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강)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1-10)
본문은 바울이 3차전도 여행 중 열정적으로 일했던 에베소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차전도 여행을 마감하고 돌아오는 길에 에베소를 잠시 들렸는데 거기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떠나 있었습니다(18:21).
그는 다시 에베소에 돌아와 온 열정을 전도에 쏟았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무려 3년 동안 있었는데 바울이 3차 전도여행에서 에베소 사역이 전성기였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서쪽 '카이스터' 계속의 입구에 자리 잡은 항구 도시로서 교통과 무역의 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를 한때 '아시아의 보고'로 불릴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그런 에베소에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는데 이 아데미 여신상은 음란 신으로 고급 매춘부들이 사제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에베소에 아데미 숭배가 도덕적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되었는데, 그곳 타락의 도성에 바울이 복음의 폭탄을 가지고 들어간 것입니다.
본문은 아볼로가 고린도 지방으로 떠나간 후 바울이 다시 에베소에 왔습니다. 바울은 아볼로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을 만나 큰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점검해 봤습니다.
먼저 2절에 보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의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아니오? 성령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단지 요한의 세례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이 없이 무엇을 믿었단 말인가?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고 가르치고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니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가리켜 학자들은 '에베소의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에베소교회의 성령의 강림사건은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신앙적 사건의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남겨 놓으신 마지막 명령 가운데 하나가 '성령을 받으라!'였습니다.
오늘 제목처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중요하고도 심각한 질문이 됩니다.
바울은 롬8:9절에서 말하기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보다 더 심각합니다. 주님은 한밤중에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를 향하여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멸망이냐?'를 결정짓는 심각한 질문입니다. ◀설교제목!▶
▶1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8:2절을 보면 아볼로가 아가야로 갔다고 했는데 본문에서는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가야 지방에 있는 고린도 성에 간 것입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갈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곳 믿음의 형제들에게 편지로 소개하여 그를 잘 영접하도록 했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에 가서 성경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구약성경에서 뽑아 바르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굴복 당했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교회에서 '성경으로 증거하고, 성경으로 체계를 세우는 귀한 일'을 했습니다.
본문은 아볼로가 고린도교회로 갔을 때 바울이 윗 지방을 거처 에베소에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윗 지방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의미하는데 그곳을 윗 지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곳이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고, 에베소는 해상지역 즉 낮은 지역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제자들이 누구인가? 성경에서는 제자란 대게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제자는 스승의 철학과 비전을 품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자들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세례요한의 제자로 보는 학자도 있고, 아볼로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기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로 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여기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삶의 철학과 사상을 따라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2절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그들에게 단도직입적 적으로 묻기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란 그들이 '믿고 난 후에 성령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느냐?'라는 질문입니다. '너희가 믿고 난 후에'가 더 정확한 말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이 질문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만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물음은 오늘 우리를 향하여 똑같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믿/
▶왜 이런 질문을 했는가? 성령을 받아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⑴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요16:13), ⑵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고전12:3), ⑶성령은 우리를 끝까지 보호해 주십니다(요14:16-18). 그래서 바울은 엡4: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그들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던진 질문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바울을 실망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사실 이들이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것은 성령의 은혜 아니고는 고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은 제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믿/
다만 그들이 성령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미 성령도 모시고 있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전혀 경험한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지는 자기 자신이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령에 부들임 바 되었다는 것은 자기가 봉사해 봄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생활을 한번 정검 해 보세요, 기도 생활, 봉사 생활, 헌신 생활, 이 모든 신앙 행위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믿/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야 두말할 것이 없이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여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또다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아멘!/
