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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보는 사람 (민13:25~33)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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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보는 사람 (13:2533)

 

사십 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약 두 달 전에 저는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북극을 넘어 앵커리지에 내린 적이 있습니다. 가는 도중에 광활하게 넓고 얼어붙은 땅 알래스카를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약 백 년 전인 1867년에 소련이 미국에 이 땅을 팔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당시 720만불로 싸게 팔아 넘겼으니 지금은 소련이 얼마나 후회하고 있겠습니까? 알래스카는 군사전략상으로도 요지일 뿐 아니라 기름가스 등 각종 지하자원이 많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소련은 100년 앞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얼어붙은 볼품없는 땅인데다가 국경을 지키자니 군사들을 보내야 하는 등 귀찮게만 생각된 나머지 쉽사리 싸구려로 미국에 넘겼는데, 오늘날에 와서 생각해보니 얼마나 잘못했고 큰 실수였습니까? 그들은 땅 속 깊은 곳을 보지 못했고 먼 훗날의 일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로 본다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보여지느냐, 그리고 어떻게 보고 행동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 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물질로 보는 견해입니다. 정신 세계는 물론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진리까지도 물질에 근거한 것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도 결국은 육체적 생식 본능의 발로라고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물적(物的)으로 육적(肉的)으로만 보려 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둘째는,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원리적으로만 보는 견해입니다.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그 어떤 원리가 있지 않겠는가 해서 작은 지식을 발동하여 그 지식의 척도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세상일이 어디 생각대로만 되어집니까?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부족하고 지극히 제한된 능력인데, 이것을 믿고 의존하고 이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겠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셋째는 믿음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깊은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상징적 견해를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게 보고 멀리 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11:1)라고 말했습니다.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그리고 어떻게 보여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볼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진노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깜짝 놀랄만큼 하나님은 공의롭고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그렇게 깊숙이 감추어 놓은 비밀인데도 백일하에 다 드러내어서 심판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 심판과 진노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그 놀라운 능력과 경륜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이 있음도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때는 매맞는 줄 알았는데 사랑이 있었고 거기에 축복이 있더란 말입니다. 바로 보고 바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에 430년 동안 긴 세월을 대대로 노예 생활을 해 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이 430년이지 어디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노예 부모 밑에서 노예로 태어난 이 사람들이 어찌 자유를 알며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요 숙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출애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먼저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그들을 건져내십니다. 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건너갈 수 없다고 하는 무서운 신 광야를 육십만 대군이 건너갔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덮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달아 주셔서 광야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또한 먹을 것이 없을 때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고 목마르면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길을 막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원수들을 만날 때에는 싸워서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능력 아닌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 넓은 광야를 지나 지금 요단강 가까이까지 왔습니다. 이 강만 지나면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런 시점에 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마지막 결정적인 시간에 와서 실수를 하게 됩니까? 지금까지 은혜로 왔고 믿음으로 왔으니 이제 남은 길도 믿음으로 가면 잘 마무리될 것인데 엉뚱하게도 인간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스파이를 보내어 정보 수집을 하고 작전 계획을 세워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다는 인간적인 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발상 자체부터가 불신앙적인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애당초 열 가지 재앙으로부터 시작해서 광야를 지나 요단강 앞까지,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기들의 지혜로 일을 처리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그 지시직인 은혜와 허락적인 은혜만 따라 오던 백성들이 이제 와서 인본주의적인 생각, 즉 불신앙적인 인간의 지혜를 발동해서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백성들이 정탐꾼을 보내자고 와아하고 외칠 때에 모세는 이것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백성들의 뜻을 따르게 되고 하나님께서도 백성들의 뜻을 허락하십니다. 성경에는 종종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지만 백성들이 정 하겠다고 하면 시험적으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겠다고 야단할 때에 그 아버지가 막을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나가겠다고 고집하니 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시험 허락입니다. 또 사무엘상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우겠다고 야단할 때도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을 세우겠다 하니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졸라대니 어디 왕을 세워서 한번 고생 좀 해 보라고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지만 일단 허락해서 그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려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 시험 허락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두 지파의 대표자를 선발해서 가나안에 보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정탐을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같은 장소에 같은 사건을 동시에 보고 돌아왔으면서 본 것이 다르고 판단도 다르며 결론도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편견과 결론 없는 싸움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무엇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쪽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같은 사건을 놓고 어쩌면 그렇게도 정반대로 보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 땅에 대해서 모세와 아론 외의 열 명은 말하기를,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사람이 살 곳은 못된다고 악평을 합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니,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곳 사람들에 대해 열 명은 말하기를, 그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으니 우리가 그들 앞에서는 메뚜기 같아 도저히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성은 높고 견고해서 그 누구도 쳐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면 절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본 땅은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쳐들어가서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결론입니다. 