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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보는 사람(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한 아버지가 회갑을 맞이하여 그 아들이 크게 잔치를 벌이고 많은 친지들을 초청하여 아버지께 효도를 다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주인공인 아버지는 시종 침울한 표정이시더니, 자손들이 절을 하는 순서가 되자 드디어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까닭인즉 이 집안의 큰아들이 사업에 실패하여 형제간에 불화가 일어났고, 결국 가난한 형은 집을 나가버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혹시나 하고 기다려왔으나 끝내 큰아들이 나타나지 않아 말할 수 없이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형님 몫까지 합하여 더 큰 잔치를 배설하였건만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화평이 없는 가정은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의 근본은 무엇보다 화평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마른 떠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리라"(잠 17: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평과 화목이 없는 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화평이 우선이요 근본입니다. 만일에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가정은 큰 짐이요 지옥일 뿐입니다. 또한 화평이 없는 효도는 효도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가 형제들의 화목인데, 그것 없이 어찌 효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화목 없이 드리는 좋은 옷, 좋은 음식은 결코 효도가 아닙니다. 저는 이번 여행 중에 옛날에 공부하던 프린스턴 대학에 들러 교수님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곳에 유일하게 한국인으로서 신학대학 교수이신 이상현 목사님도 만나 뵙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프린스턴에 있는 한인 교회 어느 가정의 슬픈 소식도 듣게 되었습니다. 대학 교수인 남편과 의사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16세의 딸이 얼마 전에 가출하였다가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지만 부부간에 화목하지 못하여 자주 다투고 별거하는 등, 자녀들에게 늘 불안한 환경을 제공한 것입니다. 딸이 가출할 무렵에도 이 부부는 몹시 다투어서, 딸이 이런 집에서는 살수가 없다고 원망하며 뛰쳐나갔다는 것입니다. 설마 하고 기다리던 부부에게 자살이라는 비보가 날아왔으니 얼마나 기막힌 노릇입니까? 그 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화목하지 못했음을 뼈아프게 뉘우쳤지만, 그들을 위로할 말이 없더라고 이 목사님도 무척 마음 아파했습니다. 여러분, 화평하지 못한 가정에서 무슨 공부가 되며 어떻게 아이들에게 교육을 논할 수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화평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가정에서 교육적으로 한 가지 잘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어린아이들과 대화한다는 것이 고작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은 영리해서 그때마다 상황에 따라 잘 대답합니다마는 정말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심지어는 아이들에게 "엄마하고 살 거야, 아빠하고 살 거야?"라고 백해 무익한 질문들을 대화랍시고 하고 있습니다. 엄마 없는 아빠, 아빠 없는 엄마와 사는 자녀가 행복할 수 있다고 봅니까? 화평이 우선입니다. 아이들은 부부가 화평한 가정에서 자랄 때에만 인격적으로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생명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몫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 기형아가 태어나고 이상 심리, 정신병자, 자살 심리로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화평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오늘 본문은 화평이 최우선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언제나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넘쳐 있습니다. 오 리를 원하면 십 리를 가 주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용서할 때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가이없이 깊고 넓은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엄격한 윤리적 조건이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마 18:3). 무슨 뜻입니까?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고 경험적으로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목회 생활 3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가령 돈이 많은 사람, 가난한 사람, 지체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그리고 세계적인 학자 등 참으로 많은 여러 형태의 사람들과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훌륭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하나같이 어린아이와 같은 특징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마음들이 그렇게 깨끗하고 순진할 수가 없어 대하기가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저렇게 순진한 사람이 어떻게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저렇게도 촌스러운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아무튼 모두가 순수하며 깨끗한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사실, 좀 덜 여문 사람들이 건방지고 까다롭고 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문자 그대로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직도 여러분 중에 남편과 또는 아내와 팽팽히 맞서는 분이 계십니까? 원래 남편은 아내 앞에서 네 살배기입니다. 남편이 장군 같고 할아버지 같고, 대통령 같다면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이란 온 식구가 다같이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곳이 바로 낙원이요 참 가정입니다. 여기에 왜 엄한 법이 있고 복잡한 격식이 그렇게도 많아야 합니까? 특별히 하늘나라와 그 진리에 대하여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절대적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늘나라를 보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중생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령과 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으로, 상징적으로 바꿔 보면 결국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생한 교인이어야 말씀이 귀에 들어오고 화목도 할 수 있고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셋째,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크게 공로를 세우거나 구제 사업은 하지 못했어도 어쩔 수 없지만, 용서만은 절대 조건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용서만은 절대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넷째, 성령을 훼방한 자는 사함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감동케 하시는데, 이것을 거부하고 거역하면 다시는 회개할 기회나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에 대해서는 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의미합니다. 워싱턴에 있는 어는 백인(白人) 교회 학교에 흑인 아이 하나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사 실 흑인이 백인교회에 다니려면 따가운 눈총이나 여러 가지 서러움을 당하게 됩니다마는 이 철없는 어린아이는 늘 좋은 마음으로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그에게 "너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하고 물었답니다. 그 아이는 "저는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마음으로 나옵니다."라고 정말 예쁜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친절을 받겠다거나 누가 나를 인정해 주기를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안기는, 즉 예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마음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맑고 깨끗합니까? 여기에는 비판이나 불안이 있을리 없고, 그저 화평과 감사와 기쁨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예배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팔복(마 5:1 이하) 중에서 두 가지 축복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 두 말씀을 종합해서 "너희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절대 조건으로서 화평과 거룩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화평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로마식 화평입니다. 