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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명한 사람(사무엘상 9장 1절~6절)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시람이더라.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인간부재(人間不在)라고들 합니다. 사람이 없고 일꾼이 없고 인재가 없다, 지도자가 없다--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뇌고 듣습니다. 우리 민족이 우러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언젠가 지도자가 없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을 보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다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왜 그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까?" 여러분, 인물이 별다른 사람입니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람입니까, 땅에서 솟는 사람입니까, 어디서 빌려올 사람입니까?
도대체 어떤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인물은 우리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인물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물을 인물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지도자를 지도자로 모셔야 합니다. 오늘의 풍토에서는 지도자가 나지도 못할 뿐더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도자가 지도자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대에 어느 인물이 지도자로 앞에 나서겠습니까? 정신병자 아니고는 나설 사람이 없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오늘 우리는 인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부정하고, 인물을 죽이는 그런 세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도자이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지도자입니다. 직장에도 윗사람이 있고 아랫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고 또한 지도자이어야 합니다. 크건 작건 우리는 다 지도자입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세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하나가 다 지도자인 것입니다. 나 한사람으로 해서 전체가 사는 수도 있고 망하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름지기 모두가 지도자의 위상에 서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목자를 세워 양을 다스리듯이, 아버지를 세워 가정을 다스리듯이, 왕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듯이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그렇게 다스리고 다스림 받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지도를 받습니다. 지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질서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한 제사장을 세워 온 백성의 죄를 사하기도 하십니다. 한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전하기도 하십니다. 한 왕을 세워 백성의 안녕 질서를 다스리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축복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귀한 지도자를 주신 것입니다. 이 땅에 거룩한 제사장이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 땅에 온 백성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왕이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한 사람을 주셨습니다.
지도자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조건으로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권위적 지도자, 민주적 지도자, 대표적 지도자, 설득력 있는 지도자, 집행적 행정적 지도자, 지적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겸비한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마는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지도자는 다름아니라 덕 있는 지도자입니다. 흔히들 덕치주의니 윤리정치니 하지 않습니까? 재능도 있습니다. 능력도 있습니다. 권세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있어야 할 도덕성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덕 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사(士師)들을 통하여 친히 다스리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열방과 같이 왕이 있어 저들을 다스리기를 원합니다. 왕을 세워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왕 세우기를 허락하시고 친히 왕을 세워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신 첫 번째 왕, 그 왕을 세우는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쓰시는 사람은 어떠한 인격인가를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계시적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사울을 가리켜 '준수한 소년'이라고 표현합니다.
'준수하다'--'바후르 와토브(bahur wa-tob),' 곧 히브리 원문대로 보자면 젊고 순수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활기차고 패기가 넘치는, 자신만만한 인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이가 젊다는 말이 아닙니다. 활기가 넘치는 동시에 준수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토브(tob)'라는 히브리어는 보통 '아름답다'라는 말로 번역이 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 그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이 말이 '키토브 Ki-tob'입니다.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도덕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나 인간이 볼 때에나 모두에게 흡족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는, 그야말로 마음에 드는 인격을 말함입니다. 더욱이 사울은 체격까지 출중하였다고 합니다. 뛰어난 바(excellence)가 있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인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인물 중에는 이처럼 준수함을 인정받고 쓰임 받은 사람이 몇 있습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이 그러합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다윗 왕이, 사무엘하 14장에 보면 압살롬이 그러합니다. 에스더 2장에 보면 에스더가,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모세가 그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수한 인격을 쓰신 케이스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사울을 들어 쓰시는 것을 보십시다. 그의 인격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인격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인격을 보시고 사람을 쓰셨습니다.
