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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님이 기억하는 경건(사도행전 10:1-8)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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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억하는 경건(사도행전 10:1-8)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오늘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단지 그들의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며 또한 그들이 어떻게 고백하며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도 있겠고, 비인격체인 물질은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유형의 하나님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보통 때와는 다르게 몇 주일이 지나도록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든지 또는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이상 기온이 한동안 계속되고 보면 도처에서 갖가지 하나님을 찾는 소리가 하늘을 울립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다만 불신자가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함'을 뜻합니다. 인간의 그릇된 생각이나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세는 오로지 경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 주의 낯을 피할 수 있으리이까? 하늘로 오를지라도,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바다 끝으로 숨어도 하나님은 그 곳에 계시며 나를 인도하고 계시나이다"라고 하나님의 감찰하심과 인도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감찰하심을 믿고 이를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는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랑에 대한 두려움도 역시 경건입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행동은 무척 조심스럽고 어려우며 두렵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앞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은 곧 경건'이라고 말한 것처럼 경건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의식'인 것입니다.

경건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보였느냐보다는 우선 나를 경건한 자로 인정하셔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다고 하여도 그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면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는 경건에는 어떠한 소망도 없습니다. 참된 경건이란 외식에서 벗어나 진실함과 겸손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상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고넬료는 이방 민족의 장교였지만 그의 경건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로 생활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화가였던 밀레의 작품 중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만종'은 바로 이러한 풍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저녁 노을이 온 대지를 덮고 멀리 교회당이 보이며 은은하게 들려오는 교회당의 저녁 종소리에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던 일손을 멈추고 젊은 농부 부부가 마주 서서 경건히 기도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매우 평화스러워 보이며 특히 고개 숙여 기도하는 부부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 같기만 합니다.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자양분이 됩니다. 간혹 금식과 철야로 서원 하는 기도를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식사와 같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의 핵심은 규칙적인 기도의 생활입니다. 우리의 식사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또 여러 가지 이유로 식사를 자주 안 하면 결국에는 건강을 해치고 마는 것처럼 기도의 생활이 충실하지 못할 때 신앙 생활도 점차 약화되다가 곧 무너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6․25사변 당시에 최전방 부대의 통신과장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일선으로 나가는 부대는 오직 무전기만을 통하여 하루 세 번씩 정식 보고를 합니다. 격전중일 때는 계속적으로 연락함으로써 본부의 작전 지시에 따라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전사가 그 부대의 상황을 작전 본부에 보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보고해야 하며 기도를 통하여 그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으면 즉시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인의 자세는 생활하면서 기도하고 또 인도하시는 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를 거절하고 실천하지 않을 때 지금까지 하나님과 통화되었던 기도의 선을 끊어지고 그 즉시 우리의 영혼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활과 기도를 연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넬료의 기도는 하나님의 경청하시는 경건한 기도였습니다. "네가 기도한 바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고 기억하신 바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도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기도자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말합니다. 장황하고 아름답게 미화한 기도문이나 사람을 감동시키는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고넬료는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교훈하신 대로 고넬료는 은밀하게 많은 백성을 구제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제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즉흥적으로 '구제는 선행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구제에는 도덕적 향락주의자들이 구제함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나보다 약한 사람을 낭만적으로 동정하고 구제함으로써 몇 푼 안 들이고 주는 자로서의 기쁨을 누리려는 자들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경건에서의 선행이 아닙니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위로하고 점점 조여오는 죄책감에서 자유하고 싶은 몸부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구제받는 상대방을 위한 선행도 될 수 없습니다.

참된 구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선행입니다. 진심으로 이웃을 도와주기 원한다면 행동하기에 앞서 구제의 동기가 이웃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사람들은 구제를 남용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그로 인하여 마음이 편할 수 있겠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은 결코 편하지 못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구제에 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더욱 보수적입니다. 그들은 한 순간의 감상적인 도움은 베푸는 자나 받는 자가 동시에 망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구제의 손길만 의지한다는 것은 곧 죽음의 길을 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6․25사변 직후 여러 우방들의 따뜻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감사하기 전에 이 일로 인하여 개인과 사회와 때로는 교회까지도 부정과 부패로 만연되었던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의 헐벗고 굶주린 이웃은 의미없는 동전 몇 푼이나 굳은 한 조각의 빵보다는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 고통을 참고 견디는 그 어려운 기간에 계속적인 관심과 따뜻한 사랑의 격려를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하나님께 향한 경건이 곧 사람에게 표현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나님께 행한 것으로 증거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선행이라도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겸손이 이웃에게 나타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선한 구제가 되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구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그의 경건한 구제를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경건은 가정적이고 또한 공동체적이었습니다.

오늘날 편만한 지식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그들의 가정과 이웃을 외면한 채 오직 자기 한 심령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는 극히 개인주의적 경건만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언제나 움직임이 있으며 참된 의는 살아 역사합니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기쁜 일이나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혼자 지니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즐거워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른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입으로 증거할 수 없는 복음과 진리와 구원이라는 것은 한낱 이름뿐인 복음이요 진리이며 구원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면 어찌 이 기쁨을 혼자만이 알고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디 선생처럼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에게나 말씀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한 가정마다 전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이야말로 참된 경건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한 가정의 식구가 둘러앉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그의 일가 친척과 심지어 가까운 친구들까지 청하여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더욱이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가 당시 유대인의 지배자 고넬료의 집에 들어설 때에 그는 온 집안 식구와 더불어 그 발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프로스쿠니오[worship]라는 말은 경배함을 뜻합니다. 이렇게 진실한 고넬료의 경건 앞에 교만하고 다혈질의 베드로도 멸시하던 이방인에게 '나도 사람이니 일어나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절하는 고넬료는 동시에 그 시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려는 경건한 믿음의 가정 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이방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그리스도를 믿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고넬료의 가정을 통하여 협소하게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던 민족주의자 베드로의 마음이 완전히 허물어지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은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여는 온화한 손길이며,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던 교만함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겸손함으로, 동시에 이기심으로 어두워진 눈 앞에 자기를 사랑하는 이웃을 보여주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사고의 능력이 생활양식의 변화를 따를 수 없는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가정이 경건해야 한다는 하나님에 대한 가정적 경건에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경건한 믿음이 온 집안에 넘칠 때, 하나님은 그러한 가정에 축복을 더하신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나님 아버지, 경건을 잃어 가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다시 경건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심을 감사합니다. 원하옵기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서든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경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구제와 선행이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들의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돌아보시고 넘치는 축복으로 같이 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영광을 우리의 생활에서 드러내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한 심령 한 심령이 경건하게 도와주시고, 우리 가정과 우리의 자녀들이 다 함께 경건하게 하여 주셔서 고넬료의 가정과 같이 새로운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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