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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받은 자의 윤리(마10:16~23)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세대는 악해지고 사람들의 성품은 날이 갈수록 난폭해져 귀에 들리는 소식은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고 용기를 잃게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드뭅니다. 어떻게 하면 담력이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강해지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나 지식 등에 의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강합니다. 우리는 공부를 많이 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각이 많고 근심도 많아서 더 약해지는 것을 봅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지식에 의해 강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약해지기가 쉽습니다. 또한 물질이 많으면 강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돈 많은 사람은 약한 자입니다.
돈이 많으면 많은 만큼 걱정거리가 많고 그것을 간수하기 위해 심지어는 비굴해지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어떤 면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더 강한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지식이나 소유에 의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여건이나 환경에 의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편안해지면 강해질 줄로 생각합니다. 또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잘 해결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월남전쟁 때, 월맹의 포로 되었던 미군들이 포로교환으로 돌아와 기자 회견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군들은 포로 생활 당시를 회고하면서 배가 너무 고파 쥐까지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기자들이 묻자 한 병사는, 너무 학대가 심하니까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악착같은 마음이 들어 공산당을 미워하고 증오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악한 조건이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에 의해서 약해졌다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셋째, 자기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아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겸손하고 온유하고 진실한 사람이 강하다는 말입니다. 허세나 만용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가장 약하다는 것을 알고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겸손할 때, 그 때가 가장 강할 때입니다. 진실처럼 무서운 힘은 없습니다.
넷째, 죽음보다 더 큰 사명을 아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보다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더 크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보통 사람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비굴해지고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단정해 버립니다만 죽음은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죽음으로 성공이 시작되고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컨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이 이치를 알아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도 개의치 않는, 즉 죽음보다도 더 큰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죽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그런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이 본문에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권능을 주시며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파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르시고(calling) 권능을 주시며(Giving), 그리고 보내시는(Sending) 일은 참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자들은 지금 바로 부름을 받은 애송이요 철없는 갈릴리 어부들이기에 지식이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재산이나 정치적 권력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열두 사람을 부르시어 저들을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정치적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세속적인 꿈을 버리지 못한 보잘것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시며 당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리는 동물 중에서 포악한 동물로 떼를 지어 다니는데, 그 속에 나약한 양을 보내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서로 상대가 되지 않으면 처음부터 보내지 말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가령 우리들에게 귀한 자녀가 있습니다. 이 자녀들이 어린 양과 같고 세상이 늑대나 이리 같으면 여러분은 자녀들을 그 이리 속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양 같은 너희들을 이리들 속인 세상에 보낸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너희는 양이다"는 말씀은 양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하게 너희는 양이어야 한다는 명령적인 당부의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양은 순진하고 단순하며, 그리고 절대 복종하는 순종 체질입니다. 양은 반항을 모릅니다. 모든 동물들이 반항을 하지만 양은 그대로 순종하기 때문에 목을 매거나 코를 뚫거나 재갈을 물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온순한 동물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습니다. 사나운 이빨이나 뿔을 가진 동물이 있는가 하면, 또 빨리 달아날 수 있는 주력을 가진 동물도 있고, 또 무서운 발톱이 있어 자기를 방어하며, 말과 노새 같은 동물은 뒷발질을 잘 하는 재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이라는 동물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그저 순하고 착하기만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저희 학교에서 열댓 마리의 양을 키웠습니다. 양을 먹이는 당번이 되면 먹이를 준답시고 가서는 양을 타고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그저 순종하기만 하는 착한 양이었습니다. 