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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강) 바울 사도의 일사각오! (행 21:1-14)

by 【고동엽】 2022. 3. 11.

(제59강) 바울 사도의 일사각오! (행 21:1-14)

 

주나라에 어진 신하가 있었습니다. 나라가 부강해 지고 태평성대의 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라가 이쯤 부유하여졌으면 나무젓가락 대신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이 말을 들을 신하들은 하나같이 말했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독 그 중에 신하 한 명만은 말없이 어전을 물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다른 신하들이 그 집을 방문하여 말했습니다. '상아 젓가락 하나 가지고 무얼 그리 상심하시오. 일어나 나라 일에나 전념하십시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얼른 보면 상아 젓가락 하나 같습니다. 그러나 그 후가 문제입니다. 상아 젓가락을 해드리면 얼마 후 은그릇 금 그릇을 찾을 것입니다. 그것을 해드리고 나면 산해진미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은 자개 상, 금 자개 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 후에 아방궁, 대궐을 요구할 것입니다. 백성들의 세금은 늘어 날 것이고, 국력이 약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적국이 쳐들어오면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상아 젓가락 속에는 나라의 운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첫 출발이 중요합니다. 이명박 정부를 위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행21-28장까지는 새로운 주제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20장까지의 내용은 사도바울이 1, 2, 3차 전도여행에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21장부터는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것도 급히 서둘러 올라가는데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을 맞이하기 위함입니다. 또 예루살렘교회가 가뭄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는데 구제헌금을 빨리 전해주기 위함이요, 더 큰 이유는 이제 로마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장부터는 바울이 겪은 핍박과 환난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울의 가는 길이 평탄하지 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중간 중간에 예언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계속 권고합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큰 어려움이 있으니 올라가지 마십시오! 이번에 올라가면 틀림없이 잡혀갈지 모릅니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보통 사람이라면 '이때는 피하는 것이 현명하겠다.'하고 올라가지 않았을 것인데 바울은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해서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만 높아진다면 감옥에 가도 생명의 위협이 와도 그 길은 택하겠다는 것이 바울의 일사각오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제목은 ◀사도 바울의 일사각오!▶입니다.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6절까지는 밀레도에서 두로까지, 7-14절은 두로에서 가이사랴까지, 15-16절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행로가 전개되는데 오늘은 14절까지만 끊겠습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작별의 설교를 마친 후, 아쉽고 어려운 작별을 고하고, 고소와 로드 그리고 바다랴를 경유하여 두로에 상륙하게 됩니다.

 

▶1-3절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여기 '우리가'는 바울의 일행을 말합니다. 또 '저희'는 에베소 장로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작별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울음을 참지 못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여기 '작별하고'는 뿌리치고 떠났다는 뜻으로 그들과의 작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울며 매달리는 어린아이를 떼어놓고 떠나는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과 헤어지는 연민의 정보다는 가야할 복음의 길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밀레도에서 배를 탑니다. 그리고 고스라는 곳에 도착해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이 고스는 유명한 그리스의 작은 섬으로 땅이 비옥하고 술과 비단 산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직업이 의사인 만큼 이 고스 성에 대단히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스 성에는 당시 의과학교가 있었으며 그리고 의학의 원조라고 부르는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의사가 되는 사람은 의사가 될 때,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라는 것을 한답니다. 고스는 행전의 저자 누가에게는 뜻 깊은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바울 일행은 그곳 고스에서 하루 밤을 자고 로드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그곳에서 다시 바다랴라는 항구도시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야 베니게를 거쳐서 두로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일행은 수리아로 행선하는 도중에 구브로라는 섬을 지나게 됩니다. 구브로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처음 가서 전도했던 곳으로 바울이 잊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성경은 바울일행이 구브로 섬을 옆에 끼고 수리아를 거쳐서 드디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지역인 두로라는 곳에 도착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일행이 온 코스가 가장 빨리 온 지름길입니다. 학자인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바다랴에서 두로까지는 약 닷새가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일행은 바다로 직행하여 날짜를 줄여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그러면 두로에는 언제부터 성도들이 있었는가?
①주님이 두로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막7:24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어린 딸을 고침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세다의 불 신앙'을 말할 때 두로를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11:21절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②스데반 순교시 흩어진 자들입니다. 행11:19절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두로)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박해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지역으로 흩어졌을 때 처음으로 베니게 항구도시 두로까지 왔습니다.
③예루살렘 총회 방문 길에 바울이 들렸습니다.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유대의 할례당이 올라와서 교회를 혼란케 하여 예루살렘 총회에 묻기로 했습니다. 행15:3절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그가 예루살렘에 가면서 믿음의 형제들을 심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로는 특이한 곳입니다. 예수님이 두로를 참 좋게 보셨고, 또 두로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곳에 지금 바울이 도착하여 짐을 풀었습니다. 바울이 두로에서 얼마만큼 머물렀으며 또 무엇을 했는지 본문 4절에 나옵니다.

