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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경으로 행케 하소서(시119:33~40)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인생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그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얻었느냐, 무엇이 될 것이냐, 얼마나 성장했느냐, 그리고 얼마나 잃었느냐 하는 문제 자체보다도 그 문제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공부하는 학생이면, 그가 일류 학교에 갔느냐 삼류 학교에 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학교 어느 학과를 공부하더라도 공부하는 자세가 훌륭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뒤늦게 인생을 뒤돌아볼 때, 양심에 가장 괴로운 것이 있다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어떤 자세로 살아 왔느냐고 하는 그 문제에 가책을 느끼게 되고 여기에 심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몸가짐과 마음 자세와 그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기본 자세가 바로 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바로 될 수가 없습니다. 결혼하는 신랑 신부도 그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혹시라도 남들이 모두 하는 결혼이니 나도 해 보자든지, 혼자 살기가 불편하니 결혼이나 하자는 자세이면 되겠습니까?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이냐 과장이냐 수위이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느 직위이든, 자기가 하는 일에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과학 하는 사람에게도 과학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학이 이룩한 기계 문명 속에 살아갑니다만 과거의 미신적인 문화권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과학과 미신의 혼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직도 길가에서 트럭을 세워 놓고 그 앞에 제삿상을 차려서 올해에도 무사하게 해 달라고 비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이 만들어 놓은 기계 앞에서 과학 하는 자세는 어디 가고 요행을 바라는 사행적인 자세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깊이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철학 자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인에게도 신앙인의 자세가 있습니다. 예배할 때에는 경건한 예배의 자세가 있고 봉사할 때에는 성실히 봉사하는 봉사의 자세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여러분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말씀을 듣고 감격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모습으로 예배를 드립니다만 더러는 남들이 감격할 때에 감격하지 못하고 맹숭맹숭한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팔짱을 끼고 앉거나 비스듬히 걸터앉아서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자세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옆에 앉은 남편을 쿡 찌르면서 잘 들어 두라는 시늉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든지 말씀은 내게 주시는 은혜로 받아야지 왜 옆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것입니까? 예배 시간은 말씀을 통해 나와 하나님이 만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예배가 예배되어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선 교회에 나오는 마음부터 시작해서 이 자리에 앉기까지 그 자세가 분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인의 기본 자세가 흐트러진 사람은 교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 실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공에는 반드시 그 성공적 동기가 있습니다. 그 성공적 동기에 가장 우선적인 것이 바로 성공적 자세입니다. 어느 직장이든 어느 시간이든 자세가 분명한 사람에게는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신앙적으로 가장 성공한 기본 자세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자세는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기도 속에서 충분히 엿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자세를 살펴보기 전에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범적인 신앙인을 먼저 생각해 보고 지나가겠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라는 사람으로 로마 군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으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베드로를 모셔오게 됩니다. 온 식구와 친척들을 다 모아놓고 경건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나타나니 그 앞에 가서 꿇어 엎드려 경배를 했습니다. 물론 그의 경배는 베드로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이지만 베드로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너무 송구스러워서 그를 일으키며, 나도 사람이니 이러지 말라고 황송해했습니다. 고넬료의 자세에 가식이 있고 위선이 있거나 다소라도 흐트러짐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겠습니까? 그의 태도가 경건했고 진실했기에 베드로는 규례를 어기고 이방인인 그의 집에 들어가 먹고 마시며 세례까지 베풀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뒤늦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고넬료의 자세는 베드로로 하여금 규례까지 어기면서 세례를 베풀도록 감동을 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넬료의 바로 이 말씀 듣는 자세야말로 큰 축복이 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가진 바른 자세를 그의 기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배우는 자세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시 119:33). 율례의 도란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윤리적 명령으로서 이것을 가르쳐 주십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난날 자신의 실패를 저지른 것이 몰랐기 때문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 사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도 꼭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일이 얼마나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하신 말씀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몰라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아무리 안다고 떠들어 보아도 그렇게 잘못된 일인 줄 몰랐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간구하기를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다 안다고 착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점점 더 우매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 잘 듣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만이 정치․경제․사회․스포츠 등 모두를 잘 안다고 떠들면 인간 관계는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본 자세는 배우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겸손한 생각으로 마음 문을 열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배우는 마음은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일생을 통해서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로 말을 하는 편이었습니까? 