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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0-28)
그 때에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식량이 부족하다든지 입을것이 없다든지 하는 물질적 빈곤에 있지 않습니다.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목적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을 벌었지만 왜 애써 벌었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물질은 많이 가졌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궁극적 목적을 모르는 것입니다. 공부를 합니다. 공부를 시킵니다.
그런데 왜 공부하는 것인지, 왜 공부를 시키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궁극적 목적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많은 수고를 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건강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일을 합니다.
그러나 수고의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행해지고, 허무해지고, 피곤해집니다.
둘째로, 목적이 문제입니다. 목적이 의미를 주고 의미가 가치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목적이 없으니 가치기준이 없습니다.
결국 가치의 상실로 인하여 피곤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목적에 따르는 결단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추상적 목적이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비장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보면 생각은 있습니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고 말은 잘하는데 그에 따르는 구체적인 현실이 없습니다. 결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목적이 있다면 참된 결단이 따라야 합니다. 목적이 확실하다면 결단은 자동적으로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마치 갖고 싶은 귀한 것을 발견했을 때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팔아서 그것을 사도 아깝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灌祭)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관제가 무엇입니까? 피를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목적과 가치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하고 보니, 그대로 피를 토하고 죽어도 좋을 만큼 감격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확실한 목적과 그것에 따르는 확실한 결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목적에 끌려가고 목적에 흡수되는, 아름다운 결단이 없는 인생은 피곤할 뿐입니다.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2,500명을 상대로 '당신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한 30여 가지로 대답한 실패의 원인 중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결단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라는 것이었답니다. 모름지기 바른 결단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Longfellow)는 '결단하라. 그러면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에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확실한 결단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 혼기가 가까이 오면 참 고민이 많습니다. '결혼을 할까 말까, 이 사람하고 해야 하나 저 사람하고 해야 하나'하고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서 확실하게 결정짓고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그 고민은 없어집니다.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도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사람하고 결혼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하는 미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운명은 정해졌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남편 코고는 소리가 크든 작든 이제는 정해진 운명입니다. 이 사람하고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합니다.
아내가 음식을 잘하든못하든 이제는 그녀와 평생을 살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무릇 결단이 없는 삶이기에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결단에는 변화가 없어야 합니다. 환경이나 여건, 대상을 따지지 않고, 결정된 구체적인 신앙적 의지는 절대로 변화를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하여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천지개벽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결단에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처음의 마음 그대로 사는 사람만이 성공하고, 평안할 수 있고,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았다고 남을 사랑하고, 내가 미움받았다고 남을 미워하고, 내가 손해입었다고 남의 것을 빼앗고----이렇게 종속적으로 흔들리는 사람이라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그저 사랑하기로 생각하였으면 사랑하고, 일단 남에게 주기로 마음먹었으면 주는 것입니다.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 자유함이 있습니다.
본문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고 계십니다.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불변의 신앙적 의지가 성경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줄렁줄렁 따라나선 제자들은 너무나 한심합니다. 우편이냐 좌편이냐, 우정승이냐 좌정승이냐 하면서 다투고 있습니다. 빌라도 법정이나 대제사장 가야바의 음모 같은, 예수님을 해하려 하는 세상이야기는 접어두고라도, 가까이 있는 이 제자들마저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 저런 것 자꾸 생각하면 마음만 흔들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불고(不顧)하셨습니다. 그저 주려고 하셨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원칙적인 본래의 목적 그대로, 주기로 하셨기에 주실 뿐입니다.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에 사랑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기에 지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도 그 결심은 주저될 수 없고, 방해될 수 없고, 좌절될 수 없었습니다. 본문말씀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처음부터 섬기려 왔기 때문에 끝까지 섬기겠노라 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한심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 13:7)."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흔히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주려고, 베풀려고, 사랑하려고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어찌하여 변심하기도 하고 변덕을 부려서 실패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처럼 사람의 마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이기심은 자기 양심의 성원을 받지 못합니다. 나의 양심은 마음속의 이기주의를 옳다고 성원하지 않습니다. 주위사람들도 반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나이가 마흔이 넘었으면 나의 주변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잘한다고 하는데 주위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처럼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 잘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한테는 왜 친절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변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독합니다.