먼저, 사울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아버지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는 효성 지극한 사람이었음을 본문은 하나의 이야기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효가 없는 인격은 파산된 인격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큰 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작은 덕인 효를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나라를 다스리는 큰 책무를 맡길 수 없습니다. 불효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패륜아가 나라를 맡아 다스릴 수 있습니까? 그에게 기대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그러합니다. 일평생을 나라를 위하여 일해온 훌륭한 재상들은 하나같이 효자였습니다. 효자 아닌 사람을 등용한 일도 없고, 효자 아닌 사람이 훌륭한 역사를 이룩한 예도 없습니다. 사람을 등용하고자 하면 먼저 그 사람의 효를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중요한 사람을 쓸 때에는 이 효를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력서나 자기소개 서를 아무리 뜯어본들 사람을 알 재간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혼한 사람은 절대로 쓰지 않습니다. 가정이 시원치 않은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평안치 않으니 밖의 일인들 제대로 하겠습니까? 또한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은 무조건 쓴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은 배신하는 법이 없습니다. 효를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발탁하는 것이 경험상으로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순종의 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지도자의 위상을 가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사울은 적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십시다. 뭐 하나 찾아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건성으로 한두 번 찾아보고는 없다고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럴진대 이 도망간 나귀를 어떻게 찾아오겠습니까? 동으로 갔는지 서로 갔는지 이 넓은 천지에서 어떻게 찾습니까? 한나절 찾아보고 돌아와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 사흘을 찾아 헤맵니다. 주야로 사흘을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찾습니다. 이 노력과 충성, 이 효심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요즘은 이런 아들을 만나는 것이 죽는 일보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가 시키니까 사흘 낮 밤을 열심으로 찾아다니는 적극적인 효도, 보기 드문 효도라 하겠습니다. 묵묵히, 그러나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두루 다니되'라는 말이 본문에 세 번이나 나오지 않습니까? 이처럼 온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사흘을 찾았습니다마는 끝내 찾지 못하고 맙니다.
셋째로, 사울에게는 자상한 면이 있었습니다. 사흘을 찾아 헤매지만 나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사울은 생각합니다. '나귀를 찾지 못했으니 아버지께 야단을 맞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나귀는 고사하고 아들까지 잃었을까 걱정하시겠구나' ----- 아버지의 마음을 읽습니다. 아버지는 수전노가 아닙니다. 나귀나 돈만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나귀를 찾아오라고 보냈지만 헤매다가 그 보낸 아들까지 잃을까 걱정하는, 아들의 고생을 마음 아파하는 그 아버지의 심정을 염려하고 이제 돌아가기로 합니다. 이 얼마나 착한 마음씨입니까? 주위를 가만히 보면 아이들이 공부를 못했다고 하여 '그렇게 공부할 바에야 차라리 나가 죽어라'라고 심한 말을 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소리까지 나왔겠습니까? 부모의 마음이 족히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정말로 나가고, 죽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래서 되겠습니까? 나귀를 찾아오라 하여 나왔습니다마는 소식 없이 사흘씩이나 찾아 헤맨 것이 아버지께 더욱 걱정을 끼치는 일임을 압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고 돌아가기로 합니다.
일전에 우리 교회의 한 청년이 찾아와 제게 이상한 질문을 합디다. 제 주례로 결혼한 사람인데, 그 아내가 지극정성으로 잘한다고 합니다. 결혼한 이래 오늘까지 사먹는 음식이 몸에 나쁘다고 하며 도시락을 꼬박꼬박 싸주는데 그 도시락이 정말 일품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아내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들고 회사에 나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동료들이 식사하러 가자고 합니다.
도시락을 가져왔다고 하면 공처가라느니 마누라한테 쥐여산다느니 하면서 놀리기 일쑤입니다. 하는 수없이 밖에 나가서 설렁탕이나 짜장면 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이제 도시락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그냥 가지고 가면 아내가 섭섭해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먹으라고 줍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는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고 말합니다. 몇 번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 번번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말해야겠는데 아내가 섭섭해할 것같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더 마음이 언짢다는 것입니다. 어찌했으면 좋겠느냐고 제게 묻습니다마는 저도 그 해답을 모르겠습디다. 어쨌든 이 얼마나 좋은 마음입니까? 혹 아내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지는 않았는가--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그곳의 병원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늘그막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의사들이 많습니다. 우리 민족을 위하여 봉사하다 죽겠다는 생각에서라고 합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자들을 치료할 때, 이를테면 주사를 놓거나 실밥을 뽑거나 할 때에 아무리 조심스럽게 한다고 해도 아픔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에 의사들은 'How are you feeling now?'--아프지 않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That's OK, thank you.'--괜찮다, 염려해주어서 고맙다는 것입니다. 좀 아프더라도 나를 위하는 일이다 생각하면 충분히 참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사한테 대들면서 욕까지 한다고 합니다. '저런 사람들의 병을 고치겠다고 돌아왔는가'라는 생각을 하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것으로는 아픈 체하지 마십시다. 좀 견디어내십시다. 나를 위한 일이 아닙니까? 병원에서 소리지르고 싸우고 하는 일을 저도 가끔 볼 때가 있습니다마는 어찌 교양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상대편을 생각해야 합니다. 전철에서 발등을 밟혔습니까? 좀 참으십시다.
