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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평안히 가라(막5:25~34)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불쌍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교부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이 여인은 가아사랴 빌립보에서 온 이방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 속에 끼여 있습니다마는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많다보면 그만큼 개인은 무시되기도 하고 또한 서로서로 관심을 갖지 않아 개개인의 소중함이나 소원은 묻혀 버리기가 쉽습니다. 이 여인 역시 이와 같은 무관심 속에 있기에 그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 싶다고 해서 인도해 줄자도 없고, 가까이 간다고 해서 말릴 사람도 없습니다. 완전히 소외된 형편에서 그 여자는 지금 주님께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인병을 앓고 있는 환자였습니다. 복음서가 한결같이 그의 병명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몹시도 불편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12년이란 긴 세월을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만약 그가 20세에 병을 얻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32세가 되는 셈입니다. 아름다운 청춘을 몹쓸 병으로 다 허송하여 인간으로서의 대접, 특히 가장 좋을 시절 동안 여성으로서의 여건을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병명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의학자들에 따르면 성병이나 자궁암 같은 부인병이었으리라고 짐작을 합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어려운 병으로 12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버려진 존재로 지내온 것입니다. 본문은 그의 형편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바 많은 의원들로부터 치료받는 중에 낫기는커녕 오히려 더 괴로움만 받고 병은 더욱 더 중해져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끔 병원에서 이런 일이 있습니다. 치료해서 병이 나으면 그동안 어렵고 힘들었던 모든 과정이 정당화됩니다만, 병이 낫지 않을 경우에는 오히려 복잡한 조사 과정으로 인하여 괴로움만 더 가중되는 결과가 되는 셈입니다 이 여인의 경우도 병은 고치지 못하고 괴로움을 더했을 뿐 아니라 가진 재산마저 허비한 비참한 형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고독과 실의와 절망과 가난으로,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 속에 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유일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두 가지 문제가 그 여자를 난감하게 했습니다. 첫째는 외적인 조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옹위하고 있기에 환자된 몸으로 이것을 뚫고 나아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 나아옴에 있어 방해되는 외적인 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가족이나 친구나 때로는 먼저 믿는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주님께 나오지 못하도록 방해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적인 조건으로, 이 여인 자신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다른 환자들은 자기들의 병명을 말하며 그들의 환부를 보일 수가 있었습니다. 장님은 "눈을 뜨게 해 주세요." 문둥이는 "내 몸을 깨끗하게 해 주세요"라고 자기의 사정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고쳐 주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지금 부끄러운 병에 걸려 있습니다. 특히 여인으로서 많은 사람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숨겨진 병이기에 남다른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그는 소외된 사람입니다. 레위기 15 : 25 이하에 보면 이 여인과 같은 사람은 회당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위생 조건이 좋지 않아 자주 옷을 갈아입거나 자주 목욕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특히 소독할 수 있는 형편은 더더욱 아니므로, 이런 환자가 성전에 들어가면 그 냄새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환자들은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회중 가운데에도 가까이 있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내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여인에게서 바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자기 나름의 내 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여집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자기 고통을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이 여 집사님의 남편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특히 그들의 4남매는 자기 아버지를 최고로 아는 좋은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밝혀진 사실로 남편에게는 숨겨진 여인이 있었고 거기에는 일곱 살 난 아이까지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 사건이 노출되어 여집사님이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집사님의 고민은 아버지를 그렇게도 좋아하는 아이들 때문에 마음놓고 싸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온한 가정 분위기를 하루아침에 바꾸지 못하여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을 유지하자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문제입니다. 조용한 것 같고 무사한 것 같고 평온한 것 같아 이렇다 할 존경을 받아 가며 체통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으나, 내적으로는 숨겨진 악이 있고 자기만이 가진 고민이 있어 문제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원하고 깨끗한 은혜의 경험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인도 병 중에 있었기 때문에 더 예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자들은 한 이틀 앓고나면 핼쑥하니 예쁘게 보이는 수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입니다만 속으로는 지금 계속 썩어 가는 병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됩니다. 이것은 경건과 겸손과 지극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 순간 병에서 낫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도 고통스럽던 몸이 순간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이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열려 있고, 또한 그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멀리 항해하던 배 한 척이 풍랑에 쫓겨 그대로 떠내려 갔습니다. 여러 날 고생하는 동안에 마실 물이 떨어져 선원들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들이 육지로 마실 물을 좀 보내달라고 급하게 신호를 보냈더니 해답이 오기를, 당신들의 배가 떠 있는 그 곳이 바로 아마존강 하류이니 배 옆에 있는 물을 마시면 되지 않느냐고 답해 왔답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문제는 내게 믿음이 없어 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고민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병에서 나음을 받는 순간 소원 성취로 인한 기쁨과 감사와 그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생깁니다. 마치 예수님의 능력을 훔친 것 같은 죄책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도둑질한 기분이 들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병으로부터 깨끗하게 변화된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병만 낫겠다는 일구월심으로 찾아다녔으나, 이제 낫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감사해야 하나, 즉 이제부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예수께서 이 여인을 찾으십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누군가가 내 옷을 만졌다"고 말씀하시며 군중 속에서 여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은 좀 짜증을 내며 주님이 인기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주님 가까이 오려다가 밀고 밀리는 상태에서 옷을 만질 수도 있고 닿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합니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저 지나가다가 스친 것이 아니라 경건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바로 그 여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이 여자를 찾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가 지나가는 길에 교회에 들렀습니까? 혹은 친구가 권유해서 나왔습니까? 아니면 습관적으로 나온 것입니까? 여인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을 예수님은 오늘 개별적으로 찾으시며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이 여인의 마음 속에는 진실한 경건이 있었고 두려운 마음도 함께 있었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생에 처음이요, 또한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자세입니다. 즉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기회로 생각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갖다 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주님은 직접 찾으시고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이 여인은 너무 감격해서 주님을 찾아온 경위와 또 병이 낫게 된 모든 사실을 용기있게 고백합니다.