불 신앙적인 사람들은 건망증이 심합니다. 왜냐하면 지난날 어떻게 믿음과 은혜로 살아왔는가를 다 기억하고 있다면 오늘과 내일도 믿음과 은혜로 살수 있음을 내다보아야 하는데, 어느 사이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인간적인 생각과 편견으로 절망하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열 명의 대표자들은 현상 중심적으로 보고 자기들을 보았기 때문에 세속적이요 불 신앙적인 결론을 내렸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고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허락을 믿었고 약속된 미래를 보면서 오늘과 내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낙천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학과 종말론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미래학이란 과거에 있은 일들을 논리적으로 잘 정리해서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이 반복될 것으로 예상해서 미래를 전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학의 결론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저 앞에 있는 종말론적인 약속을 믿고 그것으로부터 현재를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종말론적 역사관은 항상 소망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현상만 보지 말고 보다 깊게 보다 멀리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볼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가정에서는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자녀들로 인해 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왜 이래야만 합니까? 제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제가 머물렀던 기숙사 바로 옆에 아인슈타인 박사가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 앞을 함께 지나가던 미국 친구가 제게 아인슈타인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공부를 잘하지 못해 늘 낙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적부에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성적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이 성적표가 우리네 아들의 것이었다면 부모들은 울고 불면서 이제 망했다는 식으로 마치 다 끝난 것처럼 초상집 분위기를 연출하고 야단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그런 성적표를 들고 온 자식을 붙들고는 "너는 다른 아이들과 같으려고 하면 열등생이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과 다르려고 하면 너는 우등생이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라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한 면을 보았습니다. 아니, 자기 아들의 특수한 일면을 보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그 격려에 힘입어 그는 훗날에 아인슈타인 박사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유명한 박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성적표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 학창 시절에 성적이 우수했던 사람들이 다 훌륭하게 되었습니까? 공부 잘했다고 떠들던 사람들도 별것 아님을 보지 않습니까? 아니,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살아갑니까? 보다 깊게 보다 멀리 보며, 그리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사건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성적으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종합적으로 보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편견에 빠져 편견의 횡포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 예로 장님 코끼리 만진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장님들이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를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코끼리 코를 만졌기에 코끼리가 뱀같다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코끼리 다리를 만졌기에 코끼리는 기둥 같다고 말했으며, 또 한 사람은 귀를 만져 보았기에 코끼리는 부채 같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배를 만져 본 사람은 코끼리가 바람벽 같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 누구의 말이 옳습니까? 사실 그들의 말은 다 맞기도 하고 다 틀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순간의 편견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인식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객관적인 말 자체도 주관적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관에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조명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바른 사관(史觀)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바른 눈을 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역사관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 지향적이요 소망 지향적인 안목으로 사물을 보고 이웃을 보고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크신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요즘 정국이 시끄럽다 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큰일났다고, 마치 금방이라도 어떻게 되는 것처럼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우리들입니까? 언제는 우리가 정부 믿고 살았으며, 사람 믿고 살았습니까? 처음부터 믿었던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우리 민족과 함께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분명한데, 무슨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잘 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졌던 신앙적 안목을 가지고 내일을 보고 나라를 보자는 것입니다.

또한 수()의 우상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보면 10:2, 민주적인 평가로는 당연히 열 사람이 다수이기에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열 사람이 틀리고 두 사람이 옳았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 실정에서 바로 이 문제가 걱정되는 점입니다. 지도자가 백성에게 아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당장 몇 사람에게 지지를 받느냐 못 받느냐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 바른 길은 외롭습니다. 중요한 결정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고독하게 혼자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밀어붙여야 합니다. 혹 고집스럽게 보일 수도 있고 당장 보기에는 잘못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먼 훗날 역사가들이 판단해 줄 것이고 하나님이 판단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백성들의 눈치만 보고 무슨 정치를 하겠습니까? 여론에 이리 저리 밀려다녀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몇 프로가 지지하고 몇 프로가 반대한다는 그 비율에 의지해서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의 여호수아와 갈렙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그들이 옳았지만 백성들은 돌을 던졌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편을 들어 주셨고 그 백성들은 다 광야에 엎드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독한 두 사람의 편이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하나님 편에 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낙천가를 원합니다. 전부 망했느니 흥했느니 하고 벌벌 떠는 사람들로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 편에서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는 대로 신앙이 없는 사람은 가나안 땅을 보고 "불가능하다. 우리는 저들 앞에서 메뚜기 같다"고 부정적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가나안은 우리들의 것이다. 저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낙심이 없습니다. 만사가 낙천적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행치 아니한 모든 것은 죄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현실을 이해하고, 믿음 안에서 자신을 평가해야 합니다. 이 크고 놀라운 역사가 우리와 우리 민족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보는 사람 (13:2533)

 