고독한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집단적 이기주의를 볼 수 있습니다. 가정적 이기주의입니다.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청을 넣습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오직 우리 가문, 내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 가정, 우리 자손, 우리 가문만 생각하는 집단적 이기주의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마음이 집단적 이기주의입니다. 문제입니다. 실은 자기도 불행하게 되고, 가문을 위하는 것도 되지 않고, 사회에는 비사회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부끄럽고 다른 사람 보기에도 창피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것을 모릅니다. 이기심의 노예가 되기 시작하면 자신이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 왜 구하는 것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욕심만 있었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기가 구하는 것의 댓가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허구헌날 교회에 나와도 하나님의 말씀은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습니다. 왜 입니까? 마음의 문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하고 자상하게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기적인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습니다. 적이 많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겠다고 하니, 그 당장에 다른 제자들이 분하여 화를 냅니다. '네가 뭔데 너만 잘되겠다는 것이냐'---모두들 그 둘을 시기합니다. 여러분, 봉사하는 사람이 시기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이기적인 사람은 언제나 제 생각만 하기 때문에 반드시 적이 있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Kant, Immanuel)는 이기주의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논리적 이기주의입니다. 자신의 판단만 옳다고 보고 다른 판단은 자기와 무관하게 보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만 옳고 자기 생활은 무엇이든 정당화시킵니다. 논리에는 내가 생각하는 논리도 있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논리도 있는 법인데, 다른 사람의 논리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무조건 자기만 옳고 자기 생활은 항상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이것이 바로 논리적 이기주의입니다.
두 번째로, 미학적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만족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나만 생각할 뿐더러 내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은 전혀 상관없고 내 기분만 좋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기분, 자기만족, 자기감정에 중심을 두고 다른 사람의 마음은 상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불순한 이기주의입니다. 혹여 이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도덕적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생기는 논리입니다. 자기한테 유익하지 아니하면 다 나쁜 것이요, 자기한테 유익한 것은 다 선하고 누구한테도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이기주의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사회도 나라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같은 도덕적 이기주의가 가장 일반적인 이기주의입니다.
며칠전의 일입니다. 여러분도 이름을 들으면 익히 알만한, 큰 기업체의 회장인 어느 장로님과 조찬기도회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분이 들려준 경험담입니다. 그 장로님은 일본과 합작으로 벌이는 사업이 있어서 일본 현지에도 자주 가고 친구들도 많답니다. 어느 정도 일본의 기업인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무렵에 그들에게 물어보았답니다. "이상하게도 우리 나라 사업이 잘 풀리지 않는데, 우리 한국의 기업들이 잘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일본인 친구는 "한국인은 기술도 있고, 재주도 있고, 능력도 있고, 자본도 있고, 다 갖추었는데 딱 한가지, 애국심이 빠졌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순간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장로님에게 한마디 덧붙이더랍니다. "적어도 우리 일본의 기업인들은 수입을 할 때에 아무리 돈벌 수 있는 상품일지라도 나라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수입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돈이 된다 해도 나라를 해치는 짓이라고 생각되면 절대로 수입하지 않아요.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사회가 어떻게 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돈만 벌면 그만이라고들 생각하더군요. 아마도 이런 점이 한국의 기업들을 부진하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요?" 사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쓸데없는 것들도 많이 수입하고 있습니다. 필요 없는 상품이 상점에 가득합니다.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저 하나만 잘살면 된다는 태도입니다. 제 한 몸 편안하고 자식 손자 남보다 흥청거리면 그만인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이기적인 생각은 불행의 원인입니다. 몸이 편안하다고 마음까지 평안하다던가요? 남의 눈총 받고 사는 게 그리도 재미있습니까? 이기주의가 큰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집이 좋아서 잠이 잘 온답디까? 침대가 좋아서 잠이 잘 오는가요?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떤 소리를 듣고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의 원성을 사고 있는데 그 운명이 어떻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양심이 어떻게 평안하겠습니까. 생각을 고치십시다. 불행, 고민, 고통의 원인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기적인 생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습니다. 높아지려고 발버둥질치는 사람은 낮아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에 매이는 것은 벌써 자기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의 주인공 마틸드는 아주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여인이었습니다. 돈많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지참금이 없어서 원하지 않았던 아주 가난한, 교육부에 다니는 직원과 결혼을 합니다. 마음은 언제나 멋지게 살아보고 화려한 사교계에서 활동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안되던 차에, 교육부장관 주최의 파티에 내외가 초청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좋아하던 마틸드는 파티에 입고 나갈만한 옷을 마련하느라, 집을 사려고 모아두었던 사백 프랑의 돈을 써버렸습니다. 그런데 목걸이가 없었으므로 돈 많은 친구에게 값비싼 진주목걸이를 빌려가지고 파티장에 나갔습니다. 생전에 소원했던 대로 여러 남자들과 춤도 추고, 사교계의 여왕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썩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보니 그만 목걸이가 없어졌습니다. 도둑맞은 것입니다.
