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사도행전 13:17-23)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오십 년간)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우리의 신앙고백 제 1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의 종말을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요, 오늘도 이 우주를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자유로이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냥 떠맡기고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다스리는 우리 인간을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마치 목자가 양을 보살피고 돌보고 기르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왕이 되시고, 목자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시고, 창조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적 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선택하시어 그의 인격, 그의 지식, 그의 감정---좋은 감정, 나쁜 감정까지 십분 이용하시어 당신의 뜻하신 바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친히 선택하시어 쓰십니다. 지도자로 삼으십니다. 백성의 지도자라 일컫는 자라 역시 겉보기에는 백성의 지지를 받아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그실 성경이 증거하고 우리가 믿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심으로 비로소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권세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로서 나온다고.
그런데 세상을 가만히 보십시오. 다수의 폭력이 대단합니다.
독재자들이 그들의 정권을 세우고 권세를 펼 때에 보면 모든 국민, 모든 사람의 지지를 얻으며 일을 합니다. 이 다수의 폭력이란 무서운 것이요 난폭한 것입니다. 상원의원을 지낸 바 있는 미국의 정치가 슬라이델(Slidell, Joh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다수가 많은 기독교인들을 인형극장에서 죽게 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의 함성 중에 죽으셨습니다. 그 모든 악행이 '다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을 절대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도자란 백성의 의견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양을 사랑하고 인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지지를 받도록 일하는 것이지, 지지를 받아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취하고 있는 소위 민주주의라고 하는 제도 역시 차선의 길이지 최선의 길은 못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에도 오른손과 왼손이 있다. 왼손은 율법이요 오른손은 은혜다. 왼손은 심판이요 오른손은 구원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도 양면이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사람을 선택하시어 선한 일에 쓰시기도 하고, 나쁜 사람을 선택하시어 악한 일에 쓰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축복과 은혜를 베푸시고자 좋은 일꾼을 선택하시어 선한 방향으로 쓰십니다. 그렇게 다스리십니다. 그런가하면 나쁜 사람의 악행을 중지시키시고, 죄인을 멸하시고, 심판하시고, 불의의 길로 가는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시고,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악한 사람을 들어 쓰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모두 쓰신 다는데, 그렇다면 과연 어느 쪽을 더 많이 쓰실까?'하고. 긴 이야기는 접어두고 일단 성경을 봅시다. 하나님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왕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 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몇 사람을 빼놓고는 악한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는 왜 이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시나,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무얼 하고 계시나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세요. 우리는 여기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과 같은 좋은 왕을 세우시어 당신의 백성들에게 축복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바로나 느부갓네살과 같은 악한 왕을 세우시어 불의와 죄로 말미암아 부패된 예루살렘을 멸하시고 불태워버리셨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데에 나쁜 사람을 들어 막대기로 쓰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악을 내려치는 막대기로 사용하십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블레셋 왕, 네로 왕을 통하여 역사 하셨습니다. 히틀러를 통하여 부패한 독일 교회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독일 사회를 내려치셨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을 통하여 러시아 교회와 국민을 내려치셨습니다.
여러분, 모스크바를 방문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곳이 어떻게 공산주의 도시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보다 더 많은 교회가 있고, 화려하게 지은 성당들이 즐비합니다. 로마나 파리 못지 않은 성당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 도시가 공산주의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느냐 그 말입니다. 이를 두고 그곳 교회지도자들 스스로 고백하기를 "70년 전, 이 나라가 도덕적으로 부패했을 뿐 아니라 교회도 타락을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스탈린을 통하여 우리를 내려치셨기에 우리는 70년 동안 이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이렇듯 고백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막대기로 우리를 내려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지도자를 주신다는 것은 큰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인이 득세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요, 악인이 세력을 잡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의인이 잘되는 것은 복 받는 증거요, 악인이 잘되는 것은 멸망의 징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부득불 우리는 위기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습니다. 그 자녀를 가르치고 인도하려고 하는데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결국은 속이 상해서 '무자식아 상팔자'라는 말까지 내뱉게 됩니다. 자식들이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으니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자식 잘 만나는 것도 복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부모님 잘 만나는 것은 더 큰복이고요. 부모님 잘 만나면 내가 잘살 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됩니다. 나아가 자식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를 닮으라고 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아무리 보아도 닮을 데가 없으니 제발 네 할아버지는 닮지 말라고 말하게 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부모님을 만나는 것, 이것은 복입니다.
