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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강)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선교! (행 17:1-15)

by 【고동엽】 2022. 3. 11.

(제49강)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선교! (행 17:1-15)

 

본문은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중 데살로니가 전도와 베뢰아 전도와 아덴 지방을 전도하는 내용입니다. 1-9절은 데살로니가 전도, 10-15절은 베뢰아 전도, 16-34절은 아덴 전도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바울이 교회를 세우고 선교에 성공했는데 아덴에서는 그만 교회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아덴은 철학적인 사람이 많이 모인 철학의 도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곳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보다는 철학적인 설교를 시도했다가 선교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야심적으로 전도하고 싶었던 곳이 두 곳이었습니다. 바로 아테네와 로마였습니다. 아테네는 문화의 중심지였고, 로마는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아덴에서는 선교의 열매를 맺지 못했으나 후에 로마는 죄수의 몸으로 갔지만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오늘은 1-15절까지의 ◀데살로니가 교회와 베뢰아 선교!▶라는 제목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는 그런 교회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고 성경은 간단히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은 160Km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더구나 빌립보에서 당한 고난과 능욕의 상처는 아직 아물 여유가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는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자신들의 의지로 사역을 감당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훗날 데살로니가 교회에 당시 복음 전한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살전2:2절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이며 당시 아가야 지방과 쌍벽을 이루는 최대의 도시로 육로와 해로가 잘 발달된 곳입니다. 그곳에는 국제 항구가 있었고,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인구는 약 20만 명이었고,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곳을 발칸 반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고 바울은 빌립보에서 그런 고초를 당하고서도 그 데살로니가로 결사적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살전2:2).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는 유럽에서 빌립보에 이어 두 번째로 교회가 세워진 지역이 되었습니다.
'키케르'는 그곳 도시를 '우리 영토의 심장'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읍장이 다스리는 지방자치제 행정체제를 가진 자유도시로 바울이 이 도시 회당에서 3주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복음관은 롬1:16절에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고 말한 것처럼 데살로니가에서도 먼저 자기의 동족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복음의 핵심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심판'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리면 기독교는 파괴되어버린다'고 '존 스토트'는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처음부터 말씀 위에 확고히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는 믿음이 역사 합니다.
바울의 설교는 주로 '선포와 증거'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선포의 권위를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1절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저희가' 바울과 실라를 말합니다. 빌립보에 있는 관원들이 감옥에서 나온 바울에게 다른 곳으로 가도록 통사정을 했습니다.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소동하니 떠나 달라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항상 소요사태에 민감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교회가 상당한 부흥을 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머무르면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당시 마게도냐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바울일행은 로마제국이 세계정복을 위하여 닦아 놓은 길들이 요긴하게 천국으로 가는 대로로 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암비볼리를 거쳐 아볼로니아를 지났다고 했는데 그곳은 잘 닦여진 도로로 '말을 타고 가지 않았겠는가?' 추측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두 도시를 그냥 거쳐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도시에 복음을 들고 구원을 얻어야 할 영혼들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도처에서 죽어 가는 영혼의 신음소리를 마을마다 가정마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냥 지나갔을까요? 그것은 바울의 선교전략 때문입니다. 암비볼리는 빌립보에서 가까운 도시이고 아볼로니아는 데살로니가에서 가까운 도시입니다.
그러니까 암비볼리는 빌립보교회에서 선교하라고 한 것이고, 아볼로니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선교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도시를 지나 당시 마게도냐의 수도이자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상업의 중심지인 데살로니가에 온 것입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곳에는 큰 회당이 있었습니다.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다섯 집만 모이면 회당을 지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은 당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많았고, 메시야를 전하면 누구보다도 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회당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하나밖에 없었고,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예언서를 읽고 율법을 읽었습니다.
예언서를 읽으면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신다고 했는데 그 메시아가 언제 올까?' 늘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자기나라를 세계 일등국가로 만들어서 세상 나라를 다스리며 왕 노릇 한다하여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또 율법서 중 신명기를 가장 많이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강론합니다.

