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강)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 (행 18:18-28)
지난 시간에 말씀으로 받은 1-17절까지는 바울의 고린도 선교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
1절에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에덴 선교는 큰 빛을 보지 못하고 고린도에 건너온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는 죄악의 도성으로 '아무나 함부로 고린도를 여행하지 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오염된 도시였습니다. 그런 오염된 도시에 바울이 생명의 복음을 들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 도시에서 바울은 신앙의 위대한 동역자를 만나게 되는데 2절을 보면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입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살다가 당시 '글라우디오'란 로마의 황제가 유대인들의 추방 영을 내림으로 그들은 로마에서 쫓겨 와 고린도에 온 것입니다.
그들의 직업이 바울과 같은 가죽업자였습니다. 가죽으로 텐트를 짓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는데 8절에 보면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회당장인 '그리스보'라는 사람이 온 가족과 함께 주님 앞으로 돌아왔고,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은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회당장이 기독교로 돌아왔다는 것은 유대인 사회에 큰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그로 인하여 12절에 보면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 '갈리오'란 아가야 총독은 로마가 자랑하는 '세네카'(스토아 철학자로서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음)의 형님으로 덕망을 갖춘 지도자였습니다. 세네카는 '우리 형님처럼 착한 사람은 없다!'고 자랑했다는 바로 그 '갈리오'입니다.
그는 로마 원로원의 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품도 있고 존경도 받는 학자가 주후 51년 6월에 아가야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유태인들은 속으로 기회가 왔다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철석같이 유태인들이 믿었던 갈리오는 이 고소 사건을 대하자 정확히 그 사건의 본질을 파악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바울이 끌려왔는데 당시 재판관인 갈리오 총독은 그를 판결하기를 '너희들이 종교문제 가지고 나에게 판결하라는 것은 웃기는 소리다. 네가 보니 바울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고 무죄를 선고하고 바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리스보' 다음으로 회당장이 된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에 앉히고서는 폭력을 휘두르며 난리 법석을 떨었습니다.
바울대신 십자가를 진 소스데네는 고전1:1절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되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의 선교를 마치고 2차 선교여행을 마무리짓는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오늘 읽은 본문 18-22절까지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에베소에서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교회를 거쳐 다시 파송 받은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부터 또 다시 바울의 제3차 선교 여행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입니다.
▶18절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하다가 드디어 그곳을 떠납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을 살펴보면 바울은 항상 자신에게 닥친 여러 위험한 상황들 속에서 머물렀던 곳에서 떠나곤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혼자 떠난 것이 아니고 고린도에서 만났던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와 함께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잠깐 아굴라 부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아굴라의 출생지인 '본도'는 소아시아 북부 지역에 있었습니다. 아굴라는 로마식 이름인데 로마의 '기사나 호민관'들 중에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굴라는 유대인 노예였다가 후에 로마에서 자유민이 되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브리스가'와 결혼을 했습니다. '브리스길라'는 '브리스가'의 애칭입니다.
'롱게네커'라는 사람에 의하면, 아굴라에게는 기술이 있었고 브리스길라에게는 돈과 배경이 있었으며, 이들은 공동으로 천막 제조와 가죽 수공 상사(商社)를 소유했고, 또 이 상사의 지점이 로마와 고린도, 에베소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온 것은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가장 헌신적인 바울의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롬16:3-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나니' 얼마나 아름다운 헌신입니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헌신, 바로 그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을 만나고 나서 새로운 삶의 깃발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일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하여 돈을 벌어야 하는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한 평생을 바울을 도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모든 삶에 포커스를 그곳에 초점을 두고 움직이게 됩니다.
바울은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텐트를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복음만 전하면 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선교 후원자가 발을 벗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 만큼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도바울의 사역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①함께 하는 부부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언제나 함께 하는 부부였습니다. 성경에서 최고 이상적인 믿음의 부부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부부애가 좋은 사람을 금실(琴瑟)이 좋다고 말합니다. 금(琴)은 거문고를 말합니다. 그리고 슬(霧)은 비파를 말합니다.