회사도 그렇습니다. 윗사람이 있고 아랫사람이 있습니다. 아랫사람 잘 만나는 것도 복입니다. 그리고 윗사람 잘 만나는 것도 큰복입니다. 윗사람을 잘 만나서, 그 질서 안에서 내가 순종하고 살아갑니다. 나아가 윗사람의 인격을 높이 우러르며 모시고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반면에 "어쩌다 저런 인간이 돈 좀 벌어서 저 위에 올라앉았노?"하고 뒷전으로 욕을 해가면서 밥술을 떠먹고 산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얼마나 비능률적인 일입니까? 좋은 윗사람,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 이것이 또한 복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실 때에는 좋은 지도자를 선택하시어 그를 통하여 주신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 한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온전할 때에는 온 백성이 복을 받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다함께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군 밑에 충신이 나게 마련 아닙니까? 그 지도자가 성군답지 못하면 충신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는 성경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합왕이 범죄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벌입니까? 다윗이 교만해져서 인구조사를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흘 동안 온역으로 이스라엘 백성 칠만 명을 죽게 하는 큰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범죄 했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분열이라는 크나큰 벌을 내리셨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잘못됨으로써 온 백성에게 화가 임하는가 하면, 그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거룩하게 섬으로써 온 백성에게 은혜와 복이 임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을 베푸시어 좋은 지도자를 세우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왕을 주십사고 조릅니다. 그 자체가 그리 선한 일은 아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긍휼히 여기사 사울 왕을 세워주십니다. 그는 본디 충성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어 권세를 얻은 뒤로는 점점 교만해져갑니다. 스스로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지 않나, 나아가서는 왕의 직무에서 벗어나 제사장의 직무까지 행합니다. 이렇듯 잘못 변화한 사울을 향하여 사무엘은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17)"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스스로 작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이시나, 스스로 높이고 교만하고 순종치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폐하신다고 하는 성경적 진리를 말씀함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교만해진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22절)."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직역해보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심판이나 저주나 징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고 축복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시작이요 복의 근본입니다.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내리시는 시각인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한 5년 공부하는 동안 기숙사제서 지냈습니다. 같이 지내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선거에 관한 이야기도 하게 됩니다. 저는 직접 선거에 가담하지는 못하지만 많은 이야기는 들을 수가 있습니다. 저들이 하는 말 가운에 빠지지 않고 끼는 것이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자랑입니다. 대통령으로서, 노예를 해방시킨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많은 자랑을 합니다. 링컨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와 덕담을 즐겨 이야기하며 그를 높이 흠모하고 존경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왜 그런 지도자가 없을까 하는 비애감까지 들더군요.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없어요"합니다. "정말 없느냐?"라고 거듭 물으면 간신히 "이순신장군이오" 합니다. 그 이상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아이들에게 "저 대통령을 보아라. 얼마나 훌륭하시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온전히 이루는 지도자를 모실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큰복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어 왕으로 세우신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은 외모가 그리 시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에게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라고 명하십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양을 치는 사람인 이 새의 집을 찾아가 그 아들들을 만나봅니다. 이새의 일곱 아들을 차례대로 다 보았으나 왕으로 기름 부을 만한 자가 없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라고 묻자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마도 이새는 '아들이 하나 더 있긴 마지만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하는 뜻을 품고 이렇게 대답한 것 같습니다. 설사 내 자식들 가운데서 왕이 나온다 하더라도 말째는 치지도외(置之度外)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말째가 바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윗이 아니었습니까? 이렇듯 다윗의 외모는 그리 신통치 않았습니다. 내세울만한 풍채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중심을, 정직함을, 도덕성을, 신앙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다윗은 거룩한 분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 받들었기에 여호와를 모독하는 자를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여호와를 모독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분노하여 소년 다윗이 달려나가 돌로써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그는 의분이 있는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신앙적 용기가 대단했습니다. 그 조그마한 체구의 다윗이 신장 여섯 규빗 한 뼘이나 되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골리앗 대장 앞에 서서 당당하게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하고 외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용감하게 물맷돌을 던져 그 오만한 골리앗 장군을 쓰러뜨립니다. 다윗은 참으로 용기가 있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한 교리와 신앙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왕의 신하요 사위였습니다만, 사울왕의 병적인 질투심으로 숱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사울이 사위인 다윗을 죽이고자 직접 창을 두 번씩이나 던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이런 수난을 당하면서도 절대로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에 대항할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를 해하지 않고 오히려 피할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임을 믿었기에 끝까지 존경하고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왕을 죽이고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앉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기름 부으심으로 왕이 된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에 실린 다윗의 시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는 시로써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들여올 때에는 너무 좋아서 그 행렬을 따르며 부끄러움도 잊은 채 춤을 추었습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신앙적 감동과 시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극히 예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다윗은 철저하게 교회 중심의 사람이요 성전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잘못을 나단 선지가 꾸짖었을 매에 다윗은 아무 변명도 없이 그 자리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회개했습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회개의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다윗은 어떤 잘못을 핑계로 직무유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밧세바와의 동침으로 아들을 잃는 벌을 받았을 때에도 "부끄러워 더는 왕 노릇 못하겠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다시 목자나 하렵니다"라고 직무유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은 나는 무너져도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나는 부끄러워졌어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때문에 다윗은 모든 부끄러움을 떨치고 꿋꿋하게 왕의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훌륭한 사람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다윗 같은 사람을 지도자로 주셨다는 것 자체가 복이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선한 목자가 있고야 양들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이 하나님께 합심하여 기도를 드립시다.-----"주여, 이 민족 앞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충성되이 이를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를 주시옵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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