 

▶4절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제일 먼저 바울이 두로에서 행한 일은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찾는 일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일주일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러니까 사공들이 짐을 풀 동안도(7일) 쉬지 않고 신앙인들을 양육시켰습니다.
사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잠시라도 쉬고자 합니다. 특히 배를 타고 여행할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짐을 내라는 그 동안도 쉬지 않고 제자들을 양육하고자 기회를 찾은 것입니다.
행11:19절을 보면 이 두로 지방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것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 헬라파 유대인들이 흩어져 세운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바울의 모습에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복음에 미쳐있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예수님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였고, 그가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만 골라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과만 교제하고 신앙을 양육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두로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⑴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성도들입니다. 교회는 이런 자들이 일으켜 세웁니다. 성령의 능력을 입어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 받고 일하는 사람과 못 받고 일하는 사람의 차이가 엄청 큽니다. 성령 받은 자는 포클 레인으로 땅을 파는 자요, 성령 받지 않는 자는 삽으로 땅을 파는 자입니다.
믿음에는 구원적 믿음과 성령적 믿음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모두가 구원적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적 믿음이 약합니다. 이 믿음을 탐내야 합니다.
한 아내가 야근하는 남편을 자꾸만 부르고 싶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화로 남편을 졸라서 집으로 오게 했습니다. 그 날 밤 그 직장에는 큰 화제사건이 나서 많이 죽고 부상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성령 받은 부인 때문에 그 남편은 무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알 수 있는 신앙을 탐내야 합니다.
⑵두로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바울도 이 사건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행20:22절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같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두로의 제자들이 가지 말라고 한 것은 성령의 역사가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종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말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행여나 그 사람이 어떻게 될까봐 염려하는 것이요, 그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입니다. 그들이 만류한 것은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온 당연한 행동입니다. 마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류했던 것과 일맥상통입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임한 성령과 두로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이 다른가? 아닙니다. 성령의 사역은 꼭 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의 믿음의 분량이 다를 뿐입니다. 제자들은 바울을 살리는데 초점을 맞추었으나 바울은 죽을 것을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오히려 성령께서는 바울의 예루살렘이 고난의 길임을 재차 확인시켜준 것이며 바울로 하여금 더욱 더 기도로 무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아멘!/

 

▶5-6절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는 여기서 두로교회의 성도들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들과의 만남은 일주일간의 짧은 교제입니다. 피차 서로 몰랐던 관계였지만 헤어질 때의 모습은 밀레도에서의 작별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관심은 사랑입니다.
⑴처자들과 함께 성문 밖까지 따라 나가며 바울을 배웅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성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바울에게 돌을 던지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성문 밖까지 나와 사랑을 전한 이들은 없습니다. 바울은 사막 속에 오아시스처럼 감격하였을 것입니다.
정말 이 모습은 바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향기로운 추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은 축복된 만남이며, 축복된 헤어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잘 만났다가도 헤어질 때가 문제입니다. 만남과 헤어짐이 오늘 본문의 장면과 같아야 합니다. /아멘!/
▶초창기 한국교회사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목사님이 다리에 종기가 나서 내일 주일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집사님이 밤새도록 그 종기를 입으로 빨아 고름을 요강에 뱉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종기를 사라졌고 목사님은 강대상에 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갈4:14-15절을 보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은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사랑을 쏟은 적이 있습니다.
⑵그들은 바울 사도의 선교사역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합심기도였고, 가장 경건한 모습의 기도였습니다. 무릎을 꿇은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그들은 무슨 기도를 했겠습니까? 주의 종 사도 바울의 신변에 아무런 이상이 없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할/
우리는 여기서 초대교회의 기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전심으로, 합심하여, 통성으로' 두 손들고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또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으로 기도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사도행전적 기도입니다. 두로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해서 사도바울과 이별을 했습니다. 서로 작별한 후 바울일행은 배에 오르고, 성도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7절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두로에서 수로를 따라 '돌레마이'에 이르렀습니다. 이 지역은 두로에서 가이샤라 방향으로 35Km 지점에 위치한 소항구도시였습니다.
여기서 바울 일행이 하루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성도들이 찾아오고 방문하고 해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4절에서는 '제자들'이라고 표현한데 비하여 여기서는 '형제들'이라고 표현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 받은 공동체의 친근감을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부르심을 입은 한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중에서 시험에 든 자가 있습니까? 혹시 환란을 당한 자가 있습니까? 병든 자가 없습니까? 문제를 갖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서로를 돌보며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교제를 해야 합니다. /믿/


