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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추수의 윤리(갈라디아서 6:6-10)

by 【고동엽】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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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의 윤리(갈라디아서 6:6-10)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비유에 의하면 어떤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그 종들에게 얼마간의 책임을 맡겨 주고 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돌아와서 그 동안 수고할 것을 가지고 회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또 다시 다섯 달란트를 남겨 열 달란트를 가지고 왔고,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도 두 달란트를 더 남겨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그 한 달란트를 땅에다 묻어 놓았다가 그것을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내놓고 변명을 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종이 하는 말이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여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가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것입니다" 하고 본전 한 달란트를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종을 향해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게으르다는 말에 대해서는 쉽사리 납득이 갑니다. 그러나 악하다 하는 데서 이의가 있습니다. 세상에 본전 잘라먹는 사람도 많은데 이 사람은 본전을 고스란히 가지고 왔습니다.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인데 악하다는 말까지 들어야 하느냐, 이 점에 궁금한 생각이 있습니다. 어째서 악하다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습니다." 했습니다. 이 생각이 악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심지 않고 거둔다." 그것은 기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어진다.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이러한 기적을 바라는 마음, 이러한 믿음, 이런 미신적 신앙을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주여 당신은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즉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부하신데 뭐 그까짓 한 달란트 그것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데, 주시려면 얼마든지 더 주실 수 있는 분인데 뭐 그 한 달란트가 그리 소중하냐 해서 마침내 자기가 맡은 한 달란트를 소홀히 여겨 악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하나님께 책임을 들립니다.

"주여 당신은 능력이 많습니다." 그러한 신앙고백입니다. 자기의 책임, 적으나 많으나 자기의 책임, 맡은 바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돌리려고 하는 자세를 예수님께서는 악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이 만홀히 여긴다는 말은 코를 들고 비웃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좀더 진실해 보십시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처럼, 그 능력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원히 하나님은 침묵한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것,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비웃음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살기 힘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일 때문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단순한 진리를 솔직하게 받아들여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개인의 마음속에 고민이 있다면 그 고민의 이유도 마찬가지로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진리 앞에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내가 뿌리지 않은 씨가 싹텄다고 말입니다. 그럼 누가 뿌렸습니까? 내가 뿌리지 아니한 씨앗이 돋았다고 원망입니다. 또한 많이 뿌렸는데 왜 적게 거두게 되느냐고 해서 또 불평입니다. 나는 좋은 것을 뿌렸는데 왜 나쁜 열매가 맺혔느냐? 내 수고는 선한 것이었는데 왜 결과는 이 모양이냐? 이러한 불평 때문에 문제입니다. 최소한 우리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 이 환경, 내가 처한 처지, 내가 받은 대우, 이 모든 것이 내가 뿌린 바에 대한 추수다. 내가심은 바대로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그렇게 어려운 세상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떤 날 노예선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여기는 많은 죄수들이 끌려와서 쇠사슬에 묶여 노를 짓는 비참한 노예선입니다. 여기 왕이 방문하게 되었을 때 많은 죄수들이 이거야말로 일생에 한 번뿐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각각 자기의 결백을 말했습니다. 나는 억울한 사람입니다. 나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잡혀와서 이렇게 노예가 되어 고생합니다.

죄수들 전부가 왕을 붙들고 이러한 자기의 변명을 했더랍니다. 그 중에 한 사람만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자네는 왜 말이 없니?" 하고 왕이 물었을 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죄인입니다.

여기서 이 고생을 해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 때에 알렉산더 대왕은 "여기 모든 사람이 다 의인인데 의인 속에 왜 너 같은 죄인이 있느냐, 너는 집으로 가라" 하고 보내 주었답니다.

우리는 저마다 옳다고 우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스스로 속는 일이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일이 있습니다. 내 양심은 증거 합니다. 내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은 분명히 무엇인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변명합니다. 자기 변명, 자기 관용, 자기 옹호에 급급한 것이 현대 지성인의 죄악입니다. 그 지혜가 진실 되이 발달하지 못하고, 자기 변명하는 데 아주 도사가 되었습니다. 어떠한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이것이 부모 탓이다, 형제 탓이다, 누구 탓이다, 조상 탓이다 하고 전부 다른 사람에게 돌려버리는 그러한 변명으로 급급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그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인은 사실상 속고 있습니다. 속았다는 사실을 그 언젠가 알 때에 가슴 치고 후회하게 됩니다. 현대인은 무엇을 아는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가진 줄로 알았는데 가진 것도 없습니다. 무엇이 된 줄로 알고 자부했는데 아무 것도 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이만큼 가졌으니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속았습니다. 그들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진리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심는 것과 거두는 것 사이에 있는 절대적 연관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심었으면 꼭 추수합니다. 추수하는 것과 심는 것, 이 파종과 추수는 절대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추수는 심판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심는 것은 내 자유요 내 마음대로 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두는 것은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일단 심었으면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불가피하게 필연적으로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뿌린 씨앗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콩을 심었는데 가을에 가서 팥을 거두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심어 놓은 것이면 이제는 거두어야 합니다.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심판입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싫고 괴로워도 거두어 들여야 하고 부끄러워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봄에 심어서 가을에 거둡니다. 젊을 때 심어서 나이 많아서 거두게 됩니다. 어제 심은 것을 오늘 거두고, 다시 오늘 심어서 내일 거두게 됩니다. 언제나 심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거둘 때는 선택이 없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을 심었느냐, 그리고 무엇을 기다리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되었다. 그렇다면 썩어질 것을 심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만일 거두는 바에 불평이 있다면 이 사람은 진실치 못한 사람입니다. 썩어질 것을 심고 영생을 거두겠다는 식의 미신적이요 불합리한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심고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여야 할 것입니다. 합리적인 신앙, 이것이 요구됩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는 법입니다. 효도하지 않는 사람이 효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애당초 내 자식으로부터도 효도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심지 아니한 씨앗이 나기를 바라는 그런 망상은 버려야 합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들로부터 속았습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아버지는 잠깐 속였지만 아들로부터는 13년을 속았습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싹이 나는 데 있어서의 시간과 공간의 격차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 엄연한 진리를 외면하고 만홀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오늘 심고 내일 난다면 누가 이 진리를 부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심고 10년 후에 싹이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몇십 년 후에 싹이 납니다. 뿌린 씨앗이 기억에서 다 사라진 후인 몇십 년 후에 깜짝 놀라게 싹이 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간의 이런 격차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 시간을 극복해야 합니다. 반드시 납니다. 언젠가 나고야 맙니다. 이 시간이 너무 길다고 만홀히 여기지 말고 또한 걱정하지도 맙시다.

