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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듣는 자세(사도행전 10장 24절~33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예수님은 복음의 역사를 이루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이 광야는 대단히 무서운 곳입니다. 몇년 전에 어느 목사님이 예수께서 금식하신 그 곳을 답사하기 위해 지프차를 타고 광야로 나갔다가 차가 고장이 나서 남은 콜라를 마시고 더 견디지 못해 햇볕에 목말라 죽은 일이 있습니다. 이런 무서운 광야에서 예수님은 40주 40야를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몹시 주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바로 그 시간에 찾아와서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즉 배고픔을 면하라고 시험을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바로 세계의 문제이며 우주의 문제이고 역사의 문제로서, 바로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사흘을 굶으면 안 나는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의 깊은 의미는 사흘쯤 굶게 되면 더러는 도둑질을 해도 괜찮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가난하면 죄를 지어도 괜찮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시작도 끝도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40일을 금식한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말씀이 먼저입니다. 사람은 그 어느 경우에도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삽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요 우주적인 해답입니다.
기독교를 그 책(the Book)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 그 종교마다 경전이 있습니다. 회교의 코란이 있고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있으며 불교의 불경이 있듯이 종교마다 가지고 있는 경전이 있긴 합니다만 그 경전과 종교와의 관계가 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기독교가 있어서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있어서 기독교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의 종교입니다.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에 의해서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영감된 책이요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라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한 법칙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어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살아 있는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며, 오늘도 우리 앞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시어 친히 말씀하셨으며 사도들의 선교적 죽음을 통한 증거로써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으로 기록되어서 성경책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기록된 계시입니다. 물론 이 말씀의 중심부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또 구약에서는 예언과 예표로 말씀하셨고 신약에서는 역사적으로 현실 속에서 증거하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스스로 방편을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도적으로 역사 하는데 세 가지 방편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으로 객관적으로 계시를 방편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를 고용하십니다. 사실 성경이 있어도 누군가가 전달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누군가가 전해 주어야 하고 가르쳐 주어야 말씀이 말씀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간다게 내시의 병거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병거를 탄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는 것을 보고 빌립은 묻습니다. "그 성경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때 내시는 말씀은 읽기는 하지만 가르쳐 주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알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빌립이 병거를 같이 타고서 이사야서 말씀을 가르치고, 그 순간 내시는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고, 세례를 받았으며, 동부로 돌아가서 교회를 최초로 세운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디오피아의 교회가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존속하게 된 중요한 역할을 한 자가 바로 이 내시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전도자를 고용하십니다. 오늘도 누군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시어 전파하게 하십니다. 셋째는 성령을 고용하십니다. 아무리 말씀이 전해져도 마음이 닫히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성령의 역사가 동시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의 고백과 자세입니다. 우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나의 고백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이에 따라서 우리의 몸도 분명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드리는 자세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끔 예배드리는 성도 중에서 팔짱을 끼거나 비스듬히 앉아 있는 분들을 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런 자세는 좋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어른들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정중해야 하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팔짱을 끼거나 자세가 비뚤어져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에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잠옷 바람으로 성경을 읽다가 할아버지께 여러 번 혼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이 그런 자세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경우라도 새벽 기도에 나올 때에 정장을 합니다. 어른들을 만나러 갈 경우에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심을 하는데,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입어서야 되겠습니까? 