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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선택하는 사람(사무엘상 16장 6절~13절)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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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선택하는 사람(사무엘상 16장 6절~13절)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 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섭리하시며 경륜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또한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고, 그리고 권능과 권세도 주셔서 귀한 책임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반적인 경륜입니다. 또한 특별한 경륜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륜이란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가 특별해서 이것을 위하여 당신의 사람들을 고용하시어 특별한 일에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고용에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 쓰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정적이고 악한 일을 위해서 쓰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루터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하나님의 오른팔과 왼팔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른팔은 십자가의 은혜로, 왼팔은 율법과 심판으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쓰시는데 오른팔로 들어 선한 목적에 쓰시는 자가 있고 왼팔로 들어 징계하고 훈련케 하기 위해 쓰시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모세 및 여러 왕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많은 사도들과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오른팔로 쓰시어 당신의 선한 목적에 고용하셨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바로 왕을 왼손으로 들어 쓰셨으며, 악하고 잔인한 심판의 막대기로 느부갓네살을 쓰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하나님의 특별 고용에 채용되어 오른팔과 왼팔로 쓰이는 자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어느 팔에 고용되어 있는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일에 우리들을 쓰시되, 쓰이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구원이 있고 영광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전적인 은사요 사명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그릇은 믿음이요 축복 받는 그릇은 겸손으로, 그 그릇은 우리들이 준비해야 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어 기름을 부으시고 왕으로 삼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게 하시는 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신학적인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은 온 백성이 지지하고 높여서 마침내 이스라엘 왕이 됩니다. 즉 백성들이 선택했고 성원해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시어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은밀한 가운데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왕을 선택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당신의 사람으로 선택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백성으로 하여금 선택케 하셨단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쓰실 때에 그에게 영감을 주시고 은혜도 능력도 권세도 주십니다. 또한 필요한 건강, 장수, 재물도 주십니다. 그러니까 일하기에 필요한 모든 요소와 모든 은사를 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은사 이전에 인간 자신이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할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됨의 그릇으로 그 그릇은 나 자신의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만 이 은사를 받을 그릇은 우리 자신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택해 주셨고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주셔서 말씀을 전하는 큰 역사를 이루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있는 자격 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주셨다." 즉 바울 자신에게 충성, 진실은 있었기에, 그 위에 하나님께서 능력과 은사를 더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의 충성을 인정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아주 극적인 장면이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 배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사울을 먼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남보다 어깨 너머로 키가 컸고 기골이 장대하여 전형적인 장군 재목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선지자와 제사장의 위치까지 넘보는 교만을 부려 자기 페이스를 잃어 갔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그의 교만을 보시고 왕권을 빼앗기 위한 작업을 시도하십니다. 사울이 아직 왕의 보좌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시어 그의 아들 중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있으니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기름을 소뿔에 채워서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새에게 당신의 아들 중에 하나님이 선택한 자가 있으니 내게 보이라고 해서 아들들을 하나씩 만나보게 됩니다. 본문에서 보는 대로 사무엘은 제일 먼저 맏아들인 엘리압을 봅니다. 그는 키도 크고 늠름하여 용모가 준수하였기에 사무엘은 이 아들을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실 자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은 둘째 아들인 아비나답을 보았으나 역시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셋째인 삼마를 보고 차례차례로 일곱 아들을 다 보았지만 그 중에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가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아들이 더 없느냐고 묻자 이새는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설명을 좀 붙인다면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인 이새의 생각에 막내아들이 하나 있긴 하지만 변변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 중에 선택한 자가 있다 해도 막내인 다윗은 아닐 것이라고 거의 단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의 생각이 그럴진대 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막내는 신통치 않을 뿐 아니라 어리기에 형제들 대열에 끼워주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기름을 부으십니다.

