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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뿌리가 되는 죄(로마서 1장 18절~23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이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하면, 해서는 아니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가령 공부해야 할 학생이 당연히 해야 할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학생으로서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하면 되어서는 아니 될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은 모든 문제의 근본을 경제로 돌리려는 견해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즉 도둑질을 했다면 가난 때문이요, 거짓을 범했다면 못살기 때문이었다고 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용납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살고 못살고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문제는 죄의 문제요, 의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청문회로 인해 국민 전체가 산만한 가운데 있습니다만, 그 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지적하고 있습니까? 그 동안 얼마나 GNP를 올렸느냐 내렸느냐, 국가를 위해 얼마나 공을 쌓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부정을 했으며 어떻게 공의를 실천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로만 들렸습니까? 각자 우리 자신에게로 한번 방향을 돌려서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자 하십니까? 돈을 모아 부를 물려주고 싶습니까, 아니면 비록 가난하더라도 한점 부끄러움 없는 깨끗한 인격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또는 정의의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근본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관심은 바로 죄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 의의 문제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시고 몹시 주린 상태에서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성경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심리학자들은 이 시험은 예수님이 너무 배고픈 상태에서 돌을 보니, 그 돌이 떡덩어리였으면 좋겠다는 유혹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있을 수 있는 상상입니다만 정말 돌이 떡으로 보일 만큼 정신이 희미할 정도로 배가 고팠던 상태였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그토록 굶주린 시간에도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교훈입니까?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누구나가 다 한다고 해서 부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절박한 시간일지라도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은 진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계 문제, 국가 문제, 경제 문제, 가정 문제, 그리고 나 개인의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 즉 뿌리는 죄요, 죄의 문제는 바로 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의로우며,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떳떳하며, 나 자신의 양심 앞에서 얼마나 바르냐가 가장 중요하단 말입니다. 설혹 온 국민이 지탄한다 하더라도 양심에 가책이 없고, 온 사회가 그를 정죄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의로우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온 국민이 지지하고 성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면 죄인입니다. 언젠가는 공정하게 심판 받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 다른 사람 앞에서의 의, 그리고 나 자신 앞에서의 의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죄의 뿌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몇 가지로 분석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자의로 짓는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동기가 되어 내 마음에 의해서 짓는 죄입니다. 둘째는 죄짓게 되는 죄입니다. 한번 죄를 지었으면 이것을 숨기기 위해 다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의 노예 되는 죄입니다. 계속되는 이 죄는 어느 단계에서 회개를 하지 못하면 계속 함정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서 죄짓고 싶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피성에 빠지고 필연적인 죄가 되어, 수동적이고 노예적인 그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죄짓게 하는 죄가 있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 다른 사람에게 죄짓도록 하는 죄입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범죄케 하는 것은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낫겠다고 무섭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잘못 가르쳐서 자식이 죄를 지었다면 결국은 죄의 원인을 제공한 죄가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 손은 깨끗해도 내가 범죄케 한 사람이 있는 한 나도 죄인인 것입니다. 넷째, 정당화 내지 합법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우상화해 버리는 죄로, 이것은 죄의 극치입니다. 이 죄는 회개하지 않음으로 계속되는 죄가 뿌리를 내려 성장하는 것으로, 뿌리깊은 죄입니다. 그러면, 왜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회개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뿌리가 너무 깊어 그 뿌리가 빠지기 전에는 회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한마디만 하면 될 것 같은데 회개는 되지 않고 계속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바로 죄의 특성이요, 죄의 노예 된 자의 비참한 운명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은 이 중요한 문제를 심각하게 분석하고 파헤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그 불경건함과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죄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신성을 부인할 때 죄가 나타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고귀한 존재인데 이 신성을 부인하는 순간에는 그대로 수렁에 빠져 동물화하고 물질화하여 비인간적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 존재 자체가 흐려지므로 죄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 자신을 아는 두 가지에서 성립된다"고 칼빈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자신도 모르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야 자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불 신앙이 이루어지고 이 불신앙이 뿌리가 되어 부득이 엄청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부인함으로 죄가 됩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자유를 통하여, 이성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 