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강) 바울의 아덴 설교! (행 17:16-34)
행17장은 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 베뢰아 선교, 아덴 선교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5절까지는 데살로니가 선교와 베뢰아 선교에 대한 내용인데 핍박이 너무 심해서 그곳에서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13절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 집요하게 복음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열심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뒤를 쫓아 75Km나 되는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한때 바울이 예수쟁이들을 잡아죽이기 위하여 열심히 쫓아다녔는데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베뢰아에서는 거의 얼마 있지도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로 든든히 서갔고, 베뢰아 교회는 성도들이 신사적이어서 내용 있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11절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기서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의 신앙적인 특성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①신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칼빈'은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인보다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지녔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다른 주석가들은 신사적이란 말을 '더 정직하고 공평하고 정의롭고 진리에 대한 좋은 열심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좋은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좋은 성품은 선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는 기본적인 비료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말씀에 대하여 부정적이거나 도전적인 태도보다는 보다 긍적적으로 수용하는 마음으로 받아 드릴 때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아멘!/
②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드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송이 꿀보다 더 달게 여겼습니다. 또 굶주렸을 때 양식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영의 양식으로 먹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뢰아 사람들의 훌륭한 신앙적인 장점입니다.
③성경은 열심히 배우고 탐구해야 할 진리의 책입니다. 그래서 사34:16절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또 요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여기 '상고'는 '묵상'이란 말로 '되새김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을 통하여 예수를 바로 알고 바로 믿는 성도들이 신사적인 성도인줄 믿습니다. 이제 본문부터 아덴의 선교입니다. 아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테네입니다.
아덴은 아티카의 영웅 데세우스에 의해 건설되었고 아테네(Athene)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아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헬라의 눈',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 '모든 지혜의 본고장'으로 불리는 아덴은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 주전 4-5세기경 아덴의 조각, 문학, 수사학을 능가할 만한 문화는 역사상에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민주주의의 기초가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합니다. 주전 146년에 로마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로마인들은 아덴의 찬란한 과거 역사를 고려하여 아덴이 로마 제국 안에서 자유 동맹 도시로써 자신의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도록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덴은 찬란한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우상이 가득함으로 정신적인 면은 어두웠습니다. 네로 시대에 아덴 광장에 서 있는 공중 우상만 300개였고, 기타 신상은 3만여 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덴에서는 사람을 찾기보다 신을 찾기가 쉽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제목소개!▶
▶16절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아덴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 중의 하나로 헬라문화의 중심지입니다.
⑴정치의 중심지입니다. 당시의 아덴은 로마의 정복지였으나 아덴의 화려한 문화와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로마 당국은 아덴을 <자유 특구>로 특혜를 베풀어주어 민주주의가 꽃피웠던 도시였습니다.
⑵학문의 중심지입니다. 아덴을 일컬어 <헬라의 눈,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 모든 지혜의 본고장>이라고 극찬합니다. 아덴은 철학, 문화 예술의 중심지며, 서양문화 나아가서 세계문명의 발생지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고향이기도 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에피규리스, 스토아철학, 제노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⑶종교의 중심지입니다. 아덴은 한마디로 성전의 도시였습니다. 아덴에 자리 잡은 신상이 그 도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아덴에서는 사람 한 명 만나기보다 신 하나를 만나기가 더 쉬었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 문화의 첨단을 걷던 그 아덴에 바울이 복음을 들고 온 것입니다.
"저희를 기다리다가" 누구를 기다렸다는 말인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바울의 의분이 나옵니다. '마음이 분'했다고 했는데 왜 분이 났습니까?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의분을 일으킨 것입니다.
네로 황제시대는 무려 3만의 신상과 300개 이상의 공중신상이 있었다고 아까 말씀했지요? 이런 우상을 보고 분이 가득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분노를 가리켜 '사도적 분노, 거룩한 종교적 분노, 영의 분노'라고 합니다.
그가 분 냈다는 말은 '자극을 받다, 날카롭게 되다'라는 뜻으로 보통 분한 것이 아니라 격분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분을 내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1:19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또 엡4: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이렇게 말했던 사도 바울이 분을 낸 것입니다.
▶분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사로운 분'이 있습니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노하는 그런 분노를 말합니다. 이런 분노에 대하여 성경은 금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의분'이 있습니다. 어떤 불의와 죄악상을 볼 때, 의로운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본문의 사도바울의 분노가 바로 이런 의분입니다.
일본의 '내촌감상'은 '우상이 많은 곳에는 음란죄가 많다'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은 '서울 코리아'라는 발음이 '소돔 고모라'와 비슷한데 우상의 범람과 타락 양상도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최고의 철학의 도시에 와보니 온통 우상천지였습니다. '아 이렇게 인생들이 무지할 수 있고, 어두울 수 있는가?' 하고 분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은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야만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을 볼 때, '정말 바보 중에 바보가 철학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이란 지식을 사랑하고,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참 지혜는 자기를 아는 것이요,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세상을 바르게 아는 것,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자기를 바로 알고, 피조물을 바르게 알아야 인간의 실존을 알게 됩니다.