몸의 자세, 마음의 자세가 준비되지 않고는 말씀이 잘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가령 시아버지께서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침대에 누워서 전화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교양이 있는 며느리라면 어른이 보이지 않더라도 음성이 들리면 얼른 옷깃을 여미는 것이 도리입니다. 몸의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도 반드시 바른 몸가짐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요즘 중국과 우리나라가 빈번하게 소식을 주고받는데, 저희 교회 새벽 예배가 그대로 그 곳에 방송으로 전해져 많은 분들로부터 잘 듣고 있다고 편지가 옵니다. 또한 방문하고 오시는 분들에게서 그 곳의 새벽 예배의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5시 30분에 드리는 새벽 예배가 그 곳에서는 4시 30분에 방송되는데, 그들은 비록 고물 라디오 앞에서지만 온 식구가 모여 방송되기 30분전부터 무릎꿇고 기도하고 나서 말씀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세부터 가다듬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다음은 영성의 자세를 바로 하고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결국 부모의 말씀을 귀담아 잘 듣고 순종하는 것 아닙니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좋고 재미있으며 또한 마음이 그리로 쏠리면 사랑하고 있는 표시입니다. 반대로 한두 마디 이야기조차 듣기 싫게 되면 이미 사랑은 식은 사이입니다. 그의 말을 사랑하고 그 말에 귀가 기울여지면 사랑은 시작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를 사랑하고, 말씀이 전해지는 예배 시간을 사랑하고, 말씀이 선포되는 성전을 사랑하면, 이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다윗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신․구약을 통해서 다윗이라는 이름이 무려 800번이나 나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사람 중에서는 가장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윗의 신앙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소서, 지키겠습니다. 깨닫게 하소서, 따르겠습니다. 말씀은 나의 등불입니다. 내 생명입니다. 나의 사랑입니다"라고 말씀에 대한 그의 애정이 구구절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문에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의 고백은 마치 상사병이 난 사람처럼 사모하는 정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는 피난길에 다닐 때에도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수가 없어 안타까워했고, 여호와의 전을 사모하여 영혼이 쇠약해졌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하나님의 전에 가고 싶어 안타까워하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조금 전에도 어느 분이 임종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만, 임종이 가까워서 누워 있는 성도들은 그들의 소원이 건강한 몸으로 한번 더 교회에 나가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봅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이렇게 간절한 소원인데, 지금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교회는 우리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러기에 여행을 다니다가도 지나는 길에 띄엄띄엄 교회가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체화된 것입니다.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는 백부장으로서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분명하게 증거하기를 그가 말씀을 받아서 경건해진 것이 아니고 이미 경건하여 기도하고 구제해서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해서 그 응답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신학적인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제 감사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고넬료의 말씀 받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절하는 마음입니다. 그는 말씀을 듣기 위해 베드로를 모셔와서 엎드려 절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군인으로서 지금은 식민지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지체는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여기에 비해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로서 촌사람입니다. 외모로 보면 두 사람이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온 집안과 더불어 대기하고 있다가 베드로가 오자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합니다. 이 절의 뜻은 원래 발에 입을 맞춘다는 뜻입니다. 그는 베드로가 누구인지 알 바가 아닙니다. 단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는 분이기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너희를 영접한 것은 나를 영접한 것이요, 나를 영접한 것은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넬료는 복음을 가지고 온 베드로이기에 그를 극진하게 영접하고 그 앞에 절을 했습니다. 보기는 베드로를 보았지만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얼마나 공손하게 정성을 들여 무릎을 꿇었던지 우쭐하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황송해서 "나도 사람이니 이러지 말라"고 절하는 고넬료를 말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서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또한번 신학적인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서 감동을 받음으로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여러 가지 문화적 장애, 율법적인 장애, 자기의 습관적인 장애가 다 무너지게 됩니다. 신학적인 표현을 하면, 율법을 극복하고 은혜가 승리하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은혜로 율법을 극복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내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을 너희도 알거니와" 즉 베드로와 그들과는 만날 수가 없는 관계이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큰 역사가 일어나는 순간이므로 만나도 안 되고 그 집에 들어가도 안 되는 것을 그대로 만나고 그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순간이 바로 율법과 문화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놀라운 순간인 것입니다.
