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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됨을 알라(시편 46편 4절~11절)

by 【고동엽】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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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됨을 알라(시편 46편 4절~11절)


요즈음에는 길에서나 차안에서나 노상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수업을 하는 교실에서도 그것을 귀에 꽂은 채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앙케트를 내 보았습니다. 텔레비전을 본다든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면서 공부하는 것이 공부에 더 유익한지 해로운지를 물어 본 것입니다. 결과는 놀랍게도 응답자의 거의 100%가 '유익하다'는 대답이었다고 합니다.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를 해야 공부가 잘된다고 하더랍니다. 음악소리가 끊어지면 졸리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이 청소년들은 시끄러운 가운데에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태어나 시끄러운 가운데 자랐으니 소요체질(騷擾體質)이라고나 할까요? 시끄러우면 정신이 나고 조용하면 잡니다. 어쩌다 젊은 사람들이 음악감상 하는 데를 가보면 귀청이 떠나갈 것 같습니다. 귀도 그렇지만 우선 몸부터가 견딜 수 없어요. 음악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듣는 것입니다. 온몸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좋다고들 합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런 분위기에서 공부를 하고 있더라 그 말입니다.
기성 세대는 요즈음 청소년들의 그러한 경향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강한 자극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이제는 오히려 조용한 것이 이상합니다. 조용하면 불안합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보면 장난꾸러기들은 줄곧 떠들고 부수고 해야 부모들이 마음을 놓지, 그렇지 않고 조용해지면 겁이 납니다. 혹시 병이라도 들었나 해서 말입니다. 워낙 소요 가운데서 살고,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모두가 그 시끄러움에 종속되어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떠들고들 있습니다. 모두가 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의 하나가 명상(暝想)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명상'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명상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명상을 하면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든다고 해요. 그래서 좋은 생각이 들 때까지 명상을 하라고 말했습니다마는, 숫제 명상이라고는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찾아가는 일에는 서투릅니다. 다른 소리, 다른 말, 다른 어떤 소요에 수동적으로 끌려서 그에 대한 조건 반사적인 생각과 행위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명상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돌아와 명상을 익혀야 합니다. 자기 성찰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치 거울을 마주하고 있을 때처럼 조용히 자아(自我)의 모습을 점검해 볼 줄 아는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기 책임은 스스로가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이것은 내가 할 일이요, 여기까지는 나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자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책임을 사회의 모순성에 돌린다던가 누구에 겐가 책임을 전가하면서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듯이 입을 닦아 버리는 무책임성이야말로 오늘날의 크나큰 병폐입니다.
원망과 시기가 그칠 날 없습니다. 원망이란 제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데서 비롯됩니다. 50퍼센트만 내가 책임을 져도 원망은 없습니다. 자기 책임을 통째로 남에게 떠맡기려고 하는 데서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떠드는 마음, 내 목청에만 집착하는 마음, 그리고 격한 감정 속에는 아무런 일도 생각도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부지리(漁父之利)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중국의 고전인「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고사(故事)에서 유래된 말로, 쌍방이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제삼자가 애쓰지 않고 가로챈 이득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한 어부가 망태기를 메고 썰물 뒤의 바닷가에 나가 보았더니, 모래사장에 조개 하나가 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황새가 이 조개의 속살을 꽉 물었습니다. 그러자 조개는 입을 꽉 닫아 버렸습니다. 황새는 조개 살을 물고, 조개는 황새의 부리를 물고 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서로가 네가 놓아라, 네가 놓아라 하지만 둘 다 놓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고 있는 황새와 조개를 어부가 고스란히 거두어서 망태기에 집어넣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부는 힘도 안 들이고 공짜로 얻은 셈이고, 황새와 조개는 둘이 싸우다가 둘 다 먹히고 만 셈입니다.
옛날에는 남을 죽이고 자기가 살자고 해서 탈이었습니다. '나는 살고 너는 죽어야 한다'---이래서 탈이었는데, 요사이는 그것이 아닙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이렇게나 무서워졌습니다. 너 죽고 나는 살자고 한다면 적어도 길은 있겠는데,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그야말로 한사(限死)하는 싸움만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딱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벼랑에 이르러 말고삐를 잡아당기듯 정신을 가다듬어 자중(自重)하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미래를 내다보아야 합니다. 결코 근시안으로 내다보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 존재의 상실을 경계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을 항상 지니고 기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경건(敬虔)이 요구됩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서둘러야 할 시각에도 경건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 갑니다. 한 사람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지지 않을 양으로 이른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가면서 일했습니다. 산을 내려갈 때가 되어서 두 사람은 각자 수고한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일까요.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훨씬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더랍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다른 한 친구는 점잖게 설명합니다. "나는 10분씩 쉴 때마다 도끼 날을 갈았다네." 그러니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지요. 도끼 날 무뎌지는 것도 모르는 채 덮어놓고 열심만 낸다고 되겠습니까?