거문고와 비파가 잘 어울려 연주되면 최상의 소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 조화는 신비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잘 어울리면 거문고와 비파가 어울리는 것과 같은 신비한소리가 나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에 '아내와 잘 합하는 것은 금슬을 고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에서 금슬 좋은 부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런 면에서 금슬 좋은 부부였습니다.
⑴건강이 같았습니다. 아무리 함께 활동하고 싶어도 한 사람이 병들어 누워 있거나 사별하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부부가 끝까지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여러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건강하여 끝까지 함께 하는 행복한 부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⑵뜻이 같았습니다. 부부가 천막을 깁는 직업을 가진 이였습니다. 서로 힘을 합하여 열심히 같은 일에 종사하면서 같이 살았습니다.
여러분 부부가 피차에 서로가 양보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뜻을 같이하는 행복한 부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⑶믿음이 같았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믿음으로 같이 하지 못하면 가정 생활은 물론 교회생활에 어려움이 오게 됩니다. 부부는 믿음이 같아야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믿음의 깊이와 높이가 같았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믿음의 부부였습니다.
여러분, 건강이 같고 뜻이 같고 믿음으로도 같이하는 행복한 부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교회와 함께 하는 부부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주 이사를 다녔습니다. 첫 번째 이사는 유다에서 로마로 했습니다. 이 부부가 유다에서 로마로 이사한 이유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수 있겠으나 교회 때문에 이사한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핍박이 심하여 교회에 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가 있는 로마로 아사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교회에 집착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 이사는 행18:1절에 보면 로마에서 고린도로 했습니다. 로마에서 글라우디오가 교회를 무섭게 핍박하게 되니까 다시 고런도로 이사한 것입니다. 그는 오직 교회가 생명이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신앙부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사는 고전16:19절에 보면 바울을 따라가는 이사였습니다. 18절에서 그들이 바울을 만난 후 바울을 따라 다녔습니다. 복음 때문에 사도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다가 개척된 교회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늘 함께 하는 부부였고, 특별히 교회와 함께 하는 부부였습니다. 오직 교회만 생각하는 부부였습니다.
여러분 브르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이 언제나 말없이 교회와 함께 하는 부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사도와 함께 하는 부부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만난 후부터 그들은 한번도 헤어지지 안고 평생동지로 살았습니다. 에베소로 로마로 선교지로 장소는 수없이 바뀌었어도 사람은 단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올을 따라 다닌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⑴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접하든 돕는 방법으로 하든 하나님의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일에 부부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⑵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2:29절 "이러므로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생명을 함께 한 신앙의 위대한 동지였습니다. 기독교 초기 찬란한 교회 운동의 역사 중에 이들 부부의 이름이 6번이나 소개됩니다. 그런데 3번은 남편이 먼저 소개되고 3번은 부인이 먼저 소개됩니다.
그들은 신앙의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부부간에 함께 신앙생활을 보조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또 그들은 전도자와 함께 하는 신앙의 위대한 동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2차 선교 원정의 귀로에 이러한 신앙의 동지 아굴라와 브리스가를 에베소에 함께 동행케 하였습니다. 18절 하반절에 보면 '바울이 겐그리아에서 서원의 머리를 깍았다'고 했습니다.
겐그리아는 고린도에서 20Km 동편에 있는 항구도시로써 이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롬16:1절에 보면 여집사 뵈뵈가 봉사하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서원이 있어 머리를 깎았습니다. 여기 서원은 나실인의 서원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특별한 감사나 장래 어떤 일에 간절한 소원을 아뢸 때 나실인의 서원을 하게 됩니다.
▶나실인의 서원이란 일종의 성별된 구별 약속인데, ①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음과 평생 동안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삼손과 같은 서원이 있고, 시체나 부정한 것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②일정한 기간에 머리를 깍지 않고 길게 길렀다가 그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깎아 그 머리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표로 삼습니다.