사십 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약 두 달 전에 저는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북극을 넘어 앵커리지에 내린 적이 있습니다. 가는 도중에 광활하게 넓고 얼어붙은 땅 알래스카를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약 백 년 전인 1867년에 소련이 미국에 이 땅을 팔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당시 720만불로 싸게 팔아 넘겼으니 지금은 소련이 얼마나 후회하고 있겠습니까? 알래스카는 군사전략상으로도 요지일 뿐 아니라 기름가스 등 각종 지하자원이 많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소련은 100년 앞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얼어붙은 볼품없는 땅인데다가 국경을 지키자니 군사들을 보내야 하는 등 귀찮게만 생각된 나머지 쉽사리 싸구려로 미국에 넘겼는데, 오늘날에 와서 생각해보니 얼마나 잘못했고 큰 실수였습니까? 그들은 땅 속 깊은 곳을 보지 못했고 먼 훗날의 일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로 본다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보여지느냐, 그리고 어떻게 보고 행동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 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물질로 보는 견해입니다. 정신 세계는 물론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진리까지도 물질에 근거한 것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도 결국은 육체적 생식 본능의 발로라고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물적(物的)으로 육적(肉的)으로만 보려 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둘째는,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원리적으로만 보는 견해입니다.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그 어떤 원리가 있지 않겠는가 해서 작은 지식을 발동하여 그 지식의 척도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세상일이 어디 생각대로만 되어집니까?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부족하고 지극히 제한된 능력인데, 이것을 믿고 의존하고 이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겠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셋째는 믿음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깊은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상징적 견해를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게 보고 멀리 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11:1)라고 말했습니다.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그리고 어떻게 보여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볼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진노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깜짝 놀랄만큼 하나님은 공의롭고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그렇게 깊숙이 감추어 놓은 비밀인데도 백일하에 다 드러내어서 심판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 심판과 진노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그 놀라운 능력과 경륜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이 있음도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때는 매맞는 줄 알았는데 사랑이 있었고 거기에 축복이 있더란 말입니다. 바로 보고 바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에 430년 동안 긴 세월을 대대로 노예 생활을 해 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이 430년이지 어디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노예 부모 밑에서 노예로 태어난 이 사람들이 어찌 자유를 알며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요 숙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출애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먼저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그들을 건져내십니다. 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건너갈 수 없다고 하는 무서운 신 광야를 육십만 대군이 건너갔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덮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달아 주셔서 광야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또한 먹을 것이 없을 때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고 목마르면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길을 막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원수들을 만날 때에는 싸워서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능력 아닌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 넓은 광야를 지나 지금 요단강 가까이까지 왔습니다. 이 강만 지나면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런 시점에 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마지막 결정적인 시간에 와서 실수를 하게 됩니까? 지금까지 은혜로 왔고 믿음으로 왔으니 이제 남은 길도 믿음으로 가면 잘 마무리될 것인데 엉뚱하게도 인간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스파이를 보내어 정보 수집을 하고 작전 계획을 세워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다는 인간적인 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발상 자체부터가 불신앙적인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애당초 열 가지 재앙으로부터 시작해서 광야를 지나 요단강 앞까지,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기들의 지혜로 일을 처리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그 지시직인 은혜와 허락적인 은혜만 따라 오던 백성들이 이제 와서 인본주의적인 생각, 즉 불신앙적인 인간의 지혜를 발동해서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백성들이 정탐꾼을 보내자고 와아하고 외칠 때에 모세는 이것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백성들의 뜻을 따르게 되고 하나님께서도 백성들의 뜻을 허락하십니다. 성경에는 종종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지만 백성들이 정 하겠다고 하면 시험적으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겠다고 야단할 때에 그 아버지가 막을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나가겠다고 고집하니 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시험 허락입니다. 또 사무엘상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우겠다고 야단할 때도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을 세우겠다 하니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졸라대니 어디 왕을 세워서 한번 고생 좀 해 보라고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지만 일단 허락해서 그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려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 시험 허락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두 지파의 대표자를 선발해서 가나안에 보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정탐을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같은 장소에 같은 사건을 동시에 보고 돌아왔으면서 본 것이 다르고 판단도 다르며 결론도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편견과 결론 없는 싸움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무엇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쪽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같은 사건을 놓고 어쩌면 그렇게도 정반대로 보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 땅에 대해서 모세와 아론 외의 열 명은 말하기를,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사람이 살 곳은 못된다고 악평을 합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니,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곳 사람들에 대해 열 명은 말하기를, 그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으니 우리가 그들 앞에서는 메뚜기 같아 도저히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성은 높고 견고해서 그 누구도 쳐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면 절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본 땅은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쳐들어가서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결론입니다. 