 

▶2-3절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여기서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을 계속하는 것일까요? 왜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자처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 있는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은 자기 동족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가까이 있는 가족부터 복음을 증거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정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방해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고 했습니다.
동족에게 먼저 복음을 증거하고 싶은 것이 사도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롬1:16)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먼저 구원받아 복음을 이루어야 한다는 그의 심정을 토로한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롬9:1-3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자기 민족과 형제가 구원받는 일이라면 자기는 저주를 받아 구원에서 떨어져도 좋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구원에서 떨어지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로 인하여 더 많은 형제들이 구원받게 된다면 자신은 저주받아도 좋을 정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바울의 이런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아멘!/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바울의 신앙생활은 '규례대로'입니다. 이 말은 '규칙대로 습관대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기도도 규칙적으로 했습니다(3, 6, 9시기도).
우리도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고 오후 예배, 수요 예배, 어째든 큰 예배에 모두 참석하는 것이 규칙적이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식사시간도 잘 지켜야 합니다. 한꺼번에 잘 먹는다고 해서 건강해지지는 않습니다. 평소 규칙적으로 잘 먹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도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자기의 규례대로'란 말은 ①바울이 새로운 도시에서 회당을 찾아 복음 전하는 일을 습관처럼 여기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②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겠다는 그의 선교전략을 따른 것입니다. 회당에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서 바울이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여기 '세 안식일'이란, 세 주간동안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구약성경을 가지고 강론한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이사야를 강론하지 않았겠는가?'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머물렀다고 한 증거를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안식일이면 회당에 가서 성경을 강론했고, 평일에는 거리 골목마다 누비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설교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예수님이 바로 너희가 구약에서 기다리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프랑스의 한 영웅이 있었답니다. 어느 날 그가 한 목사를 찾아가서 '선생님 내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를 만들어 보고 싶은데 조언을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기를 '예 한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장군이 직접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에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 보십시오! 그러면 위대한 교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머리를 긁으면서 돌아갔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도 모방하거나 흉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대단히 간단하고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영혼들이 그 말씀을 옥토에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4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생각 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구약 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유대인들은 안 믿고 헬라인들이 더 믿더라는 것입니다.
'경건한 헬라인'이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여기 '경건'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경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하여 지키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경건은 바른 신앙인의 덕목입니다.
경건은 세 가지 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고, 그 다음 이웃과의 경건이고, 그 다음은 네 자신과의 경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할/
'귀부인들'은 당시 그 도시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아내로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사실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교만하기 쉽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귀부인들은 바울의 말씀을 듣고는 '아! 구약이 말씀한 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구나!' 깨닫고 복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할 때 사람의 계산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전하기만하면 하나님은 예비 된 성도들의 심령을 열어서 역사 하십니다. /믿/

 

▶5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항상 은혜가 있는 곳에는 사탄의 방해가 꼭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열매가 맺어지고 있는데 또 다시 유대인들이 치밀하게 방해공작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증거되고 기독교가 부흥되자 시기가 났습니다. 1차전도 여행 때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도 유대인들이 선동하더니 여기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했는데' 소동케 한 주동자는 유대인들이었고, 어떤 괴악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질이 나쁜 불량배들을 동원한 것입니다.
오늘 유대인들의 소행을 보십시오. 경건한 헬라인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구원의 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했습니다. 시기심이 무섭게 그들을 마비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당시 도시 중심부에는 대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건달과 불량배 등이 할 일없이 빈둥거리고 다녔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이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노라 자부하는 유대주의자들이 깡패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시가와 독선이 얼마나 사람을 잔인하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시기의 노예가 될 때, 영적으로 무지해지고 마음이 강퍅해지고 복음을 대적해서 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계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중을 선동하여 혼란에 빠뜨리게 합니다.
우리 성림교회도 송재식과 동네사람들의 민원과 고발과 핍박과 폭력을 엄청 당하고 무너지고 경매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탄의 방법은 동일합니다.
다음 야손의 집을 공격합니다. 야손의 집은 사도들이 묵고 있는 집입니다. 빌립보에서는 루디아를 붙이시더니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을 하나님이 붙여주셨습니다. 후에 야손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야손이란 '여호수아' 또한 '예수'에 대한 헬라어의 번역이름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람을 유대인이 아니면 이방사람으로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롬16:21절을 보면 바울의 친척 야손이 나오는데 이 사람과 동일한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무튼 야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을 덮쳤는데 바울과 실라는 다른 곳에 전도하러 가고 없었습니다.

