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을 사기당한 자(창세기 25장 27절~34절)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어느 사업가가 갑자기 중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 병마와 싸웁니다. 그에게는 오로지 목숨만이라도 건져야 하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많은 비용을 써가며 오랫동안 치료를 한 결과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그가 수십 년 동안 일궈놓은 사업이 엉망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리를 떠나 있는 동안 뒤를 돌보던 사람이 잘못하여 그만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십 년간의 수고와 땀과 공적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을 보고 그는 허탈감에 빠지고 맙니다. 낙심하였습니다. 살아야 하는가, 죽어야 하는가 --- 원망도 불평도 합니다.
하나님마저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하는 친구가 그를 찾아옵니다.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데 이 친구, 양팔에 목발을 짚고 있습니다. 사연인즉 자동차 사고가 나서 그만 두 다리를 자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의족을 하고 다니네마는 생명을 보전하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밝게 살아간다네." 이 말을 들으면서 그는 몹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친구가 돌아간 다음,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두 팔도 두 다리도 온전합니다. 두 눈도 있습니다. 이제 건강도 회복되었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저는 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넉넉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불행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그는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지식이나 지위에 있지도 않습니다.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불행한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불행하다는 사실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느 환경에서나 행복합니다. 모든 환경에서 '나는 복되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복을 빼앗는 사람은 나쁩니다. 그러나 복을 빼앗기는 사람도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속이는 사람, 물론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속는 사람도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속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기를 당해본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물질을 잃어버렸습니까, 명예를 잃어버렸습니까? 지위를 잃어버렸습니까, 인권을 잃어버렸습니까? 설령 속은 일이 있었다 해도 남을 원망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부터 물어야 합니다. '속았던 이유가 나에게는 없었는가?' --- 신중히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내가 무지해서 속았습니다. 똑똑치 못했습니다. 둘째, 욕심이 많았습니다. 알고 보면 실패 원인의 상당 부분이 욕심이 지나쳤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저 내게 주어진 것에 자족할 줄 알고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듯이 나아갔어야 했습니다. 일확천금을 바라다니……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욕심, 그래서 사기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셋째, 수고 없는 이득을 바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래 전 어느 잡지에선가 읽었던 기사 내용입니다.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동경으로 들어가는 중간쯤에 자그마한 교회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 인접해 있는 얼마간의 땅이 있는데 쓸모 없는 땅이라 사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땅 주인으로서는 팔아야 무엇이라도 하겠건만 도대체 팔리지를 않습니다. 하는 수없이 교회에다 거듭거듭 사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하도 졸라대기에 주차장으로나 쓸 요량으로 사고 말았습니다. 후에 올림픽이 열리게 되면서 도로를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 엄청나게 높은 값을 쳐서 그 땅을 사들였습니다. 자그마치 2억 엔이라는 돈을 주고 그 쓸모 없던 땅을 매입한 것입니다. 교회로서는 공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을 놓고 제직회를 엽니다. 예배당을 새로 짓자느니, 뭘 하자느니 하며 저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자 한 집사님이 절대반대를 하고 나섭니다. 우리가 땀흘려 모은 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금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이 아닌, 공으로 생긴 돈으로 성전을 지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고아원에 기부합시다"---딱 잘라 말합니다. 결국 그 돈을 고아원에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일입니까?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우리 가운데도 어쩌다 집을 샀는데 집 값이 뛰어서 돈을 벌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축하를 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저로서는 참 난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땀흘려 벌지 않은 돈은 내 돈이 아닙니다. 내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돈입니다. 불로소득이 나와 내 가정을 행복하게 하리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복은 내가 수고한대로 내게 돌아옵니다.
땀흘려 얻어야 합니다. 불로소득, 공짜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에 속았습니다.
