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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태복음 25장 31절~40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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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태복음 253140)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날 이 세대는 살기좋고 편리한 세대이나 한편으로는 무서운 세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때는 미국이 살기 좋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갔었는데, 이제는 저녁 6시 이후이면 길거리에 나가는 것을 꺼려할 정도로 무서운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머지 않아 서울도 그렇게 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폭력은 점점 늘어나고 범죄는 날로 지능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완전 범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증거를 완벽하게 감추어서 그 불의한 돈으로 평안하게 살려는 몇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어야 합니까?

사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다음 네 가지 유형의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한 사건은 한 사건으로 끝나서 아무도 모를 수 있다는, 즉 완전 범죄가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았고 증거만 없애면 죄를 짓고도 무사하게 살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입니다. 한 사건으로 끝날 수 있다고 믿기에 한탕주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둘째, 한 사건은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어 사건이 이어지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셋째, 한 사건은 반드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남을 속였으면 언젠가는 나도 속아서,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좋게 베풀었으면 언젠가는 그 은혜가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고, 후에 야곱은 자기 아들에게 속았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아들에게 속는 것은 합당한 것으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로, 어떤 사건이든지 하나님께서 보시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과 행위들을 다 아시며 또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직고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2:3에 보면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 비밀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와 나만 알자는 비밀한 이야기는 믿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악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일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사 상태(假死狀態)에 한번 들어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경험을 모아 연구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통계적인 것으로 하나같이 경험이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숨이 넘어가자마자 우선 강을 건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자기가 지내온 일생을 마치 필름을 보듯 단번에 볼 수 있어서 깜짝 놀란 나머지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는 잘 모릅니다만 성경은 우리가 일생 동안 지나온 것을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 같은 사람도 현재 베드로 앞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가 듣고자 합니다"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우리가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십자가의 큰 구원에 의해서 나를 보고 저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그 사랑의 빛에 조명해서 나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아 인간 관계를 맺고 자연과의 관계를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맺어지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모두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25:40), 또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25:45)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중요한 교리를 우리는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와 이웃과의 관계가 그대로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로 연결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내가 이웃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주고 받은 모든 관계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야 알든 말든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며 그리스도께서 지켜보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나아가서는 언젠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 종말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그리스도 안에 산 사람과 그리스도 밖에 산 사람을 구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이웃과의 관계를 맺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며,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세상일은 세상일대로 생각해서 믿음 없이 산 자는 그리스도 밖에서 산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의인인지 악인인지 구별할 수 없으나, 어느 때가 되면 이쪽과 저쪽이 분명히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염소와 양으로 나누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푸른 초장에서는 염소와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있겠으나 저녁이 되어 우리로 들어갈 때는 염소는 이쪽, 양은 저쪽으로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나 지금 함께 있을 뿐이니, 언젠가는 다 구별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내가 누구에게 선한 일을 하느냐 하는 대상 문제입니다. 봉사할 마음은 있는데 누구한테 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마음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요 행위로써는 이웃을 대하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친히 오신다면 누가 대접을 마다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 이웃과 나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사에서 널리 알려진 마틴(Martin)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특히 수도원 사업에 큰 공헌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기병대였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교도였지만 나이 열 살 때에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가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추위에 벌벌 떠는 불쌍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무척 돕고 싶었지만 군복을 벗어줄 수가 없어 망설이다가 군복 절반을 찢어서 이 짓으로라도 추위를 면해 보라고 덮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에 마틴은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이 찢어진 군복 자락을 걸치고 계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천사에게 말하기를 마틴이 헐벗은 나를 이 옷으로 덮어 주었다고 칭찬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꿈 속에서 받은 그 은혜와 충격을 가지고 그는 일생 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오늘날 교회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누구에게 봉사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대하는 이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봉사해야 할 대상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작은 자일 뿐 아니라 사회 적인 지위도 없는 소외된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보람은 커녕 병들고 가난하고 힘없고 구제 불능한 자로 아무 쓸모없는 자들을 향하여 손길을 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때로는 지나치게 처세적이거나 정치적인, 또는 장사속으로 계산하여 그가 나에게 이익을 줄 것인지 아닌지를 계산하며 대하지는 않습니까? 아니, 최소한도의 보답이나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기대하며 이웃을 대하지는 않습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이웃을 대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본문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즉 전혀 보답할 수 없는 자로 우리의 봉사 대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 본문에서는 '내 형제 중에 작은 자'라고 형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형제란 피를 나눈 사이입니다. 탈무드 중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여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머리가 두 개이고 몸은 하나이며 팔다리는 각각 두 개씩인 기형아였습니다. 문제는 몸은 하나이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두 개씩이므로 이 아이가 하나인지 둘인지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랍비가 지혜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만일에 이쪽 머리를 때렸을 경우 저쪽 아이도 울면 하나이고, 전혀 반응이 없으면 둘이라는 것입니다. 이쪽 머리가 기뻐할 때에 저쪽 머리도 기뻐해야 하나이지 이쪽은 기쁜데 저쪽은 슬퍼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별개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픔이 내게 전달되어야 형제입니다. 여러분, 인류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인도주의만으로도 안 됩니다. 소위 인간애에다가 형제애가 플러스되어야 하나될 수 있습니다. 형제란 하나라는 뜻입니다. 저가 아플 때에 내가 아프고 저가 기쁠 때에 나도 기쁩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이 아플 때에 부모님은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아픈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한 몸으로, 한쪽의 고통은 그대로 전달되어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진정한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겠습니까? 이웃 간의 사랑도 공동 운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앗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아주 불쌍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우리 옷을 제 주인에게 돌려주자. 우리가 입은 옷은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 빌려 입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옷을 벗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 때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옷을 입지 못하고 다니면 일에 지장이 있습니다"하며 만류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나는 도둑놈이 되기보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라고 대단히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내것이란 무엇입니까? 적어도 성 프란체스코의 마음으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임의로 내가 잠깐 사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당연히 그에게 돌려 주어야지 내 것이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자기 것을 가지고 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가 가질 것으로 제 주인에게 돌려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윤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내것이다 할 때에 문제가 있게 됩니다. 본래부터 내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언젠가는 남의 것이 되고 맙니다. 엄연히 내가 소유하고 있더라도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당연히 그의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형제애입니다.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불편한 일은 없습니다. 입지도 않는 옷을 보관해 둘 필요도 없습니다. 맞는 자가 주인이며 쓸 줄 아는 자가 주인입니다.

