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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승리의 비결(롬8:31~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오늘은 88올림픽의 폐막식이 있는 날입니다. 두 주간 동안의 이 큰 행사는 온 국민의 관심 아래 무사히 끝나고 있습니다. 저는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해서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시종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특히 6․25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이번 올림픽에 유달리 큰 감격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6․25때 참전해서 최일선에서 싸우기도 했고 육박전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공군들이 쳐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싸우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아무튼 동서 진영의 격전지였던 이 서울에서 38년이 지난 오늘날 160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평화의 축제를 가짐은 정말 벅찬 감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쟁의 폐허에서 딛고 일어선 지난날을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이 땅에 떨어 졌고, 많은 성도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축복하시어 이같은 영광된 잔치를 주셨다고 생각하니 그 은혜에 더욱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드신 분은 꿀꿀이죽을 아실 것입니다. 식량이 부족해서 꿀꿀이죽을 먹기 위해 줄을 서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군들이 던져 주는 껌 하나를 굉장한 선물처럼 자랑스럽게 씹던 지난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온 세계가 이 곳에 모여서 올림픽을 할 만큼 번영을 주신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난날들을 너무 쉽게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교육열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교육을 위해서라면 집도 팔고 땅도 팔고 소중한 기업도 팔아서 자녀를 가르치는 그 교육열이 오늘의 한국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절대적으로 부족한 저임금을 참아가며 일한 근로자들의 공로가 있습니다. 지난 추석 때 어느 근로 청소년에게 누가 물었다고 합니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그 소년은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낯선 타향에서 밤새워 일하는 근로자들의 수고가 오늘날 이만큼의 번영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들의 피땀이 있었기에 오늘의 건설이 가능했단 말입니다.
또한 이번 올림픽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날씨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귀중한 일기입니다. 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저를 만날 때마다 날씨 때문에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사실 이맘때면 해마다 무서운 태풍의 조짐이 있어 여름내 농사지어 놓은 농작물들이 다 망가지는 위험을 안고 있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하루도 아닌 보름 동안 내내 날씨가 좋아야겠으니 하나님께 부탁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이 일을 위해 기도했고, 이 기도의 응답으로 보름 동안 보기드문 청명한 날씨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고 우리에게 향하신 기도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또한 전도인들의 전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올림픽을 축복하신 줄로 믿습니다. 성도들은 이 기간이 제 2의 오순절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16개국이 이 땅에서 전쟁을 했는데. 오늘 160개국이 모여 귀한 잔치를 열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은혜스럽습니까?
우리는 이번 운동 경기를 통해서 참 많은 진리를 배우고 들었습니다. 첫째, 영원한 승자가 없음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오늘의 승자는 내일의 패자입니다. 이 땅에서는 영원한 승자나 권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영원한 영광도 없습니다. 둘째, 예상을 뒤엎고 이례적으로 이변이 많이 나왔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무슨 이변입니까? 사실은 있을 일이 있었을 뿐이지 이변이 아닙니다. 져야할 사람은 진 것이고 이길 사람은 이긴 것뿐입니다. 반드시 그가 이겨야 하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우연은 없습니다. 단지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승부의 결과는 컴퓨터도 맞힐 수가 없습니다. 셋째, 자만은 금물임을 알았습니다. 오만한 자세 때문에 졌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승리에는 온유와 겸손과 자제가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경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뒤에는 기도를 부탁하는 젊은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기를 끝낸 다음 승리하고 나서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감사 기도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 거룩한 모습을 아나운서는 울고 있다고 억지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이 모습을 그렇게 매도해도 되는 것입니까? 저는 감사 기도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이 바로 한국 교인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넷째, 정신적 승리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와의 싸움에서 먼저 이겨야 승리가 보장된다는 말입니다. 기대했던 한 선수가 자기 절제에 실패해서 연습하는 도중에 규칙을 어기고 선수촌 담을 넘어 술 먹고 요령 피우다가 결국은 패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다섯째, 불법자의 승리는 용납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적으로 영광을 얻었는가 했더니 그 영광을 빼앗기고 도리어 전 세계적으로 부끄러움 당하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 하십니다. 거짓된 자에게는 결코 영광을 주지 않습니다. 여섯째,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 우리는 일체감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국민 전체가 높은 일체감을 가진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선수 한 사람이 넘어지면 우리 모두가 아프고, 선수가 영광을 얻을 때는 온 국민이 함께 기뻐했습니다. 내가 그 선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같은 동족이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며 일체감을 모두가 느꼈던 것입니다. 그 선수와 우리 모두가 함께 감격을 누렸습니다.
