 예언을 하셨을 때에, 그는 요한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라고 자기와 비교해서 질문을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여기에 둘찌라도 너와(베드로와) 무슨 상관이냐"고 크게 책망하십니다. 베드로 너는 요한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그 사람의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세 번째의 시험은 변심입니다. 무슨 일이든 좀 꾸준했으면 좋겠는데 변덕이 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역자들이 제일 신경 쓰이고, 함께 일하기가 힘든 분들입니다. 때로는 불같이 일하다가 변덕이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싸늘하게 돌아서서 신앙이 있는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으로 언제 변할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네 번째 시험은 무의식중에 자기 의식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타락입니다. 원인 모를 허탈과 실망에 빠져 시들시들해지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 비유하면 권태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뚜렷하게 이유도 없이 믿음이 약해지고 열심이 식어져서 허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가 원인을 모르고 있을 뿐, 엄격한 의미의 원인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큰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입니다. 많은 핍박 속에서도 수고와 인내가 있었고 정의로운 비판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성적인 판단과 고발의 능력도 있었으며 과감한 숙청도 있었습니다. 즉 교회의 총화를 위해서 여러 가지 수고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부지런했고 순교적인 헌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크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계 2:5).---벌써 촛대가 그 마음에서 옮겨진 사람이 많습니다. 불이 꺼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심령들도 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리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랑이 없어서입니다. 즉 형식은 있는데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머리가 아프도록 신경을 쓰고, 정말 중요한 일은 어디서 잊었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중심이 없고 핵이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은 기막힌 일입니다.
언젠가 미국에 가서 우리 교포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사회하시는 분이 저와 의논도 없이 광고를 했습니다. 모처럼의 기회이니 오늘밤에 잠을 좀 줄여서라도 어려운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개인 상담도 하고 기도도 해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예고 없이 붙들리어 밤 두 시까지 교인들과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대체적으로 답답하고 가슴아픈 사연들이 많았습니다만 특별히 제 기억에 남는 어느 가정의 경우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들은 부부가 다 의사로서 소위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제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울기 시작했고 내내 울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부가 의사가 되어 돈도 많이 벌었고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의 다섯 아이들이 모두 히피족이 되었고, 이제 살만하니 남편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명예도 얻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었지만, 정작 그들 부부의 마음은 황폐해져서 몸은 교회에 나와도 서로가 두터운 벽을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질문하기를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오늘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 가진 것 같은데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몸부림치는 그 부부를 볼 때에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4). 여기서 말하는 처음은 첫째(first)라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처음이 아니고 질적인 의미에서의 처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옛날 여러분들이 처음 연애할 때 그 당시의 생각을 되살려보든지 아니면 지금 아들․딸들이 푹 빠져 있는 첫사랑을 한번 들여다보십시다. 첫사랑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첫째, 사랑만 있으면 그만이다 하는 사랑 제일주의가 첫사랑입니다.
사랑의 비중이 너무 크고 극대화해서 사랑 말고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소위 사랑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만 받을 수 있고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온 우주를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심지어는 죽어도 한이 없다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랑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첫사랑입니다. 또한 첫사랑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소화하고 해석합니다. 키가 크면 커서 좋고 작으면 작아서 좋고 공부를 많이 했으면 많이 해서 좋고 안 했으면 안 한대로 좋고, 성격이 불같으면 적극적이라서 좋고 얌전하면 침착해서 좋은 것입니다. 즉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 첫사랑입니다. 모두를 사랑으로 해석하니 좋지 않을 것이 있습니까? 성경에서도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리운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면 그가 가진 단점도 장점으로 보여 무엇이든지 아름답고 귀하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첫사랑은 전체를 다 주고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말은 헤어질 때 하는 이야기지 첫사랑은 즐겁고 무작정 좋은 것뿐입니다.