언젠가 어느 집을 방문했더니 초현대식 콤퓨터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수입 재봉틀이 있었습니다. 보기에도 아주 훌륭해서 누가 이 기계를 만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대답하기를 자기는 전혀 만질 줄도 모르고 가정부 아줌마가 조금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재봉틀의 임자는 누구입니까? 도대체 소유권이란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만나는 순간 벌써 내가 가진 돈은 내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는 바른 철학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탈무드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한 랍비가 그 지방에 새로 부임하고 보니 회당이 많이 낡아서 수리하기 위해 기부금을 걷으려 했습니다. 그 곳에는 대단히 인색한 한 갑부가 있었는데, 뒤로는 나쁜 일을 많이 하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랍비가 그 갑부에게 기부금을 부탁하려고 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가봐야 소용없다고 만류했습니다. 그래도 랍비는 찾아가서 부탁을 했더니 과연 소문대로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그 때 랍비는 "탈무드를 아십니까"하며 갈릴리 바다와 사해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을 자꾸 흘려 보내기 때문에 썩지 않아 맑은 물이고, 사해는 물을 받아들이기만 했지 흘려 보내지를 않아 썩은 물이 되었으니 당신 재산도 자꾸 나누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갑부는 "제가 아주 비밀리에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까? 랍비는 "참 이상하군요. 당신이 비밀리에 하는 나쁜 일은 다 소문이 나는데 어째서 비밀리에 하는 선한 일은 소문이 안 납니까?"라고 꼬집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물론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 많이 하실 것입니다만 결국은 다 알게 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은 "네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내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하게 쓴 것만이 내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다음 두 가지만 내것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는 내 입으로 먹는 것은 분명히 내 것입니다. 일단 먹었으니 내 것이지요. 또 하나는 남에게 베푼 것은 내것입니다. 장사속이나 어떤 다른 목적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웃에게 베푼 것은 하늘나라에 저축한 것으로, 그것은 진짜 내것입니다. 영원히 내것이란 말입니다.

본문에서도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25 : 44)라고 그 때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불쌍한 사람을 보고 그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때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소외된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돌봐야 할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사실 나에게까지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자에게 주는 것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빼앗기는 것입니다. 손을 내밀 수도 없는 자를 내가 찾아가서 도울 때에 여기에 진정한 의미의 선행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나온 생애를 통해서 정말 그리스도를 위하여 참 의미에서의 선한 일을 몇 번이나 하셨습니까? 내 생활이 이래도 괜찮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소외된 형제에게 오늘 내가 해야 할 본분을 다해서 종말적인 축복은 물론이려니와 현세에 나와 내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는 큰 축복이 있어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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