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성도의 윤리(사도행전 4장 32절~37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乏絶)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어떤 사회라야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행복이라면 어떤 것일까? 이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물음입니다. 그 행복에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크나큰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한사람의 행복만으로 내가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 전체가 행복해야 합니다. 사회와 개인이 더불어 행복해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사회, 행복한 삶을 위하여 이처럼 여러 가지 요소, 여러 가지 여건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마는 종합적으로 생각하면 철학적 구조로 보아 세 가지 요소를 살필 수 있습니다.
그 하나가 정의입니다.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 둘이 평등입니다. 모든 사람이 골고루 나누어 가질 수 있는 평등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셋은 번영입니다. 역시 풍요해야 합니다. 물질도 지식도 넉넉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넉넉해야 행복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마는 그렇지 못합니다. 부득불 우선(優先) 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근본인지, 무엇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위 사회주의자들은 평등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정의보다도 평등이 먼저다,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야 되겠다, 평등해야 모든 문제가 풀린다, 평등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불사한다 ----- 그래서 소위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평등이 먼저요 번영이 그 다음이다, 평등하고서야 번영이 주어 질 것이다, 번영 다음에야 정의가 이루어진다--이러한 철학입니다. 그런가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번영이 먼저입니다. 세상에 평등이 먼저일 수는 없다, 가진 자가 먼저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좀 먼저 가지고 많이 가질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이렇게 번영이 되면 그때에 나누어 가져서 평등한 사회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정의도 이루어질 것이다 ----- 정의가 마지막에 있습니다.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번영이 되기 전에 나누어 가지자는 마음이 앞서기에 우리 사회가 시끄러운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무엇보다 정의가 우선입니다. 평등이나 번영은 나중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 공의와 정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평등한 사회가 따라오고, 평등해진 다음에야 번영이 따라옵니다. 이러한 철학적 구조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에서는 평등만을 외치다가 번영과 정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가하면 자본주의에서는 번영만을 외치다가 그만 평등과 정의를 잃어버렸습니다. 자유다, 정의다, 일치다, 화평이다, 평화다 하면서 떠듭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부득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를 먼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자유가 개인적임에 비해 평화는 공동체적이요 사회적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먼저이겠습니까? 전체를 위하여 개인이 희생해야 된다, 전체의 평등이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개인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 이러한 기대로 무려 40년, 아니 70년을 기다려왔습니다마는 이루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개인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아 사회주의는 마침내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상과 현실, 공동체적 평화와 개인적 자유--이 관계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자유함과 하나됨, 곧 자유함과 평화는 조화 있게 일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됨 안에 자유가 있고, 자유 안에 하나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과연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까?
모름지기 인간이 중요합니다. 꿈같은 이야기를 현실로 만드는 일에 동역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조적으로 해결하려 하면 오히려 무리가 따르기 쉽고, 자칫 더 큰 문제로 악화될 위험성도 있습니다. 내 자유가 다른 사람에 의해 속박이 된다면 참으로 문제가 아닙니까?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기 위하여 내가 불이익을 당하고, 내가 자유를 빼앗겨서야 되겠습니까? 전체를 위하는 평화와 함께 개인의 자유가 주어져야 합니다. 평등과 화평, 하나됨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합니다. 우리 가운데 가만히 보면 꼭 유별나야만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부인이 시장에 나가 좋은 옷을 사 입었다고 합시다. 색상이나 디자인이 특별합니다. 이것을 입고 나갔을 때에 보는 사람마다 멋있다고 찬탄의 말을 해왔습니다.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마는 며칠 후에 보니 친구가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이후로는 기분이 상하여 다시는 그 옷을 입지 않습니다.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힘들게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좋은 옷을 입어 기쁘면 친구가 같은 옷을 입었을 때에 더 기뻐야 합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입으면 더더욱 기뻐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은 집을 가지면 좋고 남이 가지면 배가 아픕니다. 누구나 다 가진다면 아예 죽어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잘살고, 남이 잘살고, 모두가 잘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 사회에는 영원히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기쁨이 솟아날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지나치게 찾아서 탈입니다. 개성을 강조하는 시대라서 그런지 옷도 특별해야 하고 사는 집도 특별해야 합니다. 자녀도 지위도 명예도 특별하기만을 바랍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와 초대교회를 비교 연구한 논문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가 소유에 중심을 두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존재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존재, 곧 인간 자체에 중심을 두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심령, 중생(重生), 하나님의 자녀됨--인간성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오직 사랑, 자발성, 그리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사회주의에서는 물질과 분배의 이론에 착안하여 모든 문제를 이 이론에 의거하여 해결하려고 합니다. 물질을 공평하게 분배하려면 힘과 구조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빼앗고 빼앗기는 역사가 그것입니다. 피비린내가 납니다. 제가 소련에 갔을 때에 그곳의 대주교를 만났습니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1년에 약 백만 명을 숙청했다고 합니다.