성령은 우리에게 어머니와 같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신앙 안에서 나아서 길러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신앙을 자라게 하고, 깨닫게 하고, 믿게 하고, 감화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또 성령은 파워, 능력입니다. 그래서 약한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철저하게 성령을 의지하고 살면 성령 님은 절대로 우리를 배신하거나 배반하지 않습니다. 굳센 힘, 강한 힘을 주셔서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래 전에 아프리카 개척자 중에 영국에 유명한 탐험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로드'라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리빙스턴'입니다. 로드는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황금전쟁을 일으켜서 수십만 명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을 노예로 잡아왔고 수많은 황금과 아프리카의 진기한 보물들을 다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게 되자 국가에서는 그에게 최고의 훈장을 달아주었고, 그는 명예를 얻고, 인기를 얻고, 부귀영화를 얻어서 모든 신문, 모든 사람들이 로드, 로드, 로드만 외쳤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람 리빙스턴은 성령의 감동으로 아프리카에 있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듣고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병든 사람들을 돌봐 주면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 예수를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정부의 노예정책을 반대했고, 침략정책도 반대했고,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또한 식민지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런 그를 영국정부가 좋게 봐줄 이가 없습니다.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리빙스턴은 나쁜 놈, 죽일 놈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사실 국민들은 자초지종을 알 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은 정부가 말하는 데로 리빙스턴을 욕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로드는 간 곳이 없고, 리빙스턴은 영국의 국립묘지, 그러니까 왕들만 묻히고 왕비만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리빙스턴의 묘가 아프리카에 있었는데 영국의 국민들이 뒤늦게 그를 국립묘지에 모시게 되었지만 그의 심장만은 아프리카에 그대로 묻고 왔답니다. 왜냐하면 그가 생전에 자기의 심장은 여기에 묻어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어느 왕의 무덤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리빙스턴의 무덤 앞에서 사진을 찍고 그 묘비에 입을 맞추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세계가 알아주는 위대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로드는 지금 무덤도 없고, 자손도 없고 흔적도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인도 받은 삶은 영원히 남습니다. /할/
다시 본문의 배경을 보자! 바울은 아마도 아볼로 밑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제자들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7절에 보면 그 당시 바울이 만난 제자들이 12명이 됩니다.
그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의 대답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하여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입니다. 오늘날도 믿음 안에서 성령에 대하여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제안하고 무시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
▶본문의 바울의 질문인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란 이 질문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성령에 대한 세 가지의 명령을 기억나게 해 줍니다.
①요20:22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그들은 실의와 허탈과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부활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다른 말씀은 하시지 않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의 능력만이 저들의 삶을 치료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
예수님은 저들에게 '왜 겁을 먹고 숨어 있느냐? 왜 벌벌 떨고 있느냐? 개척교회를 세우고 전도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마디는 '성령을 받아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만이 실의에 빠진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할/
오늘날도 우리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거듭 났는지,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 전연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신앙의 기쁨도 천국의 의미도 아무것도 발견치 못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무거운 부담이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령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아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번째 부탁한 것은 '성령을 받으라'였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이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②그 다음 두 번째 부탁의 말씀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행1:8)'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이 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주를 위해서 일할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구약선지자 스가랴의 입을 통해 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성령의 능력이 나에게 강하게 임하기만 하면 그 능력 안에서 무엇이든지 우리는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으며, 바울은 빌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능력을 가지고 산을 옮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③그 다음 예수님이 성령에 대한 세 번째 명령은 '성령을 받되 시시하게 받지 말고 충만하게 받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엡5: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할/
본문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너희들이 예수 믿은 후 지금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느냐?'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성령 충만한 것과 술 취한 것과 서로 대조시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술 취하게 되면 소극적인 사람도 적극적으로 변합니다. 대담해지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이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소극적인 사람도 적극적인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믿/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쁨이 샘솟습니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게 되고 그 사랑을 담대히 전하게 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도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으나 그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서는 자기를 죽이려고 서슬이 시퍼런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도 '우리가 너희 말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듣는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술 취한 사람들을 보면 말이 많아집니다. 술기운에 가슴속에 넣어 두었던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쏟아 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예수 구원, 예수 천당, 예수 사랑, 예수 권능,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또 말하게 됩니다. /아멘!/ 우리가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또 술 취한 사람들을 보면 세상 근심 걱정 모두 잃어버리고 즐거워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세상 근심 걱정 모두 잃어버리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의 충만함과 술 취함의 현상은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술 취하는 것은 타락한 육의 본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은 새 영을 받은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할/
술 취한 것은 순간이지만 성령의 충만함은 영원한 것입니다. 술 취한 것은 술이 깨면 가슴속에 더 큰 후회와 죄책감을 가져다주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더욱 놀라운 기쁨과 감격으로 변화를 가져옵니다.