이런 양 같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그 뜻은 너희는 끝까지 양이니 양으로 살다가 죽으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리를 만났다고 해서 또는 사자를 만났다고 해서 이리나 사자 흉내 내지 말고 너희는 끝까지 양이니 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참 좋았던 사람도 나쁜 사람들과 대항하다 보면 오히려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처음에는 나쁜 사람의 버릇을 고쳐 주겠다고 시작했는데, 자신이 더 나빠진다는 말입니다. 죄악된 세상, 부조리한 사회를 바로잡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자기 자신이 더 부조리한 인간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이 이리와 같을 지라도 너희는 끝까지 양으로 살다가 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쁘니까 너희도 나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물건 도둑 맞았다고 나도 남의 물건 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내가 남에게서 미움을 받았다고 내가 그를 미워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끝까지 순진하고 순종하는 양으로 온유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양에 대한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은 제물이기에 구약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양도 제물의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이 제물은 속죄적인 의미로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의롭게 하기 위해 대신 죄인 되어야 하는 그러한 양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바쳐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명도 써야 하고 억울함도 겪어야 하며 끝까지 인내해서 이 고난을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양으로서 이리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이길 수 있는 강함의 비결을 몇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어느 집에 가든지 복을 빌고, 아무 집이나 일단 유하면 그 집을 옮기지도 말고, 자신을 위해서는 전대에 은이나 금을 가지지 말며,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받겠다는 마음을 비워버리고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약해지는 것입니까? 받으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주는 자가 강한 사람이며 이기는 자입니다. 그런데 주겠다고 시작했다가 이자까지 붙여서 받겠다니,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주기로 했으면 주어 버리고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사랑하기로 했으면 사랑해 버릴 일이지 왜 사랑 받지 못했다고 아우성입니까? 자식을 키우면서 사랑한다고 했으면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야지 왜 효도를 생각하느냐 말입니다. 효도하고 안 하고는 자식 마음이니, 부모는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끝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다가 어느 사이에 변질되어 사랑 받겠다는 마음이 앞서고 있으니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강합니다. 욕심 없이 깨끗하게 주어 버리고 복을 빌고 사랑할 뿐입니다. 여기에 양의 강함이 있습니다.
둘째, 지혜로우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지혜로운 것에 대해서는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지만 뱀으로부터, 즉 악으로부터도 배울 것은 배우라는 뜻입니다. 뱀은 예리한 눈을 가졌고 신중하며 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극히 조심해서 행동을 취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뱀의 특징은 악조건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래도 발이 있든지 날개가 있든지 뿔, 이빨 등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데 뱀은 막대기처럼 아무 것도 없이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그러면서도 험한 산이나 계곡이나 강이나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스며들어갑니다. 못 가는 곳이 없을 정도로 뱀은 잘 다닙니다.
여러분, 뱀을 보고도 환경을 탓하며 못한다고 불평하겠습니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뱀같이 지혜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즉 어디든지 어떤 역경에서든지 할 일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순결 하라는 것입니다.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비둘기'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온 지면이 물로 뒤덮여 노아 방주가 떠다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물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어 육지가 드러났다 해서 노아가 비둘기와 까마귀를 날려보냅니다. 비둘기는 아무리 다녀도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해 방주로 다시 돌아왔는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 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성경에는 없습니다만 짐작하기로는 둥둥 떠다니는 시체를 뜯어먹느라고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까마귀는 발붙일 곳을 찾았지만 깨끗한 비둘기는 그러지를 못하고 방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오늘도 비둘기와 같이 깨끗한 사람은 이 세상에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리떼 속에 살아도 순결해야 하고 죄악 세상에 살아도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둘기입니다. 이 어려운 세대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명령하고 계십니다. "깨끗하라. 그리고 사명을 다하라." 우리에게 주신 이 사명은 모든 것보다 우선 순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불확실한 세대에 삽니다. 핍박이 있습니다. 무방비한 상태로 이 어려운 세대를 헤쳐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의 사명은 대단히 크고 중요한 것이기에 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천사장 가브리엘이 예수님을 만나 여쭈어 보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예수께서 하신 일이 너무 제한된 지역에서 되어진 일이라 만백성을 구원하기에는 미흡한 것 같은데,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하셨으니, 정말 다 이루어진 것이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다 이루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도 가브리엘은 걱정스러워 "천사들을 보내어서 만방에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면 어떨까요?"