이 화평은 라틴어로 팍스(Pax)인데, 권력에 의한 평화를 뜻합니다. 즉 전쟁으로 승리하여 힘이 지배하는 평화로서, 겉으로는 조용한 것 같으나 그 속에는 억압이 있고 노예가 있는 권력의 화평입니다. 둘째는 헬라식 화평 '에이레네'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이요 철학적인 것으로 마음에 잇는 기쁨을 말합니다. 셋째는 히브리적인 화평으로 샬롬입니다. 이 화평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자유로운 평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바른 관계로 이루어지는 평화, 그리고 물질과는 관계에서까지도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번영과 충만함을 말합니다. 이 평화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요 긍정적이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고 충만함과 만족한 자유, 그리고 넘치는 기쁨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한 평화를 샬롬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평화의 보다 깊은 면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평과 거룩을 함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이 없는 거룩은 위선이요 독선이며 바리새주의적입니다. 화평을 모르는 거룩은 남을 정죄하며 자기만이 깨끗하고 의로운 척하게 됩니다. 여기에 분열과 교만과 때로는 불경건함까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함이 없는 화평은 화평이 아니라 야합으로, 그리스도인의 화평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묘지의 적막함과 같이 죽음 뒤에 있는 고요함을 뜻합니다. 이것을 일명 히피족의 평화라고 이름지어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히피족이 없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마는 원래 히피족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상당한 철학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물어 보면 세계에서 자기들만이 가장 평화주의자라고 자처하고 있으니까요. 그들의 세계에는 전쟁도 없고, 백인과 흑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구분이 없답니다. 그래서 남자하고도 살 수 있고 여자하고도 살 수 있어 모두가 사랑하고 모두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화평이 있는 것 같은데 거룩함이 없고 정결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타 락의 원인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싸움이 없는 곳은 극장과 무덤뿐이다'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극장에 가면 화면에 집중하느라고 조용합니다. 두말할 것 없이 공동묘지에는 말이 없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싸움터요 수라장이라는 말이니 얼마나 심각한 이야기입니까? 얼마 전 잡지에서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에 관한 상세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있는 인구가 약 50억인데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가 무려 일천만 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계산을 해보니 5백 명 중 한 명 꼴로 이 썩어 가는 병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썩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은 있는 것 같은데 거룩함이 없기에 이렇게 타락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과 거룩함은 언뜻 보기에는 이율배반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평과 거룩함과 사랑과 진리는 조화된 하나의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85편 10절에 보면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화평이 있고 거룩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9:50)고 하셨습니다. 소금이란 다른 물질에 들어가면 자신은 녹아 없어지지만 그 본질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자기 형체는 비록 녹아지지만 다른 물건을 짜게 만들어 자기 본질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소금입니다. 가령 배추나 무우에 소금을 치면 뻣뻣한 채소들이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이런 화목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만한 사람, 오만한 사람에게 소금 한번 쳐 서 다들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도 이런 뜻에서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화목한답시고 술집에 가고, 화목하다는 미명하에 도박을 하고 있으니 언제 화목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나 소금처럼 자기 본질을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희생함은 있으나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성결함과 깨끗한 본질을 지킬 때에만 화목이 있는 것입니다.
화평이란 사회적이고 공동체(community)적인 데 비해, 거룩함은 개인적인 경건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집니다. 신앙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요즘은 단결은 있으나 진리가 없고, 건설은 있으나 화평이 없습니다. 화평이란 자기 마음에 기쁨이 있고, 그리고 그가 속한 사회 전체에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가령 가정에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참고 견디기만 하면 화평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고요함일 뿐 화평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참는 것에서는 한(恨)을 만들며 화평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인격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정한 화평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문제를 소화하고 기뻐하는 자세입니다. 어느 부인이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으니, 전에는 보기 싫던 남편이 갑자기 좋아지며 사는 것이 그렇게도 즐거워졌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얼마나 좋은지 잠잘 때에도 눈을 뜨고 남편을 보면서 자고 싶다는 고백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화평이란 개인적이 기쁨과 감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은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최우선적으로 화목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화평케 하는 자, 즉 화목을 만드는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화평에는 적이 많습니다. 심리학적으로는 탐욕과 야망과 질투와 분노와 교만 등이 화평의 적입니다. 내 마음에 어두움이 있으면 이웃과의 화평이 없으며, 이웃과의 화평이 없으면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화평할 때에 비로소 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탈무드」에 보면, 하나님을 웃기기 위해서는 고아와 과부를 웃겨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내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더니 예수님께서 입구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심사하고 계시더랍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말씀대로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네가 방문해 주었으니 들어가라. 내가 배고플 때에 네가 먹을 것을 주었으니 들어가라.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네가 옷을 주었구나. 들어가라"고 한 사람씩 체크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별로 한 일이 없어 두려운 마음으로 제일 뒤에 섰는데, 예수께서 보시고 가까이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세히 들여다보시더니 "너는 먹을 것을 준 일도 없고 옷을 준 일도 없지만 내가 고아로 있을 때에 찾아와서 한번 웃게 해 주었으니 천당에 들어가라" 하셨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을 즐겁게 웃기는 일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남을 기쁘게 하여 화목하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마지막으로, 화평 없이는 누구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 12:14).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원수를 용서하고 화평을 찾았을 때 하늘이 열림을 보았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서로 쌍둥이였지만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욕심과 이권 때문에 서로 질시하다가 6년 후에야 비로소 재회하여 끌어안고 입맞추는 감격을 갖게 됩니다. 이 순간을 야곱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은 감격으로 형님을 본다고 형제간의 화해의 극치를 표현했습니다. 소유보다 명예보다 성취보다 화평이 우선임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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