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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강) 바울의 고별 설교! ① (행 20:13-24)

by 【고동엽】 2022. 3. 11.

(제57강) 바울의 고별 설교! ① (행 20:13-24)

 

본문은 바울사도가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중에 사역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마게도냐를 거쳐 바다를 건너 귀환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선창에서 바울을 없애기로 했다는 소문을 듣고 육로로 마게도냐로 들어갔습니다.
빌립보에서 부활절을 지나고 드로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일주일동안 머무르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실 드로아는 바울에게 잊지 못할 곳입니다. 왜냐하면 3차 선교여행 출발 시 환상 중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자기를 도와달라'는 것을 보고 곧 구라파(유럽)로 떠나갔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이 드로아가 인상 깊은 곳입니다. 그래서 귀로의 길에서 일주일을 머물렀습니다. 머무르면서 바울은 특별집회를 인도했는데 그곳에서 잊지 못할 사건 하나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집회 중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창문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건입니다. 항상 은혜 뒤에는 사단의 장난도 강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 큰 집회가 잠시 중단된 것 같았으나 사도바울이 엘리야와 엘리사가 기도한 것처럼 죽은 유두고를 안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집회는 더 큰 은혜가 넘쳤고 드로아 성도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그 사건 뒤에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도중 밀레도에 도착하여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다가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13-16절은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가는 여정을 소개했고, 17-38절까지는 바울의 고별설교가 이어지는데 너무 길어서 24절까지만 끊어서 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도 ◀바울의 고별 설교!▶입니다.

 

유두고를 살리고 그 밤에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바울은 또다시 드로아를 떠났습니다. 사명 자에게는 가야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가고 또 갑니다. 어디로 갑니까? 생명의 복음을 싣고 영혼을 살리려 가고 있습니다.

 

▶13절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우리는' 누가를 포함한 사도바울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먼저 배를 타고 앗소까지 갔는데 바울은 혼자 걸어서 앗소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약 32Km(80리)정도 인데 그 먼 길을 바울이 혼자 간 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가다가 교회를 심방하기 위함이라고 했고, 어떤 학자는 바울이 밤에 배를 타면 멀미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만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조용히 주님을 생각하면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주석가들의 표현을 보면 그때는 4월의 아름다운 화창한 봄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통해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기적을 베푸시고, 능력을 행하시고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때마다 대중을 피하여 홀로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밤이 맞도록 혼자 산에서 기도를 하시고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찾아 가셔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대중 속에 있었지만 언제나 대중과 함께 있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들을 끝까지 가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이런 고독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홀로 하나님과 대결하는 시간이 절대 필요합니다. /믿/
사도바울이 1, 2,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여러 지역을 전도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열정이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주님을 잃어버리기 쉽다는데 있습니다.

 