바울의 의분은 전도로 이어집니다. '아 저들이 예수님만 바로 안다면 생애가 달라질 것인데' 우리도 우상을 보면서, 무속 인을 보면서, 절간을 보면서 이런 의분을 가져야합니다. 이런 의분이 전도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믿/
▶17절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바울은 아덴이 전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아 이곳이야말로 복음이 필요한 곳이구나!'크게 깨닫고 회당에 들어가 날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오기까지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회당에 가서는 유대교인들과 개종한 사람들에게 구약을 근거로 설교를 했고, '저자'에서는 철학적인 의식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저자'는 일용품을 매매하는 시장을 말하는데 그곳<아골라>라는 지역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으로 유명한데 그곳에서 소크라테스가 강의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바로 철학 문화의 심장부인 <아골라>에서 정치연설이 아닌, 철학자의 사상 강연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그들과 변론을 했다고 했는데 바울도 철학이라면 일가견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복음적인 설교보다는 본때를 보여주자는 심정인지 철학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논쟁적인 설교, 변론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쟁도 변론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는 일방적인 통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다.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 간다. 믿지 않으면 당신들이 손해 본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크게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아덴은 실패작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후에 바울이 크게 깨닫고 고전2: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18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저자에서 바울이 철학자들과 변론을 합니다. 여기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는 사람이 만든 철학파 이름입니다.
①에비구레오 철학파가 주장하는 것은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고, 천국과 지옥은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땅에 사는 것으로 끝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라고 여기는 자들인데 이들이 바로 쾌락주의자입니다. 쾌락을 그들의 신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모르고 지내자는 주의요, 마음대로 놀자는 주의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이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죽음 뒤에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믿/
②스도이고<스토아파> 이들은 에비구레오와는 정반대의 사람들입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에비구레오 학파와는 달리 범신론자들입니다. 모든 것에는 신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위 앞에서도 절하고, 고목 나무 앞에서도 절합니다. 계속 절하면 결국 무엇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학파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학파로써 자기 자신을 제어하고 고통을 참아 가는 금욕주의자들입니다.
바울이 그들과 쟁론을 했다고 합니다. 앞에서 변론이 변하여 쟁론이 된 것입니다. 전도는 변론이나 쟁론으로는 안 됩니다. 변론에서 이기고, 쟁론에서 이겼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기분 나빠서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있는 예수님을 주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변화되었다. 이렇게 치료되었다'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할/
그들은 바울을 보고 '말쟁이'라고 했습니다. 말쟁이란 말은 '모이를 쪼아먹는 새'를 말합니다. 변론과 쟁론을 하다 보니 말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말쟁이'로 보았고, 또 하나는 '이방 신'을 전하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복음의 진수를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지혜이고,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사람을 보니 꼭 말쟁이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19-20절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저자 거리, 즉 시장 터에는 시끄러워서 안 되겠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들을 테니 그리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로 나왔습니다. 여기 '아레오바고'는 법정으로써 주로 종교와 교육,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했던 일종의 권력기구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재판도 하고, 명사들의 명언도 듣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곳에서 복음 전도의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확실히 철학적인 기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사상에 대하여 논쟁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니까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했다고 하니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더 자세히 들어보려고 바울을 '붙들어 가지고' 간 것입니다. 표면적으론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말로 보이지만 분위기 상 조롱 섞인 태도를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21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여기서 아덴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호기심이 많았고, 또 그것을 쉽게 버리는 경박함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다녔고, 또 찾았을 때 이미 식상해 버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아덴 사람들을 가리켜 '소위 새로운 것이라고 하면 가장 잘 속아넘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비난도 받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새롭게 받아 들였다가도 또 쉽게 내던져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22절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여기서부터 바울의 설교가 이어집니다. 바울이 이곳에 선 것은 죄인으로서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 선 곳이 아니고 철학을 강의하려고 선 것도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도자의 위대한 정신입니다. 바울의 복음의 일성은 '아덴 사람들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로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태초로부터 사람들은 신을 동경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문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고 한 말은 칭찬이 아니라 그들의 무지와 오만을 꾸짖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어리석은 우상 숭배를 지적한 말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이 온통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분을 냈습니다. 아덴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헛된 우상에게 낭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헛된 우상숭배를 지적한 것입니다.
저들은 세상 사물에 대해서는 높은 지식을 가졌으나 영적으로는 무지했습니다. 3만여 개의 신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하는 단(檀)까지 세워 혹시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신으로부터 저주가 올까봐 보호를 받기 위해 그들의 그릇된 종교심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에 대하여 깊이 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먼저 우상은 신(神)이 아니라 인간의 '수공'물입니다.