왜 내 발을 밟았느냐고 소란을 피울 것 없습니다. 어쩌다 잘못해서 밟게 된 사람이 얼마나 미안해하겠습니까?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서 참고 넘어가십시다. 우리는 언제나 나의 불편함보다 상대편의 마음을 먼저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울을 보십시다. 그에게는 나 자신의 괴로움과 실패는 문제가 아닙니다. 나로 인하여 걱정할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셨습니다. 로버트 슐러는 지도자가 되려면 '나보다 남을 위하는 이타적인 마음과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나 자신을 위하려는 마음이 앞서 있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넷째로 사울은 여유와 아량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종의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무릇 충고를 받아들이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남의 충고를 얼마나 잘 받아들입니까? 언젠가 제가 운동에 관한 책을 읽다보니 참으로 수긍이 가는 이야기가 있습디다. 누구와 함께 운동을 할 때에는 혹 상대편이 잘못하고 있더라도 본인이 요구하지 않는 한 충고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령 테니스를 하는데 상대편이 잘못한다고 하여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충고를 했다고 합시다. 당연히 기분이 나쁩니다. 모처럼 기분 좋게 운동 좀 하려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만드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충고를 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서로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충고를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없습니다. 사울은 종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6절)." 이를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뜻을 바꿉니다. 아랫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 위대한 자의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입니다. 그런 그가 문둥병에 걸려서 엘리사 선지에게 고침을 받으러 옵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는 내다보지도 않고 사자를 보내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 5:10)"라고 말합니다. 나아만은 기분이 불쾌해졌습니다. 정중히 나아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상처에 손을 대어 고치기를 바랐는데 고작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목욕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요단강만한 물이 없는 줄 아느냐'라며 몸을 돌려 떠나려 합니다. 그때 종들이 나아와 말하지 않습니까?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왕하 5:13)." 이에 나아만이 내려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상처가 깨끗해졌습니다. 아랫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이 사람, 꽤 훌륭한 사람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충고를 수용하는 능력, 그 능력만큼 성장하는 것입니다. 기고만장하여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은 이미 끝난 사람입니다.
다섯째로, 사울은 겸손한 인격과 경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선지자에게 물으면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그에게 나아가는 겸손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저를 낮게 여겼습니다. 이어지는 20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스스로 낮게,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크게 쓰신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높아지면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거두어 가십시다.
9세기, 독일 통일을 이룩한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를 잘 알 것입니다. 나라가 통일되자 왕은 흐뭇하고 기쁜 나머지 축하연에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 왕을 값으로 따지자면 얼마나 되겠는가?" 신하들은 저마다 200억 마르크가 될 거라느니, 점령한 나라의 보화까지 치자면 500억 마르크가 족히 될 거라느니 합니다. 심지어 1,000억 마르크니 5,000억 마르크니 하면서 왕을 치켜세웁니다. 왕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일등공신 비스마르크만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왕이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나를 얼마로 평가하겠소?" "29마르크입니다." 그의 조용한 이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께서 은 30에 팔렸으니 거기에서 하나를 감하여 29마르크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큰 경건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화입니다.
한 사람이 40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10일도 힘든 일인데 하물며 40일입니다.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닙니까? 40일 금식기도를 마치는 날, 친구들이 찾아가서 칭찬을 합니다. 그 동안 수고 많았다,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해냈다고 하며 이제 함께 내려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셨지만 나는 하루를 더하여 41일을 하겠다'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날밤에 그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셨으니 나는 39일만 하겠다'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것이 타당한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높이 보고 나를 크게 보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나를 작게 여기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지명하여 쓰십니다. 기름 부음받고도 정식으로 왕이 되기까지 사울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왕으로 세우겠다고 할 때에 그는 도망가서 뒤주 뒤에 숨었습니다. 그렇지만 암몬 족속과의 싸움에서는 앞에 나아가 싸우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한 사람이 이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작게 낮추는 경건과 믿음을 보시고 쓰십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면서 마음이 변하여 교만해지고 스스로를 크게 여기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바로 그 순간의 그 상태와 그 진실, 그 겸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한결같이 그 성품과 그 진실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쓰시는 그 인격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았습니다. 더는 누구냐고 묻지 마십시다. 이러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들어 쓰십니다. '그 누구'를 기다리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의 믿음과 겸손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을 쓰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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