▶8-9절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이제 바울 일행이 가이샤라까지 옵니다. 이 도시는 돌레마이에서 약 60Km 떨어진 곳으로 당시 유대지방의 행정 장관이 거주하는 정치적 수도입니다.
이 도시는 헤롯에 의해 건설되었고, 그가 로마의 황제 가이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로 이름을 가이샤라로 한 것입니다. 이곳은 당시 거대한 항구도시로 유명합니다. 바울은 이곳을 세 번 방문했습니다. 한번은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여행하는 중에 방문했고(행9:30), 두 번째는 2차 선교여행 말기에 안티 속에서 돌아오는 길에 방문하였고(행18:22), 지금이 그 세 번째입니다.
이제 바울 일행이 그곳에서 누구 집으로 갔습니까?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의 집입니다. 빌립이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와 함께 구제하는 직분을 맡아 충성했으며,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전하는 전도자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최초로 초대교회 일반 성도로는 처음으로 선교사가 되어 사마리아 땅을 복음화 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에 큰 기적을 일으켰으며, 그래서 그 성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에게 물세례를 주어 선교사의 사명을 유감 없이 잘 감당했습니다.
그런 빌립의 집으로 바울이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주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 유하니라' 그러나 그 내용을 깊이 묵상해 보면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 그 안에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빌립 집사가 누구입니까? 예루살렘에 큰 핍박사건이 벌어지면서 일곱 집사를 비롯한 크리스챤들이 다 쫓겨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때에 빌립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도피를 해서 사마리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스테반의 순교로부터 시작됩니다. 스테반의 순교사건 뒤에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이 핍박받아서 유대를 떠나게 된 그 근본 원흉이 바울입니다. 그 당시에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사울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견디다 못해서 이방으로 흩어졌고, 그리고 그 중의 하나가 빌립이요. 그러니까 빌립과 바울은 인간적으로는 원수지간입니다.
얼마만의 세월이 흘렀을까? 고증을 해보면, 20년만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양쪽 다 한창 젊었을 때, 한쪽은 복음을 위하여 한쪽은 하나님을 위하여 맹렬하게 싸우다가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20년 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어서, 함께 복음을 전하는 동지가 되어서 그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감개가 무량했을 것입니다.
빌립은 스데반의 순교 사건 이후에 대 핍박이 일어나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게 되었을 때,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예루살렘에서 살지 못하고 사마리아 지방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전도의 핵폭탄을 터트린 것입니다.
또 빌립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던 것을 그만두고 광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그와 함께 이사야서를 공부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메시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세례를 준 것입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사도바울과 빌립이 다시 만났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를 받아 1, 2, 3 전도여행을 하며 수많은 사건들을 겪었고, 이제 그는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빌립 집사의 집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아마도 바울이 그때 스데반을 핍박했던 일을 사과하고 많은 간증들을 했을 것입니다. 빌립은 자식들도 신앙으로 잘 양육을 했습니다. 9절을 보면 아직 출가하지 않은 딸 넷이 있었는데 다 예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다 아버지를 따라 복음에 헌신하는 종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빌립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범을 보였으면 딸 넷이 다 예언자가 되었을까요!
그 아버지의 그 딸입니다. 아버지가 믿음의 능력이 있으니 그 딸들까지도 믿음의 능력이 있어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깊이가 있는 집안의 딸들이 초대교회에서 큰일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10절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바울이 빌립집사 집에서 여러 날 유했습니다. 아마도 허물이 없고, 쉬기가 편해서 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로마의 선교일정을 계획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가보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여기 유대는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말로 예루살렘교회에서 아가보 예언자가 온 것입니다.
이 아가보는 행11:28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와 천하에 흉년이 든 것을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A.D 46년 '글라오디오'때에 성취되었다는 기록이 11:27-28절에 나옵니다.
그 예언가 아가보가 가이샤라까지 온 것은 바울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입니다. 그가 늘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고난을 받은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워서 일부러 먼 거리를 사랑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시청각적으로 바울에게 예언한 것입니다.

 

▶11절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지고 와서 자신의 손과 발을 묶고 '이 띠 임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같이 잡혀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아주 실감나게 예언한 것입니다.
이런 예언은 구약 선지자들도 했습니다. 왕상11:29-30절을 보면 선지자 아히야는 자신의 새 옷을 두 갈래로 찢어 솔로몬 왕국의 분열을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은 솔로몬이 죽자마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일어났습니다.
본문의 아가보의 예언은 성령의 음성으로 된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입니다.