라고 물었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다 부탁해 놓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통치 않으니 다른 길이 없겠느냐고 다시 재촉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 있다. 나는 그들을 믿고 있으니 다른 계획은 없다"고 잘라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의 구원의 역사는 그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믿고 부탁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들을 믿노라"하시며 보내시고 당부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성도 한 분이 저를 찾아와서 결혼한 지 15년이 되었는데 이제 더는 살수가 없어 이혼을 하겠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믿지 않는 집에 시집을 와서 전도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한 해 한 해를 참아가며 살았는데, 갈수록 남편의 주정은 심해지고 제사에다 가정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겹쳐서 이제는 견딜 수가 없으니 이혼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저는 그분에게 지금까지 참으셨으니 이왕 산 김에 앞으로 한 달만 더 그 집에서 살 수 없겠느냐고 제의를 했고, 그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덧붙여 부탁하기를 이번 한 달 동안은 의미를 좀 달리해서 살자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집 아내나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파송된 선교사의 사명감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15년간 함께 살던 식구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 구원을 얻게 해놓고 물러서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을 것이니 마음을 달리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달은 식구들로부터 사랑 받을 생각은 아예 말고,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해도 저 할머니 구원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남편이 주정을 해도 한 달만은 참고 견디어서 구원을 받게 해 보자고 제의했던 것입니다. 정말 그 분은 오직 구원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것을 식구들한테 양보하고 참았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못 가서 남편이 묻더라는 것입니다. 요즘 왜 이렇게 딴 사람이 되었느냐고. 그 부인은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으면서 이제는 당신 아내가 아니라 이 집에 파송된 선교사된 사명으로 지내니 그런 줄 알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남편은 부인과 함께 한 달도 못 되어 교회를 나와 지금은 좋은 가정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대망의 새해라고 잔뜩 희망을 겁니다만 별 볼일 없이 또 한 해가 지나갑니다.
환경과 나와는 사실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내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사랑 받으려고 구걸하지 맙시다. 눈치볼 필요도 없습니다. 부유해도 그렇고 가난해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이니 생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저 사람에게 복음 전하기 위하여 오늘 내가 존재한다는 엄청난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명을 바로 느끼게 되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면 큰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양의 순종에 뱀의 지혜를 더하고 뱀의 지혜에 비둘기의 순결을 더하면 강한 역사가 발동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향해 보냄 받은 사명인임을 자각하여 그 의무를 다할 때 주님은 우리의 운명을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입시다. 승리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보냄받은 자의 윤리(마10:16~23)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세대는 악해지고 사람들의 성품은 날이 갈수록 난폭해져 귀에 들리는 소식은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고 용기를 잃게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드뭅니다. 어떻게 하면 담력이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강해지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나 지식 등에 의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강합니다. 우리는 공부를 많이 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각이 많고 근심도 많아서 더 약해지는 것을 봅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지식에 의해 강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약해지기가 쉽습니다. 또한 물질이 많으면 강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돈 많은 사람은 약한 자입니다.
돈이 많으면 많은 만큼 걱정거리가 많고 그것을 간수하기 위해 심지어는 비굴해지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어떤 면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더 강한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지식이나 소유에 의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여건이나 환경에 의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편안해지면 강해질 줄로 생각합니다. 또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잘 해결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월남전쟁 때, 월맹의 포로 되었던 미군들이 포로교환으로 돌아와 기자 회견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군들은 포로 생활 당시를 회고하면서 배가 너무 고파 쥐까지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기자들이 묻자 한 병사는, 너무 학대가 심하니까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악착같은 마음이 들어 공산당을 미워하고 증오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악한 조건이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에 의해서 약해졌다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셋째, 자기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아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겸손하고 온유하고 진실한 사람이 강하다는 말입니다. 허세나 만용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가장 약하다는 것을 알고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겸손할 때, 그 때가 가장 강할 때입니다. 진실처럼 무서운 힘은 없습니다.