이제 주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말씀입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정말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 이 여인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복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소문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 했고 문둥병도 고쳤으며 죽은 자도 살렸다는 그 소문을 그대로 믿고 그리고 달려온 것입니다. 의심하려고 든다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나"하고 한 번쯤 반문할 수도 있고, 설사 그런 병을 다 고쳤다고 해도 나같은 부인병은 고친 일이 없으니 나는 안 될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면 예수님께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께서 "저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내게도 은혜를 베푸실 것을 믿었고 저곳에서 기적이 있었으면 여기에도 기적이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기적의 현재성을 믿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미친 사람입니다. 그는 온 생을 그리스도에게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처럼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간증을 들으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이지 내게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인도의 성자 썬다 씽이 언젠가 밀림 지대에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연대장이 썬다 씽을 잡아다 때리고 욕보이다가 마지막에는 밀림 속에 돼지우리 같은 것을 만들어 발가벗겨서 그 곳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까닭인즉 밤에 지독한 모기에게 뜯겨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썬다 씽은 밤새도록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라는 찬송을 기쁘게 불렀습니다. 이것을 본 연대장은 감동하여, 예수가 누군지 모르지만 저런 고통 중에서도 저가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가 있는 것을 보았으면 내게도 있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소위 지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자기 경우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의 문제는 나 하나만의 별개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데서 실마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네 문제는 곧 다른 사람의 문제요,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믿음으로 해결을 보았으면 나도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믿자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났던 기적을 자신에게도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믿은 사람입니다.
둘째, 그는 많은 의사들에게서 괴로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만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세상일이 잘 되고 형편이 좋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믿고, 그 반대로 누구로부터 배신을 당했거나 형편이 좋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버렸다고 착각을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리고 배신해도 예수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무디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가령, 친구를 믿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언젠가 그는 죽든지 떠날 것입니다. 또한 명성을 얻었다고 합시다.
언젠가는 그 명예가 나를 떠난다거나 아니면 그 명성이 오히려 더 나를 구렁텅이로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산은 안전합니까? 언젠가는 남의 소유로 넘어가는 것이 재산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은 예나 지금이나 영원히 동일하게 나와 함께하시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셋째, 그는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부끄러운 죄인임을 알았기에 신령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으며,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라고 스스로 낮춥니다. 그러나 그런 형편에서도 나가야 한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넷째, 이제 그는 드디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자기의 부족을 느끼지만 그래도 주님을 만지기만 하면 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그는 구원을 받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여기서 믿음이란 성경을 많이 알거나 종교 의식에 자주 참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선행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라는 실제적이고 단순하며 위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때에만 구원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어느 신문사에서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라는 여론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습니다. 어떤 이는 안구 은행에 가서 눈을 기증하겠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밀린 일들을 모두 정리해서 일을 마치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유산을 분배해서 남은 가족들의 장래에 보탬이 되겠다고도 했습니다. 물론 이 밖에도 여행을 하겠다든지, 심지어는 원수를 갚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모아놓고 "예수를 잘 믿으라. 주님은 분명히 우리의 구주이시다. 나는 지금 주님 앞에 간다"라는 유언을 남기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여인은 전설에 따르면,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기념비를 세우고는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평생을 간증하다가 주님 앞으로 갔다고 합니다. 나의 실망, 고민, 좌절, 부끄러움 등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까? 주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 여인과 같은 깨끗하고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설 때에 비로소 나의 귀는 열릴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이 은혜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딸아 평안히 가라(막5:25~34)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불쌍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교부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이 여인은 가아사랴 빌립보에서 온 이방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 속에 끼여 있습니다마는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많다보면 그만큼 개인은 무시되기도 하고 또한 서로서로 관심을 갖지 않아 개개인의 소중함이나 소원은 묻혀 버리기가 쉽습니다. 이 여인 역시 이와 같은 무관심 속에 있기에 그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 싶다고 해서 인도해 줄자도 없고, 가까이 간다고 해서 말릴 사람도 없습니다. 완전히 소외된 형편에서 그 여자는 지금 주님께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인병을 앓고 있는 환자였습니다. 복음서가 한결같이 그의 병명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몹시도 불편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12년이란 긴 세월을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만약 그가 20세에 병을 얻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32세가 되는 셈입니다. 