시115:4-7절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듣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런 우상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지도 못하고(삼상12:21), 인생에게 복을 주지도 못합니다(렘10:5).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그것을 섬기지 말도록 요구하셨고(출20:4-5), 더 나아가 다른 신들의 이름도 부르지 말며 입에서 들리게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23:13). 왜 그렇습니까?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시96:5절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할/
바울은 고전10:14절에서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금하고 계십니까?
⑴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18:21절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⑵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신11:28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⑶죄의 올무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시106:36절에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⑷부끄러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사45:16절에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⑸소산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11:16-17절에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⑹죄가 후손에까지 미치기 때문입니다. 출20:5절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⑺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전6:9-10절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죄를 우상 숭배하는 자 외에 9가지'를 말하고 있고 갈5:20-21절에서도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⑻유황불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계21: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사실 우리들도 전에 예수 밖에 있을 때에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 다녔습니다(고전12:2). 우리는 벧전4:3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탐심도 우상 숭배'(골3:5)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 한구석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악한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겨야 복을 받습니다(수24:14). /아멘!/
▶23절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무슨 말인가 하면 곳곳에 보니 우상이 있었는데 유독 한 곳에는 우상이 놓여 있지 않는 빈 단이 있었습니다. 그 밑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보고 '야! 됐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목을 붙이고는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했는데 내가 그 신에 대하여 가르쳐 주겠노라!'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아직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바로 하나님임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치적으로 일찍부터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고 위대한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아덴이 정말로 알아야 할 하나님은 그들의 우상 때문에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살다가 정말 답답한 일을 만나게 되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도 단을 만들어서 제사를 드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섬기지만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가 되신 것을 알고 믿는 자들입니다. /믿/
▶24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창조주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천지의 주재' 즉, '천지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이시기 때문에 오늘도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바람이 부는 것도, 태풍이 오는 것도, 비가 오는 것도 다 하나님이 다스림 속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이 다스립니다.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까지도 다스리십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적은 일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은 전각에 계시지 않는다고 한 이유는 그들이 곳곳에 우상의 전각을 지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편만하십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봉헌할 때도 이와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왕상8:27절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한 말로 이 세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온 세상에 편만해 계심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계십니다. /믿/
솔로몬은 계속해서 왕상8:28-30절에서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25절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왜? 세상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상 앞에 차려 놓은 재물을 바라보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달라는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히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쉽게 표현하면 돼지 머리 같은 것을 먹고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자이십니다(25절).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생명과 호흡을 주시므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사 만물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창2:7).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생명은 창조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임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6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여기서 바울은 인간은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한 혈통이요, 한 사람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연령과 연한을 정해놓으시고 그 예정하신 기한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각 민족들이 거하는 영토와 국가들의 국경을 정해주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아덴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티카'본토의 흙에서 생겨났으므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을 고쳐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혈통은 하나 오직 아담의 후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연대를 정하시며'는 하나님께서 모든 국가들의 흥망의 연대를 작정하시는 것을 뜻하며(시115:14, 단2:21),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는 말은 각 민족의 국경을 정하여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결코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과 공간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27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또 거주의 한계를 정하시고 나라를 주셨는데 그런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셨구나, 나를 다스리고 계시는구나!'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릅니까? 아담이 범죄 하여 영혼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더 쉬운 해석은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롬1: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아멘!/
큰 바위를 보았거든 '이렇게 큰 바위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하나님이야말로 위대하시구나' 알아야 되겠는데 그 바위를 보고 겁이 나서 절을 해대니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어주신 것은 그 창조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벵겔(Bengel)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지만 패역한 이성에는 멀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시145:18절에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28절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롱하며 있느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 호흡을 하고 숨을 쉬고, 식사를 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 또 일어나는 것들 다 하나님의 힘을 입고하는 것입니다.
더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한 말은 아덴 출신의 시인인 '아라투스'가 인간을 '신의 소생'이라고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인을 들어서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9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이렇게 피조된 인간이 금이나 은이나 돌로 만든 우상을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게 섬기면 되겠느냐는 책망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여기서부터 바울은 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 '알지 못하던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곧 이방 족속이 구원의 도리를 알지 못하던 때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유보하신 채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는 책망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복음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울려 펴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은 그 정체가 드러났고, 아울러 '알지 못하는 시대'도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하셨으니' 세례 요한의 복음의 일성이 '회개하라!'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일성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여기서 정하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날 라디오, TV, 컴퓨터, 또는 문서 전도를 통하여 세계 도처에 복음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대가 이미 말세가 왔다는 증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24: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바울의 선교 결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있음을 말합니다.
▶32-34절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들의 태도가 나옵니다.
①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사람이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났다고? 웃겨' 조롱합니다.
②이해를 못했으니 다음 번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들겠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듣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시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③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은 자들도 있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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