 

▶12절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계시하고 있음을 봅니다.
밀레도에서 같은 예언을 들었을 때,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두로와 가이샤라에서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똑같은 예언을 했습니다.
왜 자꾸 반복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즉 바울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바울에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성령님이 그가 예루살렘에 가서 겪을 일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너는 환란과 핍박을 겪게 될 것이다, 내가 준비 되었느냐?' 13절에서 '준비된 바울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13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세상에서 '포기하지 말라'(Don't give-up)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미국의 새들백 교회의 '릭 웨렌' 목사는 세미나에 참석자들에게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를 한답니다. 또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말로 신앙의 굳센 의지와 사명의 소중함을 깨우쳐 준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의지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숭녕'씨의 국어 사전에 '의지'라는 단어는 '목적을 정하고 결행하는 마음의 능동적 방면'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지는 목적을 성취시켜주는 힘이요,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정신이요, 역경을 이겨내게 하는 용기요, 목적한 바를 달성케 하는 집념입니다. 의지란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정신력이요, 목적을 성취시켜 주는 행동이요, 성공의 동력입니다.
세상에서 머리가 좋거나, 성격이 멋져도 의지가 박약하면 성공할 확률이 적습니다. 의지는 뚝심입니다. 밀고 가는 추진력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계산하면서 잣대로 자꾸 재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이 적습니다.
성공 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자질이요, 굳센 의지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천재를 정의하기를 '99%의 땀과 1%의 영감으로 구성된다'고 했습니다. 천재는 우연이나 요행의 산물이 아니라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런 노력의 인생이 되려면 의지가 굳건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소망은 강한 용기요 새로운 의지'라고 했습니다. 강한 용기와 새로운 의지를 가진 자만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소망은 공포를 쫓아내고, 의지는 포기를 접게 만듭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다른 말로 의지가 강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의욕 충만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을 계획했어도 그것을 성취할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은 믿음이요 의지입니다.
의지는 돈보다 귀하고, 지식보다 보배입니다. 의지에서 믿음이 나오고, 결단이 나오고, 집중력이 나오고, 능력이 나옵니다. 약속을 받았어도 그것을 성취할 힘이 곧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려면 우리도 날마다 결단하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 곧 의지가 강해야 합니다. 의지는 더 성숙한 믿음의 세계로 나가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자질입니다. /믿/
사26:3절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주를 의뢰하는 자는 심지가 강합니다. 내 의지가 문을 열어야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내가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문을 부수고 우리에게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지 절도나 강도가 아니십니다. 내가 문을 열어야 주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의 식탁에 함께 하십니다. 여호수아처럼 '오직 나와 내 집은 하나님만 섬기리라'는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수24:15). /아멘!/
여호수아는 의지가 약한 백성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수1:7)하다고 했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려면 의지를 굳게 세워야 합니다. 에스더처럼(에4:11-16), 다니엘처럼(단1:8), 죽음을 각오하고 의지를 지켜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천국은 열려 있지만 그곳으로 가려는 강한 의지를 가져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나 천국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약속을 받았어도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면 철저한 의지, 굳은 결심을 갖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의 바울의 모습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의 마음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죽기로 결심한 사람은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결심을 못해서 흔들립니다. 그것을 방황이라고도 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이 결단이 없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천국이 결정되지 않는 사람은 방황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⑴'너희가 어찌하여 울며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여기 상하게 한다는 말은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드느냐? 흔들리게 만드느냐는 말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⑵'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자라고 고백합니다. 롬1: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이것이 사도바울의 운명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자, 사나 죽으나 그의 것으로 산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⑶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각오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사각오'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는 내 한 몸 던져 죽으면 죽으리라고 충성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이 보통 선언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결심하라는 선언입니다. 이런 바울의 가는 길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14절은 바울을 말린 자들의 결론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결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고자 하는 바울의 굳은 결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이 이렇듯 일사각오를 했습니까?

⑴성령에 매였기 때문입니다. 행20:22절에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령에 매인바 된 사람임으로 오직 한 길 성령의 인도만을 따를 뿐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각오한 것입니다.
⑵복음을 증거키 위해서입니다.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⑶은혜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자기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늘 나는 주님께 무엇을 드릴까?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목숨을 바치기로 했던 것입니다.

 

▶14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 모두가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바울이 권함을 받지 아니함으로 그에게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시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한때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랐다가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소서!' 결국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으로 한마디 할 수 있는 고백은 이 고백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뜻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고 하셨습니다. 지금 역사는 이 사실 때문에 돌아가고 왔습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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