넷째, 스스로 속이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딱 한 번만 더'하다가 짐짓 크게 당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 곧 에서와 야곱이 나옵니다. 쌍둥이 형이요 동생이고보니 에서나 야곱이나 서로 형과 아우라는 개념이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동생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권을 시기한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몇 시간 먼저 나온 형인데……'하고 에서를 우습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에서도 야곱에게 형 노릇을 제대로 못한 모양입니다. 어느날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오니 야곱이 죽을 쑤고 있습니다. 에서는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당장 한 그릇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성경에는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마는 꽤나 시비를 벌였을 것입니다.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라고 에서는 야곱에게 조릅니다. 그러자 야곱이 약삭빠른 짓을 합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한마디 더 합니다. "오늘 내게 맹세하라." 어리석은 에서는 맹세를 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고 맙니다. 팥죽 한 그릇에 그 소중한 장자권을 팔았습니다. 동생에게 장자권을 사기 당하고 만 것입니다. 뒤늦게 깨닫게 된 에서는 제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야곱을 미워하고 심지어 죽이겠다고 까지 합니다. 증오와 원한을 품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슬픔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대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축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흔히 내 노력으로, 내 지식과 경험으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마는 모든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되어지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유명한 주석가이자 목사인 매튜 헨리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도와주심과 성공케 하심과 자비로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설교도 할 수 없고, 강연도 할 수 없고, 축도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구체적인 기도를 드려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축복이라고 하면 특별히 가나안땅을 이을 자를 뜻합니다. 신령한 기업을 이을 자녀의 복을 말함입니다. 곧 땅과 기업에 대한 복입니다. 야곱은 복을 받아서 하는 일마다 형통하여 큰 부자가 됩니다. 이 복에는 영적인 것도 포함이 됩니다. 후계자요 가장이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됩니다. 그가 복을 빌 때에 그가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명분입니다.
메시야의 계보를 이루며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특권입니다. 여러 가지 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는 거듭하여 네 번이나 '장자의 명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에서는 그 귀한 축복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결국은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에서의 실수입니까? 에서가 어쩌다 한번 실수하여 그의 일생의 운명이 달라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바로 에서의 사람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단순한 사건으로 보고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 깊은 곳에서는 인간의 인간됨, 그 전체, 그 본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서의 인격이 시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서,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영적인 신령한 권리, 신령한 축복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과 인격, 성공과 양심---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양심을 팔아서 성공을 사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도덕과 물질, 신앙과 성공---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가치,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종교개혁자 칼뱅 선생은 임종을 맞으면서 로마서 8장 18절 말씀을 수없이 되뇌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보이지 않는 것, 신령한 것, 영원한 가치의 것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에서는 마침내 이방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아브라함 가문의 장자로 계계승승 아브라함의 그 귀한 축복과 덕을 이어가야 할 사람이 이방 여자와 결혼을 해버립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큰 근심을 사게 됩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결과입니다. 에서는 육체적인 것에 집착하였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물질만능주의입니다. 가시적인 것,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팥죽을 보는 순간 정신이 확 돌아버렸던 것입니다. 우선 먹고 보겠다고 달려듭니다. 그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에서가 얼마나 순간적인 것에 집착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장 달라고 합니다. 원문상으로 보면 '먼저'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강조되고 있습니다. 천천히 기다렸다가 아버지 먼저 드리고 온 집안식구가 둘러앉아 함께 먹어도 됩니다. 식구라고 해야 많기나 합니까? 그런데 참지 못하고 배고프니 당장 내놓으라 하고 말았습니다.
현대의 문화를 가리켜 흔히 찰나적인 문화라고 합니다. '쾌락이 당신을 웃게 할 수는 있어도 당신의 눈물을 말려줄 수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쾌락이 여러분의 마음을 잠시 즐겁게 해줄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여러분의 눈물과 고통은 제거하지 못합니다. 또한 현대사회를 인스턴트사회라고 합니다. 모두가 인스턴트입니다. 3분 라면도 길어서 이제는 1분 라면입니다. 어느 책인가를 보았더니 인스턴트가 좋은 것만은 아닙디다. 그 과정에 문제가 많습니다. 정신적인 문제도 있고 문화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사실 위생적인 문제도 심각합니다. 예전에는 남자보다도 여자가 좀 느긋한 편이었습니다. 남자들이 급하다고 펄펄 뛰어도 여자들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듭니다. 하나는 열 달을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열 달을 기다려야 아기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밥을 하는 과정입니다. 아무리 서둘러도 뜸이 들어야 먹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저 모두들 급하게 서두르기만 합니다. 인스턴트, 참으로 문제입니다.
또한 'throw-away' ----- 한 번 쓰고 던져버리는 시대라고 합니다. 옷도 한 번 입고는 다시 입지 않습니다. 그릇도 설거지하기가 싫어서 종이그릇을 쓰고는 버립니다. 도대체 움직이기를 싫어합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으면 숨도 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회용품 시대, 던져버리는 시대 ---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더욱이 'snap-decision'--즉각적으로 결단합니다. 급하게 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결혼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만난 지 며칠 사이에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오면 제가 먼저 묻는 것이 이것입니다. "얼마나 사귀었습니까?" 대부분 얼마 안되었습니다. 저마다 결혼식부터 하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래서 되겠습니까? 좀 느긋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농사를 지은 것 같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사냥을 한 것 같아요.
