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강) 바울의 고린도 선교! (행 18:1-17)
바울은 신구약 선경에 나오는 2,993명의 인물들 중에 가장 크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은 그런 사람입니다. 학자들의 평에 '기독교 역사이래 그와 비길 전도자가 없고, 그의 비길 신학자가 없고, 그의 비길 목회자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바울이라면 '하는 일마다 성공하고 그는 아마 천사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바울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자신의 성격이 너무 급해서 성경에 보면 여러 사람들과 다툼을 일으키고 싸웠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만 보아도 바울은 베드로와도 다투고 바나바와 다투고 누가와 다투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의 성격을 죽이려고 몹시 고민을 하면서 고백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외쳤습니다. 바울도 한 때는 사람 관계나 목회에서도 실패한때가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상고한 17장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교회를 세우려고 무척이나 노력을 하고 수고를 했으나 끝내 세우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게 된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목회에 실패한 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테네에서는 실패를 했지만 그 후 고린도에 와서 목회를 했는데 그 고린도에서는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할/
실패했다고 좌절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신앙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삶의 모든 환경을 이기고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본문 18장은 바울사도의 제2차 선교여행과 3차 선교여행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본문을 보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이 겐그리아→에베소→ 가이사랴→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에 돌아옴으로서 제 2차 전도여행을 마치는 장면과(18-22) 다시 갈라디아→브르기아 등지에서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는 장면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은 ◀바울의 고린도 선교!▶입니다.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1절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이후에' 아덴에서의 선교실패를 맛본 후입니다. 성경은 바울이 아덴에서 핍박을 받았다든지 또는 다른 곳에서처럼 쫓겨났다는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덴에서 선교의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을 전하지 않고 무엇인가 이론적으로, 논쟁적으로 자신의 철학적인 지식과 논리적인 말장난을 함으로서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는 교회를 설립하지 못하고 고린도로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이후에'란 말은 아덴에서 실패한 후에 라는 의미가 됩니다.
고전 2장을 보면 바울은 아덴에서 실패를 뼈저리게 느끼고는 '다시는 말장난이나 말재주를 부리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 자랑하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선교는 실패 뒤에 새롭게 각오를 다짐하고 들어간 도성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의 일이든 세상일이든 하다가도 더러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를 성공의 계기로 잘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실패는 고린도에서 성공을 거두는 밑거름으로 삼았습니다.
'아덴을 떠나' 실패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침체되기 쉽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부족했던 점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아덴보다 더 급한 곳이 있구나 고린도로 가라'는 감동을 받고 고린도로 온 것입니다.
왜 고린도가 더 급했습니까? 죄가 더 많은 곳이요, 더 악한 곳이기 때문에 빨리 보내신 것 같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아가야의 수도로써 국제 항구가 있는 헬라의 남북을 관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요, 인구가 많이 살고 있었으며 돈이 많이 돌다보니까 그 도시가 타락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음란의 신상 '비너스'신상이 있었는데 그 신에게 바쳐진 1,000명의 여인들이 진짜 몸을 파는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행위를 종교적 예배순서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1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런 말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고린도 사람 닮았다'는 말이 있었답니다. 즉 타락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또한 당시에 '아무나 함부로 고린도를 여행하지 말라'는 말도 유행했다고 합니다. 고린도는 로마의 집정관인 무미우스가 BC 146년에 점령하여 파괴해버린 폐허의 도시를 BC 46년에 '쥴리어스' 시저가 다시 복원하여 신형도시로 만들었고 그의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고린도는 전 세계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그리스의 중요한 국제적 상업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을 선교기지로 삼고자 들어간 것입니다.
▶2절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하나님은 바울을 위해 고린도에 벌써 큰 인물들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이들은 로마에서 살다가 유대인 추방령을 받아 고린도에 왔는데 하나님은 바울이 올 시점에 맞추어 그들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들은 평신도로써 주의 종을 잘 받들고 하나님의 교회를 일으켜 세운 대들보 같은 일꾼들이었습니다.