이제는 듣는 자세로 바꾸어야 합니다. 항상 먼저 말하는 편이었습니까? 이제는 상대방의 말을 다 듣고 마지막에 가서 말하는 자세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쉽게 안다고 말하지 말고, 쉽게 비판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마음대로 평가하는 심판주 노릇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언제나 배우는 자세로, 인내하는 자세로 사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입니다. 남의 말을 다 듣기 에 대답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끝까지 다 듣고도 잘 모르는데, 미리 짐작하고 서둘러서 저지르는 실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을 바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 번 듣고 또 생각하고 또 듣고 듣는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를 몸에 익혀야 하겠습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부탁을 합니다. 지금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하지만, 사랑은 일생을 통해서 배워야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사랑이란 20대 사랑이 다르고 30대 사랑이 다르며 60대 사랑이 다르지 않습니까? 사랑의 신비는 무궁무진한 것이어서 두고두고 배우며 깨닫게 되는 것이니 사랑을 안다고 쉽게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남자나 한 여자를 알기가 그리 쉽습니까? 수십 년간 함께 살아도 잘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사랑을 배우는 자세로 임하라고 주례자로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찬미하며 떡을 떼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늘 배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심코 넘기기 쉬운 배웠다는 말에 좀더 신경을 쓰고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배우는 자와 가르친 자가 누구였습니까? 배우는 자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고 가르치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갈릴리 어부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 아닌 무식한 사람들인데,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그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오늘날은 배우겠다는 사람보다 가르치겠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서 걱정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일생동안 계속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깨달음이 없이는 지식이 제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생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생각하여 이치를 따져가며 공부하는 것은 지식이며, 몸으로 부딪쳐서 배우는 것은 깨달음입니다. 때론 뭔가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건으로 부딪쳐 보면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이 순간은 역설적입니다. 이치와는 상관없이 내가 직접 부딪쳐 보고 경험한 순간에야 알게 되니, 깨달음이란 자기 중심적인 아집이 깨어지고서야 얻어지는 새로운 지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따져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 그 사건 자체를 받아들임으로 얻어지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주세요"라고 간구하는 것은 내게 시련도 주시고 역경도 주시고 질병도 주셔서 어떤 사건이든간에 부딪쳐서 나로 하여금 어리석고 복잡한 생각은 다 지워 버리고 순수한 진리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해 주십사는 기도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셋째, 헌신하는 자세입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시 119:35). 첩경이란 영어로 하이웨이(Highway)로서, 고속도로라는 말입니다. 옛날에 비하면 오늘날은 정말 길이 좋아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는 우리 마음의 길이 좋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첩경이 있어서 말씀을 듣자마자 거침없이 그대로 들어가면 좋겠는데, 장애물이 많아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령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이미 이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 주의 말씀이 내게 직행해서 바로 들어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첩경으로 행하게 하옵소서."---이 말을 좀더 깊이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다시 배우고 경험하고 실패하고 깨달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결심해 보고 맹세해 보았자 헛일임을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셔서 행하도록 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나의 지식과 의지와 마음은 믿을 것이 못됨을 인정하오니 하나님께서 때려서라도 인도하시고 꺾어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하시어, 주의 길 외에는 가지 말도록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하나님께 헌납하는 강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은 존 뉴턴이라는 목사님이 지으신 노래입니다. 그는 원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백인들에게 파는 노예 상인으로, 못된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중생하고 나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맙고 놀라워"라는 귀한 가사를 만들어 부흥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함께 은혜를 나누던 한 성도가 뉴턴 목사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만일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뉴턴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택해 주시기를 요구하겠습니다"라고 놀라운 답변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도 아시고 나의 약함도 아시며 나의 미래까지도 아시니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기를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절대적 필요성을 하나님께 반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 얼마만한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주어진 자유를 그대로 하나님께 반납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것으로 은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 생애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의 의지로 살아가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실패하고 이지러진 모습으로 살아왔습니까? 