둘째로 듣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고넬료의 집안들은 다 듣기를 원하는---영접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신뢰와 존경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우선 말씀을 들어보고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듣고자 하는 마음이 준비된 옥토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든지 한번 들어보고 순종하겠다고 벼르는데,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고넬료는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또 하나의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씀만 하소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가라고 하시면 가고 오라고 하시면 오겠으니 주님은 말씀만 하시라는 대단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크게 칭찬하십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큰복을 허락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가지고 오는 전도자에 대한 바른 영접의 자세이며, 이 자세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말씀에 대해서 간절한 순간이 언제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종시간이 가까이 오면 목사가 무슨 말을 하든 받아들일 자세가 잘 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 말씀을 의지하고 이제 하늘나라에 가야겠으니 간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요즘 입시철이 가까이 오니 수험생 부모님들의 마음은 정말 간절합니다. 교역자들을 만나기만 하면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우리 아이 이름이 누구누구입니다"라고 매달립니다. 어떤 학생은 자기 부모는 예수를 안 믿으니 목사님께서 갑절로 기도해 줘야 한다고 떼를 쓰기도 합니다. 아무튼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합니까? 말씀을 듣고 싶고 받아들이고 싶은 이 간절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셋째는 하나님 앞에 있는 마음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발하면,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베드로 당신의 말씀을 듣고자 하오니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하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이런 관계를 카리스마적 관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우리에게 전도자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말씀을 주셨으니 얼마나 중요한 관계입니까? 이런 카리스마적 관계에서 말씀을 받을 때에 은혜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 서서 말씀을 전할 때에 여러분들은 제 얼굴을 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귀는 주님의 음성에 기울여서 하나님과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이 고넬료처럼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앙적 자세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D.L.무디 선생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이 영감된 책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이론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고 신학적 변증도 있습니다만 무디 선생님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성경이 내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오." 사실입니다. 성경을 바른 자세로 읽으면 성경 자체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북한을 방문하고 온친구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근에 평양에도 교회가 하나 세워졌다고 합니다. 여기 사진이 있는데 여러분들께서는 잘 보이지 않겠습니다만 지난 추수감사절에 약 5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제 친구 목사는 평양 거리에 일부러 성경책을 끼고 다녔다는데 안내자가 늘 함께 다녔는데도 어느 나이 많은 할머니가 줄곧 따라오시더니 "선생님, 그 책 성경이지요? 나에게 줄 수 없습니까?"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이 성경을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할머니가 이 책을 가지고 계시다가는 큰 수난을 당하실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라고 여쭈었다는 것입니다. 이 할머니의 대답은 그런 것은 벌써 각오했으니 이제 보고 싶은 성경이나 보고 죽겠다고 생명을 내놓을 결심으로 성경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들은 손안에 귀한 성경책이 늘 있고 그 말씀이 오늘도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성경을 읽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이 나를 만나 주십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십니다.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가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지켜 주십니다. 성경은 나를 가르치고 나를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갈 때까지 지켜줄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지식이나 지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한 도덕적 계율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이요 약속이며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옷깃을 여미고 마음의 귀를 귀울이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며,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귀한 축복이 우리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사도행전 10장 24절~33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예수님은 복음의 역사를 이루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이 광야는 대단히 무서운 곳입니다. 몇년 전에 어느 목사님이 예수께서 금식하신 그 곳을 답사하기 위해 지프차를 타고 광야로 나갔다가 차가 고장이 나서 남은 콜라를 마시고 더 견디지 못해 햇볕에 목말라 죽은 일이 있습니다. 이런 무서운 광야에서 예수님은 40주 40야를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몹시 주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바로 그 시간에 찾아와서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즉 배고픔을 면하라고 시험을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바로 세계의 문제이며 우주의 문제이고 역사의 문제로서, 바로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사흘을 굶으면 안 나는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의 깊은 의미는 사흘쯤 굶게 되면 더러는 도둑질을 해도 괜찮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가난하면 죄를 지어도 괜찮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시작도 끝도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40일을 금식한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말씀이 먼저입니다. 사람은 그 어느 경우에도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삽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요 우주적인 해답입니다.
