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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됨의 윤리(에베소서 4:17-2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새해 첫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신년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은 새로움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좀더 새롭게, 좀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생각뿐, 무엇을 새롭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새로운 것인지, 그 구체적인 방법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가끔 집에서 텔레비전 연속극을 볼 때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그 나오는 장면이, 이야기가 한결같습니다. 밤낮 무엇을 그리 많이 먹는지 계속해서 먹어댑니다. 그리고는 잡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뭐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사는 모습입니다. 산다는 것이 먹고 자는 것의 연속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불가피적 욕구 충족의 순환이라는 그 끈끈한 굴레를 아무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실 새롭다고 해봤자 만났던 사람 또 만나고, 여전히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새로움이란 무엇입니까? 옛날 이야기나 옛날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새로움을 찾기 위하여 가출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반복적인 생활 더는 못하겠다고 멀쩡한 집을 두고, 가정을 두고 가출합니다. 사막이나 바닷가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는 나름대로 보다 깨끗하고 보다 정결하고 보다 신령한, 높은 차원의 생을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이 역시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여러분, 혹시 '주상(柱上)의 성자(聖者)'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옛날 어떤 사람이 좀더 새로운, 좀더 경건한 삶을 위하여 집을 나와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는 사막에 기둥을 세워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한번도 내려오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삶도 그리 새롭고 경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구경꾼이나 순례자들이 던져주는 음식으로 평생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언젠가 속리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속리산 정상에 오르려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비구비 이어지는 높은 언덕을 넘어야만 합니다. 여기를 넘어서 올라가느라면 '문자 그대로 속리산(俗離山)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험준하고 울창한 산세가 속세를 떠난 산이라는 생각을 품게 합니다. 그런데 정작 속리산 정상에 오르고 보면 그 생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맙니다. 남대문시장보다 더 복잡합니다. 도저히 '속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세상, 온 하늘과 온 땅 어디에 새롭고 깨끗하고 온전한 환경이 있다는 것입니까? 결국은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새 생활, 새 생명, 새 존재, 새롭게 사는 비결을 아주 신비롭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성경말씀을 읽을 때면 늘 마음 한구석 답답함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이 귀한 진리를, 이 온유한 이치를 성도들에게 바로 전달할 수 있을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아도 제 구사력(驅使力)이 부족한지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참으로 답답해집니다. 그리고 사실, 이 말씀은 여러분 각자의 심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적 사건이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도 합니다. 다만 이 시간을 빌어 이 새로운 이치, 새사람의 윤리를 여러분과 함께 깊이 생각하고, 나아가 그 깊은 세계를 터득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옛사람과 새사람을 확실하게 구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옛사람을 지칭해서 이방인과 같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은 비 유대인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중생(重生)하지 못한 사람을 다 이방인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새사람이란 그리스도인을 가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에 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새사람을 설명하기에 앞서 옛사람의 모습을 여섯 가지 존재양식으로 나누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허망한 자라고 말씀합니다(17절). 헬라어로 '마타이오테스'라고 하는 이 '허망하다'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계약은 했으나 그 계약의 내용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허망하다'는 목적이 없고, 내용이 없고,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를테면 결혼을 했으되 사랑도 없고 평생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저 단순히 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한다고 해봅시다. 온 마음, 온 인격, 온 정성, 나아가 생명까지도 그 일에 쏟아 부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고 그저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허망한 것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하는 권투시합을 볼 때가 있습니다. 저는 시합보다는 해설자의 말에 더 흥미를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그 해설 속에 진리가 담겨 있을 때가 많거든요. 언젠가도 보니까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선수를 놓고 안타까워하면서 그 해설자가 "주먹하나를 던질 때에도 온 체중을 실어서 쳐야 하는데 저 선수 왜 저렇게 허우적거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더군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온 마음, 온 정성, 온 생명을 다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허우적거립니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이렇게 평생을 살아갑니다. 선물을 주었는데 정성이 없습니다. 음식을 대접했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수고는 했는데 그 마음속에 진정한 희생의 마음이 없습니다. 온 정성, 온 사랑, 온 마음을 가득히 담아서 행하지를 않습니다. 사람의 목적과도 상관없이, 가치의식과도 상관없이 그저 체면과 형식에 매인 생을 허우적거리며 휘청거리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허망한 것입니다.