요즘 신혼 부부들을 보면 옛날과는 달라서 드러내놓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하면서 철없이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평생 오늘 같은 마음으로 살아 달라고 마음속으로 간곡히 빌어 봅니다. 처음 사랑은 희생도 영광이요 수고도 특권으로, 기쁨과 행복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기쁨이나 아픔이 하나되는 순간으로 완전한 연합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머리가 둘인 기형아가 있는데, 이 아이가 두 아이냐 한 아이냐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랍비의 대답인즉 한쪽의 머리를 때렸을 때에 그 아이가 우는데 또 한쪽 머리도 울면 한 아이이고, 울지 않으면 두 아이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대답입니다. 한쪽이 아플 때에 다른 한쪽도 아프고, 기쁠 때에도 함께 기쁘면 사랑하는 것이지만 만일 기쁨과 아픔이 연합되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첫사랑은 기쁨도 소망도 행복도 느낌도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수고도 있고 인내도 있고 열심도 있었는데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수고는 반갑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불평과 원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열심이 문제입니다. 한 가지 일 해놓고 두 가지 불평을 하면 되겠습니까? 몇십 년을 살아도 사랑 없는 수고는 한(恨)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위해서 오래 참기도 했고 수고도 많이 했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기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도 좋고 지혜도 좋고 정의감도 좋으나, 사랑 없는 비판, 사랑 없는 정의, 사랑 없는 고발은 반갑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 없는 충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 없는 개혁은 오히려 무서운 함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랑 없는 그 어떤 것, 심지어 순교까지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강한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목숨을 바치는 희생이 있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잃어버린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행위란 무슨 말입니까?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처음 나올 때에 속죄 받은 구원의 감격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에 무엇을 바라고 나왔습니까?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 예수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감격이 어디 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 처음 행위는 십자가를 통해 보는 사랑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8:32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이제 그 사랑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자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세계를 사랑의 시선으로 보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의 이 사랑을 알면 고난도 특권으로 알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행위는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고 고난받는 것을 기쁘게 그리고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수고를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였단 말입니다. 넷째, 처음 행위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행위입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 보면 최대의 관심사는 주의 재림 대망 사상(再臨待望思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곧 재림할 것이라고 믿었기에 재림하시는 주님을 사모하고 그를 영접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충만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사랑, 자기 우상, 자기 교만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없어지고 자기 우상만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심령은 황폐해져 드리려는 마음에서 받으려는 마음으로 바뀌어지고, 남이 알아주기만을 바라고,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고대해서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회개하라." 즉 원점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며칠 못 가 죽었습니다. 서로 마음을 아파하며 살아가다가 결혼 10년만에 서로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둘이서 살림을 나누다가 옷장 저 밑에서 10년 전에 죽은 아이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두 사람은 사진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10년 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즐겁게 연애하고 사랑해서 결혼하여 이 아이를 낳았고 함께 기뻐하다가 아이가 죽자 같이 슬퍼하며 서로 위로하던 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쳐다보다가 다시 시작해서 합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원점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면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이 길만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몹시도 바빴습니다.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이룬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감격을 잃었고 십자가의 사랑을 잃었습니다.