큰일났습니다. 그래서 3만 6천 프랑이나 되는 빚을 지고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친구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빚을 갚기 위하여 마틸드 부부는 10년이나 갖은 고생을 다 합니다. 한 순간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토록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빚을 다 갚을 무렵의 어느날, 고생으로 찌든 마틸드에게 그 옛날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그 친구가 말합니다. 그 때 빌려준 목걸이는 가짜였다고.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의미없고 부질없는 이기적인 행동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가문을 망치고, 자기를 망치고 명예 잃고, 하나님 앞에도 죄송스럽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자기희생이 곧 자기 행복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文豪) 톨스토이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언제 이것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언제 가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섬김을 받는 것과 섬기는 것, 주는 것과 받는 것은 어느 것이 큰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기쁨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유치한 수준일 때에는 받는 기쁨이 좋지만, 성숙하고 보면 받기보다는 주는 것이 좋은 법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란 '주는 기쁨'에 살아가야 합니다. 희생하는 기쁨에 살아갑니다. 섬기는 기쁨을 즐기는 취향으로 살아갑니다. 물질을 주고, 목숨을 주고, 의미를 주고, 진리를 주고, 대속물로 주어서 내가 죽고 내가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고 의미가 돌아가게 하는 것----이런 것을 즐기는 것이 그리스도인 된 삶의 취향입니다.
주는 것은 곧 자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창의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억지로 주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에게 학비를 주거나 먹을 것을 줄 때, 귀한 자녀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여, 특히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무엇이든 주곤 합니다. 그런데 꼭 빼앗기는 마음, 강도 만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만 낳을 것을 괜히 셋씩이나 낳아서 다 빼앗긴다'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속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20년 부부생활을 돌이켜 볼 때에 20년 내내 강간당하는 기분으로 살아왔다는 여자분들도 있습디다. 이 무슨 소리입니까? 왜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엮어가지 못하고 평생을 강간당하는 기분으로 산다는 말입니까? 왜 자발적이고 좋은 마음으로 주지 못하고, '주는 기쁨'에 살지 못하고, 평생을 강도만나거나 도둑만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어차피 사람이란 다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남에게 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빼앗기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준 것은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주었을 뿐입니다. 항상 베푸는 사람만큼 사는 것이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본디 사람은 그리하여야 합니다. 또한 이 마음에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하였건 세상이 어떻게 하였건, 우리의 그리스도처럼 전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기쁘게 생각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다 베풀고 어떻게 라도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일관하여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고민이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마음 속에 이기적인 생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옛날에 주었던 것을 두고 이제와서 섭섭하다고 탓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에게 주기로 마음먹었으면 고맙다는 소리 들을 생각 마십시오. 그런 소리, 소용없습니다. 주기로 하였던 것이니 주어버리고, 희생하기로 하였던 것이니 희생하는 것이 깨끗합니다. 시시하게, 섬기려 하다가 섬김받으려 하고, 주려 하다가 뺏으려 하고, 변변치 않은 것 하나를 주어보지도 못한 채 초라하게 살지 말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이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데에 능력이 있고 자유가 있고 영원한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0-28)
그 때에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식량이 부족하다든지 입을것이 없다든지 하는 물질적 빈곤에 있지 않습니다.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목적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을 벌었지만 왜 애써 벌었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물질은 많이 가졌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궁극적 목적을 모르는 것입니다. 공부를 합니다. 공부를 시킵니다.