참 승리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승리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귀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승리는 일시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영광된 미래 지향적 승리로 영원한 것입니다. 신학자 레이몬드 크레이머(Raymond Cramer)는「예수 심리학」이란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예수는 승부욕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누구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나 누구보다 좀더 잘하고자 하는 승부욕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참된 승리와 그 영광"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참 승리란 의(義)의 문제입니다. 얼마나 의로웠느냐, 끝까지 의로웠느냐.---의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이나 자신 앞에 그리고 세상 앞에서 얼마나 정당했으며 얼마나 바르게 살았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경기를 통해서도 계속 경험했습니다. 내가 직접 싸워서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승자를 응원하면 나도 승자가 됩니다. 승자를 응원할 때 그 이긴 자의 영광이 응원한 본인에게도 돌아옴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승자와 내가 하나가 될 때에, 즉 믿음으로 사랑으로 일체감을 가질 때 그 승리는 내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거룩한 의가 그를 믿는 자에게, 즉 그와 하나가 되는 자에게는 그 의가 함께 해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누가 나를 송사하리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데, 이것은 자기 의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의에 동참하고 연합된 결과로 그 의에 힘입어 자랑스럽게 누가 나를 송사 하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광이 있습니다.
둘째, 참 승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의 확신에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독생자 외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그 분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우편에 계시어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며 또 장차 우리를 위하여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에 보증이요 우리에게 향한 사랑의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그 절대적인 사랑과 약속 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2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승자는 고독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독하면 승자는 아닙니다. 고독으로 끝나는 것은 참된 승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고 아무리 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 해도 그 언젠가는 절대적인 고독에 이를 수밖에 없을 때가 옵니다. 친구도 떠나고 사랑하는 사람도 떠납니다. 명예도 권세도 떠납니다. 모두가 다 떠나가고 혼자 있게 되는 그 순간,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감싸주실 그 때에 비로소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믿는 자에게만 승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위로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이 진정한 승리인 것입니다.
셋째, 은사에 대한 확증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받은 것이 다 은사라는 말입니다. 그 사랑 안에 조명하여 현실과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은사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소중하게 여길 때에 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이번 경기에서 승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어렵게 자란 그들에게 영광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어떤 선수는 시력이 나빠서 그것 때문에 열심히 수영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선수는 귀가 어두워서 그것 때문에 열심히 운동을 해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또 한 선수는 다리가 불구였기에 열심히 팔로 노를 저어서 면류관을 얻었습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을 탓할 것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부분이 더 강인해져서 승리함을 보지 않았습니까? 얼마전에 노트르담 성당의 반주자로 있는 오르가니스트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는 시각 장애자였습니다. 연주하기 전에 교회에서 두어 번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았더니 놀랍게도 오르간의 수많은 스위치를 몇 번 더듬더니 일백 프로 활용하지 않겠습니까? 바하를 소화하는 데는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연주 솜씨에 감탄하여 어떻게 이렇게 잘할 수 있느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빙긋이 웃더니 "저는 다른 것은 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눈이 안 보이기에 귀로 살았습니다. 귀를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로 받았습니다. 못가진 것을 달라고 원망만 하고 있겠습니까? 손은 없어도 눈은 있고 눈은 없어도 귀가 있으며 귀가 없으면 발은 있는 것 아닙니까? 가진 바를 선물로 알고 가장 소중하게 활용하는 자에게는 영광이 있습니다. 가진 것을 소중하게 알지 못하고 없는 것에 대해 원망만 하는 사은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 승리란 말을 쉽게 합니다만 잘못된 말입니다. 은사 승리입니다. 받은 바를 은사로 알고 있는 자에게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의 역경은 오늘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겠습니까? 우리들은 벌써 받았고 앞으로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고 받은 바 은사를 극대화하여 최선을 다할 때 거기에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강조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 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어떤 위험이나 곤고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이기고 그 은사로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고 있는 동안에는 시험도 죄도 율법도 이기며 거짓과 게으름, 나아가서는 나 자신과 세상도 이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창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영원한 승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확증되어 있고 보장되어 있습니다.
참 승리는 은사로써만 이루어집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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