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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소원(호세아 6장 1절~6절)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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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소원(호세아 6장 1절~6절)


인간에게는 인간만이 갖는 인간적인 번민이 있습니다. 춥다, 배고프다, 아프다 하는 문제는 동물에게도 있는 느낌으로 인간적인 고민은 아닙니다. 가령, 아픈 것과 슬픈 것은 같지 않습니다. 배고픈 것과 외로운 것도 서로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아플 때에 슬퍼지고 배고플 때에 외로워집니다. 여기에 인간만이 갖는 고통이 있으며, 이것을 번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번민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 소원과 현실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실제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상이 없고 소원 없다면 아마도 아픔은 있을지언정 슬픔은 없을 것이며, 배고픔은 있을지언정 외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 번민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높고 먼 곳에 있습니다. 실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둘째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자기 능력의 부족을 알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소원을 이루는 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가령, 부지런하면 잘살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부지런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요즘 학생들에게 고민이 많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성적이 나올 텐데 공부가 안 됩니다. 아니, 공부를 못 합니다. 공부를 잘할 수 없는 자기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원도 공부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맞추어야 할 터인데 그럴 수 없기에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복 받을 자격이 없음을 자신이 잘 알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일반사람들과 다른 또 하나의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소원을 몰라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의 고통을 외면하실까?' 하는 고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소원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들이 기도할 때나 이야기를 나눌 때,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나의 소원보다 하나님의 소원을 먼저 기원합니다. 그러나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뜻에 합쳐 주시기를 고대하며, 기왕이면 내 뜻대로 했으면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을 꺾느라고 밤새도록 몸부림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양보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원망과 불평과 고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 6)"----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알기 원하십니다. 지식적인 것을 요구하고 계신단 말씀입니다. 안다는 문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철학적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헬레니즘(Hellenism;서양)으로 헬라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고, 또 하나는 헤브라이즘(Hebraism;동양)으로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 방식입니다. 헬레니즘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별개로서 지식과 감정이 따로 입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 결심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즉 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적인 생각에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하나로 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안다'라는 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많이 쓰이는 대표적인 단어가 '야다'라는 말입니다. '야는'는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쳐서, 체험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지식을 가져서 안다면 그것은 곧 실천을 의미하는 온전한 지식을 말합니다. 지식을 가지고는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 앎은 전인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인격을 움직여 생명의 변화를 가져오는 힘을 가진 지식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적으로 유명세가 있는 한 어른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온 가족이 쉬쉬하며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제가 그 사실을 전할 임무를 맡아 조용히 그분과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일은 목사의 특권이면서 동시에 목사의 십자가입니다.
저는 세례를 베풀고 그분이 가진 세상에 대한 미련을 일체 버릴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괴롭지만 유서를 쓰고 이제 예수를 믿고 하늘나라에 갈 준비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하면서 "목사님, 이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을 진작 알았다면 저는 좀더 다는 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정말 다시 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물론 사람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올 때는 순서대로 왔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 어른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았겠습니까? 나이가 그만큼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했으며 장례식에도 여러 차례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시간이 바로 이렇게 올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먼 남의 이야기로만 존재하다가 자기 문제로 부딪히는 그 순간에 가서야 지금까지 알고 있던 죽음에 대한 지식을 몸으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사는 동안은 죽음에 대해 내 문제로 생각 못하는 헛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가 죽는 이 순간에 바로 참 지식이 된 것입니다. 기억하고 있다고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삼단논법으로 합리적으로 이해한다고 정말 이해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죽는 그 순간에 가서야 죽음에 대한 지식이 온몸으로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뜨거운 사랑을 하는 그 순간 사랑에 의해 인격이 달라져서 온몸으로 사랑을 알게 됩니다. 유행가 가사에서도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면 그 순간부터 얼굴이 달라지고 사람이 완전히 바뀝니다. 남자라고 하면 무조건 욕하고 아주 부정적이던 여자도 일단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남자에 대한 편견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인생을 밝게 보는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지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짓기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순간 나를 알고 남을 알며 세상을 알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시기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없어서 망합니다. 