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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사야 6:1-8)

by 【고동엽】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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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사야 6:1-8)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잎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공원이나 유원지에 가면 때때로 어머니를 잃고 울고 다니는 어린아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들은 어머니를 잃어버리기 전에는 정신없이 어떤 재미있는 일을 따라다녔거나, 혹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고 어머니를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에 어머니가 곁에 없음을 깨닫고는 지금까지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던 것들을 모두 팽개치고 슬픔과 두려움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그에게는 이제 친구들이나 어떠한 장난감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어머니뿐입니다.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나기까지는 아무리 멋있고 훌륭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을 보여주더라도 그의 주위를 끌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일단 어머니가 나타나 아이의 손을 잡게 되면 또 다시 다른 것으로 아이의 눈은 집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재미있고 저것도 필요하고….

이러한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만나야 될 사람을 만나야 하며, 만일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모든 가치가 한꺼번에 부정되고 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기의 석학 임어당(林語堂) 선생님은 언젠가 타임(Time)지에 자신의 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지난 40여 년 동안은 마치 고아의 생활 같았으며 비참한 나날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사람인 그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유명한 교수로서 하나님을 떠나 40여 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후에는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그의 회고록에서 위와 같이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늘 부르고 계십니다. 사람은 그 부름에 응답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못 만난 사람, 이 모두가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관계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요, 그 만남의 관계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8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아주 똑똑한 제자 둘이 등장합니다. 도마와 빌립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하는 대화는 매우 지성적인 말들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꼭 만나보고야 그가 살아있음을 믿겠다고 하여 심지어는 손으로 예수님 옆구리의 창 자국에다 손을 넣어보아야 믿겠다는 실증주의자입니다. 그런가 하면 빌립은 계산이 바른 똑똑한 제자였습니다. 어느 날 빌립은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과연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아니면 권력과 안일입니까? 물론 그러한 모든 것들은 사람이 사는 데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소원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보는 것, 하나님을 만나고 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에게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고민이 있다면 바로 만나야 할 분, 곧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이사야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사야는 본래부터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face to face)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경위를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첫째로, 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배경과 시간을 살펴봅시다. 그 당시는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솔로몬 못지 않은 훌륭한 왕으로서 50년 동안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렸습니다. 옛날에는 어느 나라든지 왕이 정치를 잘하면 백성들은 모두가 평안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웃시야 왕을 모든 백성들은 흠모하고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덕이 있는 이 훌륭한 웃시야 왕이 죽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변의 다른 나라들의 세력은 점점 막강하여지고 있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불안해졌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음으로 그들의 소망은 끊어졌습니다. 국가적으로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거기에다가 이사야에게는 개인적인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웃시야 왕은 이사야 사촌이며 당시 어느 위치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높은 고관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촌인 웃시야가 죽자 소위 말하는 정치적인 배경이 그만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사야에게는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즈음에도 궁극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의지하던 사람이나 재산을 잃고,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잃고서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대체로 잘 살고 평안할 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사야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보니 전에 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이 살아있을 때에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번을 드나들었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전에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높이 들린 보좌 위에 하나님이 앉으셨는데 그 보좌를 쳐다보니 한없이 높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의미하며 그의 초월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충만하였다고 하였으며 좀더 나아가서는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느곳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으로 가득차 있고 스랍들이 찬송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으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의 역사 아닌 것이 없게 됩니다. 심지어는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속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영광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나고 영광의 높임을 받습니다. 그야말로 온 우주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 중에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이사야는 본 것입니다.

셋째로, 자기가 앉아 있는 그 문지방이 요동하였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 나의 거처는 진동을 합니다. 근본적으로 기초가 흔들립니다(shaking foundation).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일이나 아름답다고 했던 모든 것이 필요가 없고 모두 다 무효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도 안전하다는 스위스은행도, 땅을 사 놓은 것도 다 필요가 없어집니다. 모든 기초와 터전이 근본적으로 뒤흔들리는 것을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믿고 어디에다가 삶의 기초를 두고 있습니까?

넷째로, 집에 연기가 가득하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소멸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소멸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연기만이 자욱한 것처럼 다만 연기만 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모든 가치와 지식이 일시에 부정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모습과 경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만난 이후의 이사야의 반응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을 만나자 이사야는 소리쳐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멸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의롭고 깨끗한 줄 알았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자 너무도 부끄럽고 비참하여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려졌던 자신의 더러운 모습이 그만 노출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약간 어두운 곳에서는 매우 아름다워 보였던 짙은 화장이 밝은 햇빛에서 보면 너무나 추하게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조작은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워 보이도록 화장하고 날씬하게 보이도록 옷을 입고 교양 있어 보이도록 차밍스쿨(charming school)에 가서 훈련을 받는 것들이 정말 그 사람을 아름답고 교양 있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한낱 인간의 조작이며 속임수일 따름입니다.