하나님은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실, 사람을 바로 볼 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그 기준을 어디에다 두고 있느냐 말입니다. 누군가가 각 나라마다 사람을 보는 가치관이 다름을 그 민족성의 특징으로 꼬집듯이 말한 것이 있습니다. 가령, 독일에서는 사람을 채용할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일에 대한 능력을 묻고, 미국 사람들은 일에 대한 경험을 묻고, 일본 사람들은 어느 학교 출신인가 하고 학벌을 중요시하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느 집 자식인가를 묻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 다릅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있었던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장을 크게 경영하는 테일러씨 집에 어느 날 짐이라는 청년이 찾아와서 일자리를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착실하게 보였기에 테일러씨는 허락을 했고, 그는 건초를 저장하는 창고에서 아무렇게나 자고 얻어먹으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가 아주 진실 되게 열심히 일을 하자, 테일러씨의 딸이 짐을 사랑하게 되고, 드디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테일러씨는 깜짝 놀라면서, 돈도 없고 족보도 알 수 없는 주제에 어디 감히 내 딸을 넘보느냐고 크게 책망하며 짐을 내쫓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30년이 지난 어느 날 테일러씨는 창고 수리를 하기 위해 대청소를 하다가 창고 기둥에서 짐이 칼로 새겨 놓은 제임스 에이 가필드(James A. Garfield)라는 그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가필드는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테일러씨가 30년 전에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았으면 대통령의 장인이 될 뻔했는데, 짐이 가진 소유, 그의 소속이 불분명하다는 것 때문에 그의 성실과 진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아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선택할 때에 무엇을 기준으로 삼겠습니까? 각 가정에서 사위나 며느리를 맞이할 때에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됨을 보고 중심을 보아야 하는데 학벌이나 가문, 재산, 용모 등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즘은 그 사람의 소속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면적인 인간, 즉 그 존재 자체를 보십니다. 영적이고 근본적인 바탕을 보신단 말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지식을 쌓았고 지위를 얻었어도 그 사람됨의 본바탕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끝까지 사람 노릇하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사람됨이 바로 된다는 것은 중생함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그 중심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말하는 것으로 영적 품성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6:1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인간이 되고 육체가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고깃덩어리만 남아 있는 인간이기에, 생각하는 범위가 돈이나 물질 또는 본능적인 것뿐이니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육적인 인간에게 지식이 있으면 무얼하고 돈이 있으면 무얼하겠다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품성을 보고 계십니다.

본문은 사건이 재미있게 전개되어 가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의 형들이 양을 치다가, 선지자가 오시어 잔치를 한다 하니 양을 치다 말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더우기 이 행사는 보통 잔치가 아니라 이 형제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나라의 왕될 사람이 있어서 선지자가 기름 부으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흥분되고 좋은 시간입니까? 형제들이 모두 옷을 갈아입고 선지자 앞에 나서기 위해 분주해졌습니다. 이 때 다윗은 홀로 들에서 계속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잔치에 참여키 위해 준비하면서 다윗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함께 가자고 권유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막내아들은 제외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 자신도 형님들의 그 대열에 끼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보통 생각으로는 그래도 선지자가 오시는데 구경이라도 하고 싶어 나설 것 같은데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가 우리 형제들 가운데 있다면 그야 당연히 형님들이 될 것이니 다윗은 겸손히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얼마나 깨끗한 마음가짐입니까? 여기에 왕권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겸허한 마음, 여기에 왕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겸손과 작은 충성에 하나님의 뜻이 계셨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별명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나의 종, 정직한 다윗'이라고 부르고 있듯이 그의 별명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정말 정직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믿음 위에서 정직했기에 맹수와 싸울 수도 있었고, 골리앗 대장 앞에 담대하게 맞설 수도 있었습니다. 생각만 있는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회개도 정직하게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책망하자 아무 변명 없이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깨끗하게 고백했습니다. 회개에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신분으로서 이 일이 드러나면 백성들에게 얼마나 부끄러워집니까? 어떻게 백성들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체면에 상관없이 그는 정직하게 회개했습니다. 다윗의 참회는 눈물겹고도 위대한 일면이 있습니다. 많은 시편 가운데서도 다윗은 종종 회개하는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회개 중에 단 한번도 변명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밧세바와의 사건에도 그 여자를 원망하거나 책망하는 말은 전혀 없습니다. 자기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책임을 누구에게도 전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하며 깨끗하게 책임을 지며 회개했습니다. 그것이 왕권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책임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까?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긴다는 것 같이 불안한 일은 없습니다. 잘한 일이든 못한 일이든 내가 한 일은 책임질 줄 알아야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정직하지 않음은 슬픈 일입니다. 다윗은 그 정직함이 시종일관했습니다. 불변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처음과 나중이 아주 다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울은 처음에 왕이 된다고 하자 숨을 정도로 겸손했지만, 왕이 된 후에 점점 변신하여 아말렉과 싸운 뒤에는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고 사무엘 선지자도 무시하는 교만을 부렸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거나 유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의인도 아닙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며 허영심과 탐욕이 없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회개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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