아무리 바쁘다 해도 경건의 시간---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성찰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만은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좋아했던 말씀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 힘찬 찬송은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하는 오늘의 시편 말씀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요, 내 편이 되시고 강한 성이 되신다---많은 사람에게 애송되고 우리도 함께 부르면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찬송입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어지럽고 시끄러운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불 신앙과 교만 때문입니다. 불 신앙적인 교만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폭력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 소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화목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격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심판자 위에 심판주가 있고, 재판하는 사람 위에 재판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바로 거기에, 고요함이 있고 자기 반성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욕심과 정욕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걷잡을 수 없는 욕심, 목표 없고 끝없는 자기 욕심 때문에 폭력이 있고 소요가 있고 화목이 없습니다.
서로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가해자는 없습니다.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은 피해자라고들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책임을 돌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책임이 있다고 둘러댑니다. 남편은 자기의 성격이 아내 때문에 고약해졌다고 하며, 아내는 남편 때문에 히스테릭해졌다고 둘러댑니다. 자신의 허물과 잘못과 그릇됨이 자기 탓인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잘못 만나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핑계 대고, 부모는 자식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피해 망상증에 걸려 있습니다. 한술 더 떠서, 겁을 내며 벌벌 떠는 기형적 인간으로 되어 갑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도리질을 하고 생각을 돌려보아야 합니다. 조용하게 생각을 바꾸어 보십시다. 내가 가해자가 아닐까?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내 탓이 아닐까? 저 사람의 고통도 내가 준 것이요, 이 사회의 어지러움도 나 때문이 아닐까?
내가 피해자이기 이전에 철두철미 가해자라고 하는 의식을 가져 보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조용해져야 합니다. 조용한 가운데에라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내가 가해자라고 하는 인식을 가질 때에만 자기 성찰이 있고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바른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좀더 미래를 생각하는 영적인 안목이 없을 때, 다시 말하면 소망의 확증이 없을 때에 불안하게 되고, 불안한 사람들이 모일 때에 떠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를 보면, 말세에 나타날 인간상을 심리학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하고 특징을 말씀하다가 특별히 지적하는 것에 "조급하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이 조급한 점입니다. 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이를테면 남녀를 대비해 볼 때에, 옛날에는 대체로 남정네가 조급한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낙네가 음식을 준비할라치면 듬직하게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밥이 왜 이리 늦느냐고 성화를 부립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아낙네들은 여유가 만만합니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밥은 뜸이 들어야 먹고, 아기는 열 달이 차야 낳는 것입니다. 이처럼 옛 아낙네들에게는, 누가 뭐라 해도 기다려야 할 것은 기다려내고 인내할 것은 인내할 줄 아는 미덕이 돋보였습니다. 아쉽게도 요즈음은 그런 미덕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3분 라면'이라는 것이 있더니 이제는 '1분 라면'까지 있습니다.
또 '전자 레인지'라는 것은 왜 그렇게 인기가 있습니까? 만사를 급하게 처리해 버릇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요새는 아낙네들의 성정이 더 조급합니다. 심지어는 죽는 날까지도 급하게 잡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들 느긋함이 없습니까? 좀 듬직하게 기다려내지를 못합니까? 어떤 어머니가 저보고 말합디다. "우리 애가요, 제 아비를 닮아서 그런지 영 못됐어요. 아무래도 장래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큰일이에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아이가 몇 살입니까?"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도 급하단 말입니까? 시파란 어린아이를 놓고 소망이 없느니 못돼먹었느니---이래가지고는 안 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 마는 여러분, 오늘 댁에 돌아가시거든 서랍을 한번 뒤져보시기 바랍니다. 먹다 남긴 약봉지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의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올시다 마는, 약이라는 것이 의사가 먹어라 하는 대로 제 날짜까지 먹어야 됩니다. 이를테면 항생제 같은 것도 사흘은 먹어야 효험을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사가 지어 주는 약을 한 봉지만 먹어 보고는 금방 듣지 않는다고 또 짓고 또 바꾸곤 합니다. 그래서 약봉지가 수도 없이 남아납니다. 이렇게들 성급합니다. 그 때문에 어떤 의사들은 별것도 아닌 병인데도 환자에게 매일 오라고 한답니다. 사흘 먹으라고 지어 준 약을 하루도 온전히 먹어 주는 환자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여러분, 사람이란 조급하면 단명(短命)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네 사회가 왜 이다지도 깨어지고 부서지고 부딪치는 소리 투성이입니까? 무엇이건 한달음에, 한꺼번에, 일시에, 금방, 후딱, 그렇게 해치우려고 덤비는 조바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10절)"---가라앉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휴식 내지 안정이 필요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동치 말고 가라앉히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을 보십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옵니다. 발걸음도 가볍게 행오(行伍)를 지어 나옵니다. 그들은 감격했습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리고 이스라엘이 구원받았습니다. 그런 기적들을 다 보고 감격해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의 홍해 길로 이끄셨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막아섰고 뒤에는 시시각각 애굽의 말발굽 소리가 다가옵니다. 좌우에는 절벽이 있습니다. "이젠 죽었구나!" 화급해졌습니다. 그런 경황에 하나님의 은혜도 능력도 경륜도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원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기에 왜 나오자고 했더냐?"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 "누구 때문이냐?" 그리고 나중에는 "애굽에 공동묘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데려다 죽이려고 하느냐"---별의별 소리를 다하면서 원망을 했습니다. 원망하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가만히 서서 구원을 보라!
