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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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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예수님의 비유들은 대체로 평화스러운 것들입니다. 씨 뿌리는 농부, 잃었던 한 마리의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 등 평화로운 이야기들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매우 생소하고 두렵기까지한 말씀을 하십니다. "검을 사라, 칼을 준비하라." 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군인이 무엇입니까? 군인이란 전쟁시에 목숨을 걸고 나가 싸우는 사람 아닙니까? 죽고 죽이는---다시 말해 사느냐죽느냐 하는 생명 문제를 걸고 싸우는 사람을 우리는 군인이라고 합니다. 군인한테는 승리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근 16년 동안 인천에서 목회한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인천은 그리 구경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황토색 바다와 소금내 나는 부둣가 밖에는 말입니다. 그래도 친구들이 가끔 놀러와서는 제게 관광 안내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걸어서 5분 정도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자유 공원으로 그들을 안내하곤 했습니다. 공원 안에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동상 앞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늘 친구들에게 맥아더 장군은 참으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비문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곤 했습니다. 비문 끝에는 맥아더 장군이 평생 좋아하고 자주 인용했던 좌우명이 씌어 있습니다. "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승리에는 대체물(代替物)이 없다. 승리는 승리일 뿐 승리에 대체시킬 수 있는 것은 승리 외에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승리에는 승리만이 있습니다. 승리하지 못했다면 결국 패배인 것을,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고 변명이 있겠습니까? 승리는 승리일 뿐 그 외에는 아무 대체물도 대명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군인은 승리를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군인한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고민이 있습니다. 그 고민은 '이 싸움이 과연 목적 있는 싸움인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제가 1963년, 처음으로 미국 유학을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간혹 미국인들의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여전도회 회원이라든가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조용한 시간에 제게 찾아와 묻습니다. "너희 나라는 왜 너희 나라 사람들끼리 싸우면서 아까운 우리 미국 청년들까지 데려다 죽이느냐?"왜 너희는 한 나라 민족끼리 싸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제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싸움은 힘이 듭니다.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이 싸움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뚜렷하지 못한 목적을 가지고 싸우는 것처럼 피곤한 일은 없습니다.

또한 목적이 있다 해도 그것이 의로운 목적이 아닐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물질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강도질입니다. 전쟁이란 물질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물질을 빼앗기 위함이라면 나라와 나라 사이의 다툼이라 해도 그것은 강도질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리고 성 함락 사건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목적은 여리고 성을 심판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쳐들어가더라도 물건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 금붙이 하나, 옷 한 벌이라도 탐내지 말고 모두 불살라 버려라." 그런데 어리석게도 아간은 몇 가지를 숨겼다가 큰 해를 당하지 않습니까? 이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이지 강도 행위가 아니었던 까닭입니다. 결국 물질을 탈취하는 것이 전쟁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전쟁이 아니요 강도질입니다.

전쟁하는 군인으로서 참 힘든 것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대장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군대의 질서가 엄한 것을 아시죠? 사병은 장교가 "뛰어라" 하면 뜁니다. "엎드려" 하면 엎드립니다.

쏘라면 쏘고 기다리라면 기다립니다. 그런데 사병이 장교의 명령에 이러쿵저러쿵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뛰어라" 했는데 "왜 뛰나요?" 한다든가, "후퇴하라" 했는데 "왜 지금 후퇴합니까?" 하고 묻는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전쟁의 확실한 목적은 지휘관만이 알고 있습니다. 대장만이 모든 계획을 머릿속에 넣고있습니다. 나는 순종할 따름입니다. "동으로 가라" 하면 동으로 가고 "엎드리라" 하면 엎드리는 것으로 그만입니다. 왜 동으로 가고 왜 엎드려야 하는지는 나의 알 바가 아닙니다. 절대 순종해야합니다. 절대 순종, 절대 복종, 이것이 군인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싸워야 합니까? 누구를 위해서 싸웁니까? 이 싸움의 마지막 결과가 누구를 위하는 것입니까?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는 것입니까? 그 많은 싸움 끝에 다 폐허가 될 터인데 거기에서 무엇을 얻겠다는 말입니까? 누가 전쟁의 원인과 목적을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의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다 좋습니다. 목적도 결과도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죄와 악령, 그리고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 군사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기에서는 승리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주 안에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가운데 무려 150번이나 쓰고 있는 귀한 전용어입니다. '주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라는 말들에는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뜻이 있습니다. '나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함받은 자로서, 의롭다함을 얻은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주님 밖에서 되어지는 일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힘의 능력으로'라는 말은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무력이 아닙니다. 총이나 대포의 힘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사람 중 열 사람은 비관적인 보고를 합니다. 키 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큰 아낙 자손들을 보고 기가 질렸습니다. 그래서 보고하기를, 아낙 자손들에 비하면 저희는 메뚜기와 같더라고 합니다. 이것을 '메뚜기 콤플렉스'라 합니다. 믿음 없이 볼 때에 저쪽은 크지만 이쪽은 작고 형편없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저 요단강 건너가나안 땅을 바라봅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민 14 : 8-9)."

미국은 흑인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무서운 전쟁을 치렀습니다.