불 신앙적인 사람들은 건망증이 심합니다. 왜냐하면 지난날 어떻게 믿음과 은혜로 살아왔는가를 다 기억하고 있다면 오늘과 내일도 믿음과 은혜로 살수 있음을 내다보아야 하는데, 어느 사이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인간적인 생각과 편견으로 절망하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열 명의 대표자들은 현상 중심적으로 보고 자기들을 보았기 때문에 세속적이요 불 신앙적인 결론을 내렸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고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허락을 믿었고 약속된 미래를 보면서 오늘과 내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낙천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학과 종말론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미래학이란 과거에 있은 일들을 논리적으로 잘 정리해서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이 반복될 것으로 예상해서 미래를 전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학의 결론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저 앞에 있는 종말론적인 약속을 믿고 그것으로부터 현재를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종말론적 역사관은 항상 소망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현상만 보지 말고 보다 깊게 보다 멀리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볼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가정에서는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자녀들로 인해 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왜 이래야만 합니까? 제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제가 머물렀던 기숙사 바로 옆에 아인슈타인 박사가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 앞을 함께 지나가던 미국 친구가 제게 아인슈타인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공부를 잘하지 못해 늘 낙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적부에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성적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이 성적표가 우리네 아들의 것이었다면 부모들은 울고 불면서 이제 망했다는 식으로 마치 다 끝난 것처럼 초상집 분위기를 연출하고 야단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그런 성적표를 들고 온 자식을 붙들고는 "너는 다른 아이들과 같으려고 하면 열등생이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과 다르려고 하면 너는 우등생이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라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한 면을 보았습니다. 아니, 자기 아들의 특수한 일면을 보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그 격려에 힘입어 그는 훗날에 아인슈타인 박사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유명한 박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성적표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 학창 시절에 성적이 우수했던 사람들이 다 훌륭하게 되었습니까? 공부 잘했다고 떠들던 사람들도 별것 아님을 보지 않습니까? 아니,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살아갑니까? 보다 깊게 보다 멀리 보며, 그리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사건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성적으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종합적으로 보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편견에 빠져 편견의 횡포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 예로 장님 코끼리 만진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장님들이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를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코끼리 코를 만졌기에 코끼리가 뱀같다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코끼리 다리를 만졌기에 코끼리는 기둥 같다고 말했으며, 또 한 사람은 귀를 만져 보았기에 코끼리는 부채 같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배를 만져 본 사람은 코끼리가 바람벽 같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 누구의 말이 옳습니까? 사실 그들의 말은 다 맞기도 하고 다 틀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순간의 편견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인식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객관적인 말 자체도 주관적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관에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조명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바른 사관(史觀)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바른 눈을 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역사관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 지향적이요 소망 지향적인 안목으로 사물을 보고 이웃을 보고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크신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요즘 정국이 시끄럽다 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큰일났다고, 마치 금방이라도 어떻게 되는 것처럼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우리들입니까? 언제는 우리가 정부 믿고 살았으며, 사람 믿고 살았습니까? 처음부터 믿었던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우리 민족과 함께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분명한데, 무슨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잘 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졌던 신앙적 안목을 가지고 내일을 보고 나라를 보자는 것입니다.

또한 수()의 우상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보면 10:2, 민주적인 평가로는 당연히 열 사람이 다수이기에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열 사람이 틀리고 두 사람이 옳았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 실정에서 바로 이 문제가 걱정되는 점입니다. 지도자가 백성에게 아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당장 몇 사람에게 지지를 받느냐 못 받느냐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 바른 길은 외롭습니다. 중요한 결정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고독하게 혼자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밀어붙여야 합니다. 혹 고집스럽게 보일 수도 있고 당장 보기에는 잘못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먼 훗날 역사가들이 판단해 줄 것이고 하나님이 판단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백성들의 눈치만 보고 무슨 정치를 하겠습니까? 여론에 이리 저리 밀려다녀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몇 프로가 지지하고 몇 프로가 반대한다는 그 비율에 의지해서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의 여호수아와 갈렙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그들이 옳았지만 백성들은 돌을 던졌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편을 들어 주셨고 그 백성들은 다 광야에 엎드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독한 두 사람의 편이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하나님 편에 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낙천가를 원합니다. 전부 망했느니 흥했느니 하고 벌벌 떠는 사람들로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 편에서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는 대로 신앙이 없는 사람은 가나안 땅을 보고 "불가능하다. 우리는 저들 앞에서 메뚜기 같다"고 부정적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가나안은 우리들의 것이다. 저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낙심이 없습니다. 만사가 낙천적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행치 아니한 모든 것은 죄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현실을 이해하고, 믿음 안에서 자신을 평가해야 합니다. 이 크고 놀라운 역사가 우리와 우리 민족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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