아마 바울이 이런 서약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삭발은 비장한 결심을 보여준 것이고 타인이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 여행을 무사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고, 3차 전도여행 중에도 함께 해 달라고 서원을 했습니다. 서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보다 더 순종하고 열심히 전도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그의 생명을 복음을 위해 온전히 주 앞에 내어놓은 사람입니다. 행20:24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런 믿음이 귀한 믿음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에스더의 믿음이요,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입니다. /할/
▶19절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에베소는 겐그리아에서 2-3일 배를 타고 가야하는 거리입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울은 아굴라 부부를 머물게 하고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이유는 바울이 잠시 동안 속히 예루살렘과 안디옥을 다녀올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 4대 도성은 '로마, 안렉산드리아, 안디옥, 에베소'입니다. 에베소는 헬라문화가 많이 침투한 도시입니다. 바울의 전도순서를 보면 1차는 아시아, 2차는 유럽, 3차 전도는 에베소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로마전도를 합니다.
바울의 에베소 전도는 제 3차 여행 중에 3년 동안 머무르면서 계시록에 이른바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골로새교회와 기타 여러 교회를 설립했으며 이곳에서 고린도전후서를 집필했습니다.
에베소는 참으로 바울에게 감격어린 도시입니다. 그는 이 아시아 지역을 전도하기를 얼마나 소원했습니까?(16:6) 그러나 성령이 그 계획을 막고 유럽으로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상륙하자마자 유럽인들의 회당을 찾아 그곳에 모인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바울이 찾던 장소는 유대인의 회당입니다. 그 만큼 바울은 동족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에서 죽음에 이르는 핍박을 받기가 일수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있으면서 전도한 것은 그만큼 이 도시가 전도전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에베소는 로마 관할 지역의 아시아 지역의 수도이며 상업도시였습니다. 지자체가 잘 되어 있는 도시로 원로원과 시의회를 갖춘 자유 헬라도시였습니다. 한 때 에베소는 아시아의 보고로 불릴 정도로 번창했던 곳으로 미신 문화가 판을 쳤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소위 '에베소 주문'을 몸에 거닐고 다니면 '만사형통'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도성이기에 바울은 그곳에 교회를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울이 제 2차 여행 중 잠시 들러 3차 여행의 기초적 작업을 한 것으로 아굴라 부부를 그곳에 머물게 한 것도 이곳에 공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짧은 그의 전도 사역 중에 놀라운 은혜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20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할' 정도였습니다. 매우 전망이 밝고, 그곳 사람들은 복음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것 같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잠깐 머물다가 떠나게 되는데 그럼에도 작별인사 중에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하면서 선교의 미련을 남깁니다.
▶21절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바울 자신도 어느 정도 에베소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여기서 잠깐 바울 사도의 전도의 특징을 알아보자! 첫째, 교회가 세워지면 즉시 또 다른 선교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에베소로 떠납나다.
둘째, 선교 기간이 끝나면 반드시 파송교회(안디옥)로 돌아왔습니다. 선교란 파송 기관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과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교회가 선교 없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선교는 교회를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셋째, 먼저 선교했던 선교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앞서 선교한 선교지를 돌아보면서 그들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와 제자들과 양무리들을 굳게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전도 방법입니다.
▶22절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이 인공 항구를 만들어 놓은 곳으로 여기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얼마 되지 않으며 이 항구가 예루살렘의 항구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여기 '올라가'라는 말은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본 구절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없기 때문에 바울이 가이사랴에 있는 성도들의 안부를 물어보려고 그 곳에 도착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이사랴에 온 것은 예루살렘 모교회로 방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서둘러서 올라간 이유가 무엇일까?
①21-22사이에 서방 사본과 비잔틴 사본에는 '내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절기를 지켜야 하리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유월절 내지는 오순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서둘러 간 것 같습니다.