농사짓는 것은 어느 정도 인내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사냥은 그야말로 운이 좋으면 한 마리 건지는 것이 아닙니까? 사냥꾼 에서가 좀 서두는 성격이었던 것은 그래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스스로 현재를 위기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본문 32절에 보면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그가 정말로 죽게 되었습니까? 배고픈 것으로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좀더 있다가 먹어도 됩니다. 내가 지금 당한 사건을 과장하는 것, 스스로 위기를 만드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의 소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겠노라 합니다. 이를테면 대학에 떨어져서 죽어버리겠다느니, 부모가 날 사랑하지 않아서 죽어버리겠다느니 하는 것입니다. 다 잘못된 일입니다.
가끔 결혼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미혼 여성들이 있습니다.
남자가 사랑한다며 끈질기게 쫓아다녀서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들어 싫다고 하면 죽어버리겠다고까지 한답니다. 벌써 한 차례 약을 먹은 일도 있다고 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니 어쩌면 좋으냐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런 경우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둔 대답이 있습니다. "자고로 여자 하나로 죽네사네 하는 남자하고는 살아보아야 별 볼일 없다." 그러면 죽는다고 하는데 어떡하느냐고 합니다. "죽겠다면 죽으라고 해라, 그렇게 살아서 뭘 하겠느냐?" 사실이 그러합니다. 한 여자 때문에 죽네사네 하는 남자치고 결혼해서 순탄하게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때 사랑에 미쳐서 너 아니면 죽겠노라 하고 한마디쯤 해보는 것이야 모르겠습니다마는 한 여자로, 한 남자로 인하여 죽어야 하겠습니까? 생사를 가름할 일이 그렇게 시시해서야 쓰겠습니까? 너 아니면 죽는다고 하고는 다른 사람하고 결혼해서 잘만 삽디다.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의 일을 놓고는 되면 살고 안되면 죽는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저가 죽겠다면 그래도 낫습니다.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 문제입니다. 일을 극대화시켜서 목숨까지 거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바보스런 사람들입니다. 팥죽 한 그릇,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다 무엇이냐' --- 정말 에서가 죽게 된 것입니까? 이러한 생각이 그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만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 미래의 영광보다 눈앞을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령한 것이 아랑곳없습니다. 약속에 대한 축복은 더욱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코앞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맙니다.
고사성어에 '조삼모사(朝三募四)'라는 말이 있습니다. 송나라 때에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좋아하여 집에서 많이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원숭이의 숫자가 많아져 먹이를 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여 원숭이 앞에서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열매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씩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그 적은 것에 노하여 데모를 합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고하니 원숭이들이 좋아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사람들도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것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위하여 오늘의 고통을 얼마나 이겨낼 수 있습니까? 지금의 이 고통을 감내할 수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미래는 제쳐두고 현재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늘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약속의 축복은 저 미래에 있습니다. 저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을 기꺼이 참아내는 것이 인격자의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유감스러운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에서가 그냥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배가 고플 때는 정신이 없어서 헛소리를 했다손 치더라도 먹고 정신차린 다음에는 아까 말한 것은 농담이었다느니 하고 말 한마디쯤은 했어야 옳은 일입니다. 그런데 먹고 마시고 그냥 가버립니다. 어쩌다 실수를 했으면 뉘우칠 줄 알아야 합니다. 잘못했다고 말을 하여야 합니다. 에서는 그 한마디를 못해서 평생 은혜 없는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부끄러운 생입니다.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에서는 분명히 실수를 했습니다. 후에라도 '야곱아, 미안하다'라는 말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반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창세기 27장 36절이나 41절의 말씀을 보면 모든 책임을 야곱에게 미룹니다.
야곱이 간사하고 나쁘다고 증오하며 죽이겠노라고 까지 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입니까? 야곱이 아버지를 속인 것은 잘못입니다 마는 형을 속인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한테 주어진 축복을 간직하지 못하면 축복은 나와 무관해집니다. 사기를 당하고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십자가 없는 믿음, 훈련이 없고 제자도가 없는 믿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를 거절하는 믿음 때문에 문제입니다.
에서는 분명 복을 받을 사람이었습니다 마는 그 복을 사기 당하고 맙니다. 야곱은 방법에서야 물론 잘못한 점이 있었습니다마는 신령한 복을 간절히 사모한 나머지 마침내 장자의 기업을 누리게 됩니다. 신령한 것, 영원한 것, 복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복을 받을 뿐더러 그 복을 간직하고 누릴 수 있는 은혜가 항상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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