▶14-15절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앗소에서 일행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데 여러 지경을 거쳐서 가게 됩니다. 앗소에서 50Km 떨어진 미둘레네 성을 거치고 또 그 다음 날에는 미들레네에서 80km떨어진 기오 성을 거치고 또 그 다음날에는 사모 섬에 들리고 그 다음 날에는 에베소 남쪽 45Km 지점에 있는 밀레도라는 항구 도시로 돌아옵니다.
여기 '사모'는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조밀한 곳으로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출생한 곳이고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를 쓴 '이솝'이 이 고장 출신입니다.
또 밀레도는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이기도합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밀레노까지 5일간의 걸친 여행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눈뜨면 떠나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쉬지 않고 여행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러한 생활을 한 두 해만 한 것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국내에 있을 때 보다 외국 선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본 절에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바울의 열정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바울은 한마디로 주님께 미쳐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6절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마음이 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는 음모 때문에 길을 돌아오다 보니까 유월절을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의 3대 절기인 오순절만은 예루살렘에서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의 조상들이 지켰던 절기 예배를 그렇게 소중하게 지키기를 원한 것입니다. 또 그만큼 동족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둔 이유는 ①3대 절기의 하나인 오순절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함이요,
②각 지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요,
③3차 전도 여행을 속히 끝마치고 로마전도에 가려는 마음이 급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로 77절, 맥추절이라고 합니다.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오순절은 성령강림으로 기독교 교회가 탄생한 절기입니다.
이제 17절부터는 밀레노에 도착한 바울이 사람들을 에베소에 보내어 그곳에 섬기는 장로들을 초청하여 그 장로들에게 이제 마지막 고별설교와 더불어 권면의 설교를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여기서 왜 바울이 에베소를 들리지 않았습니까? ⑴바삐 예루살렘에 올라가 오순절을 맞이하기 위해서이고, ⑵에베소는 바울이 3년 동안 정들었던 곳입니다. 가면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말리는 일들이 있어서 떠나는데 지장이 많기 때문입니다.
밀레노에서 에베소까지는 48Km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그 먼 거리에 사람들을 보내어 장로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여기서 장로는 28절의 감독자들입니다. 이 징조들은 행19:6절을 보면 바울에게 안수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8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오매' 에베소 장로들이 왔다는 것입니다. 추측컨대 에베소 장로들이 밀레도에 도착하기 까지는 3일이 걸렸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들이 바울의 요구에 순종하고 달려왔을 그들의 겸손함과 신앙의 인격을 보여준 것입니다.
'저희에게 말하되' 장로들에게 설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는 3년 동안에 걸친 에베소 사역을 말합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바울이 그곳에서 어떻게 목회를 했는가를 장로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살아도 주의 것이요, 죽어도 주의 것'으로 산 자였습니다.
다시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이 말은 '내가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어떻게 섬긴 것을 너희가 알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온 첫날부터 그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후의 변화에 따라 문풍지가 변하듯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분 좋은 때는 교회를 위해 일하고, 기분 나쁘면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변덕스러운 신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탐욕을 채우기 위해 일하지 않았음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비겁한 삶을 살지 않았음을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를 위해, 성도를 위해 헌신적이고, 충성한 모든 일에 대해 너희가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지난 3년 간을 회상하면서 권면과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바울의 설교가 여러 번 나옵니다. 본문이 네 번째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설교와 앞에서 한 세 편의 설교와는 아주 성격이 다릅니다. 앞의 3번의 설교는 전도설교였지만 본문의 설교는 바울의 목회설교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유일하게 기록된 고별설교입니다.
19-21절까지는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며 설교하고 있습니다.

 