술 취하게 하는 것은 인간을 망하게 하고 타락하게 하지만, 그러나 성령의 충만한 것은 우리에게 더 놀라고 풍성한 생명과 삶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을 오늘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바울의 이 질문은 오늘 우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 알에 우리 모두 '아멘!'하고 받아 드림으로 그 믿음을 통하여 성령의 불이 떨어지는 현장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이번에는 '우리가 왜 성령을 받아야만 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①성령을 받아야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 하시면서 제일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멘'하였다면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주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나 '아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고전12:3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처럼 성령은 우리의 마음속에 계셔서 내 자신이 이미 천국 백성으로 구별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살고 있음을 증거 해 주시고 입으로 시인케 하여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곳에서든지 자신의 신분이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담대히 시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분명한 태도인 것입니다.
②성령을 받아야 새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바로 죄로 인하여 죽은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양을 하고 반성을 하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사람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살았던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했고 그분이 나를 지으신 나의 아버지 되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성령도 우리 안에 계셔서 하나님께 복종케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게 하고 천국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대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사람이 갖는 변화입니다.
우리가 육체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일만 생기지만 우리가 성령에 이끌려 순종하여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하여져서 날마다 새롭게, 그리고 구원의 기쁨을 안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할/
③성령을 받아야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행7장에 초대 집사였던 스데반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폭도들에게 둘러싸여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하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하늘 문이 열리며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주셔서 죄와 사망과 병마의 권세를 이기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삶 가운데 다가오는 수많은 위기와 위험을 막아주시고 또한 견디게 하여 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실패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이 주를 믿고 성령을 받았다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늘 기도로 무장하여 권능을 받고 모든 다가오는 악한 세력을 물리쳐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④성령을 받아야 교회가 부흥이 됩니다. 행2장에 오순절 날 주의 제자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에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마다 마음이 찔려 회개하고 그때에 믿는 자의 수가 3천이나 더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교회가 놀랍게 성장해서 세계복음화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강건해질 때 교회가 활기가 차고 주의 일을 해도 피곤치 않고 또 전도의 문이 열려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사를 통해서 보면 성령의 역사가 강하고 성도가 성령을 사모하고 은혜를 받을 때 교회가 부흥되고 발전되었지만 교회가 의식화되고 형식적인 순서에 의해서 예배가 진행될 때 교회가 생기를 잃고 쇠퇴하는 어려움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먼저 권능을 받은 투철한 믿음의 사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그 교회가 살고 부흥 발전할 수 있습니다. /믿/
▶3절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의 두 번째 질문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의 대답은 '요한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요한의 세례란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푼 물세례(요3:23)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드리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의 의미는 크게 죄의 씻음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이전의 죄를 씻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하나님 앞에서 공증하고 서약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이 물 세례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한 형식적 행위라면, 성령의 불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간에 내적 연합을 강조하는 실제적인 세례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요한의 물세례 밖에 모르는 제자들은 이제 신앙의 초보단계에 있는 성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절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은 요한에 대해 잘 못 이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요한의 세례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을 올바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요한의 베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로써 마음의 변화와 근본적 전환을 위해 베푼 회개의 세례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요단강 가에서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선포했던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3년 동안 사역하시다가 인간들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 승천하신 분인데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신 분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세례 요한이 증거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자세하게 부각시켜 가르쳐 준 것입니다.
▶5절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자세하게 바울의 말씀을 들었던 12제자들이 큰 은혜를 받고 이제 그들은 요한의 세례보다는 성령 세례를 대망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그들이 바울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6-7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세례를 받고 난 후 현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했습니다. 여기서 안수기도를 한 것은 그들의 믿음을 도와주는 행위입니다.