 

▶6-7절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야손과 몇 형제들을 읍장들 앞에 끌고 갔습니다. '끌고'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잔인하게 질질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여기 '읍장들'이라고 했는데 읍장이 하나가 아니고 당시 5-6명으로서 로마 영토 내에 자치 도시를 책임지는 행정 장관으로서 재판까지도 관할하였습니다.

 

▶그들을 끌고 가서 어떤 죄목을 붙였습니까?
⑴'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 여기서 천하라는 말은 로마제국 전부를 가리키는 말로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⑵'야손이 들었다.'는 말은 바울과 실라를 손님으로 영접했다는 뜻으로 야손이 로마제국을 어지럽게 하는 범죄자들과 하나가 되어 그 집에서 작당하고 범죄 했다는 의미입니다.
⑶'가이사의 명을 거역'한 자들입니다. 로마의 황제의 법령을 거역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⑷'다른 임금 곧 예수'를 섬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황제가 곧 임금이요, 왕인데 가이사 외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법령에 엄청난 범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사로이 로마의 통치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전 인류, 전 세계를 다스리는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이십니다. /믿/
우리는 여기서 바울을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라는 별명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사람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곳마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라는 별명이 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있습니까?
①부지런한 사람만이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암비볼리로 아볼로니아로 데살로니가로 부지런히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았습니다.
부지런한 근거는 ⑴그의 사명감입니다. 사명감이 넘치는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움직여야 하고 가야만 합니다. ⑵그의 용기입니다. 사명감이 있어도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핍박을 예상하고 갔습니다. ⑶그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확신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아멘!/
②오직 성경의 사람이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오직 예수(요5:39)입니다. 성경만 강론했더니 큰 무리가 따랐고, 귀부인까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③오직 기도의 사람이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기도 처를 찾았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8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당시 로마는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였지만 피정복 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세금 내는 것과 로마 정권에 도전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로마 정권에 도전하는 자들이 고소되었으니 데살로니가 행정관리들의 집이 난리가 났습니다. 본 절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이사에게 반역했다는 소리가 읍장들에게 들리니 소동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란 자가 가이사 외에 다른 임금을 섬기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건 대역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 역적을 야손 집에서 보호해 주었다고 하니 난리가 난 것입니다.

 

▶9절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保)를 받고 놓으니라"
8절에서는 살벌했는데 9절에서는 쉽게 보석금만 내고 풀려 나왔습니다. 여기 '보를 받고 놓으니라'는 말은 보석금을 받고 풀어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바울과 실라를 절대로 만나지도 말고, 도시 내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살전2:18절에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했으나 사단이 막음으로 해서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야손과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을 염려한 바울의 배려' 때문이라고 합니다.
후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로만 생각하면 '기도가 나오고, 감사가 넘쳤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믿음으로 똘똘 뭉쳐 어려운 환난과 핍박을 소망의 인내로 참고 견디며 믿는 자의 본을 보이며 교회를 섬기니까 그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전역에 퍼짐으로 너무도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라고 바울이 소개합니다.
이제 10-15절은 베뢰아 전도입니다.

 

▶10절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당시 데살로니가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 야손과 그 형제들이 밤에 몰래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냅니다. 만약 그들이 데살로니가에 머물러 있다가 발각되면 재산 몰수는 물론 생명까지도 위협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전도방법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마10:23절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물론 예수님께서 피하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서 피하라는 말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일 태세가 된 곳에 가서 씨를 뿌리라는 선교정책의 뜻이 담긴 말씀입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지점에 있는 곳입니다.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 도시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한 도시였습니다. 여기서는 바울은 회당에 갔습니다. 그의 선교전략대로 간 것입니다.