그 힘으로 체제를 유지해왔다는 것입니다. 피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윤리는 베푸는 윤리입니다. 자원적인 사랑으로 베풀어서 모두 평등하게 합니다. 한때 생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상태로 나가면 지구 전체가 엄청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습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모두 굶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각하게 걱정들을 했습니다마는 알고 보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이제 보십시다.
통계에 따르면 작년도의 세계 식량총생산량은 무려 19억5천4백만 톤에 달했다고 합니다. 총소비량이 19억1천5백만 톤이었다고 하니 잉여 농산물이 3천9백만 톤이나 됩니다. 그 전년도에 잉여된 3억2천9백만 톤까지 합치면 3억6천8백만 톤이나 남아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되는 22억 인구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이제 인구 10억이 넘는 중국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정도입니다. 영국은 3년을 먹을 만큼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미국 같은 나라는 잉여농산물 때문에 큰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1년 총생산량 3억6천2백만 톤 가운데 40퍼센트를 수출할 정도입니다. 우리 나라도 작년 총생산량이 1백여만 톤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전년에 이월된 것이 또한 2백9십여만 톤이니 더 생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미국은 생산 가능한 농토의 50분의 1에 해당하는 땅에만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노는 땅이 많습니다. 국가에서 돈을 주면서까지 농사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더 이상의 식량은 생산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지금의 50배를 더 생산할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또 하나, 사람들이 고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소 돼지한테 먹게 합니다. 사람의 식량을 먹고 자란 이 소 돼지를 사람이 잡아먹게 되면 5배의 식량이 소비되고 자연자원론적 차원에서는 10배의 식량이 소비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채식을 하면 다섯 사람이 먹을 것을 고기를 먹으면 한 사람이 먹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소와 돼지가 먹어치우는 식량은 온 세상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양입니다. 그래서 고기 값이 비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사람 하나가 써서 없애는 자연자원이 인도사람 50명분에 해당한다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식량 문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해마다 넉넉히 주십니다. 그런데도 굶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분배 때문입니다. 저마다 먹을 것을 쌓아놓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어 보관하느라고 엄청난 경비를 씁니다. 이렇듯 식량이 남아돌고 있어도 세계 도처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만 명씩 죽어갑니다. 하루에 평균 3만 명 이상이 죽어간다고 하니 참으로 문제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넉넉히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아서 한쪽에서는 남아돌고 한쪽에서는 모자라서 굶어죽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성도들, 또한 그 공동체를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무한한 자유를 누립니다. 자유를 누리면서 은혜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말씀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신명기 15장 4, 5절에서 약속해주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아무리 가져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자가 있는 한 아무리 많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배부르지 못합니다. 어디엔가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면 결코 그것이 복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어 6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치리(治理)할지라도 너는 치리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모든 것에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번영․자유․평등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초대교회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중생된 존재가 먼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감격,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자 하는 신앙적 고백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자에게는 흉년과 무질서와 폭력이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지키는 자에게는 자유와 평등과 번영이 함께 주어진다고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2절에 "믿는 무리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곧 신앙공동체를 말함입니다. 한마음 한뜻이요, 생의 목적이 같고 가치관이 같은, 행복관이 같은 신령한 무리가 모여 은혜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서로 통용했다고 합니다.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요즘은 지나치게 '내것'을 찾아서 문제입니다. 소유의 개념이 중생해야 합니다. 생각이 먼저 중생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소유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임시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어떤 좋은 것을 가지고 있건 모두 임시적입니다. 오늘밤 세상을 떠나게 되면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가끔 주택가를 지나다보면 문패를 대리석으로 크게 만들어 아예 대문 벽에 박아놓은 집이 있습니다. 참으로 가소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안 있어 파내는 수고를 해야 할 텐데 그리 단단하게 붙여놓을 것이 무엇입니까? 떼기 편하게 종이에 써서 붙이십시다.