남북전쟁---피해는 여간 큰 것이 아니었으나 그 전쟁의 승리로 숭고하고 의로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전쟁은 칼의 승리 일뿐만 아니라 붓의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칼로 싸워 이긴 사람이 링컨이라면 붓으로 싸워 이긴 사람은 스토우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용기를 주어 노예 해방을 이루는 데 불씨를 당겼던 인물입니다. 언젠가 이 두 사람이 마주 앉게 되었을 때의 일화입니다. 링컨은 스토우 부인을 보는 순간 '이런 여자가 어떻게 그처럼 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토우 부인은 노예 해방의 도화선이 된 여성답지 않게 몹시 나약하고 왜소해 보였던 것입니다. 링컨은 우락부락하고 강한 여장부를 상상해 오던 터라, 바람만 불어도 곧 날려가 버릴 것 같은 스토우 부인의 실체를 보고 조금은 아이러니컬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링컨은 솔직하게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엉클 톰스 캐빈'을 쓴 부인이 이렇게 연약한 여성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스토우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글은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노예 해방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저는 다만 잠시동안 그분의 대필자가 되어드렸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하여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믿음, 여기에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말씀드리기 좀 쑥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가끔 텔레비전으로 권투 시합하는 것을 보곤 합니다. 보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누가이기고 지고 하는 데에는 별로 흥미 없습니다. 딱 한 장면 때문에 봅니다. 한참 때리고 터지고 하다가도 마지막 종이"땡" 하고 울리면 서로 끌어안는 장면 말입니다. 저는 그 장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장면 때문에 열심히 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저렇게 끌어안을 것을 왜 죽어라고 때렸나.' 권투 시합을 보면 그 얼마나 처절하게 싸웁니까? 상대방을 링 위에 쓰러뜨리기 위하여 수없이 주먹을 내뻗습니다. 부상당한 자리에서 피가 나도 오히려 그 부분을 더욱 맹렬히 공격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종이 "땡"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납니다. 적과 적이 끌어안고 서로 격려합니다. 서로 위로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페어 플레이가 아닙니까? 저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세상만사가 다 저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이제 거기에서 철학을 끌어내 봅니다. '우리가 누구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가. 누구를 때리고, 누구를 미워하는가.' 생각해 보면 원수도 없고 미워하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힘을 겨루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6․25때 군인으로 참전했습니다. 몇 달 동안 최 일선에 있으면서 고생도 무척 많이 했습니다. 한참 총을 쏘아대다 보면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곤 합니다. 육박전이라도 벌어지면 이건 정말 끔찍합니다. 입고 있는 군복은 또 어떻습니까? 온통 찢기고 피에 물든---여러분, 그런 군복을 보셨습니까? 요새 군복은 군복이 아니라 잘 다려진 예복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분들은 그 참혹한 실상을 상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 그 피비린내, 살기 등등한 얼굴들…… 저는 이 무서운 전쟁을 보았고 겪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도 휴머니즘이 있습니다. 한창 마주보면서 쏘고 던지고 하다가도 저쪽에서 손을 번쩍 치켜들고 나오면 이쪽에서도 총 쏘는 것을 멈춥니다. 절대로 항복한 포로를 죽이는 법이 없습니다. 꿇어앉혀 놓고 감시하다가도 식사 때가 되면 예외 없이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우리도 식량이 귀한 형편이지만 저들을 굶기지는 않습니다. 또 군인이 모자라면 그들에게 우리 군복을 입혀 저쪽과 싸우게 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해 총을 쏘는 것입니까? 그 전쟁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속에 있는 악의였습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요, 유물주의, 공산주의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악마와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해야합니다. 원수는 사랑하고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다가 악까지 사랑해 버리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가난과 싸우고, 비굴함과 싸우고, 억압과 싸우고, 폭력과 싸워야 합니다. 사실, 마지막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권투 선수들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모 권투선수도 "저, 이번 시합만 하고 아예 권투를 그만두렵니다"하는 말을 벌써 몇 번째 하는지 모릅니다. 시합에 대비한 훈련이 어찌나 힘이 드는지 아무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시합날짜가 정해지면 어떤 때는 한 달에 12킬로나 체중 감량을 해야 한답니다. 생활을 절제하고 정신과 몸을 가다듬는 싸움---이 자기와의 싸움에 실패하면 시합은 나가 보나마나라고 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과연 승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쓸데없이 남의 일, 세상 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어느 사이에 패자가 되어 버렸는가, 어느 사이에 마귀의 밥이 되어 버렸는가, 마음의 평화가 없어지고 남은 것은 증오와 불신뿐이 아닌가.

믿음의 싸움이라는 것은 불신과 싸우는 것이요, 증오와 게으름과 교만과 이기심, 그리고 허영, 거짓과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 싸움을 '마귀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한 학기 동안 루터를 전공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의 책을 읽다 보면 그의 글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눈에 띄는 말이 있습니다. '마귀와 더불어'라는 말입니다. 그는 흰 마귀, 검은 마귀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검은 마귀는 세상 마귀요, 흰 마귀는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란시키는 마귀입니다. 루터는 언제나 마귀와 더불어 싸웠습니다. 눈앞에 마귀가 어른거린다고 잉크병을 내던진 일까지 있습니다. 그가 싸운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마지막 전쟁은 악령과의 싸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누구와 더불어 싸우는 지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불투명한 싸움에는 승리가 없습니다. 언제나 악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니 방위적 무기가 있습니다.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진리의 복음, 믿음---이것이 무너지면 방어진이 무너집니다. 허술해집니다. 그 다음은 적에게 방어진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항상 의로워야 합니다. 항상 진리와 복음과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해야 비로소 기본적인 자기 방어를 할 수 있습니다. 그후에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 성령의 검, 말씀, 기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사단 마귀와 싸우러 나가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성경 보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전쟁은 해보나마나 입니다. 어떻게 빈손으로 싸우겠습니까? 우리의 싸움은 오직 말씀으로, 그리고 기도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으라." 말씀과 성령, 믿음과 순종으로 무장했습니까? 이제 대장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승리를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 : 33)."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승리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아침에 승리의 영광을 누리셨습니다. 그 승리는 이제 우리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선한 싸움, 이 영적인 싸움에서 결코 좌절하거나 낙오자가 되지 맙시다. 바르게 싸워 바른 승리를 얻읍시다.

주님께서 항상 그 영광과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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