두 번째, 옛사람의 존재양식으로 어두움을 들어 말씀합니다(18절). '디아노니아'라고 하는 이 말은 지적 어두움을 의미합니다. intellect의 결여입니다. 지성의 결여입니다. 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본다'라는 말을 놓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내 눈만 밝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눈이 아무리 밝고, 내가 아무리 총명하다 하더라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꽤 똑똑해요. 스스로도 아이큐가 높다고 자랑합니다. 자기 딴에는 엄청이나 똑똑한 것 같은데 하는 짓을 보면 그렇게 바보일 수가 없습니다. 유치할 정도로 바보짓을 하고 있습니다. 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빛의 근원으로부터 너무 멀리 갔기에 이제 그의 지성은 소용이 없습니다. 어두워진 지성이요, 빛을 잃은 총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 옛사람은 무지하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8절). '아그노이안'이라고 하는 이 말은 도덕적 죄는 무지에서 비롯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에 당신을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렇습니다. 모르기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한창 정직하게 살고, 인격을 쌓고, 열심히 공부해야 할 그 좋은 나이에, 그 좋은 시간에 공부하지 않고 그 시간을 허비하는 젊은이들을 볼 때에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몇 년이 지난 다음 후회할, 가슴을 치며 후회할 저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이 모두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젊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안다면 그렇게 빈둥거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젊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얼마나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젊음을 앞에 두고 인생무상이니 뭐니 하며 울고 짭니까? 말도 안됩니다. 이렇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지하기에 미처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젊었을 때에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형편없이 바보짓을 했구나 싶습니다.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도덕적 측면에서 이 무지를 죄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말씀합니다. 죄 때문에 무지해졌고, 이 무지함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옛사람은 마음이 굳어져 있다고 말씀합니다(18절).
'포로시스'라고 하는 이 말은 석회석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아예 돌이 되어버렸습니다. 들리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말을 대신하여 '강팍해졌다'라는 말을 씁니다.
여러분, 마음이 굳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게 되고, 순종할 수도 없게 됩니다. 경직된 인격이 되고 맙니다.
다음으로, 옛사람은 감각이 없는 자라고 말씀합니다(19절).
감각능력이 아주 없어진 상태를 말하는 아주 특별한 용어이며 완료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과거완료형입니다. 이미 무감각해졌습니다. 죽은 자와 같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깨달음도 없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이 다섯 가지를 총괄하여 방임했다고 말씀합니다(19절). '방임'이라는 이 말은 '포기했다----give up'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이 포기라고 하는 것은 끝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육체적인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브레이크는 이성입니다. 우리에게는 도덕적 타락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양심이라고 하는 브레이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허무와 실의와 절망으로 빠져드는 인간에게는 이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브레이크 구실을 하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 줄이 끊어졌습니다. 그 줄이 툭하고 끊어지면 그대로 내려앉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방임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방탕한 생활로 치닫게 됩니다.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상태로 볼 때에는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자요 제자도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뵙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노력까지도 포기하고 주님의 말씀만을 따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귀한 말씀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22-24절)." 이 말씀은 스스로 새로워지라는 것도 아니요 결심하라는 것도 아니요 성결케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 그대로가 복음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이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거룩하게 하는 역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중생도 하나님의 역사요 성화(聖化)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스스로 깨닫고 결심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까? 요즈음 유행하는 말대로 그런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가만히 보면 자기 지성으로 뭘 바르게 한다, 깨끗하게 한다 하며 교만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그렇지 못한 사람만도 못합니다. 인간의 노력이란 이런 정도입니다. 선을 생각하다가 위선자가 되고, 의를 생각하다가 고집불통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24절)"라고. 여러분, 과거를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막으셨던 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방탕한 길을 가지 못하도록 때로는 징계로, 때로는 질병으로, 때로는 실패로 말입니다. 이 어려운 사건들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욥은 무진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그 고생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니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하시니 겸손하고, 하나님께서 부지런하게 하시니 부지런하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시니 깨끗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으심을 받은 그 존재를 이제는 옷 입듯이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그 존재를 수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로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가지고 집을 나간 탕자가 거지꼴이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사실 알고 보면 탕자는 형편없는 인간입니다.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돌아옵니까? 저라면 죽으면 죽었지 집에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데 탕자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탕자는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를 만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고백하리라 결심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느라면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품은 아무나 할 수 있답니까? 일을 해본 사람이나 할 수 있지, 마음먹은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탕자는 일하는 것이 쉬운 줄로 알았나봅니다. 그리고 사실 탕자는 품꾼의 자격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쓰레기 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는 어땠습니까? 아들로 영접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종들에게 일렀습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까지 베풀었습니다.