아름다운 청춘을 몹쓸 병으로 다 허송하여 인간으로서의 대접, 특히 가장 좋을 시절 동안 여성으로서의 여건을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병명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의학자들에 따르면 성병이나 자궁암 같은 부인병이었으리라고 짐작을 합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어려운 병으로 12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버려진 존재로 지내온 것입니다. 본문은 그의 형편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바 많은 의원들로부터 치료받는 중에 낫기는커녕 오히려 더 괴로움만 받고 병은 더욱 더 중해져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끔 병원에서 이런 일이 있습니다. 치료해서 병이 나으면 그동안 어렵고 힘들었던 모든 과정이 정당화됩니다만, 병이 낫지 않을 경우에는 오히려 복잡한 조사 과정으로 인하여 괴로움만 더 가중되는 결과가 되는 셈입니다 이 여인의 경우도 병은 고치지 못하고 괴로움을 더했을 뿐 아니라 가진 재산마저 허비한 비참한 형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고독과 실의와 절망과 가난으로,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 속에 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유일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두 가지 문제가 그 여자를 난감하게 했습니다. 첫째는 외적인 조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옹위하고 있기에 환자된 몸으로 이것을 뚫고 나아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 나아옴에 있어 방해되는 외적인 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가족이나 친구나 때로는 먼저 믿는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주님께 나오지 못하도록 방해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적인 조건으로, 이 여인 자신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다른 환자들은 자기들의 병명을 말하며 그들의 환부를 보일 수가 있었습니다. 장님은 "눈을 뜨게 해 주세요." 문둥이는 "내 몸을 깨끗하게 해 주세요"라고 자기의 사정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고쳐 주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지금 부끄러운 병에 걸려 있습니다. 특히 여인으로서 많은 사람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숨겨진 병이기에 남다른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그는 소외된 사람입니다. 레위기 15 : 25 이하에 보면 이 여인과 같은 사람은 회당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위생 조건이 좋지 않아 자주 옷을 갈아입거나 자주 목욕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특히 소독할 수 있는 형편은 더더욱 아니므로, 이런 환자가 성전에 들어가면 그 냄새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환자들은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회중 가운데에도 가까이 있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내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여인에게서 바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자기 나름의 내 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여집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자기 고통을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이 여 집사님의 남편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특히 그들의 4남매는 자기 아버지를 최고로 아는 좋은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밝혀진 사실로 남편에게는 숨겨진 여인이 있었고 거기에는 일곱 살 난 아이까지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 사건이 노출되어 여집사님이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집사님의 고민은 아버지를 그렇게도 좋아하는 아이들 때문에 마음놓고 싸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온한 가정 분위기를 하루아침에 바꾸지 못하여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을 유지하자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문제입니다. 조용한 것 같고 무사한 것 같고 평온한 것 같아 이렇다 할 존경을 받아 가며 체통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으나, 내적으로는 숨겨진 악이 있고 자기만이 가진 고민이 있어 문제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원하고 깨끗한 은혜의 경험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인도 병 중에 있었기 때문에 더 예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자들은 한 이틀 앓고나면 핼쑥하니 예쁘게 보이는 수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입니다만 속으로는 지금 계속 썩어 가는 병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됩니다. 이것은 경건과 겸손과 지극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 순간 병에서 낫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도 고통스럽던 몸이 순간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이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열려 있고, 또한 그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멀리 항해하던 배 한 척이 풍랑에 쫓겨 그대로 떠내려 갔습니다. 여러 날 고생하는 동안에 마실 물이 떨어져 선원들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들이 육지로 마실 물을 좀 보내달라고 급하게 신호를 보냈더니 해답이 오기를, 당신들의 배가 떠 있는 그 곳이 바로 아마존강 하류이니 배 옆에 있는 물을 마시면 되지 않느냐고 답해 왔답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문제는 내게 믿음이 없어 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고민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병에서 나음을 받는 순간 소원 성취로 인한 기쁨과 감사와 그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생깁니다. 마치 예수님의 능력을 훔친 것 같은 죄책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도둑질한 기분이 들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병으로부터 깨끗하게 변화된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병만 낫겠다는 일구월심으로 찾아다녔으나, 이제 낫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감사해야 하나, 즉 이제부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예수께서 이 여인을 찾으십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누군가가 내 옷을 만졌다"고 말씀하시며 군중 속에서 여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은 좀 짜증을 내며 주님이 인기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주님 가까이 오려다가 밀고 밀리는 상태에서 옷을 만질 수도 있고 닿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합니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저 지나가다가 스친 것이 아니라 경건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바로 그 여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이 여자를 찾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가 지나가는 길에 교회에 들렀습니까? 혹은 친구가 권유해서 나왔습니까? 아니면 습관적으로 나온 것입니까? 여인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을 예수님은 오늘 개별적으로 찾으시며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이 여인의 마음 속에는 진실한 경건이 있었고 두려운 마음도 함께 있었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생에 처음이요, 또한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자세입니다. 즉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기회로 생각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갖다 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주님은 직접 찾으시고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이 여인은 너무 감격해서 주님을 찾아온 경위와 또 병이 낫게 된 모든 사실을 용기있게 고백합니다.