마음은 싸늘해졌고 비판의 눈만 밝아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 모습을 생각하고 내가 중생할 때에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며 헌신하던 바로 그 날, 그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사랑으로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열심히 회개하라. 처음 사랑을 가지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리하면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처음 행위를 가져라(계2:1~7)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치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사람의 유형을 나누는 데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만 어떤 일을 앞에 놓고 볼 때에는 대략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피자형입니다. 이들은 생각이 많고 말이 많으나 행동은 소극적인 편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의 뒤에 서서 그들을 비판하고 부정적인 측면으로 생각을 이끌고 가서 가능하면 잘 안 되는 쪽으로 일을 기피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무관심한 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서, 비유하기를 마치 남자들의 양복 소매 끝에 있는 단추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 단추는 있으나마나한 것으로 용도가 없는 것 같은데, 그 단추가 떨어지면 보기 흉합니다. 아무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입니다. 셋째는 열심히 일하는 형입니다. 이들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고, 또 그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을 만드는 일꾼형입니다. 오늘은 이 일꾼형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적극적이고 신앙적인 인격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의 첫째는 본래성으로부터 떠나기 쉬운 점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아름다운 목적이 어느 사이에 없어져서 엉뚱한 방향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시험은 상대적 비판에 귀를 기울이다가 스스로 약해지는 시험입니다. 즉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일에만 충성하던 사람이, 세상을 보고 사람들의 일을 보고 비교하는 중에 어느 사이엔가 변해 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베드로도 요한과 자기를 비교하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앞으로 받을 많은 고난과 순교까지 해야 할 그런 뜻의 예언을 하셨을 때에, 그는 요한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라고 자기와 비교해서 질문을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여기에 둘찌라도 너와(베드로와) 무슨 상관이냐"고 크게 책망하십니다. 베드로 너는 요한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그 사람의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세 번째의 시험은 변심입니다. 무슨 일이든 좀 꾸준했으면 좋겠는데 변덕이 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역자들이 제일 신경 쓰이고, 함께 일하기가 힘든 분들입니다. 때로는 불같이 일하다가 변덕이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싸늘하게 돌아서서 신앙이 있는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으로 언제 변할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네 번째 시험은 무의식중에 자기 의식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타락입니다. 원인 모를 허탈과 실망에 빠져 시들시들해지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 비유하면 권태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뚜렷하게 이유도 없이 믿음이 약해지고 열심이 식어져서 허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가 원인을 모르고 있을 뿐, 엄격한 의미의 원인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큰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입니다. 많은 핍박 속에서도 수고와 인내가 있었고 정의로운 비판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성적인 판단과 고발의 능력도 있었으며 과감한 숙청도 있었습니다. 즉 교회의 총화를 위해서 여러 가지 수고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부지런했고 순교적인 헌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크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계 2:5).---벌써 촛대가 그 마음에서 옮겨진 사람이 많습니다. 불이 꺼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심령들도 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리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랑이 없어서입니다. 즉 형식은 있는데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머리가 아프도록 신경을 쓰고, 정말 중요한 일은 어디서 잊었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중심이 없고 핵이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은 기막힌 일입니다.
언젠가 미국에 가서 우리 교포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사회하시는 분이 저와 의논도 없이 광고를 했습니다. 모처럼의 기회이니 오늘밤에 잠을 좀 줄여서라도 어려운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개인 상담도 하고 기도도 해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예고 없이 붙들리어 밤 두 시까지 교인들과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대체적으로 답답하고 가슴아픈 사연들이 많았습니다만 특별히 제 기억에 남는 어느 가정의 경우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들은 부부가 다 의사로서 소위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제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울기 시작했고 내내 울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부가 의사가 되어 돈도 많이 벌었고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의 다섯 아이들이 모두 히피족이 되었고, 이제 살만하니 남편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명예도 얻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었지만, 정작 그들 부부의 마음은 황폐해져서 몸은 교회에 나와도 서로가 두터운 벽을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질문하기를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오늘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 가진 것 같은데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몸부림치는 그 부부를 볼 때에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4). 여기서 말하는 처음은 첫째(first)라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처음이 아니고 질적인 의미에서의 처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옛날 여러분들이 처음 연애할 때 그 당시의 생각을 되살려보든지 아니면 지금 아들․딸들이 푹 빠져 있는 첫사랑을 한번 들여다보십시다. 첫사랑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첫째, 사랑만 있으면 그만이다 하는 사랑 제일주의가 첫사랑입니다.