이제 이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 그 용서와 긍휼, 아버지가 지어준 그 엄청난 새 옷을 그대로 입어야 합니다. 잔치에 참여하여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이 지어주신 그 새사람을 입으라 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과거도 못했는데,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한번 결심해봤자 별것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된다고 하지도 말고 안 된다고 하지도 마십시오. 스스로 깨끗할 수 있다고 하지도 말고 깨끗할 수 없다고 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모든 노력까지도 포기하고 그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실패가 와도 그것은 내게 필요한 것이요, 질병이 와도 그것은 나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역경이 와도 그것은 나를 성결케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여기에 제자훈련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대로 인도하시는대로 순종하고 따라갈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옷을 입는 길입니다.
옷은 신분은 나타내줍니다. 특히나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 옷이 달랐습니다. 귀족에게는 귀족의 옷이 있고, 종에게는 종의 옷이 있고, 주인에게는 주인의 옷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새사람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에 걸맞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나를 볼 때에는 불필요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 필요하다면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사랑하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자로서 자아의식을 바로 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로부터 깨끗이 벗어나야 합니다.
아주 오래전, 저는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긴장한 탓도 있지만 사람인지라 종종 실수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반주를 해나가다가 중간에 건반을 잘못 누릅니다.
그 순간 아차하고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결국 그 연주는 망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슬쩍 다음으로 넘어가야지요. 앞으로 할 일이 더 중요하니까 그 실수는 빨리 잊어버리고 계속 연주를 해나가야지요. 만약에 하나를 실수했다고 해서 내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하고 안절부절못한다면 끝난 것입니다. 연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록 실수를 했을지라도 연주 전체는 그대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 미래의 하나님의 프로그램은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한 즉시 빨리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돌이켜보면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 잘못에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프로그램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밀고 나갈 것입니다. 과거의, 옛생활의 습관을 좇는 옛사람을 남김없이 벗어버려야 합니다. strip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옷을 입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어서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여자와 술에 빠진 이러한 생활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몸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철학적으로도 타락하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종교적으로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마니교에 심취하여 육체와 정신과 영이 모두 철저하게 타락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암브로시우스(Ambrosius)를 만나 예수를 믿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느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옛날에 술마시러 다니던 골목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왜 그동안 안보였습니까? 잠깐 쉬었다 가세요." 술집 아가씨가 뛰어나와 반색을 하며 맞습니다. "사람을 잘못 보았소."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여인이여, 나는 그 옛날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죽은 지 오래입니다. 지금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여러분, 이제 더는 누구를 향하여 원망하지도 불평하지도 마십시다. 변한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시비 걸지도 마십시다.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진 새사람을 입고 그대로 묵묵히 길을 갈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사십대 중년 여성들이 직접 짠 스웨터 102벌을 가지고 신문사에 와서 고아들에게 나누어주기를 부탁하고는 이름도 밝히지 않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사십대에 들어선 어느 여인이 문득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니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습니다. 자고 먹고 집안일 하고…… 보람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나와 내 가족들을 위해서만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녀는 고아들을 위하여 스웨터를 짜기로 작정합니다. 실을 구해다가 고아들을 생각하며 직접 스웨터를 짭니다. 너무 아름답고 행복한 일인지라 친구들이 너나할것없이 여기에 동참합니다. 직장 다니는 여성, 만삭된 여성들까지 실을 사다가 고아들의 스웨터를 짭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102벌의 스웨터를 신문사에 맡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간증을 들어본즉 일생에 그렇게 행복한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내 남편을 위하여, 내 자식을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수고해보았지만 그런 행복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절대적인, 거룩한 사랑의 마음으로 한 코 한 코 짜면서 느낀 행복을 어디에다 견줄까 싶답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새사람을 입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그 존재의식은 전혀 다릅니다. 똑같은 생활을 하나 그 감격도 다르고, 의도 다르고, 목적도 다릅니다.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새사람을 입으라"라고.
