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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여인의 찬송(누가복음 1장 46절~56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 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어수선하고 불안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또다시 기쁜 성탄이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은 가장 큰 경사이며, 온 우주가 축하해야 할 사건입니다. 사람들마다 이 날을 축하하는 의미는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기다리는 날로, 어떤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서로 만나는 날로, 또는 공휴일로, 자선의 날로, 일년 중에 한번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보는 날쯤으로 생각하겠습니다.
2천 년 전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로 돌아가 봅시다. 그 성탄은 오늘과 같이 잡다한 의미를 가진 성탄이 아니었습니다. 성탄 메시지는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천사가 전하여준 이 메시지가 바로 우리를 향한 성탄의 의미이자 내용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은 온 우주와 온 역사에 미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각 그 현장에 돌아가 보면 극히 제한적인 기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탄의 기쁨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예시적이고 미래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어서 과연 그들이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을까, 성탄 그 자체의 의미를 알고 찬양을 하였을까 하는 의문마저 듭니다. 예컨대 동방박사, 들에 있는 목자들, 사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요셉, 시몬, 안나 --- 이들만이 성탄을 알았고, 성탄을 노래했고, 성탄을 기뻐했습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메시야 대망사상(待望思想)의 성취로 받아들이고 메시야를 영접하였습니다. 제한된 사람들에게 해당된 제한된 기쁨의 성탄이었습니다.
한편 성탄의 소식을 듣는 순간, 증오심으로 부들부들 떨며 당장 아기 예수를 죽이겠다고 이를 가는 헤롯왕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심판의 소식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와 메시야가 난 곳을 묻습니다.
헤롯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의논을 한 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대땅 베들레헴'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박사들을 따라나섰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메시야를 만나겠다고 떼를 지어서 베들레헴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거민들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충격을 받고 소동이 났다고 합니다. 소란만 일으켰을 뿐 어떠한 경배자도 없었던 것으로 성경은 증거 합니다. '가서 잘 알아보고 오시오.' 박사들을 전송한 뒤에 헤롯왕은 음모를 꾸밉니다. 왕의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왕의 왕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소식은 사실 자기 왕위에 대한 위협으로 들릴 만도 합니다. 겸손하게 오신 그리스도가 그에게는 심판입니다. 그래서 즐겁고 기쁜 성탄이 되지 못합니다. 교만한 자의 마음이 부서지는 시간입니다. 인격의 아성(牙城)이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부자가 공수(空手)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우리 나라의 고대소설 가운데에 「춘향전(春香傳)」이 있습니다. 춘향이가 얼마나 예뻤는지, 이도령과 어떤 사랑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별반 흥미가 없습니다마는 한가지 희한하게 생각되는 대목이 있어요. '암행어사 출도야!' 호령과 함께 이도령이 관가에 나타나자 변사또가 코가 땅에 닿도록 엎드리어 벌벌 떱니다. 이때에 춘향이와 이도령의 극적인 상봉이 연출됩니다. 참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이 장면 하나를 보려고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에 판도가 달라집니다. 역사가 변합니다. 예수께서 왕으로, 메시야로 오신 사건은 어떻습니까? 비천한 자, 감옥에 있는 자, 눌린 자에게는 복된 소식이나, 교만한 자, 권좌에 있는 자, 거짓된 자, 죄인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소식입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자,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요 진정한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 그것이 기쁨의 소식인지 심판의 소식인지는 우리의 자세에 달린 것입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과연 누가 성탄을 가장 기쁘게 맞이했을까요? 가장 바른 의미로 그리스도를 맞이했던 사람은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가장 큰 기쁨의 성탄을 맞이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성탄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하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며 부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는 천사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잉태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그는 찬송을 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46-47절)" --- 측량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큰 찬송을 부릅니다. 마리아만이 가지는 기쁨과 감격입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복되다, 모든 사람이 대대로 나를 복된 자라 할 것이다 --- 이것이 본문말씀의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기쁨을 느껴보셨습니까?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8절)" 내가 기쁠 뿐만 아니라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복되다 할 것이라고 벅찬 감격을 노래합니다. 미래지향적인 기쁨입니다. 현재의 모습은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초라한 갈릴리의 여인에 불과합니다. 그는 스스로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잘것없는 나약한 여인이지만 그 마음에는 엄청난 기쁨이 있습니다. 메시야를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갖게 되면 몸매를 버린다고 몹시 괴로워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마음껏 멋을 내고 외출하지 못한다고 속상해합니다. 물론 아기를 갖게 되면 여러 모로 불편한 점이 많겠지요. 하지만 이 고생을 마다하는 여인은 없습니다. 그 열 달 동안의 고생을 마다하는 여자는 여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놀라운 신비 앞에서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고생이나 부끄러움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여자의 진정한 기쁨이요 마음입니다. 저는 간간이 결혼 주례를 합니다. 얼마 지나면 어떤 친정 부모님들은 안부 전화를 합니다. "딸이 아이를 가졌습니다"하며 멀리서 장거리 전화를 합니다. 심지어는 미국에서까지 알려줍니다. "정말 기쁘시겠어요, 축하합니다." 이렇게 응수해줍니다만, 전화기를 내려놓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 못하는 일을 했나,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저렇게 좋아할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기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더군다나 귀한 자녀를 갖게 된 여자의 기쁨이란 굉장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의 태동(胎動)을 느낄 때의 그 기쁨은 죄송하지만 남자들은 모릅니다.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주를 찬양합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복되다, 만세에 나를 복되다 하리라 ---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기쁨으로, 구체적인 감격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희생이 따릅니다.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총각과 약혼을 한 사이였습니다. 아무리 여인이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그것을 믿어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믿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미친 여자로 취급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감내합니다. 파혼이 되든 말든, 오해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부정한 여인이라는 죄명을 쓰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과 모험과 희생이 있는데도 아랑곳없습니다. 나는 메시야를 잉태하였노라 --- 이 한마디로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벅찬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전적으로 자기를 위탁해버립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그대로 생명과 그 동기와 방법과 마지막 운명까지 다 바치는 태도입니다. 이제 어떤 일이 전개되어도 알 바가 아닙니다.