그런데 왜 공부하는 것인지, 왜 공부를 시키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궁극적 목적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많은 수고를 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건강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일을 합니다.
그러나 수고의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행해지고, 허무해지고, 피곤해집니다.
둘째로, 목적이 문제입니다. 목적이 의미를 주고 의미가 가치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목적이 없으니 가치기준이 없습니다.
결국 가치의 상실로 인하여 피곤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목적에 따르는 결단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추상적 목적이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비장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보면 생각은 있습니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고 말은 잘하는데 그에 따르는 구체적인 현실이 없습니다. 결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목적이 있다면 참된 결단이 따라야 합니다. 목적이 확실하다면 결단은 자동적으로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마치 갖고 싶은 귀한 것을 발견했을 때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팔아서 그것을 사도 아깝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灌祭)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관제가 무엇입니까? 피를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목적과 가치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하고 보니, 그대로 피를 토하고 죽어도 좋을 만큼 감격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확실한 목적과 그것에 따르는 확실한 결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목적에 끌려가고 목적에 흡수되는, 아름다운 결단이 없는 인생은 피곤할 뿐입니다.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2,500명을 상대로 '당신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한 30여 가지로 대답한 실패의 원인 중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결단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라는 것이었답니다. 모름지기 바른 결단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Longfellow)는 '결단하라. 그러면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에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확실한 결단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 혼기가 가까이 오면 참 고민이 많습니다. '결혼을 할까 말까, 이 사람하고 해야 하나 저 사람하고 해야 하나'하고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서 확실하게 결정짓고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그 고민은 없어집니다.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도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사람하고 결혼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하는 미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운명은 정해졌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남편 코고는 소리가 크든 작든 이제는 정해진 운명입니다. 이 사람하고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합니다.
아내가 음식을 잘하든못하든 이제는 그녀와 평생을 살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무릇 결단이 없는 삶이기에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결단에는 변화가 없어야 합니다. 환경이나 여건, 대상을 따지지 않고, 결정된 구체적인 신앙적 의지는 절대로 변화를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하여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천지개벽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결단에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처음의 마음 그대로 사는 사람만이 성공하고, 평안할 수 있고,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았다고 남을 사랑하고, 내가 미움받았다고 남을 미워하고, 내가 손해입었다고 남의 것을 빼앗고----이렇게 종속적으로 흔들리는 사람이라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그저 사랑하기로 생각하였으면 사랑하고, 일단 남에게 주기로 마음먹었으면 주는 것입니다.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 자유함이 있습니다.
본문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고 계십니다.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불변의 신앙적 의지가 성경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줄렁줄렁 따라나선 제자들은 너무나 한심합니다. 우편이냐 좌편이냐, 우정승이냐 좌정승이냐 하면서 다투고 있습니다. 빌라도 법정이나 대제사장 가야바의 음모 같은, 예수님을 해하려 하는 세상이야기는 접어두고라도, 가까이 있는 이 제자들마저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 저런 것 자꾸 생각하면 마음만 흔들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불고(不顧)하셨습니다. 그저 주려고 하셨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원칙적인 본래의 목적 그대로, 주기로 하셨기에 주실 뿐입니다.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에 사랑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기에 지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도 그 결심은 주저될 수 없고, 방해될 수 없고, 좌절될 수 없었습니다. 본문말씀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처음부터 섬기려 왔기 때문에 끝까지 섬기겠노라 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한심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 13:7)."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흔히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주려고, 베풀려고, 사랑하려고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어찌하여 변심하기도 하고 변덕을 부려서 실패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처럼 사람의 마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이기심은 자기 양심의 성원을 받지 못합니다. 나의 양심은 마음속의 이기주의를 옳다고 성원하지 않습니다. 주위사람들도 반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나이가 마흔이 넘었으면 나의 주변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잘한다고 하는데 주위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처럼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 잘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한테는 왜 친절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변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독합니다.