새 사람됨의 윤리(에베소서 4:17-2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새해 첫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신년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은 새로움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좀더 새롭게, 좀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생각뿐, 무엇을 새롭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새로운 것인지, 그 구체적인 방법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가끔 집에서 텔레비전 연속극을 볼 때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그 나오는 장면이, 이야기가 한결같습니다. 밤낮 무엇을 그리 많이 먹는지 계속해서 먹어댑니다. 그리고는 잡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뭐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사는 모습입니다. 산다는 것이 먹고 자는 것의 연속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불가피적 욕구 충족의 순환이라는 그 끈끈한 굴레를 아무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실 새롭다고 해봤자 만났던 사람 또 만나고, 여전히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새로움이란 무엇입니까? 옛날 이야기나 옛날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새로움을 찾기 위하여 가출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반복적인 생활 더는 못하겠다고 멀쩡한 집을 두고, 가정을 두고 가출합니다. 사막이나 바닷가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는 나름대로 보다 깨끗하고 보다 정결하고 보다 신령한, 높은 차원의 생을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이 역시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여러분, 혹시 '주상(柱上)의 성자(聖者)'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옛날 어떤 사람이 좀더 새로운, 좀더 경건한 삶을 위하여 집을 나와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는 사막에 기둥을 세워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한번도 내려오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삶도 그리 새롭고 경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구경꾼이나 순례자들이 던져주는 음식으로 평생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언젠가 속리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속리산 정상에 오르려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비구비 이어지는 높은 언덕을 넘어야만 합니다. 여기를 넘어서 올라가느라면 '문자 그대로 속리산(俗離山)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험준하고 울창한 산세가 속세를 떠난 산이라는 생각을 품게 합니다. 그런데 정작 속리산 정상에 오르고 보면 그 생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맙니다. 남대문시장보다 더 복잡합니다. 도저히 '속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세상, 온 하늘과 온 땅 어디에 새롭고 깨끗하고 온전한 환경이 있다는 것입니까? 결국은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새 생활, 새 생명, 새 존재, 새롭게 사는 비결을 아주 신비롭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성경말씀을 읽을 때면 늘 마음 한구석 답답함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이 귀한 진리를, 이 온유한 이치를 성도들에게 바로 전달할 수 있을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아도 제 구사력(驅使力)이 부족한지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참으로 답답해집니다. 그리고 사실, 이 말씀은 여러분 각자의 심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적 사건이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도 합니다. 다만 이 시간을 빌어 이 새로운 이치, 새사람의 윤리를 여러분과 함께 깊이 생각하고, 나아가 그 깊은 세계를 터득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옛사람과 새사람을 확실하게 구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옛사람을 지칭해서 이방인과 같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은 비 유대인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중생(重生)하지 못한 사람을 다 이방인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새사람이란 그리스도인을 가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에 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새사람을 설명하기에 앞서 옛사람의 모습을 여섯 가지 존재양식으로 나누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허망한 자라고 말씀합니다(17절). 헬라어로 '마타이오테스'라고 하는 이 '허망하다'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계약은 했으나 그 계약의 내용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허망하다'는 목적이 없고, 내용이 없고,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를테면 결혼을 했으되 사랑도 없고 평생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저 단순히 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한다고 해봅시다. 온 마음, 온 인격, 온 정성, 나아가 생명까지도 그 일에 쏟아 부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고 그저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허망한 것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하는 권투시합을 볼 때가 있습니다. 저는 시합보다는 해설자의 말에 더 흥미를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그 해설 속에 진리가 담겨 있을 때가 많거든요. 언젠가도 보니까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선수를 놓고 안타까워하면서 그 해설자가 "주먹하나를 던질 때에도 온 체중을 실어서 쳐야 하는데 저 선수 왜 저렇게 허우적거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더군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온 마음, 온 정성, 온 생명을 다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허우적거립니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이렇게 평생을 살아갑니다. 선물을 주었는데 정성이 없습니다. 음식을 대접했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수고는 했는데 그 마음속에 진정한 희생의 마음이 없습니다. 온 정성, 온 사랑, 온 마음을 가득히 담아서 행하지를 않습니다. 사람의 목적과도 상관없이, 가치의식과도 상관없이 그저 체면과 형식에 매인 생을 허우적거리며 휘청거리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허망한 것입니다.