기독교를 그 책(the Book)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 그 종교마다 경전이 있습니다. 회교의 코란이 있고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있으며 불교의 불경이 있듯이 종교마다 가지고 있는 경전이 있긴 합니다만 그 경전과 종교와의 관계가 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기독교가 있어서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있어서 기독교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의 종교입니다.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에 의해서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영감된 책이요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라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한 법칙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어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살아 있는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며, 오늘도 우리 앞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시어 친히 말씀하셨으며 사도들의 선교적 죽음을 통한 증거로써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으로 기록되어서 성경책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기록된 계시입니다. 물론 이 말씀의 중심부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또 구약에서는 예언과 예표로 말씀하셨고 신약에서는 역사적으로 현실 속에서 증거하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스스로 방편을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도적으로 역사 하는데 세 가지 방편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으로 객관적으로 계시를 방편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를 고용하십니다. 사실 성경이 있어도 누군가가 전달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누군가가 전해 주어야 하고 가르쳐 주어야 말씀이 말씀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간다게 내시의 병거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병거를 탄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는 것을 보고 빌립은 묻습니다. "그 성경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때 내시는 말씀은 읽기는 하지만 가르쳐 주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알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빌립이 병거를 같이 타고서 이사야서 말씀을 가르치고, 그 순간 내시는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고, 세례를 받았으며, 동부로 돌아가서 교회를 최초로 세운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디오피아의 교회가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존속하게 된 중요한 역할을 한 자가 바로 이 내시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전도자를 고용하십니다. 오늘도 누군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시어 전파하게 하십니다. 셋째는 성령을 고용하십니다. 아무리 말씀이 전해져도 마음이 닫히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성령의 역사가 동시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의 고백과 자세입니다. 우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나의 고백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이에 따라서 우리의 몸도 분명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드리는 자세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끔 예배드리는 성도 중에서 팔짱을 끼거나 비스듬히 앉아 있는 분들을 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런 자세는 좋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어른들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정중해야 하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팔짱을 끼거나 자세가 비뚤어져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에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잠옷 바람으로 성경을 읽다가 할아버지께 여러 번 혼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이 그런 자세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경우라도 새벽 기도에 나올 때에 정장을 합니다. 어른들을 만나러 갈 경우에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심을 하는데,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입어서야 되겠습니까? 몸의 자세, 마음의 자세가 준비되지 않고는 말씀이 잘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가령 시아버지께서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침대에 누워서 전화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교양이 있는 며느리라면 어른이 보이지 않더라도 음성이 들리면 얼른 옷깃을 여미는 것이 도리입니다. 몸의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도 반드시 바른 몸가짐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요즘 중국과 우리나라가 빈번하게 소식을 주고받는데, 저희 교회 새벽 예배가 그대로 그 곳에 방송으로 전해져 많은 분들로부터 잘 듣고 있다고 편지가 옵니다. 또한 방문하고 오시는 분들에게서 그 곳의 새벽 예배의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5시 30분에 드리는 새벽 예배가 그 곳에서는 4시 30분에 방송되는데, 그들은 비록 고물 라디오 앞에서지만 온 식구가 모여 방송되기 30분전부터 무릎꿇고 기도하고 나서 말씀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세부터 가다듬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다음은 영성의 자세를 바로 하고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결국 부모의 말씀을 귀담아 잘 듣고 순종하는 것 아닙니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좋고 재미있으며 또한 마음이 그리로 쏠리면 사랑하고 있는 표시입니다. 반대로 한두 마디 이야기조차 듣기 싫게 되면 이미 사랑은 식은 사이입니다. 그의 말을 사랑하고 그 말에 귀가 기울여지면 사랑은 시작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를 사랑하고, 말씀이 전해지는 예배 시간을 사랑하고, 말씀이 선포되는 성전을 사랑하면, 이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다윗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신․구약을 통해서 다윗이라는 이름이 무려 800번이나 나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사람 중에서는 가장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윗의 신앙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소서, 지키겠습니다. 깨닫게 하소서, 따르겠습니다. 말씀은 나의 등불입니다. 내 생명입니다. 나의 사랑입니다"라고 말씀에 대한 그의 애정이 구구절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문에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의 고백은 마치 상사병이 난 사람처럼 사모하는 정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는 피난길에 다닐 때에도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수가 없어 안타까워했고, 여호와의 전을 사모하여 영혼이 쇠약해졌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하나님의 전에 가고 싶어 안타까워하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조금 전에도 어느 분이 임종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만, 임종이 가까워서 누워 있는 성도들은 그들의 소원이 건강한 몸으로 한번 더 교회에 나가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봅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이렇게 간절한 소원인데, 지금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교회는 우리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러기에 여행을 다니다가도 지나는 길에 띄엄띄엄 교회가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체화된 것입니다.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는 백부장으로서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분명하게 증거하기를 그가 말씀을 받아서 경건해진 것이 아니고 이미 경건하여 기도하고 구제해서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해서 그 응답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신학적인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제 감사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고넬료의 말씀 받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절하는 마음입니다. 그는 말씀을 듣기 위해 베드로를 모셔와서 엎드려 절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군인으로서 지금은 식민지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지체는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여기에 비해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로서 촌사람입니다. 외모로 보면 두 사람이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온 집안과 더불어 대기하고 있다가 베드로가 오자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합니다. 이 절의 뜻은 원래 발에 입을 맞춘다는 뜻입니다. 그는 베드로가 누구인지 알 바가 아닙니다. 단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는 분이기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너희를 영접한 것은 나를 영접한 것이요, 나를 영접한 것은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넬료는 복음을 가지고 온 베드로이기에 그를 극진하게 영접하고 그 앞에 절을 했습니다. 보기는 베드로를 보았지만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얼마나 공손하게 정성을 들여 무릎을 꿇었던지 우쭐하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황송해서 "나도 사람이니 이러지 말라"고 절하는 고넬료를 말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서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또한번 신학적인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서 감동을 받음으로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여러 가지 문화적 장애, 율법적인 장애, 자기의 습관적인 장애가 다 무너지게 됩니다. 신학적인 표현을 하면, 율법을 극복하고 은혜가 승리하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은혜로 율법을 극복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내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을 너희도 알거니와" 즉 베드로와 그들과는 만날 수가 없는 관계이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큰 역사가 일어나는 순간이므로 만나도 안 되고 그 집에 들어가도 안 되는 것을 그대로 만나고 그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순간이 바로 율법과 문화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놀라운 순간인 것입니다.