양심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당신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데, 그 알아지는 지식을 부인하려고 듭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벌써 그 순간부터 죄로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천당과 지옥을 믿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천당과 지옥을 인정하면 자기 자신은 틀림없이 지옥을 갈 것이니 부득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이 있다 한다고 해서 있어지고, 없다 한다고 해서 있는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구태여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왜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해야 스스로 초인이 되는 것 같고 자기 죄가 그런대로 견딜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어느 집사님이 사업을 좀 크게 하다가 부도를 내어 대단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수라장이 되고 집마저 내어놓게 되자 그는 병까지 얻어 그야말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는 심방을 가서 어떻게 어떤 말씀으로 위로를 드릴까 하고 잠깐 생각하고 있는데, 그 집사님이 먼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느냐, 하나님은 나를 저주하셨거나 버렸다는 등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아직도 이분이 정신차리지 못했음을 보고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집사님이 망한 것을 보니 분명히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기에 이 사업이 망한 것으로 볼 수 없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수건이 다 젖도록 몸부림을 치며 울었습니다. 한 10분 간을 정신없이 울더니 "목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만일 여기서 망하지 않았다면 내 몸은 물론 영혼까지 다 망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업이 망하고 육체가 병들었지만 영혼만은 살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라고 고백을 했고 사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는 산기슭으로 쫓겨가서 천막을 치고 닭 몇 마리 기르면서 재기했는데, 후에 장로님이 되었고, 천막 치고 재기한 그 자리에 교회를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 기분대로, 이래서 하나님이 안 계시고 저래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간단하게 말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탈리아에 가서 폼페이 시를 보면 왜 화산이 터져서 그 도시가 망했는가를 보는 자마다 느끼게 됩니다. 폼페이가 망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산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인정하기를 원하시고 긍정해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 지식을 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 D.)는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름대로의 최선의 목적에 부합되는 것임을 안다. 비록 나의 소원과 다를지라도…"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이 지식을 부인할 때에 그것이 죄의 뿌리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충분하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음으로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그 영광을 드리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고 나아가서 우상을 섬기게 되므로 자연히 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경배하지 못하면, 그 순간에 죄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올 때마다 바른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넷째는, 감사치도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때 원망이 생기고, 감사를 잃어버릴 때에 불평과 불만이 생기게 됩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자신을 비참하게 보며 울부짖었습니다.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아주 괴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감사로 비약하고 있습니다. 비참한 존재가 감사하는 순간 거룩해지고, 암담한 세상이 밝고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시험과 고민과 죄를 이기게 했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건강에 대해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사실 오늘도 건강한 몸으로 교회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건강을 생각하면 저도 늘 감사하는 중에 있습니다만 충분한 감사는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30여 년 동안 목회하는 중에 아파서 강단에 서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강의도 하고 설교도 합니다만 아파서 못 간다고 취소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많은 성도들께서 기도해 주시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 건강에 대한 감사의 보답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건강에 대한 감사 헌금은 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을 고생 하고 살아나온 다음에 하게 됩니다. 입원비 대느라고 힘이 들었지만 이 때는 꾸어서라도 감사 헌금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한번 혼이 나고야 건강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한번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건강에 대해 감사케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병원에 한번 들어가야 아차!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늘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선 범사에 감사하면 모든 원망과 불평은 이길 수 있고 사라집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양쪽 부모님들이 갖은 수고 다해 놓고 이제 한숨 놓으시며 기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 중 어느 한 분이 안 계시면 그 날의 잔치는 좀 우울하고, 특히 신부들은 많이 웁니다. 그래서 저는 신랑 신부들께 부탁하기를,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부모님들의 수고에 대해서 평생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감사하여 마땅한 자가 감사하지 못하면 원망하게 되며 이 원망은 마귀의 시험으로 직결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마귀가 시험하지 못하나, 감사가 끊어지면 벌써 마귀는 불평하게 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분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나간 모든 일에 감사하고, 다가오는 모든 일도 그 은혜 안에서 소화하고 소망 가운데 긍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허망해지고 마음이 어두워져 자신도 모르게 죄의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내 입에서 감사가 떠나면 마귀가 원망하는 마음을 그 입에 주입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받은 바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감사해야 죄를 이기고 시험을 이기고 허무함을 이겨, 어떤 역경과 