안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명 자에게 주는 안수가 있습니다. 직분을 수행케 하기 위해 임명되는 안수입니다. 즉 목사, 장로, 안수 집사를 안수하여 세우게 됩니다. 또 하나는 축복 안수가 있습니다. 권사 취임 때 안수해 주는 것은 축복 안수입니다. 축복 안수는 그 생명의 축복을 기원하는 안수인데, 직분 안수는 한 번의 안수로 평생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러나 축복 안수는 수시로 받습니다.
축복 안수를 받을 때 중요한 것은 주는 주의 종도 믿음으로 주는 것이고, 받는 사람도 믿음으로 받아 드릴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행8:17절에서도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의 명칭 몇 가지를 알아봅니다.
⑴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보혜사이십니다(요14:16-17), '파라클레토스'로 '중보자, 위로자, 변호자, 대언자'라는 말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파라칼레오'라는 '가까이서 부르다' 즉 '초청하다, 기원하다, 탄원, 충고, 위로에 의해, 청하다, 요구하다, 욕망 하다, 부탁하다, 기도하다'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⑵성령은 진리의 영(고전2:10-12)으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협조자가 되셔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요14:26, 15:26, 16:12), 장래 일을 알려주시어(요16:13), 결국 빛으로 나가게 합니다(요3:21).
⑶뿐만 아니라 하늘에 속한 은사를 받게 하여 영원한 약속의 은사를 체험하게도 합니다(행19:6, 고전12:6-11).
⑷그리고 더욱더 특별한 일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여 새사람'을 만들어 줍니다(요3:6-7).
▶성령이 임 할 때 몇 가지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①방언의 은사가 터졌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방언은 세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⑴배우지 않은 다른 나라말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다른 나라 방언으로 말했습니다(행2:6-12).
⑵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있습니다. 고전14: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방언 기도가 이래서 좋습니다.
⑶새 방언이 있습니다. 막16: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성경 말씀을 새롭게 깨달아 듣는 언어입니다.
②예언의 은사도 터졌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구약시대에 계시가 끝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는 예언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가 다 끝난 지금 이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믿을 수 있는 자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입니다. 성경66권의 말씀은 모두 다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지키면 모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③열 두 사람이 성령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여기 열 두 일꾼,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을 가리켜서 학자들은 '에베소의 오순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8-10절까지 바울의 말씀의 능력이 나옵니다.
▶8절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바울이 에베소에 석 달 동안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신앙의 근거지입니다. 그들은 곳곳에서 흩어져 살았으므로 예루살렘 성전까지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회당을 세우고 그곳에서 신앙의 행위를 배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운동을 가리킵니다.
▶9절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바울이 석 달 동안 에베소의 회당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결과 그들의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제자들이 생겼고, 또 다른 무리는 강력하게 반대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사도 바울 처럼 성령이 충만하고 능력이 충만한 하나님의 종이 그리고 말씀으로 무장한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도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은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볼 때 우리들이 전도했을 때 안 믿는다고 해도 또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믿는 제자들만 따로 세워서 두란노 서원에서 강 훈련을 시켰습니다. 여기 두란노 서원은 웅변가가 철학을 강의하는 강단으로 세운 곳입니다. 바울이 이 강단을 빌려서 성경 말씀을 강론한 것입니다. 그것도 날마다 강론했다고 합니다. 계속 가르치고 끈질기게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이런 배짱이 우리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10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이고 능력입니다. 해할 자가 없습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선택해 놓은 백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그 백성들을 찾는 일입니다.
여기 '듣더라'가 중요합니다. 믿음은 들어야 생기기 때문입니다(롬10:17). 여기서 바울이 2년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세운 교회가 '골로세 교회,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졌고, 소아시아 지역의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의 중심지는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서울 장안에도 주의 백성이 많습니다. 그 백성들을 찾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믿/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5강)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 (행 19:23-41) (0) | 2022.03.11 |
---|---|
(제54강) 사도 바울의 능력! (행 19:11-22) (0) | 2022.03.11 |
(제52강)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 (행 18:18-28) (0) | 2022.03.11 |
(제51강) 바울의 고린도 선교! (행 18:1-17) (0) | 2022.03.11 |
(제50강) 바울의 아덴 설교! (행 17:16-34) (0) | 2022.03.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