모든 목사님들의 기도의 제목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일꾼들을 보내달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이 있어야 부흥이 옵니다.
당시 로마에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너무나 상술이 좋아 돈을 다 끌어 모읍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상술은 못 따라 갑니다. 당시 글라디오 황제가 보니 잘못하다가는 유대인들에게 경제적으로 노예가 될 것 같아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자는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이 때 이 부부가 고린도에 오게 된 것입니다.
▶잠깐 이 두 부부를 조명해 보자!
①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 와서 선한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장막을 만들어 파는 직업이었습니다. 바울도 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직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의식주생활과 건강 및 정신 생활에 도움이 되는 직업을 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굴라 부부는 사람들의 주택생활에 도움을 주는 선한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그 직업 때문에 저들은 사도 바울을 만날 수도 있었고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불행이 오히려 저들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②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제자훈련과 전도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 다니면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고 다음에는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나중에는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16:18절 "바울이 고린도에서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아굴라 부부는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로 갈 때는 바울이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 두며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신학자 아볼로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는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③아굴라 부부는 재물과 집을 내 놓고 목을 내 놓으면서까지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진정한 헌신에는 재물과 몸의 헌신이 따릅니다. 저들의 직업은 목적이 아니라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의 선교사역을 돕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저들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제정적으로 도왔고 그리고 자기들의 집을 교회처소로 제공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굴라 부부는 자기 집을 교회처소를 제공했습니다. 고전16:19절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자기 집을 교회처소로 제공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국라에게 문안하라 또 저희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롬16:3,5). 얼마나 영광스러운 기록입니까? 이런 사람은 상급이 큽니다. 계22: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할/
▶3절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업이 같다'는 말은 직업이 같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직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천막쟁이였습니다. 당시 주거 문화가 천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하면 건축업자였습니다. 아굴라도 천막장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끼리끼리 통한다고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바울이 천막쟁이가 되었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대 최고의 교법사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천한 직업을 가졌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들의 관습을 이해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반드시 세 가지를 물려줍니다. 그것은 학문, 즉 지식과 유산과 한가지의 기술을 전해준다고 합니다.
랍비들의 말에 따르면 '그의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아버지는 아들을 도둑놈이 되라고 가르치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울타리가 잘 된 포도원을 가진 사람과 같다'는 말이 있었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학문의 시대가 아니라 라이센스의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잠깐 아굴라 부부가 바울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①18절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과 함께 수리아로 떠났습니다. 선교의 동역 자가 된 것입니다.
②롬16:3-4절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을 위해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③전 재산을 교회에 바쳤습니다. 고전16:19절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4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행하던 철학적 논리를 버리고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강론은 강해 설교를 의미하는 말로 성경을 풀어서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면, 애정을 가지고 가르친 것입니다. 목사가 애정을 가지고 권면하면 아멘하고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유 없이 시험에 빠진 자가 있습니다. 자신만 손해입니다.
▶5절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드디어 실라와 디모데가 베뢰아에서 바울에게로 왔습니다. 이제 바울은 아주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굴라부부와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했으므로 선교 단이 활력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합심하여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랬더니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하였으므로 그 말씀의 능력이 충만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눅5:5절에서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해서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는 고백이 말씀에 붙잡힌 삶이라고 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 말씀에 붙잡힌 것입니다.
말씀에 붙잡혀 말씀대로 걸어가면 실패하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말씀 때문에 갈 곳도 못 가고 살아야 하며 힘이 들어도 해야 되고 십자가의 길도 걸어가야 합니다.
바울의 복음의 확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로 '선지자, 제사장, 왕의 3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4:12절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으로 인류를 구원할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생명을 걸고 전한 이유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담대히 5천명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근거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밝히 증거 한다'는 말은 결정적인 선포요 단언을 의미합니다. 법정 용어로써 '들은 것, 본 것'을 사실대로 확신 속에서 담대하게 분명히 증거 하는 것을 뜻합니다.