두 번째, 옛사람의 존재양식으로 어두움을 들어 말씀합니다(18절). '디아노니아'라고 하는 이 말은 지적 어두움을 의미합니다. intellect의 결여입니다. 지성의 결여입니다. 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본다'라는 말을 놓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내 눈만 밝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눈이 아무리 밝고, 내가 아무리 총명하다 하더라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꽤 똑똑해요. 스스로도 아이큐가 높다고 자랑합니다. 자기 딴에는 엄청이나 똑똑한 것 같은데 하는 짓을 보면 그렇게 바보일 수가 없습니다. 유치할 정도로 바보짓을 하고 있습니다. 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빛의 근원으로부터 너무 멀리 갔기에 이제 그의 지성은 소용이 없습니다. 어두워진 지성이요, 빛을 잃은 총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 옛사람은 무지하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8절). '아그노이안'이라고 하는 이 말은 도덕적 죄는 무지에서 비롯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에 당신을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렇습니다. 모르기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한창 정직하게 살고, 인격을 쌓고, 열심히 공부해야 할 그 좋은 나이에, 그 좋은 시간에 공부하지 않고 그 시간을 허비하는 젊은이들을 볼 때에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몇 년이 지난 다음 후회할, 가슴을 치며 후회할 저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이 모두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젊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안다면 그렇게 빈둥거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젊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얼마나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젊음을 앞에 두고 인생무상이니 뭐니 하며 울고 짭니까? 말도 안됩니다. 이렇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지하기에 미처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젊었을 때에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형편없이 바보짓을 했구나 싶습니다.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도덕적 측면에서 이 무지를 죄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말씀합니다. 죄 때문에 무지해졌고, 이 무지함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옛사람은 마음이 굳어져 있다고 말씀합니다(18절).
'포로시스'라고 하는 이 말은 석회석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아예 돌이 되어버렸습니다. 들리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말을 대신하여 '강팍해졌다'라는 말을 씁니다.
여러분, 마음이 굳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게 되고, 순종할 수도 없게 됩니다. 경직된 인격이 되고 맙니다.
다음으로, 옛사람은 감각이 없는 자라고 말씀합니다(19절).
감각능력이 아주 없어진 상태를 말하는 아주 특별한 용어이며 완료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과거완료형입니다. 이미 무감각해졌습니다. 죽은 자와 같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깨달음도 없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이 다섯 가지를 총괄하여 방임했다고 말씀합니다(19절). '방임'이라는 이 말은 '포기했다----give up'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이 포기라고 하는 것은 끝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육체적인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브레이크는 이성입니다. 우리에게는 도덕적 타락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양심이라고 하는 브레이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허무와 실의와 절망으로 빠져드는 인간에게는 이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브레이크 구실을 하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 줄이 끊어졌습니다. 그 줄이 툭하고 끊어지면 그대로 내려앉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방임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방탕한 생활로 치닫게 됩니다.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상태로 볼 때에는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자요 제자도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뵙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노력까지도 포기하고 주님의 말씀만을 따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귀한 말씀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22-24절)." 이 말씀은 스스로 새로워지라는 것도 아니요 결심하라는 것도 아니요 성결케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 그대로가 복음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이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거룩하게 하는 역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중생도 하나님의 역사요 성화(聖化)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스스로 깨닫고 결심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까? 요즈음 유행하는 말대로 그런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가만히 보면 자기 지성으로 뭘 바르게 한다, 깨끗하게 한다 하며 교만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그렇지 못한 사람만도 못합니다. 인간의 노력이란 이런 정도입니다. 선을 생각하다가 위선자가 되고, 의를 생각하다가 고집불통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24절)"라고. 여러분, 과거를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막으셨던 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방탕한 길을 가지 못하도록 때로는 징계로, 때로는 질병으로, 때로는 실패로 말입니다. 이 어려운 사건들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욥은 무진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그 고생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니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하시니 겸손하고, 하나님께서 부지런하게 하시니 부지런하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시니 깨끗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으심을 받은 그 존재를 이제는 옷 입듯이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그 존재를 수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로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가지고 집을 나간 탕자가 거지꼴이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사실 알고 보면 탕자는 형편없는 인간입니다.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돌아옵니까? 저라면 죽으면 죽었지 집에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데 탕자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탕자는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를 만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고백하리라 결심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느라면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품은 아무나 할 수 있답니까? 일을 해본 사람이나 할 수 있지, 마음먹은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탕자는 일하는 것이 쉬운 줄로 알았나봅니다. 그리고 사실 탕자는 품꾼의 자격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쓰레기 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는 어땠습니까? 아들로 영접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종들에게 일렀습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까지 베풀었습니다.