②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의 성과를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함으로써 모 교회와 이방 교회간에 유대는 공고히 하고자 했으며
③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해 성전에서 그의 머리카락을 번제로 드리고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간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 방문 목적이 끝나자 그의 선교전도기지인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안디옥은 예루살렘 북쪽 약 480Km 지점에 있습니다. 이로써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끝났습니다. 드디어 23절부터 제3차 전도여행을 시작합니다.
▶23절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얼마 있다가'라 함은 2차 선교 후 돌아온 안디옥에서의 체류기간이 짧았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학자는 여름부터 봄까지를 추정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두 차례의 선교여행 동안 드러났던 문제점에 대하여 연구하고 기도했으며 3차 여행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떠나' 혼자 단독을 의미합니다. 1, 2차 여행 때는 바나바와 실라와 동행했는데 3차는 혼자 떠난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땅'은 그의 고향 다소를 거쳐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등지를 의미합니다.
이 지역들은 1차, 2차 선교 원정 시에 복음을 가동해 놓은 곳으로 교회들이 잘 성장하고 있는 곳입니다.
'내 땅을 다니며' 골고루 바쁘게 두루 다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차례로' 다녔다 함은 '계속'하여 쉴 사이 없이 활동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제자들을 굳게 하니라' '튼튼하게 하다, 힘있게 만들다'는 뜻으로 교회들마다 성도들마다 바르게 양육시킴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⑴주님의 교회를 굳게 했습니다(15:1). ⑵제자들은 굳게 했고(18:22), ⑶형제들은 굳게 했습니다(15:32). 이것은 바른 양육을 의미하는 말로 교육, 훈련을 계속해서 반복했음을 의미합니다.
▶24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거룩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선교 여행 중에 있는 바울의 문제를 감간 떠나 본문에서는 에베소에 있는 '아볼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유명한 아볼로 목사가 나옵니다. 그는 알렉산드라아의 태생으로 유대인입니다. 이곳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로서 상업도시,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또한 웅변술이 다양한 도시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들을 이곳에 이주 시켰는데 유대인들이 크게 번성하여 당시 인구의 ⅓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 태어난 아볼로의 신분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떠난 직후부터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가 에베소에 와서 사실 상 바울의 선교 활동에 예비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볼로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①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유명한 기독교의 5개 도성을 소개하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수리아의 안디옥, 이달리야의 로마, 소아시아의 현재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드리아란 알렉산더 대왕이 애굽을 정복한 후에 애굽 북쪽 지중해 연안에 건설한 도시로서 유대인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②학문이 많은 사람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입니다. 여기 '학문이 많고'라 함은 '능변의 사람, 사상의 사람, 교훈의 사람'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식도 풍부했지만 말에 능한 사람입니다. 지적으로 능변가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그 도시에는 라틴, 헬라, 인도, 애굽의 서적 70만 권을 소장한 대 도서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교육 도시입니다. 이곳에 구약 성경 70인 역이 보관되어 있으며 현대판 히브리어 성경이 번역된 곳이고 세계 최초의 신학교가 생긴 곳이며 그 유명한 오리겐 교부가 활동했던 곳입니다.
③성경에 능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능한 사람'이란 말은 성경에 능력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성경 해석에 전문적인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클레멘트와 오리겐 등 신학자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신학교가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학문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능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무시하고 신앙을 무시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 지식이 무지하면 신앙적, 신학적 혼돈이 옵니다. 아볼로는 신앙도 좋고 성경에도 능한 목사였습니다. 후에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볼로 파가 생겨날 만큼 아볼로가 유명한 사람입니다.