▶6절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여기서도 대적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 자는 이방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입니다. '훼방'은 '중상하다, 모독하다'란 뜻으로 바울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선포하자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이라고 하면서 바울의 복음전도를 방해한 것입니다.
바울이 '옷을 찢었다'는 말은 그들의 정죄에 대한 죄책을 떨어버리는 유대인들의 관습적 표현으로써 이제는 그들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옥에 가든, 말든,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으므로 그 피 값이 유대인에게로 돌아가고 바울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선교 정책이 바꿔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이 선교 원리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부터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마10:14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예수님의 이 말을 심판 날의 증거가 되기 위함이요, 또 그곳에 미련을 두지 말고 돌아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7절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디스 유스도'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을 공경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비방하고 훼방하자 마침 유스도 집이 회당 옆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회 장소를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유스도는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하여 자신의 집을 고린도의 선교 센터로 내어놓았으며 후에는 그의 집이 고린도 교회의 최초 집회장소가 되어 크게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8절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드디어 고린도에 복음의 핵폭탄이 터졌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한 회당장이 예수를 믿고 개종하였습니다. 회당장만 믿은 것이 아니라 온 집안 식구가 믿었고, 또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지금이니까 별다른 사건이 아니지 당시 회당장이 예수 믿고 보따리를 쌌다는 것은 김일성이가 죽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인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 사회에서는 큰 파문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회당장의 결단이 부럽습니다. 회당장의 감투를 내어버리고 또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도 감수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단과 용기입니다.
당시 세례식을 바울이 직접 하지 않고 실라와 디모데가 맡아서 했습니다. 지금도 큰 교회는 당회장이 세례를 안주고 교구장이나 부목사가 줍니다. 그런데 고전1:14절에 보면 여기 회당장 '그리스보'를 바울이 직접 세례를 주었습니다.
바울이 직접 세례를 준 사람은 몇 명 안 되는데 그 중에 그리스보가 끼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 회당장이 유대사회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리스보의 개종으로 고린도 선교에 새로운 활력소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 '수다한 고린도 사람'이란 대부분이 헬라사람과 로마사람과 또 다른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문법상 현재진행형입니다. 계속 세례 받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믿음은 들음에서 일어났습니다. 듣고 믿었다는 말은 듣는 중에 믿음이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한 사건입니다.
롬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9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사도바울이 밤늦은 시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환상이 11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행16:9절에서 '마게도냐의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는데 여기서도 환상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의 음성은 '두려워하지 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 같은 능력의 종도 고린도 선교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동안에 얼마나 큰 환란과 역경을 당했습니까? 바울일행은 복음의 초기 선교사역지인 안디옥에서도 박해를 받고 쫓겨났습니다. 저들은 이고니온에서는 돌려 때려죽이려는 무리들을 피하여 도망친 일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다음 도시인 루스드라에서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고도 선동하는 무리들 때문에 돌에 맞아 기절했던 일도 있습니다. 또한 저들은 유럽의 첫 성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준 일 때문에 죽도록 얻어맞고 쇠고랑을 차고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인간은 불사신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결국 인간의 연약한 몸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저들의 가슴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깊은 연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도 결국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직접 고백한 말이 고전2:3절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처음에 그의 심정을 나중에 술회한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렇게 약해지고 두려워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첫째, 아덴에서 바울의 전도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7장에서 사도바울은 아덴에서 자신의 학문과 철학을 다 동원하여 전도했습니다.그런데 바울의 유식한 말을 듣고 예수 믿게 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도에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앞서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말로 설득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인본주의입니다. 기도하면서 다만 성령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오직 복음만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택한 백성을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 중 가장 성과가 없었던 곳이 아덴입니다. 그래서 그는 낙심했습니다.
둘째, 고린도에서 전도하기가 아덴에서보다 더 어렵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화가 발달하고 상업도 발달했지만 죄악이 관영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국제적인 항구도시가 다 그러하듯이 온갖 비행, 타락이 만연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 신전은 고린도의 부패와 타락상을 보여주는 온상이 되었습니다. 신전에 천 여명의 여인들이 있어서 성적으로 극도로 문란해졌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말은 '매우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전도가 두려웠습니다.