환난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가 되는 죄(로마서 1장 18절~23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이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하면, 해서는 아니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가령 공부해야 할 학생이 당연히 해야 할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학생으로서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하면 되어서는 아니 될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은 모든 문제의 근본을 경제로 돌리려는 견해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즉 도둑질을 했다면 가난 때문이요, 거짓을 범했다면 못살기 때문이었다고 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용납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살고 못살고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문제는 죄의 문제요, 의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청문회로 인해 국민 전체가 산만한 가운데 있습니다만, 그 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지적하고 있습니까? 그 동안 얼마나 GNP를 올렸느냐 내렸느냐, 국가를 위해 얼마나 공을 쌓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부정을 했으며 어떻게 공의를 실천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로만 들렸습니까? 각자 우리 자신에게로 한번 방향을 돌려서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자 하십니까? 돈을 모아 부를 물려주고 싶습니까, 아니면 비록 가난하더라도 한점 부끄러움 없는 깨끗한 인격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또는 정의의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근본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관심은 바로 죄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 의의 문제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시고 몹시 주린 상태에서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성경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심리학자들은 이 시험은 예수님이 너무 배고픈 상태에서 돌을 보니, 그 돌이 떡덩어리였으면 좋겠다는 유혹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있을 수 있는 상상입니다만 정말 돌이 떡으로 보일 만큼 정신이 희미할 정도로 배가 고팠던 상태였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그토록 굶주린 시간에도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교훈입니까?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누구나가 다 한다고 해서 부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절박한 시간일지라도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은 진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계 문제, 국가 문제, 경제 문제, 가정 문제, 그리고 나 개인의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 즉 뿌리는 죄요, 죄의 문제는 바로 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의로우며,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떳떳하며, 나 자신의 양심 앞에서 얼마나 바르냐가 가장 중요하단 말입니다. 설혹 온 국민이 지탄한다 하더라도 양심에 가책이 없고, 온 사회가 그를 정죄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의로우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온 국민이 지지하고 성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면 죄인입니다. 언젠가는 공정하게 심판 받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 다른 사람 앞에서의 의, 그리고 나 자신 앞에서의 의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죄의 뿌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몇 가지로 분석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자의로 짓는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동기가 되어 내 마음에 의해서 짓는 죄입니다. 둘째는 죄짓게 되는 죄입니다. 한번 죄를 지었으면 이것을 숨기기 위해 다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의 노예 되는 죄입니다. 계속되는 이 죄는 어느 단계에서 회개를 하지 못하면 계속 함정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서 죄짓고 싶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피성에 빠지고 필연적인 죄가 되어, 수동적이고 노예적인 그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죄짓게 하는 죄가 있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 다른 사람에게 죄짓도록 하는 죄입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범죄케 하는 것은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낫겠다고 무섭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잘못 가르쳐서 자식이 죄를 지었다면 결국은 죄의 원인을 제공한 죄가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 손은 깨끗해도 내가 범죄케 한 사람이 있는 한 나도 죄인인 것입니다. 넷째, 정당화 내지 합법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우상화해 버리는 죄로, 이것은 죄의 극치입니다. 이 죄는 회개하지 않음으로 계속되는 죄가 뿌리를 내려 성장하는 것으로, 뿌리깊은 죄입니다. 그러면, 왜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회개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뿌리가 너무 깊어 그 뿌리가 빠지기 전에는 회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한마디만 하면 될 것 같은데 회개는 되지 않고 계속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바로 죄의 특성이요, 죄의 노예 된 자의 비참한 운명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은 이 중요한 문제를 심각하게 분석하고 파헤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그 불경건함과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죄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신성을 부인할 때 죄가 나타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고귀한 존재인데 이 신성을 부인하는 순간에는 그대로 수렁에 빠져 동물화하고 물질화하여 비인간적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 존재 자체가 흐려지므로 죄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 자신을 아는 두 가지에서 성립된다"고 칼빈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자신도 모르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야 자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불 신앙이 이루어지고 이 불신앙이 뿌리가 되어 부득이 엄청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부인함으로 죄가 됩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자유를 통하여, 이성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 양심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당신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데, 그 알아지는 지식을 