이제 그만 중단하고 새로운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즉 겸손히 배우는 자세, 공손하게 순종하는 자세, 그리고 나의 의지․지성․감정을 다 하나님께 헌납하고 전적으로 주의 뜻에 헌신하는 자세로 새롭게 출발해 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보장해 주시고 새로운 은혜, 새로운 역사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시119:33~40)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인생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그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얻었느냐, 무엇이 될 것이냐, 얼마나 성장했느냐, 그리고 얼마나 잃었느냐 하는 문제 자체보다도 그 문제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공부하는 학생이면, 그가 일류 학교에 갔느냐 삼류 학교에 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학교 어느 학과를 공부하더라도 공부하는 자세가 훌륭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뒤늦게 인생을 뒤돌아볼 때, 양심에 가장 괴로운 것이 있다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어떤 자세로 살아 왔느냐고 하는 그 문제에 가책을 느끼게 되고 여기에 심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몸가짐과 마음 자세와 그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기본 자세가 바로 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바로 될 수가 없습니다. 결혼하는 신랑 신부도 그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혹시라도 남들이 모두 하는 결혼이니 나도 해 보자든지, 혼자 살기가 불편하니 결혼이나 하자는 자세이면 되겠습니까?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이냐 과장이냐 수위이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느 직위이든, 자기가 하는 일에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과학 하는 사람에게도 과학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학이 이룩한 기계 문명 속에 살아갑니다만 과거의 미신적인 문화권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과학과 미신의 혼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직도 길가에서 트럭을 세워 놓고 그 앞에 제삿상을 차려서 올해에도 무사하게 해 달라고 비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이 만들어 놓은 기계 앞에서 과학 하는 자세는 어디 가고 요행을 바라는 사행적인 자세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깊이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철학 자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인에게도 신앙인의 자세가 있습니다. 예배할 때에는 경건한 예배의 자세가 있고 봉사할 때에는 성실히 봉사하는 봉사의 자세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여러분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말씀을 듣고 감격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모습으로 예배를 드립니다만 더러는 남들이 감격할 때에 감격하지 못하고 맹숭맹숭한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팔짱을 끼고 앉거나 비스듬히 걸터앉아서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자세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옆에 앉은 남편을 쿡 찌르면서 잘 들어 두라는 시늉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든지 말씀은 내게 주시는 은혜로 받아야지 왜 옆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것입니까? 예배 시간은 말씀을 통해 나와 하나님이 만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예배가 예배되어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선 교회에 나오는 마음부터 시작해서 이 자리에 앉기까지 그 자세가 분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인의 기본 자세가 흐트러진 사람은 교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 실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공에는 반드시 그 성공적 동기가 있습니다. 그 성공적 동기에 가장 우선적인 것이 바로 성공적 자세입니다. 어느 직장이든 어느 시간이든 자세가 분명한 사람에게는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신앙적으로 가장 성공한 기본 자세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자세는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기도 속에서 충분히 엿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자세를 살펴보기 전에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범적인 신앙인을 먼저 생각해 보고 지나가겠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라는 사람으로 로마 군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으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베드로를 모셔오게 됩니다. 온 식구와 친척들을 다 모아놓고 경건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나타나니 그 앞에 가서 꿇어 엎드려 경배를 했습니다. 물론 그의 경배는 베드로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이지만 베드로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너무 송구스러워서 그를 일으키며, 나도 사람이니 이러지 말라고 황송해했습니다. 고넬료의 자세에 가식이 있고 위선이 있거나 다소라도 흐트러짐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겠습니까? 그의 태도가 경건했고 진실했기에 베드로는 규례를 어기고 이방인인 그의 집에 들어가 먹고 마시며 세례까지 베풀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뒤늦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고넬료의 자세는 베드로로 하여금 규례까지 어기면서 세례를 베풀도록 감동을 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넬료의 바로 이 말씀 듣는 자세야말로 큰 축복이 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가진 바른 자세를 그의 기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배우는 자세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시 119:33). 율례의 도란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윤리적 명령으로서 이것을 가르쳐 주십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난날 자신의 실패를 저지른 것이 몰랐기 때문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 사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도 꼭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일이 얼마나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하신 말씀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몰라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아무리 안다고 떠들어 보아도 그렇게 잘못된 일인 줄 몰랐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간구하기를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다 안다고 착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점점 더 우매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 잘 듣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만이 정치․경제․사회․스포츠 등 모두를 잘 안다고 떠들면 인간 관계는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본 자세는 배우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겸손한 생각으로 마음 문을 열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배우는 마음은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일생을 통해서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로 말을 하는 편이었습니까? 