▶25절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아볼로는 종교적인 열심도 대단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열심히 좌우합니다. 모이는데 열심히 있어야 하고, 기도하는 일에, 봉사하는 일에, 전도하는 일에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믿/
여기 '주의 도를 배웠다'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복적인 학습을 의미합니다. 모든 교육은 반복입니다. 이것을 복습교육이라고 합니다. 운동선수에 비교하면 반복, 또 반복 훈련과 같습니다. 성경 공부도 반복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읽고 또 읽고, 듣고 또 듣고'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목사님 설교는 한 소리를 또 하고 또 해서 그 소리가 그 소리'라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목사 설교가 성경 66권의 말씀을 하다보면 그 소리가 그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정상적인 설교입니다. 특별한 설교를 한다고 하는 목사가 더 위험합니다. 이단들의 설교가 대부분 엉뚱한 이야기로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정말 조심해야 됩니다. /아멘!/
여기 또 '열심으로'라 함은 '끓어오르는 열정을 가지고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강의도 열정으로 하는 강의는 머릿속에 잘 들어옵니다. 그런데 열정도 없고 성의도 없고 준비도 없는 그런 강의는 사람들을 실망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설교도 열심히 준비하고 기도해서 전하는 말씀은 큰 은혜가 되고 역사 하는 힘이 나타나게 됩니다.
'자세히 가르치다'라는 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세밀히 가르침을 뜻합니다. 가르치는 것도 준비가 있어야 됩니다. 내 속에 뭐가 있어야 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내 속에 예수가 있어야 예수를 줄 수가 있고, 불이 있어야 불을 줄 수 있고, 사랑이 있어야 사랑을 줄 수가 있습니다.
세상 지식은 배워야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께 받아야 됩니다. 은혜를 받아야 되고, 불을 받아야 되고 능력도 받아야 능력 있는 성도로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믿/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아볼로 목사님에게도 정말 복음의 핵심을 모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소리냐면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더라.'는 말씀입니다.
아볼로는 아마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①주님의 십자가의 도는 배웠으나 믿지는 않았습니다.
②예수에 관한 지식은 알았으나 구주로써의 예수를 몰랐습니다. 세상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믿는 것이 힘이 됩니다. /믿/ 주 예수를 믿으라고 했지, 주 예수를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는 것 보다 믿는 것이 더 능력입니다.
③세례요한의 물세례를 알았으나 예수님의 성령세례와 불 세례는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는 불행하게도 성령이전의 사람이었고 거듭나지 못한 학자였습니다. 지금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아볼로와 같은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믿음과 지식을 겸비한 자로써 성령의 권능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런 능력을 받았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면 사도바울처럼 능력자가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주님을 만나십시다. /아멘!/
▶26절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아볼로가 회당에서 많은 학식과 웅변술로 담대히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회중은 반응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설교했을 때에는 유대인들이 큰 감동을 받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회당장도 돌아왔습니다. 빌립보 간수장도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말에는 능통한 것 같은데 성령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성령을 드러내야 회개가 터지고 하나님께 두 손을 번쩍 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아볼로가 성경을 가르쳤는데 그곳에 누가 있었습니까? 브리스길라 부부가 함께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아마도 그의 부인의 믿음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브리스가 부부가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그들은 누구의 설교를 들었습니까?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아볼로를 자기 집에 모셔다가 잘 대접하고는 바울에게서 배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와 부활의 진리를 더 자세하게 풀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브리스길라 부부의 인격을 다시 봅니다. 그들은 아볼로를 비난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헐뜯지 않았으며 그가 다만 '요한의 세례에 대한 지식만 지녔다'고 해서 무시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은 바울 사도 밑에서 배운 영적인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아볼로에게 전하고 방법론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자의 용기도 대단하지만 그 가르침에 따랐던 아볼로의 겸손도 용기가 있습니다. 사실 아볼로는 구약 성경의 대학자인데 장막 짓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나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27절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아볼로가 생각하기를 이곳 에베소에서는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맡기고 아가야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이 아가야 지방이 고린도를 싸고 있는 큰 도시였습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가겠다고 하니까 브리스길라 부부가 그곳 형제들에게 편지로 소개하여 그를 잘 영접하게 하였습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아볼로는 이곳에서는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곳 형제들이 아볼로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 큰 기둥 같은 종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고전3:4-8절에서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 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할/
▶28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아볼로 설교는 이젠 완전 복음의 핵심만 전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이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에 메시아가 온다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꼼짝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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