넷째, 죽음보다 더 큰 사명을 아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보다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더 크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보통 사람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비굴해지고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단정해 버립니다만 죽음은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죽음으로 성공이 시작되고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컨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이 이치를 알아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도 개의치 않는, 즉 죽음보다도 더 큰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죽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그런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이 본문에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권능을 주시며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파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르시고(calling) 권능을 주시며(Giving), 그리고 보내시는(Sending) 일은 참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자들은 지금 바로 부름을 받은 애송이요 철없는 갈릴리 어부들이기에 지식이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재산이나 정치적 권력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열두 사람을 부르시어 저들을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정치적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세속적인 꿈을 버리지 못한 보잘것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시며 당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리는 동물 중에서 포악한 동물로 떼를 지어 다니는데, 그 속에 나약한 양을 보내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서로 상대가 되지 않으면 처음부터 보내지 말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가령 우리들에게 귀한 자녀가 있습니다. 이 자녀들이 어린 양과 같고 세상이 늑대나 이리 같으면 여러분은 자녀들을 그 이리 속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양 같은 너희들을 이리들 속인 세상에 보낸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너희는 양이다"는 말씀은 양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하게 너희는 양이어야 한다는 명령적인 당부의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양은 순진하고 단순하며, 그리고 절대 복종하는 순종 체질입니다. 양은 반항을 모릅니다. 모든 동물들이 반항을 하지만 양은 그대로 순종하기 때문에 목을 매거나 코를 뚫거나 재갈을 물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온순한 동물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습니다. 사나운 이빨이나 뿔을 가진 동물이 있는가 하면, 또 빨리 달아날 수 있는 주력을 가진 동물도 있고, 또 무서운 발톱이 있어 자기를 방어하며, 말과 노새 같은 동물은 뒷발질을 잘 하는 재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이라는 동물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그저 순하고 착하기만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저희 학교에서 열댓 마리의 양을 키웠습니다. 양을 먹이는 당번이 되면 먹이를 준답시고 가서는 양을 타고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그저 순종하기만 하는 착한 양이었습니다. 이런 양 같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그 뜻은 너희는 끝까지 양이니 양으로 살다가 죽으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리를 만났다고 해서 또는 사자를 만났다고 해서 이리나 사자 흉내 내지 말고 너희는 끝까지 양이니 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참 좋았던 사람도 나쁜 사람들과 대항하다 보면 오히려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처음에는 나쁜 사람의 버릇을 고쳐 주겠다고 시작했는데, 자신이 더 나빠진다는 말입니다. 죄악된 세상, 부조리한 사회를 바로잡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자기 자신이 더 부조리한 인간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이 이리와 같을 지라도 너희는 끝까지 양으로 살다가 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쁘니까 너희도 나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물건 도둑 맞았다고 나도 남의 물건 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내가 남에게서 미움을 받았다고 내가 그를 미워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끝까지 순진하고 순종하는 양으로 온유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양에 대한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은 제물이기에 구약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양도 제물의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이 제물은 속죄적인 의미로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의롭게 하기 위해 대신 죄인 되어야 하는 그러한 양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바쳐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명도 써야 하고 억울함도 겪어야 하며 끝까지 인내해서 이 고난을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양으로서 이리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이길 수 있는 강함의 비결을 몇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어느 집에 가든지 복을 빌고, 아무 집이나 일단 유하면 그 집을 옮기지도 말고, 자신을 위해서는 전대에 은이나 금을 가지지 말며,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받겠다는 마음을 비워버리고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약해지는 것입니까? 받으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주는 자가 강한 사람이며 이기는 자입니다. 그런데 주겠다고 시작했다가 이자까지 붙여서 받겠다니,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주기로 했으면 주어 버리고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사랑하기로 했으면 사랑해 버릴 일이지 왜 사랑 받지 못했다고 아우성입니까? 자식을 키우면서 사랑한다고 했으면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야지 왜 효도를 생각하느냐 말입니다. 효도하고 안 하고는 자식 마음이니, 부모는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끝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다가 어느 사이에 변질되어 사랑 받겠다는 마음이 앞서고 있으니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강합니다. 욕심 없이 깨끗하게 주어 버리고 복을 빌고 사랑할 뿐입니다. 여기에 양의 강함이 있습니다.
둘째, 지혜로우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지혜로운 것에 대해서는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지만 뱀으로부터, 즉 악으로부터도 배울 것은 배우라는 뜻입니다. 뱀은 예리한 눈을 가졌고 신중하며 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극히 조심해서 행동을 취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뱀의 특징은 악조건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래도 발이 있든지 날개가 있든지 뿔, 이빨 등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데 뱀은 막대기처럼 아무 것도 없이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그러면서도 험한 산이나 계곡이나 강이나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스며들어갑니다. 못 가는 곳이 없을 정도로 뱀은 잘 다닙니다.