고독한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집단적 이기주의를 볼 수 있습니다. 가정적 이기주의입니다.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청을 넣습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오직 우리 가문, 내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 가정, 우리 자손, 우리 가문만 생각하는 집단적 이기주의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마음이 집단적 이기주의입니다. 문제입니다. 실은 자기도 불행하게 되고, 가문을 위하는 것도 되지 않고, 사회에는 비사회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부끄럽고 다른 사람 보기에도 창피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것을 모릅니다. 이기심의 노예가 되기 시작하면 자신이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 왜 구하는 것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욕심만 있었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기가 구하는 것의 댓가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허구헌날 교회에 나와도 하나님의 말씀은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습니다. 왜 입니까? 마음의 문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하고 자상하게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기적인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습니다. 적이 많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겠다고 하니, 그 당장에 다른 제자들이 분하여 화를 냅니다. '네가 뭔데 너만 잘되겠다는 것이냐'---모두들 그 둘을 시기합니다. 여러분, 봉사하는 사람이 시기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이기적인 사람은 언제나 제 생각만 하기 때문에 반드시 적이 있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Kant, Immanuel)는 이기주의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논리적 이기주의입니다. 자신의 판단만 옳다고 보고 다른 판단은 자기와 무관하게 보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만 옳고 자기 생활은 무엇이든 정당화시킵니다. 논리에는 내가 생각하는 논리도 있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논리도 있는 법인데, 다른 사람의 논리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무조건 자기만 옳고 자기 생활은 항상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이것이 바로 논리적 이기주의입니다.
두 번째로, 미학적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만족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나만 생각할 뿐더러 내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은 전혀 상관없고 내 기분만 좋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기분, 자기만족, 자기감정에 중심을 두고 다른 사람의 마음은 상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불순한 이기주의입니다. 혹여 이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도덕적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생기는 논리입니다. 자기한테 유익하지 아니하면 다 나쁜 것이요, 자기한테 유익한 것은 다 선하고 누구한테도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이기주의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사회도 나라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같은 도덕적 이기주의가 가장 일반적인 이기주의입니다.
며칠전의 일입니다. 여러분도 이름을 들으면 익히 알만한, 큰 기업체의 회장인 어느 장로님과 조찬기도회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분이 들려준 경험담입니다. 그 장로님은 일본과 합작으로 벌이는 사업이 있어서 일본 현지에도 자주 가고 친구들도 많답니다. 어느 정도 일본의 기업인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무렵에 그들에게 물어보았답니다. "이상하게도 우리 나라 사업이 잘 풀리지 않는데, 우리 한국의 기업들이 잘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일본인 친구는 "한국인은 기술도 있고, 재주도 있고, 능력도 있고, 자본도 있고, 다 갖추었는데 딱 한가지, 애국심이 빠졌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순간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장로님에게 한마디 덧붙이더랍니다. "적어도 우리 일본의 기업인들은 수입을 할 때에 아무리 돈벌 수 있는 상품일지라도 나라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수입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돈이 된다 해도 나라를 해치는 짓이라고 생각되면 절대로 수입하지 않아요.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사회가 어떻게 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돈만 벌면 그만이라고들 생각하더군요. 아마도 이런 점이 한국의 기업들을 부진하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요?" 사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쓸데없는 것들도 많이 수입하고 있습니다. 필요 없는 상품이 상점에 가득합니다.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저 하나만 잘살면 된다는 태도입니다. 제 한 몸 편안하고 자식 손자 남보다 흥청거리면 그만인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이기적인 생각은 불행의 원인입니다. 몸이 편안하다고 마음까지 평안하다던가요? 남의 눈총 받고 사는 게 그리도 재미있습니까? 이기주의가 큰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집이 좋아서 잠이 잘 온답디까? 침대가 좋아서 잠이 잘 오는가요?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떤 소리를 듣고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의 원성을 사고 있는데 그 운명이 어떻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양심이 어떻게 평안하겠습니까. 생각을 고치십시다. 불행, 고민, 고통의 원인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기적인 생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습니다. 높아지려고 발버둥질치는 사람은 낮아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에 매이는 것은 벌써 자기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의 주인공 마틸드는 아주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여인이었습니다. 돈많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지참금이 없어서 원하지 않았던 아주 가난한, 교육부에 다니는 직원과 결혼을 합니다. 마음은 언제나 멋지게 살아보고 화려한 사교계에서 활동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안되던 차에, 교육부장관 주최의 파티에 내외가 초청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좋아하던 마틸드는 파티에 입고 나갈만한 옷을 마련하느라, 집을 사려고 모아두었던 사백 프랑의 돈을 써버렸습니다. 그런데 목걸이가 없었으므로 돈 많은 친구에게 값비싼 진주목걸이를 빌려가지고 파티장에 나갔습니다. 생전에 소원했던 대로 여러 남자들과 춤도 추고, 사교계의 여왕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썩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보니 그만 목걸이가 없어졌습니다. 도둑맞은 것입니다.