이제 주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말씀입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정말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 이 여인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복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소문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 했고 문둥병도 고쳤으며 죽은 자도 살렸다는 그 소문을 그대로 믿고 그리고 달려온 것입니다. 의심하려고 든다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나"하고 한 번쯤 반문할 수도 있고, 설사 그런 병을 다 고쳤다고 해도 나같은 부인병은 고친 일이 없으니 나는 안 될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면 예수님께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께서 "저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내게도 은혜를 베푸실 것을 믿었고 저곳에서 기적이 있었으면 여기에도 기적이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기적의 현재성을 믿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미친 사람입니다. 그는 온 생을 그리스도에게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처럼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간증을 들으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이지 내게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인도의 성자 썬다 씽이 언젠가 밀림 지대에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연대장이 썬다 씽을 잡아다 때리고 욕보이다가 마지막에는 밀림 속에 돼지우리 같은 것을 만들어 발가벗겨서 그 곳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까닭인즉 밤에 지독한 모기에게 뜯겨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썬다 씽은 밤새도록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라는 찬송을 기쁘게 불렀습니다. 이것을 본 연대장은 감동하여, 예수가 누군지 모르지만 저런 고통 중에서도 저가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가 있는 것을 보았으면 내게도 있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소위 지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자기 경우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의 문제는 나 하나만의 별개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데서 실마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네 문제는 곧 다른 사람의 문제요,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믿음으로 해결을 보았으면 나도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믿자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났던 기적을 자신에게도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믿은 사람입니다.
둘째, 그는 많은 의사들에게서 괴로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만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세상일이 잘 되고 형편이 좋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믿고, 그 반대로 누구로부터 배신을 당했거나 형편이 좋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버렸다고 착각을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리고 배신해도 예수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무디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가령, 친구를 믿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언젠가 그는 죽든지 떠날 것입니다. 또한 명성을 얻었다고 합시다.
언젠가는 그 명예가 나를 떠난다거나 아니면 그 명성이 오히려 더 나를 구렁텅이로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산은 안전합니까? 언젠가는 남의 소유로 넘어가는 것이 재산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은 예나 지금이나 영원히 동일하게 나와 함께하시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셋째, 그는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부끄러운 죄인임을 알았기에 신령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으며,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라고 스스로 낮춥니다. 그러나 그런 형편에서도 나가야 한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넷째, 이제 그는 드디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자기의 부족을 느끼지만 그래도 주님을 만지기만 하면 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그는 구원을 받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여기서 믿음이란 성경을 많이 알거나 종교 의식에 자주 참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선행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라는 실제적이고 단순하며 위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때에만 구원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어느 신문사에서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라는 여론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습니다. 어떤 이는 안구 은행에 가서 눈을 기증하겠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밀린 일들을 모두 정리해서 일을 마치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유산을 분배해서 남은 가족들의 장래에 보탬이 되겠다고도 했습니다. 물론 이 밖에도 여행을 하겠다든지, 심지어는 원수를 갚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모아놓고 "예수를 잘 믿으라. 주님은 분명히 우리의 구주이시다. 나는 지금 주님 앞에 간다"라는 유언을 남기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여인은 전설에 따르면,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기념비를 세우고는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평생을 간증하다가 주님 앞으로 갔다고 합니다. 나의 실망, 고민, 좌절, 부끄러움 등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까? 주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 여인과 같은 깨끗하고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설 때에 비로소 나의 귀는 열릴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이 은혜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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