부인하려고 듭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벌써 그 순간부터 죄로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천당과 지옥을 믿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천당과 지옥을 인정하면 자기 자신은 틀림없이 지옥을 갈 것이니 부득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이 있다 한다고 해서 있어지고, 없다 한다고 해서 있는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구태여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왜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해야 스스로 초인이 되는 것 같고 자기 죄가 그런대로 견딜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어느 집사님이 사업을 좀 크게 하다가 부도를 내어 대단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수라장이 되고 집마저 내어놓게 되자 그는 병까지 얻어 그야말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는 심방을 가서 어떻게 어떤 말씀으로 위로를 드릴까 하고 잠깐 생각하고 있는데, 그 집사님이 먼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느냐, 하나님은 나를 저주하셨거나 버렸다는 등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아직도 이분이 정신차리지 못했음을 보고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집사님이 망한 것을 보니 분명히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기에 이 사업이 망한 것으로 볼 수 없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수건이 다 젖도록 몸부림을 치며 울었습니다. 한 10분 간을 정신없이 울더니 "목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만일 여기서 망하지 않았다면 내 몸은 물론 영혼까지 다 망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업이 망하고 육체가 병들었지만 영혼만은 살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라고 고백을 했고 사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는 산기슭으로 쫓겨가서 천막을 치고 닭 몇 마리 기르면서 재기했는데, 후에 장로님이 되었고, 천막 치고 재기한 그 자리에 교회를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 기분대로, 이래서 하나님이 안 계시고 저래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간단하게 말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탈리아에 가서 폼페이 시를 보면 왜 화산이 터져서 그 도시가 망했는가를 보는 자마다 느끼게 됩니다. 폼페이가 망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산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인정하기를 원하시고 긍정해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 지식을 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 D.)는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름대로의 최선의 목적에 부합되는 것임을 안다. 비록 나의 소원과 다를지라도…"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이 지식을 부인할 때에 그것이 죄의 뿌리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충분하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음으로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그 영광을 드리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고 나아가서 우상을 섬기게 되므로 자연히 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경배하지 못하면, 그 순간에 죄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올 때마다 바른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넷째는, 감사치도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때 원망이 생기고, 감사를 잃어버릴 때에 불평과 불만이 생기게 됩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자신을 비참하게 보며 울부짖었습니다.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아주 괴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감사로 비약하고 있습니다. 비참한 존재가 감사하는 순간 거룩해지고, 암담한 세상이 밝고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시험과 고민과 죄를 이기게 했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건강에 대해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사실 오늘도 건강한 몸으로 교회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건강을 생각하면 저도 늘 감사하는 중에 있습니다만 충분한 감사는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30여 년 동안 목회하는 중에 아파서 강단에 서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강의도 하고 설교도 합니다만 아파서 못 간다고 취소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많은 성도들께서 기도해 주시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 건강에 대한 감사의 보답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건강에 대한 감사 헌금은 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을 고생 하고 살아나온 다음에 하게 됩니다. 입원비 대느라고 힘이 들었지만 이 때는 꾸어서라도 감사 헌금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한번 혼이 나고야 건강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한번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건강에 대해 감사케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병원에 한번 들어가야 아차!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늘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선 범사에 감사하면 모든 원망과 불평은 이길 수 있고 사라집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양쪽 부모님들이 갖은 수고 다해 놓고 이제 한숨 놓으시며 기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 중 어느 한 분이 안 계시면 그 날의 잔치는 좀 우울하고, 특히 신부들은 많이 웁니다. 그래서 저는 신랑 신부들께 부탁하기를,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부모님들의 수고에 대해서 평생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감사하여 마땅한 자가 감사하지 못하면 원망하게 되며 이 원망은 마귀의 시험으로 직결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마귀가 시험하지 못하나, 감사가 끊어지면 벌써 마귀는 불평하게 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분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나간 모든 일에 감사하고, 다가오는 모든 일도 그 은혜 안에서 소화하고 소망 가운데 긍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허망해지고 마음이 어두워져 자신도 모르게 죄의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내 입에서 감사가 떠나면 마귀가 원망하는 마음을 그 입에 주입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받은 바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감사해야 죄를 이기고 시험을 이기고 허무함을 이겨, 어떤 역경과 환난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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