대리석에 조각을 해서 붙여도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집이건 땅이건 돈이건 결국은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짧은 시간, 임시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소유는 제한적입니다. 아무리 가지고 싶어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그 많은 재산을 등기로나 알고 있는 것이 고작입니다. 만져보기를 했습니까? 가보기를 했습니까?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 재산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다만 관리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가 임시로 맡아 관리할 뿐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청지기적 사명입니다. 또한 소유에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고 베풀어야 합니다. 선교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소유에서 사명을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소유는 공유적입니다.
본문에 보면 욕심도 정욕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리 사욕에서 벗어나 공유할 때에 거기에는 서로 통용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아랍사람들에게는 '빵을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채무자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말을 한바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의 것까지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의 여분은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낭비는 도적질입니다. 잉여 소유와 사치는 강도 행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할 몫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낭비, 사치--무서운 죄입니다. 저는 목사라는 것 때문에 식사대접을 많이 받습니다. 옛날에는 가정에서 손수 대접하고는 했습니다마는 요사이는 식당에서 대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덕분에 저는 좋은 식당이라고 이름난 데는 거반 다 가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 크게 느끼는 것이 있습디다. 우리 나라 식당은 너무 낭비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많습니다. 참으로 잘못되었습니다. 우리의 식사 방법,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알맞게 만들어서 먹으면 그만인 것을 진수성찬을 차려서 먹다가는 절반 이상을 쓸어버립니다.
제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본 일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이 있습니다. 아침식사로 계란과 베이컨을 지져서 접시에 담아주면 기름이나 계란 노른자가 접시에 묻어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빵 조각으로 닦아서 먹는 것입니다. 심지어 혀로 핥아먹는 사람까지 있는데 바로 독일사람이 그렇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굶주리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접시에 묻은 기름조차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식사, 문제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네 가지 반찬 이상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만들어서 깨끗하게 먹읍시다.
또한 우리네 식성은 까다롭기 그지없습니다. 세계적인 모임에 나가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주는 대로 잘먹습니다마는 유독 우리 나라 사람들만이 먹지 못하고 한국식당을 찾아가서 된장찌개를 먹고 들어옵니다. 왜 이 모양입니까? 철학 없이 습관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받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 아버님은 늘 제게 '솥에 들어갔던 것은 무엇이든 먹어라'--남편이고 아이고 이것은 주부의 전권입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싫으면 먹지 마라'라는 식의 교육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감사함으로 먹을 것이요 남기지 말 것입니다. 음식을 남기는 것은 죄입니다. 신앙적인 시각으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권적인 역사를 보게 됩니다. 부활을 증거하는 권세 있는 주님의 종들 앞에 저들이 함께 모여 순종하면서 은혜 안에 하나됨을 볼 수 있습니다.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남는 것 다 팔아서 가져다 놓으니 부족한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번영과 생산과 분배도 물론 먼저 사랑과 자유, 행복과 공유의 원리를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됨이 없이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이는 행복함이 없습니다. 베푸는 자의 윤리를 누리지 못하면 그는 영원히 불행할 것입니다. 그에게는 화평 또한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참자유, 참평화, 참행복을 누리려면 나의 행복을 함께 나누어 우리 모두 더불어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풂으로 더불어 행복해하는 그 자유를 누릴 때에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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