임어당의 책 가운데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요즈음 큼직하고 헐렁하게 입는 것이 유행입니다. 물론 왜 이런 것이 유행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이런 것들이 유행하게 된 시대적인 감각은 점점 위선이 높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옷을 헐렁하게 입으면 자기 몸의 결점을 가릴 수 있습니다. 뚱뚱한 사람도 어느 정도는 날씬하게 보일 수 있고 아주 마른 사람도 어느 정도는 풍성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어당은 "가장 진실한 옷은 메리아스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볼 때에는 아름다워 보이는 화장도, 헐렁하게 입으면 날씬하고 멋있게 보이는 옷차림도 실상 밝은 햇빛에 노출될 때에는 추하고 더럽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중생할 때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너무나도 많은 죄를 깨닫고 "내 죄, 내 죄!" 하며 견딜 수 없이 괴로웠고 고통스러웠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가톨릭 성당에 가서 매일 신부님께 고해 성사를 하였답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죄를 고백하기 위해 들어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신부님이 견디다 못해 "루터야, 죄를 모았다가 한꺼번에 고백하도록 하여라"고 하더랍니다. 그때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 신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가 죄를 지어야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질투, 시기, 미움 등의 사소한 것들조차도 모두 노출되어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은 자신이 완전히 노출되기 때문에 보다 많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보다 깊은 죄 의식을 느끼게 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 자신이 망하게 되었다고 분명히 외칩니다. 나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합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말은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적 개념으로는 곧 "말"을 뜻합니다.

그들은 이 말을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말이 속에 있으면 "생각"이요 그것이 입을 통하여 나오면 말이요 또 움직이면 그것이 곧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2에서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헬라인처럼 생각과 행동을 떼어놓고 생각하는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결국 말이라는 것은 생각이나 행동 등을 통합한 것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외친 "입술이 부정하다"하는 것은 그의 모든 생각, 말, 행위가 모두 부정하다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그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자 전에 몰랐던 죄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아,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더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회적인 면으로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들이 전부 부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속에 거하는 나 자신도 부정하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다른 사람들은 더럽고 부정하지만 나는 의롭고 진실하다고 생각하였던 것들이 이제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조금도 그들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같이 부정하고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해야 될 말을 하지 못하고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면서 어떻게 의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내 남편은 죄인이고 나는 의로운 것같이 느껴지고, 어떤 때는 부모님은 죄인이고 나는 의인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 '나도 역시 그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도 역시 지난날에는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였으나 하나님을 만나면서 "내가 부정한 백성 중에 거했던 고로 부정하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의롭다고 생각했던 자신도 역시 부정한 죄인이었음을 슬퍼합니다. 자기 교만의 바벨탑이 붕괴되는 순간입니다. 자신의 아집과 교회의 아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그는 "아,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스랍을 보내어 제단 위에 있는 달아오른 숯불을 집게로 집어다 이사야의 입술에 대게 합니다. 여기서 숯불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식의 숯불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유대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대신 양을 죽여 태우는 번제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제단 위에 양을 얹어 불사릅니다. 이사야의 입술을 지진 숯불은 바로 그 제단 위에 불같이 뜨거운 돌입니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돌을 집어다가 입술에 대는 순간 입이 지져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제물이란 죽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번제란 완전히 죽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 죽어진 제물에 내가 연합될 때 자신의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입술이 제단 위에 있던 숯불로 지져졌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 죄가 사해졌다." 그 때 그는 새로운 자유를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 구원을 얻는 순간, 그 마음속에 새로운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을 받고 그를 만나는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음성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누구를 보낼꼬?" 하나님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름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자의 느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사야는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그 부름에 응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은 아무 필요도 없는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음성을 듣고 보니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들어 쓰실 만한 그릇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자기 부정만을 하는 것은 일종의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기준으로 '할 수 있다' 혹은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다만 부름에 응답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이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라는 부름에 이사야는 "내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진실로 필요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 가정에, 이 사회에 내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나의 존재는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 망하는 자아를 느꼈지만 동시에 새로운 자기 가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인도에서 온 어느 청년이 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그 청년은 자기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되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 보았더니 그 청년은 "글쎄요, 저도 그것을 몰라 걱정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부름은 절대 무계획적인 것이 아닙니다. 소명을 받는 그 순간 내가 해야 될 일이 환하게 보입니다. 마치 성 다미엔이 문둥병자들이 살고 있는 모로카이 섬을 지날 때 그들의 불쌍한 모습을 보는 순간 그들을 위해 일할 것을 결심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성 다미엔이 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절대로 우리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건강을 핑계삼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순간 내가 그의 사업에 꼭 필요한 굴레이며,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자기 가치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새로운 가치가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일 자체에 대하여 논하지는 맙시다. 무릎을 꿇고 모든 문제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 그 모든 허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끝없는 수렁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은 허무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도 많은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삶이 의미없는 것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무미건조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살 필요성조차 없는 불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만나야 될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자기 가치의 발견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Without knowledge of God, There is no knowledge of self)

자신에 대한 것도 자신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를 만나는 그 순간 새로운 인간으로 재창조되고, 뿐만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길이 환하게 보입니다.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하나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가운데 내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물으실 때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가질 만큼 물질도 가졌고 또한 구김살 없는 가정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건강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방면에 걸친 주님의 은사와 축복에도 불구하고 왠지 우리 마음속에는 허무가 있고 절망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 좀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뵐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 안에서 우리의 비참함과 죄스러움을 깨닫게 하옵시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을 받는 기적도 보게 하옵소서. 주님이 오늘 우리를 필요로 하여 부르고 계심을 분명히 듣게 하옵시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가서 주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여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의미를 재창조하여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며, 더러운 자들을 성결하게 하시며, 과거의 죄 됨에서 벗어나 주의 의와 당신의 거룩한 팔에 이끌린 삶을 살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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