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요한복음 6장 26절~3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오늘은 우리가 늘상 구하는 바 행복에 대해서 평범한 진리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무릇 행복한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이겠습니까? 행복을 너무 고상하게, 추상적으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건강한 사람입니다. 건강은 행복의 가장 큰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흔히 건강할 때에는 이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건강을 잃어 시달리고 보면 이렇게들 이야기합니다. "건강만 하다면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막상 건강을 얻고 보면 이러한 생각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다시금 불행해집니다.
두 번째는 일거리가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노동이라는 것은 역시 귀한 것입니다. 때로 일 때문에 시달림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정년 퇴직이라도 하게 되면 일하는 행복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월급은 안 줘도 좋으니 제발 일만 좀 시켜 달라는 간절한 부탁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아무도 써주지 않습니다. 월급이야 많든 적든, 사람에게 있어 일하는 행복 역시 빠뜨릴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보람을 아는 사람이 또한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주 평범한 것 같지만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졌다고 가정해봅시다. 세월이 흘러 오십 육십이 된 후에라도 '나는 이 직업을 가진 것에 후회가 없다. 지금 다시 선택한다 해도 역시 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쩌다가 이런 직업을 택했단 말인가'하고 후회하게 되면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결혼생활도 그렇습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이 사람하고 살기를 잘했지!' 이런 마음이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는, '이 사람하고 결혼한 것은 결정적인 실수다.
내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두고두고 후회스럽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식을 두고도 그렇습니다. "내게 이런 자식이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을 때, 다시 말하여, 보람을 잃어버리게 되면 비참과 허무와 허탈에 빠지게 됩니다.
고대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제자들과 '어떤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일까?'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습니다.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병든 사람, 부모가 없는 고아…… 각양각색의 대답이 나오는 중에 스승이 이렇게 정의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보람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참으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7절)." 썩을 양식인 줄 알면서, 헛된 일인 줄을 알면서, 보람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 그래서 아침에 직장에 나갈 때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고, 저녁에는 '어서 죽어서 이 일을 하지 말았으면……' 실의에 차서 돌아오는 사람----이런 사람이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어디에 기준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성격과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일시에 먹이시는 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만일 오늘날 이런 사건이 있다면 각국에서 수백만 인파가 비행기를 타고 모여들겠지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였다---굉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 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이리저리 밀려 쫓아다니는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 것은 표적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떡 한 조각 얻어먹겠다고 모여드는 사람들, 그 신기한 떡을 한번 먹어보겠다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한번 먹고 또 배고프게 될 빵을 얻어먹기 위하여 나를 따르지 말고 영원한 양식,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위하여 나를 따르라'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도 교회에 나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찮은 세상일, 세상적인 명예, 세상적인 것들을 구하기 위함입니까? 또 내가 오늘을 사는 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원한 것,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을 위하여 일하라!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어떻게 해야 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겠습니까? 이것입니까, 저것입니까? 이런 일입니까, 저런 일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엉뚱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 역설적이요, 기대 밖의 대답이요, 동문서답 같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형식적이거나 물량적이거나 물리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학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질적인 문제, 영적으로 보는 질적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예수님께서 묻는 자의 의도를 아시고 명백한 대답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보십시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40년 동안이나 그는 하나님을 위해 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소중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기적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했는지 자신의 일을 했는지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가데스 바네아의 일을 생각해보십시다. 백성들은 그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기적으로 40년을 살고도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물이 없다고 아우성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때려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모세는 기가 막혔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먹이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반석 앞으로 모아놓고 반석을 칩니다. '원망하는 너희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긍휼히 여기사 오늘도 하나님께서 생수를 주시느니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마땅히 이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두렵고 떨림으로 반석을 쳤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원망하는 백성들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이 패역한 놈들아, 이 망할 자식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고함을 지르며 반석을 내리칩니다.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물은 나와서 백성들이 마셨습니다마는, 모세는 책망을 듣습니다. '너는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거역하였다. 너는 결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민수기 20장에 이러한 사실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도 바라던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같았으나 영적으로 볼 때에 내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명예, 내 감정, 내 유익, 내 고집으로 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심판하셨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죄악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불 신앙을 심판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 목적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고, 그 방법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고, 철저하게 믿음에 근거해야 합니다. 믿음을 떠난 행위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이것을 지적합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가르지 맙시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시장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지 맙시다. 어디서 행하든, 믿음으로 하는 일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비록 교회 일이라도 믿음 없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영원한 가치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봅시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생각을 믿음으로 하시고 말씀을 믿음으로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40일을 굶은 그 절박한 때에도 말씀이 우선 입니다.
여러분, 어떤 경황 중에도 말씀이 우선이요 진리가 우선됩니다.