또한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능동적으로 효과적으로 창조적으로 알고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재촉하시는데 사람들은 계속 지식을 버립니다. 아니, 알지 아니하려고 조금 알아지는 것조차 거부하며 몸부림칩니다. 그 현장이 바로 술집이며 댄스 홀입니다. 이런 곳들은 똑똑한 사람들을 바보 만들고 일부러 미치게 하는 곳으로, 즉 지식을 버리는 곳입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 스스로를 비인간화시키는 일입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치 않고 하나님 자신을 알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래 제사란 하나님 스스로의 자기 계시입니다. 또한 희생적 사랑을 제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죄인과 의로우신 하나님이 만나는 그 현장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가 속되게 되면, 속화되고 타락하면, 복을 받으려는 수단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귀한 예식이 하나의 수단이 되어 자기 중심,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종교 예식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인천에서 납북되었던 어부들이 북한에서 약 한 달 동안 교육을 받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 어부들의 말에 따르면 이북의 정보담당관들이 '어떻게 하면 남한 교회에 침투해서 빨리 집사와 장로가 되어 주도권을 잡고 교회를 교란시키겠느냐'고 그 방법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잘 모르겠다고 해도 집요하게 며칠을 졸라 대서 나중에는 그저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헌금 많이 하면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앙을 수단으로 하는 사람은 유달리 더 열심을 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 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지지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서, 심지어는 장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더 많은 제사를 드렸고 죄를 은폐한 두려운 마음을 해소하기 위하여 거창한 종교 예식을 행했습니다. 역사가 제퍼슨에 따르면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제사를 한번 지내고 나면 피가 강같이 흘렀다고 합니다.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제사를 위해 하루에 18만 마리나 되는 양을 잡았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서 1장에 보면 다시는 내 앞에 가증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죄된 가증한 행위를 원치 않는 그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공동번역에는 본문 6절이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찢으시는 하나님, 때리시는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하시는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 말씀하십니다. "심판이 있다. 예루살렘 성은 망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당장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심판이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오늘 망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공의가 없는 것입니까? 의인의 자식은 걸식하지 않고 죄인의 자손은 망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살아있다고 무사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지금 성공했다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기다리면 악한 자는 반드시 망합니다. 죄 값은 사망으로,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실현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분이시기에 때리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못된 자녀를 책망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매를 쳐야 하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또한 매를 맞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싸매어 주고 도로 낫게 해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고생할 때에 에스겔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싸매어 주실 것이고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위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매로 쳐야 하는 하나님의 고의와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잘못하면 부모들은 야단하거나 때립니다. 아이들이 혼이 나서 울다가 잠이 들면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어루만지며 마음 아파하는 것이 어버이의 마음 아닙니까? 자식들이 너무 속썩이면 나가 죽으라고 매질해 놓고도 일단 가출하고 나면, 다 용서할 터이니 돌아오라고 울면서 다방면으로 찾아다닙니다. 왜 때리고 왜 웁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치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마음을 알아 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평안할 때에 하나님의 공의를 알아야 하고 고통 당할 때에 일으키시고 다시 부르시는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드리는 구체적인 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으면,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오듯 조건 없이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온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지 맙시다. 살리든 죽이든 아버지께 맡기고 무조건 돌아오는 것입니다. 둘째, 매를 맞으면서도 그 형편을 감사해야 합니다. 사실 매맞는 자식보다 때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더 괴롭습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때리시고 그리고 구속하시는 뜨거운 사랑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매맞거나 그 어떠한 고난 중에서도 감사하고 감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셋째, 사랑의 응답은 사랑뿐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사랑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친히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갚을 길이 없어 주인으로부터 탕감을 받았는데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탕감해 주지 않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때에 만 달란트 탕감해 준 주인이 불러서 "내가 너를 탕감해 주었으니 너도 마땅히 그를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몹시 책망한 이야기입니다. 만 달란트는 천만 불에 해당하고 백 데나리온은 20불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 비율은 오십만 분의 일입니다. 만 달란트나 탕감 받은 그 감격으로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며,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습니까? 조건 없이 마땅히 용서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을 모르고, 그 무서운 심판을 모르며, 그 뜨거운 사랑을 모르며, 엄청난 용서를 모르기 때문에 오늘도 교만이 있고 절망이 있고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우리가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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