▶19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자기의 에베소 3년 간의 목회사역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에베소 3대 목회철학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참고' 즉 인내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목회자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주님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주를 섬긴 것'과 그 앞에 있는 모든 내용들은 주님을 어떻게 섬겼는가를 수식하는 표현들입니다.
같이 목회를 하고, 교회를 섬기면서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가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사실 목회란 사람을 섬기는 것이지만 그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 주님의 백성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목회는 섬김이요, 신앙생활도 섬김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섬기고, 교인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또 목사를 섬기고 그런 것입니다. 모는 분야에서 섬기는 자세로 일을 하면 잡음이 없습니다. 정부도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해야 되는데 군림하니까 마찰이 일어나지요!
사도바울은 교회를 섬겼습니다. 주님이 섬기듯이 그렇게 섬겼습니다. ▶사도바울이 교회를 어떻게 섬겼습니까? 세 가지 태도로 섬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①모든 겸손으로 섬겼습니다. 사도바울은 겸손한 목회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일도 겸손하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실망하게 합니다. 왜 사람들이 구제하고 뺨 맞는 줄 하십니까?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열매가 없습니까?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힘과 지식과 방법으로 목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겸손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겸손도 모든 겸손으로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모든 겸손을 온전한 겸손을 의미합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뜻이 있겠습니다만 먼저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드러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어야합니다.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 생각, 내 주장, 내 방법으로 믿고 가면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일하면서 자기도 갈등이 있고, 남에게도 갈등을 주는 것은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 내 방법들은 자꾸 내세우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전도 학에서 늘 강조하는 중요한 원리하나가 '논쟁에는 지고 전도에는 승리하라'는 말입니다. 논쟁에서 이기려고 마음먹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지 않는 자세로 복음을 전했을 때, 상대방은 '내 말이 맡기는 맞다. 그러나 내가 믿나 봐라'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전도의 열매를 맺으려면 겸손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겸손은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방법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마11:29)고 하셨습니다. 겸손은 주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생각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만을 생각하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종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은 철저하게 주인을 위해서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겸손이란 자기의 포기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주님만을 신뢰하는 영적 태도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모든 면에서 겸손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②사도바울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는 눈물의 목회를 했습니다. 첫째는 겸손목회, 둘째는 눈물목회입니다.
눈물은 언제 나옵니까? 머리로만 이해하면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눈물은 가슴으로 이해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또 눈물은 사랑하면 나옵니다. 불쌍히 여기면 눈물이 나옵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눈물 없이 자식을 키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참된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울의 가슴속에는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고후11:29절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그는 교인이 아프면 참으로 자기를 아파했습니다. 교인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참으로 자기가 어려움을 당하는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영혼들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은 정감의 표시오. 사랑의 간절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물로 나아오는 자는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는 벽을 향하여 전심으로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리라'(왕하20:5)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그 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빌3:18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불신자들의 불쌍함을 눈물로 애통했습니다. 본문의 3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③인내함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유대인으로 인하여 당하는 핍박과 눈물을 수도 없이 감내했습니다. 어려움도 인내했고, 매 맞음도 인내했고, 배고픔도 인내했고, 모든 일을 인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란 오래 참는 것'이라고 체험적 고백을 했습니다. 롬5:3-4절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참고, 참고, 또 참았습니다. /할/

 

▶20절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관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는 두란노서원에서 2년 동안 매일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여기서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라는 말씀에서 '유익한 것은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의미합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어떤 곳에서든지 사랑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유대인이면 유대인대로, 헬라인이면 헬라인대로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은 그가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유익한 것'은 구원에 유익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것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만을 전했습니다. 그는 공중 앞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공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이나 두란노 서원에서의 전도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리고 각 집에서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사적인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에 전념했다는 것입니다. '공중 앞에서 또는 각 집에서' 라는 말은 바울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복음을 전할 장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증거 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장소를 불문하고 전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21절에 나오는 바로 '회개와 믿음'이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한 때만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죄의 자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오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대상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많이 있거나 적게 있거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바울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21절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회개와 믿음을 증거 했던 것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유대인들이나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막론하고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이 구원의 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두 기둥입니다. 참된 구원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헌 것은 벗지 않고서는 새 것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더러운 물을 버리지 않고 깨끗한 물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로 물들은 심령을 회개하고 주의 생명수로 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셨습니다. 회개는 복음의 일성입니다. 여기까지가 과거를 회상한 설교입니다.
이제 22-27절은 현재의 심정을 고백했습니다. 오늘은 24절까지만 하겠습니다.

 

▶22절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여기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①지금 바울이 오순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렇게 만드신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심령의 매임을 받아' 이 말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심령에 끌려서 따라갔다는 말입니다.
②성령이 가르쳐 주신 것은 '예루살렘에 가면 굉장히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엄청난 핍박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23절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거기에 가면 결박이 있고, 거기에 가면 환난이 있고, 죽음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설교를 하고 있는 바울이나 듣고 있는 성도들이나 다 같이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언제나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고 산다고 해도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 서로 헤어질 때, 슬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제 바울은 스스로 죽음을 향해서 최후의 발걸음을 내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확실한 믿음의 결단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일했는데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이는 심각한 일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그 결국에 '면류관이 아닌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일들을 낯설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참 예배자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스데반은 동족을 구원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순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그 결국에 '면류관이 아닌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죽음 뒤에는 저 영원한 천국의 부름의 상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천국, 계21-22장의 천국의 실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기업을 받아 누리려고 우리가 환란도 핍박도 감수하며 사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믿어지면 아멘!/