침묵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말의 침묵---말을 너무 급하게 하지 맙시다. 욕망의 침묵---욕망도 거두어야 합니다. 사고의 침묵---생각도 멈춥시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중단합시다. 옳다 그르다 하는 판단도 섣불리 말고 신중히 하도록 합시다. 서두르지 맙시다. 더 잘 아는 듯이 굴어 보아야 이내 후회하게 되니 덤비지 말고 좀더 생각을 합시다. 원망도 증오도 다 버려야 합니다. 말을 중단합시다. 욕심과 정욕에도 제동을 겁시다. 소유욕을 버립시다. 더 가져도 그렇고 더 잃어도 그렇습니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립시다. 근심, 걱정, 두려움을 모두 하나님께 맡겨 버립시다. 그리고 믿는 자세, 듣는 자세로 변신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현실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고요히 하여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역사의 문턱에 서서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오는 노크소리가 들릴 때까지 말입니다. 조용히 하여 들어야 합니다. 시끄러운 현실 속에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현실 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 경륜이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그 뜻을 포착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인간의 지혜를 묵살하시고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바벨탑을 허물어 버리고 하나님 친히 이루고자 하시는 큰 뜻이 있습니다. 그 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노력, 수고, 다툼을 버리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이루려 하십니까?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그리고 그 뜻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우리는 이렇게 구해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갈멜 산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에서 다 죽이는 큰 일을 이루었지만, 결국 이세벨에게 쫓겨 한 로뎀나무 아래로 피합니다. 그리고 원망을 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4)" 하고요. 하나님, 다 죽고 나 홀로 남았습니다. 저들이 내 생명을 찾고 있습니다. 족하오니 저 사람들 손에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거두어 주십시오---하나님 앞에 이처럼 원망을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리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왕상 19:11-12)" 그 후에야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조용한 가운데에 주의 음성이 들려온 것입니다. 엘리야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음성은 쟁쟁하게 들렸습니다.
여러분, 세미한 소리를 들으려면 마음이 고요해야 합니다. 마음이 들떠 있어서는 듣지 못합니다. 증오와 불만과 원망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아무런 생각도 되지 않습니다. 세미하게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쟁쟁한 음성으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아주 고요하게 가라앉혀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역력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능력과 사랑이 오늘의 이 현실 속에 엄연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역사의 종말에 즈음하여 온 백성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안디옥 태생의 교부(敎父)로 주후 4~5세기에 걸쳐 활약한 대 설교가 입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왕후 유독시아의 미움을 사 유배 길을 떠날 때에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말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저가 내 목숨을 찾는다면 죽어 줄 것이니 이 생명은 주님이 주셨음이요, 저가 내 소유를 다 빼앗는다 해도 불만이 없을 것은 본래 가지고 온 것이 없음이니라. 저가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 같이 될 것이요, 구덩이에 던지면 예레미야 같이 될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 같이 될 것이요, 매로 때리면 사도 바울 같이 되리라. 아무 두려움이 없도다.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요, 나는 그 환난 중에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그는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진주를 개한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요할 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바른 심상(心像)을 가질 때에라야 주님의 모습을 뵈올 수가 있습니다. 조용하여 하나님 됨을 알라. 그리고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알라.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심을 알라.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높임을 받을 것임이니라--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힐 때마다 불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전도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건강인데, 그 건강마저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가시를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은 것은 조용한 가운데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성급하며, 불안에 떨며, 책임 전가에 급급하며, 생각도 없고, 듣는 바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목적 없이 바삐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차갑고 고요하게 가라앉혀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역사 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며,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선한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주안에서 새로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찬송합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뜻에, 그 말씀에 응답하며 창조적인 삶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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