둘째로 듣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고넬료의 집안들은 다 듣기를 원하는---영접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신뢰와 존경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우선 말씀을 들어보고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듣고자 하는 마음이 준비된 옥토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든지 한번 들어보고 순종하겠다고 벼르는데,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고넬료는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또 하나의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씀만 하소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가라고 하시면 가고 오라고 하시면 오겠으니 주님은 말씀만 하시라는 대단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크게 칭찬하십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큰복을 허락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가지고 오는 전도자에 대한 바른 영접의 자세이며, 이 자세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말씀에 대해서 간절한 순간이 언제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종시간이 가까이 오면 목사가 무슨 말을 하든 받아들일 자세가 잘 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 말씀을 의지하고 이제 하늘나라에 가야겠으니 간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요즘 입시철이 가까이 오니 수험생 부모님들의 마음은 정말 간절합니다. 교역자들을 만나기만 하면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우리 아이 이름이 누구누구입니다"라고 매달립니다. 어떤 학생은 자기 부모는 예수를 안 믿으니 목사님께서 갑절로 기도해 줘야 한다고 떼를 쓰기도 합니다. 아무튼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합니까? 말씀을 듣고 싶고 받아들이고 싶은 이 간절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셋째는 하나님 앞에 있는 마음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발하면,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베드로 당신의 말씀을 듣고자 하오니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하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이런 관계를 카리스마적 관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우리에게 전도자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말씀을 주셨으니 얼마나 중요한 관계입니까? 이런 카리스마적 관계에서 말씀을 받을 때에 은혜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 서서 말씀을 전할 때에 여러분들은 제 얼굴을 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귀는 주님의 음성에 기울여서 하나님과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이 고넬료처럼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앙적 자세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D.L.무디 선생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이 영감된 책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이론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고 신학적 변증도 있습니다만 무디 선생님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성경이 내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오." 사실입니다. 성경을 바른 자세로 읽으면 성경 자체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북한을 방문하고 온친구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근에 평양에도 교회가 하나 세워졌다고 합니다. 여기 사진이 있는데 여러분들께서는 잘 보이지 않겠습니다만 지난 추수감사절에 약 5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제 친구 목사는 평양 거리에 일부러 성경책을 끼고 다녔다는데 안내자가 늘 함께 다녔는데도 어느 나이 많은 할머니가 줄곧 따라오시더니 "선생님, 그 책 성경이지요? 나에게 줄 수 없습니까?"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이 성경을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할머니가 이 책을 가지고 계시다가는 큰 수난을 당하실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라고 여쭈었다는 것입니다. 이 할머니의 대답은 그런 것은 벌써 각오했으니 이제 보고 싶은 성경이나 보고 죽겠다고 생명을 내놓을 결심으로 성경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들은 손안에 귀한 성경책이 늘 있고 그 말씀이 오늘도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성경을 읽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이 나를 만나 주십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십니다.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가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지켜 주십니다. 성경은 나를 가르치고 나를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갈 때까지 지켜줄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지식이나 지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한 도덕적 계율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이요 약속이며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옷깃을 여미고 마음의 귀를 귀울이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며,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귀한 축복이 우리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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