반드시 그러시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마는 권면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겪어보니 결혼 주례를 대체로 토요일에 많이 서게 됩디다. 결혼식이 끝났으니 당연히 신혼여행을 가야지요. 이 사람들 거의 다가 토요일에 그냥 떠납니다. 그곳에 가서 주일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토요일에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신혼여행 안 갔느냐고 물으면 "주일 지키고 가야지요"하고 대답합니다. 이런 사람들 어떻게나 예쁘고 기특한지요. 내 마음에 그 사람들이야말로 아들딸 낳고 정말 잘살 것 같아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어차피 평생을 함께 살터인데 신혼여행 그리 서두를 것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우선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 구원---이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앞세우고 있습니까? 이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얼마나 소중한 말씀입니까? 신학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최고의 가치가 있는 일은 공로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죄짓는 일이야 물론 마귀적인 일이니 거론할 바도 못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선이든 구제든 봉사든 열심히 행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합니다. 이렇게 해서 공로를 쌓아갑니다. 의(義)---자기 의를 높이는, 하나님 앞에 가서 상 받을 수 있는, 공로를 세우는 그러한 일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구제도 좀 하고 봉사하려 하고 고행도 하면서 선한 일을 쌓아갑니다. 이런 일들을 귀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자기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나타난 믿음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나타난 믿음의 신학적인 개념입니다. 받아들입니다. 수락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요, 믿는 자는 곧 영접하는 자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최고의 일이 무엇입니까? 가장 높고 가장 귀한 역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시고, 전도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보다 귀한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최고로 귀한 일입니다. 역사의 중심이요, 우주의 중심이요,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구원의 사역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말하고, 선한 일을 하고…… 모두가 건방진 소리올시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는 것, 믿는 것, 영접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협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새는 무슨 좋은 일좀 한다 하면 꼭 자기는 별도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교회 일에도 그렇습니다. 가령 강대상을 산다던가 오르간을 산다던가, 어느 한 가지를 "당신의 이름으로 하십시오" 하면 액수가 조금 커도 기쁜 마음으로 합니다마는, "이러이러한 큰 일을 하는데 얼마간 보태십시오"하면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에 내가 가담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내 작은 몫을 감당하는 것이 믿음이요, 이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무엇이 믿음입니까?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역사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일을 버리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것, 거기에 쓰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죄인에게 요구하시는 일차적인 응답이 믿음이기 때문이요, 또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얼마 전에 대학부 학생들이 수양회를 다녀왔습니다. 그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 동안 속 많이 썩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번 수양회에 가서 많이 깨달았습니다. 정말로 제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부모님이 원치 않는 술, 담배도 끊겠습니다." 그 부모들이 제게 찾아와 인사를 합니다.
'효자 났다'고들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목사님, 제 아들이 돌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너무 즐겁습니다. 요새는 우리 집이 사람 사는 집 같습니다." 이 아들이 돈 보따리를 가져왔습니까? 크게 출세를 했습니까? 어째서 효도가 된다는 것입니까? '고맙습니다'----이 마음이 효도입니다. 한마디의 감사가 효도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느니 어쩌느니 거창하게 떠벌리지 맙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십시다.
선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선행으로, 우리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도움을 베푸는 것을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절대빈곤자가 많으므로 도울 일은 많습니다. 집 없는 사람, 배고픈 사람, 재난을 당한 사람…… 그러나 어느 정도 경제력이 향상되면 문제의 양상이 달라집니다.
세계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의 몇몇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식량 부족으로 근심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오히려 식량이 남아서 걱정일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삼 년 먹을 양식이 쌓여 있는데 새로 수확한 곡식을 쌓을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배고픔의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이 경제적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면 그 다음으로 있어야 할 선(善)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높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계속할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구속(救贖)함을 찬양합시다. 나를 선택하고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큰 역사에 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미국의 한 여자 청년이 인도 선교사로 가기를 소원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언어 훈련까지 마치고 막상 떠나려는 무렵에 어머니를 임종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로마에 있는 네 여동생이 병중(病中)이라는데 내 대신 한번 가보고 선교지로 떠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선교사는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로마로 갔습니다. 동생은 아들 셋,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가 어렸습니다. 얼마 후에 동생이 죽고 그 남편마저 죽었습니다. 졸지에 아이 다섯을 떠맡게 된 선교사는 몹시 난처했습니다. 선교지로 떠나야 할 시간은 임박했는데 도저히 아이들을 그냥 버려두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선교사는 선교부에 서신을 띄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른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선교사로 떠날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아이들을 믿음으로 정성껏 키웠습니다. 25년 후, 이 아이들 중 세 아들이 인도 선교사를 자원했습니다. 그는 다시 선교부에 편지를 띄웠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25년만에 세 배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제 이 세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내가 나로서 오늘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시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어디서든지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구원 사역에 내가 동참하게 되었다는 신앙을 가지고,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 나를 통하여 오늘도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믿음으로 행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거기에 나를 조용히 바쳐 순종해나갈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묻는 제자들에게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대답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뜻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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