사랑의 비중이 너무 크고 극대화해서 사랑 말고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소위 사랑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만 받을 수 있고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온 우주를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심지어는 죽어도 한이 없다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랑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첫사랑입니다. 또한 첫사랑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소화하고 해석합니다. 키가 크면 커서 좋고 작으면 작아서 좋고 공부를 많이 했으면 많이 해서 좋고 안 했으면 안 한대로 좋고, 성격이 불같으면 적극적이라서 좋고 얌전하면 침착해서 좋은 것입니다. 즉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 첫사랑입니다. 모두를 사랑으로 해석하니 좋지 않을 것이 있습니까? 성경에서도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리운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면 그가 가진 단점도 장점으로 보여 무엇이든지 아름답고 귀하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첫사랑은 전체를 다 주고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말은 헤어질 때 하는 이야기지 첫사랑은 즐겁고 무작정 좋은 것뿐입니다.
요즘 신혼 부부들을 보면 옛날과는 달라서 드러내놓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하면서 철없이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평생 오늘 같은 마음으로 살아 달라고 마음속으로 간곡히 빌어 봅니다. 처음 사랑은 희생도 영광이요 수고도 특권으로, 기쁨과 행복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기쁨이나 아픔이 하나되는 순간으로 완전한 연합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머리가 둘인 기형아가 있는데, 이 아이가 두 아이냐 한 아이냐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랍비의 대답인즉 한쪽의 머리를 때렸을 때에 그 아이가 우는데 또 한쪽 머리도 울면 한 아이이고, 울지 않으면 두 아이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대답입니다. 한쪽이 아플 때에 다른 한쪽도 아프고, 기쁠 때에도 함께 기쁘면 사랑하는 것이지만 만일 기쁨과 아픔이 연합되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첫사랑은 기쁨도 소망도 행복도 느낌도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수고도 있고 인내도 있고 열심도 있었는데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수고는 반갑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불평과 원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열심이 문제입니다. 한 가지 일 해놓고 두 가지 불평을 하면 되겠습니까? 몇십 년을 살아도 사랑 없는 수고는 한(恨)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위해서 오래 참기도 했고 수고도 많이 했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기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도 좋고 지혜도 좋고 정의감도 좋으나, 사랑 없는 비판, 사랑 없는 정의, 사랑 없는 고발은 반갑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 없는 충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 없는 개혁은 오히려 무서운 함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랑 없는 그 어떤 것, 심지어 순교까지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강한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목숨을 바치는 희생이 있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잃어버린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행위란 무슨 말입니까?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처음 나올 때에 속죄 받은 구원의 감격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에 무엇을 바라고 나왔습니까?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 예수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감격이 어디 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 처음 행위는 십자가를 통해 보는 사랑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8:32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이제 그 사랑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자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세계를 사랑의 시선으로 보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의 이 사랑을 알면 고난도 특권으로 알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행위는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고 고난받는 것을 기쁘게 그리고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수고를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였단 말입니다. 넷째, 처음 행위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행위입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 보면 최대의 관심사는 주의 재림 대망 사상(再臨待望思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곧 재림할 것이라고 믿었기에 재림하시는 주님을 사모하고 그를 영접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충만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사랑, 자기 우상, 자기 교만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없어지고 자기 우상만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심령은 황폐해져 드리려는 마음에서 받으려는 마음으로 바뀌어지고, 남이 알아주기만을 바라고,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고대해서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회개하라." 즉 원점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며칠 못 가 죽었습니다. 서로 마음을 아파하며 살아가다가 결혼 10년만에 서로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둘이서 살림을 나누다가 옷장 저 밑에서 10년 전에 죽은 아이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두 사람은 사진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10년 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즐겁게 연애하고 사랑해서 결혼하여 이 아이를 낳았고 함께 기뻐하다가 아이가 죽자 같이 슬퍼하며 서로 위로하던 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쳐다보다가 다시 시작해서 합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원점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면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이 길만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몹시도 바빴습니다.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이룬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감격을 잃었고 십자가의 사랑을 잃었습니다.
마음은 싸늘해졌고 비판의 눈만 밝아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 모습을 생각하고 내가 중생할 때에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며 헌신하던 바로 그 날, 그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사랑으로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열심히 회개하라. 처음 사랑을 가지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리하면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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