어디서 낳으며, 어떻게 키울 것이며, 어떤 어려움이 닥칠 것인가 --- 문제가 안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위탁했습니다.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무 걱정과 염려가 없습니다. 무한한 기쁨만이 그의 마음에 충만합니다. 이것이 복된 여인의 찬송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찬송이며, 성탄의 기쁨입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자기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세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이 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 거룩한 역사. 구원의 역사에 고용되어 하나의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 질그릇과 같은 여인이 쓰임받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가슴 벅차 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직업이 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직업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해롭게 하고 슬프게 하는 직업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담배 파는 일입니다. 하고많은 직업 가운데서 하필이면 백해무익한 것을 팔아먹고 살아가다니 한심스러워요. 물론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또 남의 장점, 좋은 점을 살피는 직업이 있는가 하면 꼭 남의 잘못된 점만 들추는 직업이 있습니다. 남의 못된 점을 밝혀내고 쑤시는 직업을 생계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좋지 않은 직업입니다. 아름다운 것, 귀한 것, 선한 것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부득이 나쁜 것을 보며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전하여야만 하는 심판과 저주를 전하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는 메신저(messenger)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선지자가 끊어진 지 수백 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하나님의 긍휼과 축복이 임하는 그 때에, 그 도상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선포하는 귀한 일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49절)" ---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는 일에 기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선포되는 시간입니다. 진노의 시간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시는 시간입니다. 마리아가 메시야를 잉태한 것이 바로 긍휼의 증거입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그 긍휼 속에 공의가 있었습니다.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51절)" --- 교만할 이유를 다 무효로 돌립니다. 메시야의 오심은 모든 교만을 헛된 것으로 만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지요. 교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겸손 말고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 앞에는 오직 겸손과 비천이 있을 뿐입니다.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지금 마리아는 보고 있습니다. 복중에 있는 메시야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환하게 전망합니다. 그래서 '나는 기쁘다'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영접하되 마음으로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드려 영접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위탁하였습니다. 운명을 바칩니다. 다른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그녀는 믿었습니다. 온 세상사람이 다 못 믿어도 마리아는 예수 잉태를 믿은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많은 슬픔과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게 하였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이요, 미움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슬픔을 이기는 기쁨입니다. 마리아는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쓰임 받는 감격으로 기뻐합니다.
미셸 퀘스트라는 사람의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주여, 나는 예라고 대답하기가 두렵습니다. 주님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것입니까? 나는 허탕칠까 두렵습니다. 나는 덮어놓고 백지에 도장을 찍기가 두렵습니다. 나는 한 번만이 아니라 자꾸만 예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 두렵습니다. 아들아, 예라고 대답해다오! 나는 이 세상에 오기 위해 마리아의 예라는 대답이 필요했듯이 너의 예라고 하는 대답이 필요하다. 너의 일터에 내가 있어야 하고, 너의 가정에도 내가 있어야 한다. 네가 사는 구역에도 내가 있어야지 네가 있어서는 안 된다. 쳐다보는 눈도 내 눈이어야지 네 눈이어서는 안 된다. 주어야 할 말은 내 말이지 네 말이 아니다.
변화시킬 생명도 내 생명이지 네 생명이 아니다. 내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다오. 모든 것을 내게 맡겨다오. 나는 너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데에 아무래도 너의 예라고 하는 대답이 필요하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 아무래도 너의 긍정적인 대답이 필요하다. 오 주님, 주님의 요구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러나 누가 주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내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라고 대답하게 하소서.'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예'하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기쁨에 감사하며 살아갔습니다. '예'라고 대답하는 기쁨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순교자입니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오로지 '뜻대로 하소서'할 뿐입니다. '예'하면서 찬송하십시다. 그 기쁨과 감격으로 승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의 역사 앞에 '예'라고 대답하여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성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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