여러분, 뱀을 보고도 환경을 탓하며 못한다고 불평하겠습니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뱀같이 지혜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즉 어디든지 어떤 역경에서든지 할 일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순결 하라는 것입니다.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비둘기'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온 지면이 물로 뒤덮여 노아 방주가 떠다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물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어 육지가 드러났다 해서 노아가 비둘기와 까마귀를 날려보냅니다. 비둘기는 아무리 다녀도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해 방주로 다시 돌아왔는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 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성경에는 없습니다만 짐작하기로는 둥둥 떠다니는 시체를 뜯어먹느라고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까마귀는 발붙일 곳을 찾았지만 깨끗한 비둘기는 그러지를 못하고 방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오늘도 비둘기와 같이 깨끗한 사람은 이 세상에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리떼 속에 살아도 순결해야 하고 죄악 세상에 살아도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둘기입니다. 이 어려운 세대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명령하고 계십니다. "깨끗하라. 그리고 사명을 다하라." 우리에게 주신 이 사명은 모든 것보다 우선 순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불확실한 세대에 삽니다. 핍박이 있습니다. 무방비한 상태로 이 어려운 세대를 헤쳐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의 사명은 대단히 크고 중요한 것이기에 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천사장 가브리엘이 예수님을 만나 여쭈어 보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예수께서 하신 일이 너무 제한된 지역에서 되어진 일이라 만백성을 구원하기에는 미흡한 것 같은데,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하셨으니, 정말 다 이루어진 것이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다 이루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도 가브리엘은 걱정스러워 "천사들을 보내어서 만방에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면 어떨까요?"라고 물었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다 부탁해 놓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통치 않으니 다른 길이 없겠느냐고 다시 재촉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 있다. 나는 그들을 믿고 있으니 다른 계획은 없다"고 잘라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의 구원의 역사는 그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믿고 부탁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들을 믿노라"하시며 보내시고 당부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성도 한 분이 저를 찾아와서 결혼한 지 15년이 되었는데 이제 더는 살수가 없어 이혼을 하겠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믿지 않는 집에 시집을 와서 전도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한 해 한 해를 참아가며 살았는데, 갈수록 남편의 주정은 심해지고 제사에다 가정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겹쳐서 이제는 견딜 수가 없으니 이혼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저는 그분에게 지금까지 참으셨으니 이왕 산 김에 앞으로 한 달만 더 그 집에서 살 수 없겠느냐고 제의를 했고, 그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덧붙여 부탁하기를 이번 한 달 동안은 의미를 좀 달리해서 살자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집 아내나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파송된 선교사의 사명감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15년간 함께 살던 식구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 구원을 얻게 해놓고 물러서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을 것이니 마음을 달리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달은 식구들로부터 사랑 받을 생각은 아예 말고,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해도 저 할머니 구원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남편이 주정을 해도 한 달만은 참고 견디어서 구원을 받게 해 보자고 제의했던 것입니다. 정말 그 분은 오직 구원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것을 식구들한테 양보하고 참았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못 가서 남편이 묻더라는 것입니다. 요즘 왜 이렇게 딴 사람이 되었느냐고. 그 부인은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으면서 이제는 당신 아내가 아니라 이 집에 파송된 선교사된 사명으로 지내니 그런 줄 알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남편은 부인과 함께 한 달도 못 되어 교회를 나와 지금은 좋은 가정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대망의 새해라고 잔뜩 희망을 겁니다만 별 볼일 없이 또 한 해가 지나갑니다.
환경과 나와는 사실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내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사랑 받으려고 구걸하지 맙시다. 눈치볼 필요도 없습니다. 부유해도 그렇고 가난해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이니 생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저 사람에게 복음 전하기 위하여 오늘 내가 존재한다는 엄청난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명을 바로 느끼게 되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면 큰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양의 순종에 뱀의 지혜를 더하고 뱀의 지혜에 비둘기의 순결을 더하면 강한 역사가 발동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향해 보냄 받은 사명인임을 자각하여 그 의무를 다할 때 주님은 우리의 운명을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입시다. 승리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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