 

▶11절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래서 세상은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항상 어두움만 있으면 못삽니다. 어두움이 있으면 밝은 대낮도 옵니다. 빌립보에서는 고통스러운 감옥의 밤도 있었지만 기쁨과 승리의 아침도 있었습니다. 간수장과 온 가족이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데살로니가의 박해도 있었지만 본문의 베뢰아의 기쁨도 주었습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순종 뒤에 기쁨이 있고, 역경과 고난 뒤에 찬란한 승리의 아침이 있음을 절대 기억하시고 끝까지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실 데살로니가 사람 중에도 신사적인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3주간만 복음을 전했는데도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더 신사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신사적이란 말은 폐쇄적인 태도가 아니라 개방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치 못한 것은 그들의 편견 때문입니다. 편견은 마음을 닫아줍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은 주님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노크하십니다. 계3: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열린 상태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날마다 상고하여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자세가 분명합니다.
①말씀을 잘 받았습니다. 베뢰아 성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날마다 섭취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읽는 일은 말씀을 받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와의 접촉이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초자연적 도움을 받게 됩니다. 연약할 때는 힘을 얻고, 병들 때에는 치유를 받습니다. 문제로 고민할 때에는 해결의 지혜를 얻고, 가난으로 신음할 때에는 물질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는 재미, 예배시간을 통하여 말씀을 듣는 재미는 축복의 통로요 지름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베뢰아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절대로 건성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말씀은 듣지 아니하고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진실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에게 바로 구원의 말씀이 됩니다. 말씀은 말씀 밭에 잘 듣고, 받아들이는 자세는 신앙의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롬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멘!/
②베뢰아 사람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여기 '날마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은 베뢰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절대적인 필수조건입니다.
원래 '상고'란 의미는 '묵상'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송이 꿀같이 단 마음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야로 묵상했습니다(시1:2). 히브리어에서 '묵상'이란 '되새김질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깊이 수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마음 밭을 옥토처럼 갈아엎고 말씀을 받아야 열매를 맺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고 교훈 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 가슴속에는 더 큰 믿음이 생겨납니다. 저들은 말씀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말씀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따지기 위해서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가지기 위해, 영혼을 살찌우기 위해, 진리를 보다 더 잘 알고 받아들이기 위해 말씀을 듣고 연구한 것입니다. 주님은 마4: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날마다' 신앙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말씀대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고,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했습니다(마7:24-27).
약1:22절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말씀의 뜻을 알게 되고, 말씀의 맛도 알게 되고, 말씀의 축복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게 됩니다.
요한은 종말을 사는 지혜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계1:3).

▶12절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분명히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상고하기 시작하면 믿음이 커집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그렇게 하여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에 나온 사람들 중에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은 유대인들 중에도 믿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니' 당시 사회의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귀부인들만 믿었는데 베뢰아는 남자들도 적지 않게 예수 그리영접했습니다.
롬1: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3절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호사다마란 말 그대로 사탄이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까지 깡패들을 보내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꼭 은혜가 많을 때에 사단도 크게 역사 합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면 사탄도 강하게 역사를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사탄도 열심히 역사를 합니다. '가만있으면 사탄은 너는 내 편이구나'하고 가만둡니다.

 

▶14절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무슨 말인가? 베뢰아 사람들이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도 바울을 너무나도 아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이제 복음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이곳에 핍박이 너무 심하니 다른 곳으로 피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십시오' 다른 곳으로 가게 했습니다.
바다로 갔다고 했는데 배를 타고 떠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까지 베뢰아 교회가 성장이 미약하므로 계속 남아서 돌보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보다는 위험이 적었습니다.

 

▶15절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바울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어려운 곳으로 도전해갔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받으니 베뢰아로, 베뢰아에서 핍박을 받으니 아덴으로, 이 아덴이 아태네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들이고, 철학의 도시이기 때문에 따지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바울은 아덴에 이르자 안내 해 준 성도들에게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보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그만큼 아덴을 전략적으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의 도움을 요구한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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