또 하나는 공간의 문제입니다. 동에서 심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게 아니고 서에 가서 납니다. 이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배신한 그 사람으로부터 뒤에 배신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도 있습니다만 다 그런 게 아닙니다. 배신한 사람은 여기 있는데 내가 배반당하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입니다. 이 때에 내가 "아니"라고 해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물어 보십시다. 아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배반한 그 사람은 여기 있으나 우리는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같은 배반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곳, 그리고 선지자를 죽이는 이 예루살렘이 이제 머지않아 40년 후에 초토가 될 것을 내다보면서 울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제자들은 "이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굉장합니까?" 하고 부러워했습니다.

심판의 그 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다른 측면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너를 핍박하고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게 되면 너희들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큼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내가 의와 진리와 믿음을 심어 나갈 때에 장차 맺힐 열매가 있음을 알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긴 사람은 여기 있지만 그 언젠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가 또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심은 대로 거두는 진리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야 말 것입니다. 신령한 것,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와 의와 화평을 심고 그리고 사랑을 심어 나가는 사람은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 동안 무엇을 심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열매가 내 앞에 맺혀질 것이라고 기대합니까? 어느 청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장가 안 가렵니다." "왜?" 한참 있더니 하는 말이 "장사는 가도 아이는 안 낳으렵니다." "그건 또 왜?" "나 같은 아들을 낳을까봐요." 이만하면 그 청년이 진실합니다. 내가 부모의 속을 썩였으니 틀림없이 이런 아들이 태어날 거란 말입니다. 나 같은 아들이 태어난다면 난 장가 안 가겠습니다. 이것이 진실의 시작입니다.

어느 아주머니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암이라고 하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6개월밖에는 더 살지 못한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온 집안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친정 아버지가 그에게 편지를 합니다. 그 편지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실하게 살려고 오늘까지 내 딴에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 무엇인가 잘못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병이 그대로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이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앞에 닥친 이 현실이 어떤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죄악을 심어 놓고 이것이 싹이 날까봐 마치 형사에게 쫓기는 죄수처럼 불안에 떨며 조그만 일만 터져도 "아, 바로 여기서 싹이 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공포와 두려움에서 살아가야 합니까? 아니면 의와 진리를 심어 놓고 오늘 싹이 날 것인가, 내일 싹이 날 것인가 하며 그 언젠가 맺혀질 아름다운 화평과 의의 열매를 생각하며 오늘을 묵묵히 참아 나가는 농부의 인내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까?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고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인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모양으로 어디서 열매가 거두어졌는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꼭 맺히고야 말 것인데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누구를 통하여 맺혀질지 모르나 반드시 맺혀질 것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며 참는 이 같은 믿음의 생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시편 126:5에 말씀합니다. "눈물을 뿌리며 나아간 자는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남이야 알든 모르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과 의와 진실과 기도를 뿌려 나가면 반드시 열매는 맺힐 것입니다. 순교적 신앙이란 이 세상에서 심고 빛을 못 보고 죽어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거두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설사 이 세상에서 이렇다 할 빛을 못 본다 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가서 거둘 그 영광스런 열매를 생각하며 오늘도 묵묵히 뿌려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심었다고 생각합니까?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다시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아멘.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심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사랑과 그 놀라우신 은총을 베풀어주심으로 오늘까지 기다려 주시는 그 은혜 가운데 살아 왔습니다. 간구하오니 이제 우리는 무엇을 받을 것입니까? 또 무엇을 기다려야 합니까? 원컨대 이제 성령으로부터 아름다운 믿음과 진리와 사랑과 화평과 그리고 희생을 심어서 주께서 권고하시는 날에 우리에게 주실 그 아름다운 열매를 바라보며 길이길이 참아서 승리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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