셋째,바울의 형편이 너무 곤고했습니다.
함께 동행했던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아 있어서 바울 혼자였습니다. 믿음의 동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진 돈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힘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들을 그냥 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저들에게 친히 나타나 용기와 격려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 힘을 얻어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와 함께 해 주시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겠다는 최고의 격려와 용기를 자극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 잘 믿는 사람도 때로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목사도 때로는 약하고 두렵고 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은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알고 계시며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바울을 찾아와 격려해 주신 것처럼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상황 속에 오셔서 격려해 주시고 용기를 분명히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그의 백성이 망하도록 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고후4:8-9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주님은 낙심하며 떠는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잠잠하지 말라!' 계속해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행동지침을 내리신 것입니다.
▶10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더 구체적인 주님의 말씀입니다.
①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생명의 주님이 함께 해 주시겠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우리 주님이 부활 승천하실 때 지상명령을 내리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이 말씀을 바울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하셨던 주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라! 안전보장의 약속입니다. 지금 고린도 한 회당장이 개종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별의별 공갈, 협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너를 해할 자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③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말씀은 고린도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많이 있다는 예고입니다. 고린도 전도의 열매를 알려주는 즐거운 소식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서울 장안에도 이 화양동에도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11절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바울은 선교지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 동안이나 머물면서 교회를 아주 크게 세웠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바울은 줄기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친 것입니다.
▶12절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여기서 또 바울의 핍박이 시작됩니다. 아가야 총독이 새로 부임해 왔는데 그가 '갈리오'입니다. 아가야란 고린도를 둘러싸고 있는 넓은 지역을 말합니다. 마게도냐란 곳은 빌립보, 데살로니가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한 주처럼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가야 총독이 고린도에 살고 있었는데 이 고린도가 아가야의 수도인 것입니다. 이곳에 갈릴리 총독이 새로 부임해 오자 유대인들이 또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선교를 봉쇄하고 새로운 총독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계략을 꾸몄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총독이 바뀌는 상황을 틈 타 바울을 고소한 것은 매우 교묘한 수법입니다.
▶13절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내용은 율법을 어기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불법종교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로마법상 로마정부로부터 공인되지 않은 종교를 전하는 것은 불법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당국으로부터 승인된 공인 종교였습니다. 따라서 유대교는 자유로운 예배행위를 허용 받았고, 나아가 로마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자신들과는 달리 공인되지 않은 불법 종교를 로마의 법을 어기면서 전하고 있다고 고소한 것입니다.
▶14절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입을 열고자 하였으나 총독 갈리오가 더 분명하게 못을 박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총독의 말은 '만약 저 사람이 돈을 떼어먹었다든지 또는 풍속에 어긋나는 아주 나쁜 범죄를 행했다면 행정관으로써 마땅히 이 사람을 재판하여 감옥에 넣든지 벌금을 매기든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5절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만일 문제와 언어와 명칭과'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하는 그 말 차이나 너희들의 종교풍속에 관한 것이라면 내가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스스로가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손을 들어준 것이고, 유대인들은 김이 빠진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이것은 내가 재판할 성질이 아니라 이 문제는 너희들의 신앙문제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16절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그래서 재판소에서 다 쫓아내 버렸습니다. 위대한 승리입니다.
▶17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저들의 고소가 총독에게 기각당하고 재판자리에서 쫓겨나는 창피를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저들의 지도자인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그 책임을 물어 폭력을 가하면서 화풀이를 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행동에 총독인 갈리오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스데네'는 전회당장 그리스보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자가 되자 그의 후임으로 온 회당장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장도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고전1:1절에 나오는 소스데네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사실 이 날 회당장 소스데네가 당한 폭행은 바울이 당할 폭행을 대신한 셈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한 고난과 관계가 됩니다. 마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애매한 고난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축복으로 바꿔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소스데네는 후에 바울이 친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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