 

▶24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람이 무엇인가 목숨을 걸만한 일이 있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바울은 사명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할/
⑴우리는 예수님과 코드가 맞는 사람입니다. 노무현정권 때 '코드가 맞느니, 안 맞느니' 코드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코드가 같다는 말은 같은 정신에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노무현의 사람이니, 부시의 사람이니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예수님과 코드가 같다는 뜻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우리 모두는 예수의 제자라는 말입니다. 제자는 주님의 사상과 철학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이란 말은 '보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사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어 이 세상에 살도록 '보낸 자'들이란 뜻입니다.
요20:21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파송한 것처럼 자신도 성도들을 세상에 파송한다.'고 하십니다.
▶사명을 제대로 깨달은 사도 바울의 선언을 보자!
딤후4:7-8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면류관은 종류도 다양합니다. ⑴고전9:25절 '썩지 않는 면류관'이 있고, ⑵빌4:1절 '즐거운 면류관'이 있고, ⑶딤후4:8절 '의의 면류관'이 있고, ⑷벧전5:4절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 ⑸약1:12절 '생명의 면류관'이 있고, ⑹계4:4절 '금 면류관' 등이 있습니다.
⑵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은 본문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전도입니다.
▶사명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배이고 또 하나는 선교(전도)입니다. 또 사명 안에는 사역과 사명이 있는데, 사역은 공동체 안에서의 섬기는 삶입니다. '사명'은 '봉사'를 뜻하는 말로 곧 '수종든다.'는 말입니다. 안 믿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어려움 당한 이웃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아무런 사명을 감당한 게 아닙니다. 사명은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유언이며, 지상명령입니다. 마28: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가시기 전에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유언입니다. 목사나 선교사들에게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준 말씀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유언으로 주셨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특권입니다. 이 유언의 말씀은 안 믿는 이들에게는 없는 사명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셨습니다.
비록 무거운 책임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릴 사용하시겠다고 주신 엄청난 특권입니다. 사랑도 아무나 할 수 없는데, 사명은 더욱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만 이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⑶사명의 길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상급은 큽니다. /할/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도 이 사명을 감당하다가 쉬 낙심합니다. 중간에 주저앉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24:13절에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눅9:62절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사명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내 목표를 버리고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전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사는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는 그 상급도 큽니다. 마10:10절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은 삯, 보상을 받습니다.
딤전5:18절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일하는 사람은 일한 것만큼 보수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소는 일하게 하고, 빈둥빈둥 놀고 먹는 소는 잡아서 잔치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풍족한 양식을 주십니다(왕하4:8).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마6:33). ㈂이 땅에서 백 배의 축복을 받고 내세에도 영생을 얻게 됩니다(막10:29-30).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계2:10). ㈄큰 영광을 얻게 됩니다. 단12:3절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그렇습니다. 사명을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에 충성을 다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는 내 앞에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나는 결코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결단입니다.
여러분! 결정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나의 달려갈 길, 그것은 곧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인데, 이 복음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이제 바울이 심령의 매임을 받아 성령이 이끄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환란과 박해와 고통의 버림받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 때문에 생명을 거는 것도 절대로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사람이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돈에 목숨을 걸고, 명예와 권력에 목숨을 겁니다. 또 사랑 때문에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목숨을 건 자입니다.
믿는 사람들 각자에게 달려갈 길이 있습니다. 달려갈 길을 잘 달려가는 성도도 있고, 잘 달려가지 못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달려갈 길을 계속하여 달음박질하는 사람입니다.
빌3: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복음 전하는 것은 사명입니다. 사명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선배들은 독립운동을 할 때 목숨을 걸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복음의 사명이 있습니다. /할/
바울은 인생의 결산 때가 되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딤후4:7)라고 최후의 개가를 불렀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가지 목표 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고전10:31).
달리는 것은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땀이 있습니다. 숨가쁨이 있습니다.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골인 지점까지 달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신앙 결산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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