이제는 듣는 자세로 바꾸어야 합니다. 항상 먼저 말하는 편이었습니까? 이제는 상대방의 말을 다 듣고 마지막에 가서 말하는 자세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쉽게 안다고 말하지 말고, 쉽게 비판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마음대로 평가하는 심판주 노릇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언제나 배우는 자세로, 인내하는 자세로 사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입니다. 남의 말을 다 듣기 에 대답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끝까지 다 듣고도 잘 모르는데, 미리 짐작하고 서둘러서 저지르는 실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을 바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 번 듣고 또 생각하고 또 듣고 듣는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를 몸에 익혀야 하겠습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부탁을 합니다. 지금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하지만, 사랑은 일생을 통해서 배워야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사랑이란 20대 사랑이 다르고 30대 사랑이 다르며 60대 사랑이 다르지 않습니까? 사랑의 신비는 무궁무진한 것이어서 두고두고 배우며 깨닫게 되는 것이니 사랑을 안다고 쉽게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남자나 한 여자를 알기가 그리 쉽습니까? 수십 년간 함께 살아도 잘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사랑을 배우는 자세로 임하라고 주례자로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찬미하며 떡을 떼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늘 배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심코 넘기기 쉬운 배웠다는 말에 좀더 신경을 쓰고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배우는 자와 가르친 자가 누구였습니까? 배우는 자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고 가르치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갈릴리 어부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 아닌 무식한 사람들인데,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그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오늘날은 배우겠다는 사람보다 가르치겠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서 걱정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일생동안 계속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깨달음이 없이는 지식이 제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생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생각하여 이치를 따져가며 공부하는 것은 지식이며, 몸으로 부딪쳐서 배우는 것은 깨달음입니다. 때론 뭔가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건으로 부딪쳐 보면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이 순간은 역설적입니다. 이치와는 상관없이 내가 직접 부딪쳐 보고 경험한 순간에야 알게 되니, 깨달음이란 자기 중심적인 아집이 깨어지고서야 얻어지는 새로운 지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따져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 그 사건 자체를 받아들임으로 얻어지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주세요"라고 간구하는 것은 내게 시련도 주시고 역경도 주시고 질병도 주셔서 어떤 사건이든간에 부딪쳐서 나로 하여금 어리석고 복잡한 생각은 다 지워 버리고 순수한 진리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해 주십사는 기도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셋째, 헌신하는 자세입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시 119:35). 첩경이란 영어로 하이웨이(Highway)로서, 고속도로라는 말입니다. 옛날에 비하면 오늘날은 정말 길이 좋아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는 우리 마음의 길이 좋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첩경이 있어서 말씀을 듣자마자 거침없이 그대로 들어가면 좋겠는데, 장애물이 많아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령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이미 이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 주의 말씀이 내게 직행해서 바로 들어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첩경으로 행하게 하옵소서."---이 말을 좀더 깊이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다시 배우고 경험하고 실패하고 깨달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결심해 보고 맹세해 보았자 헛일임을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셔서 행하도록 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나의 지식과 의지와 마음은 믿을 것이 못됨을 인정하오니 하나님께서 때려서라도 인도하시고 꺾어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하시어, 주의 길 외에는 가지 말도록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하나님께 헌납하는 강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은 존 뉴턴이라는 목사님이 지으신 노래입니다. 그는 원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백인들에게 파는 노예 상인으로, 못된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중생하고 나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맙고 놀라워"라는 귀한 가사를 만들어 부흥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함께 은혜를 나누던 한 성도가 뉴턴 목사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만일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뉴턴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택해 주시기를 요구하겠습니다"라고 놀라운 답변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도 아시고 나의 약함도 아시며 나의 미래까지도 아시니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기를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절대적 필요성을 하나님께 반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 얼마만한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주어진 자유를 그대로 하나님께 반납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것으로 은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 생애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의 의지로 살아가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실패하고 이지러진 모습으로 살아왔습니까? 이제 그만 중단하고 새로운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즉 겸손히 배우는 자세, 공손하게 순종하는 자세, 그리고 나의 의지․지성․감정을 다 하나님께 헌납하고 전적으로 주의 뜻에 헌신하는 자세로 새롭게 출발해 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보장해 주시고 새로운 은혜, 새로운 역사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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