큰일났습니다. 그래서 3만 6천 프랑이나 되는 빚을 지고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친구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빚을 갚기 위하여 마틸드 부부는 10년이나 갖은 고생을 다 합니다. 한 순간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토록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빚을 다 갚을 무렵의 어느날, 고생으로 찌든 마틸드에게 그 옛날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그 친구가 말합니다. 그 때 빌려준 목걸이는 가짜였다고.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의미없고 부질없는 이기적인 행동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가문을 망치고, 자기를 망치고 명예 잃고, 하나님 앞에도 죄송스럽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자기희생이 곧 자기 행복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文豪) 톨스토이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언제 이것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언제 가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섬김을 받는 것과 섬기는 것, 주는 것과 받는 것은 어느 것이 큰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기쁨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유치한 수준일 때에는 받는 기쁨이 좋지만, 성숙하고 보면 받기보다는 주는 것이 좋은 법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란 '주는 기쁨'에 살아가야 합니다. 희생하는 기쁨에 살아갑니다. 섬기는 기쁨을 즐기는 취향으로 살아갑니다. 물질을 주고, 목숨을 주고, 의미를 주고, 진리를 주고, 대속물로 주어서 내가 죽고 내가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고 의미가 돌아가게 하는 것----이런 것을 즐기는 것이 그리스도인 된 삶의 취향입니다.
주는 것은 곧 자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창의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억지로 주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에게 학비를 주거나 먹을 것을 줄 때, 귀한 자녀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여, 특히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무엇이든 주곤 합니다. 그런데 꼭 빼앗기는 마음, 강도 만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만 낳을 것을 괜히 셋씩이나 낳아서 다 빼앗긴다'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속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20년 부부생활을 돌이켜 볼 때에 20년 내내 강간당하는 기분으로 살아왔다는 여자분들도 있습디다. 이 무슨 소리입니까? 왜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엮어가지 못하고 평생을 강간당하는 기분으로 산다는 말입니까? 왜 자발적이고 좋은 마음으로 주지 못하고, '주는 기쁨'에 살지 못하고, 평생을 강도만나거나 도둑만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어차피 사람이란 다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남에게 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빼앗기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준 것은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주었을 뿐입니다. 항상 베푸는 사람만큼 사는 것이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본디 사람은 그리하여야 합니다. 또한 이 마음에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하였건 세상이 어떻게 하였건, 우리의 그리스도처럼 전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기쁘게 생각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다 베풀고 어떻게 라도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일관하여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고민이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마음 속에 이기적인 생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옛날에 주었던 것을 두고 이제와서 섭섭하다고 탓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에게 주기로 마음먹었으면 고맙다는 소리 들을 생각 마십시오. 그런 소리, 소용없습니다. 주기로 하였던 것이니 주어버리고, 희생하기로 하였던 것이니 희생하는 것이 깨끗합니다. 시시하게, 섬기려 하다가 섬김받으려 하고, 주려 하다가 뺏으려 하고, 변변치 않은 것 하나를 주어보지도 못한 채 초라하게 살지 말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이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데에 능력이 있고 자유가 있고 영원한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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