이제 이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 그 용서와 긍휼, 아버지가 지어준 그 엄청난 새 옷을 그대로 입어야 합니다. 잔치에 참여하여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이 지어주신 그 새사람을 입으라 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과거도 못했는데,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한번 결심해봤자 별것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된다고 하지도 말고 안 된다고 하지도 마십시오. 스스로 깨끗할 수 있다고 하지도 말고 깨끗할 수 없다고 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모든 노력까지도 포기하고 그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실패가 와도 그것은 내게 필요한 것이요, 질병이 와도 그것은 나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역경이 와도 그것은 나를 성결케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여기에 제자훈련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대로 인도하시는대로 순종하고 따라갈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옷을 입는 길입니다.
옷은 신분은 나타내줍니다. 특히나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 옷이 달랐습니다. 귀족에게는 귀족의 옷이 있고, 종에게는 종의 옷이 있고, 주인에게는 주인의 옷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새사람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에 걸맞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나를 볼 때에는 불필요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 필요하다면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사랑하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자로서 자아의식을 바로 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로부터 깨끗이 벗어나야 합니다.
아주 오래전, 저는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긴장한 탓도 있지만 사람인지라 종종 실수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반주를 해나가다가 중간에 건반을 잘못 누릅니다.
그 순간 아차하고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결국 그 연주는 망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슬쩍 다음으로 넘어가야지요. 앞으로 할 일이 더 중요하니까 그 실수는 빨리 잊어버리고 계속 연주를 해나가야지요. 만약에 하나를 실수했다고 해서 내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하고 안절부절못한다면 끝난 것입니다. 연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록 실수를 했을지라도 연주 전체는 그대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 미래의 하나님의 프로그램은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한 즉시 빨리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돌이켜보면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 잘못에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프로그램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밀고 나갈 것입니다. 과거의, 옛생활의 습관을 좇는 옛사람을 남김없이 벗어버려야 합니다. strip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옷을 입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어서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여자와 술에 빠진 이러한 생활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몸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철학적으로도 타락하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종교적으로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마니교에 심취하여 육체와 정신과 영이 모두 철저하게 타락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암브로시우스(Ambrosius)를 만나 예수를 믿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느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옛날에 술마시러 다니던 골목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왜 그동안 안보였습니까? 잠깐 쉬었다 가세요." 술집 아가씨가 뛰어나와 반색을 하며 맞습니다. "사람을 잘못 보았소."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여인이여, 나는 그 옛날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죽은 지 오래입니다. 지금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여러분, 이제 더는 누구를 향하여 원망하지도 불평하지도 마십시다. 변한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시비 걸지도 마십시다.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진 새사람을 입고 그대로 묵묵히 길을 갈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사십대 중년 여성들이 직접 짠 스웨터 102벌을 가지고 신문사에 와서 고아들에게 나누어주기를 부탁하고는 이름도 밝히지 않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사십대에 들어선 어느 여인이 문득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니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습니다. 자고 먹고 집안일 하고…… 보람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나와 내 가족들을 위해서만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녀는 고아들을 위하여 스웨터를 짜기로 작정합니다. 실을 구해다가 고아들을 생각하며 직접 스웨터를 짭니다. 너무 아름답고 행복한 일인지라 친구들이 너나할것없이 여기에 동참합니다. 직장 다니는 여성, 만삭된 여성들까지 실을 사다가 고아들의 스웨터를 짭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102벌의 스웨터를 신문사에 맡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간증을 들어본즉 일생에 그렇게 행복한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내 남편을 위하여, 내 자식을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수고해보았지만 그런 행복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절대적인, 거룩한 사랑의 마음으로 한 코 한 코 짜면서 느낀 행복을 어디에다 견줄까 싶답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새사람을 입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그 존재의식은 전혀 다릅니다. 똑같은 생활을 하나 그 감격도 다르고, 의도 다르고, 목적도 다릅니다.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새사람을 입으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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