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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강) 결박당한 바울! (행 21:27-40)

by 【고동엽】 2022. 3. 11.

(제61강) 결박당한 바울! (행 21:27-40)

 

사도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초대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와 장로들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바울은 총회 앞에서 자세하게, 낱낱이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역사하신 사건들을 간증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고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 하였는지를 상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의 겸손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선교보고를 듣고 흥분한 유대인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 앞에서 율법의 의식 법을 지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런 오해를 풀어주는 계기를 삼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란 바로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유대인들의 율법의 관습을 행하지 말라고 했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바울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함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나 바울 자신은 무 율법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의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나실인 서원을 한 네 사람의 모든 제사 비용을 자비로 부담하고 그들과 함께 머리를 깎고 결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포함한 다섯 사람이 드리는 특별예배 기간은 7일간이었는데 처음 6일은 방해받지 않았지만 마지막 7일이 되는 날, 소아시아 지방에서 무교절을 지키려고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발각되어 성이 소동이 일어나고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잡아 결박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가 된 것입니다. 그것도 성전에서 체포됩니다. 그리고 성전 밖으로 쫓겨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성전 출입이 됩니다. 그는 세계를 누비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예루살렘에 돌아오면 반드시 유대사람으로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바로 지금 예배드리는 현장에서 그는 체포되어 끌려나옵니다. 더욱이 본문에는 아주 비참한 장면이 나옵니다.
30절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이 결박이 사도바울을 로마로 후송하여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이 결박은 로마로 가기 위한 결박이었습니다. ◀제목소개!▶

 

▶27절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그 이례가 거의 차매"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나실인의 서원 예식이 7일간 계속되는데 그 마지막 예식이 거의 끝나 가는 무렵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의식 법에 동참한 것은 교회의 평안을 위하시고 또 동족인 유대인들이 바울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드렸는데 역시 본문에 보면 시간 낭비에다 돈 낭비까지 한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 아시아란 소아시아로서 에베소, 비시디아, 갈라디아 지방을 말하는데 그곳에 가서 선교활동을 할 때. 제일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가서 전했습니다.
에베소에서도 3년을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바울의 얼굴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고 확실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듣고 여러 곳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했지만 이방 땅이기 때문에 쉽게 처리할 수 없었다가 이제 본토 예루살렘에서 만났으니 좋은 기회다 하여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바울을 붙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 핍박자들의 끈기가 정말 무섭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는 곳마다 계속적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핍박했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따라왔다면 모르지만 죽이기 위해서 악착같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니 이게 보통 극성입니까? 인간적인 면에서도 이렇게 까지 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디에 있을 때 붙잡혔습니까?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붙잡았습니다. 여기 성전은 성전 구내에 이스라엘인의 뜰을 가리킵니다.
당시의 성전은 지성소 앞에 '제사장의 뜰, 유대인의 뜰, 부인의 뜰, 그밖에 한 층 낮은 이방인의 뜰'이 있는데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 사이에는 높은 담으로 경계가 되어 있어,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시 그것을 어기면 사형에 처한다고 헬라어와 라틴어로 쓴 표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3대 자랑거리가 있는데 '선민의식, 율법, 성전'을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의 중심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주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여기에서 '충동'이란 '함께 쏟아 붓다, 혼란시키다.'라는 뜻으로 마치 저 에베소에서 오장색 메데드리오가 운동을 일으킨 사건과 같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선봉자 유대인 몇 사람이 각 나라에서 올라온 유대인들과 본국에 살면서 명절을 지키러 온 모든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향하여 핍박과 환란을 함께 쏟아 붓도록 선동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붙들고'란 이 말의 뜻은 '정식으로 그에게 달려들어서 전격적으로 그를 사로잡은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범인으로 체포하는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28-29절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 이러라."
여기서는 바울의 죄목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성전 모독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즉 신성을 모독하는 반대주의자라고 선동한 것입니다.
"외치되" 선동가가 큰 소리로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우리와 함께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바울을 가리킨 말이고 '각처에서'는 바울이 아시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참으로 중대하고 무서운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의 세 가지 자랑거리인 '선민의식과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자'라고 한 것입니다.
⑴'우리 백성과'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부하는 선민 우월성을 말합니다.
⑵'율법과' 이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저들을 위하여 받은 '선민 계율의 헌장'을 의미합니다.
⑶'이곳' 곧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성전을 말하는데 안식일과 명절에 저들만이 예배드리는 곳으로 신성시 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바울이 세계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이 세 가지를 모독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참으로 유대인들의 골수를 건드리는 말이요, 몇 번 죽여도 한이 차지 아니하는 치욕적인 죄목들입니다.
또 28절 이하를 보면 '이 거룩한 곳'이 나오는데 여기서 거룩한 곳은 성전을 말하는데 '유대인의 뜰'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과거에 성전이 있었던 터에서 함부로 들어가지 않을 만큼 엄격합니다. 하물며 초대교회 당시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심지어 로마의 시민이라 해도 성전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도록 허락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정부가 유대인들의 종교를 보장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29절을 보면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지래 짐작으로 잡아넣으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모두 다 사단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요8:44절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드로비모'는 에베소에서 예루살렘의 흉년 만난 형제들을 돕기 위해 구제 헌금을 가지고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울이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갔다 하여 자신들이 자랑하는 '이방인들과의 구별'이 무너졌다고 아우성을 친 것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건물 숭배자들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거룩해야 할 곳은 건물과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심령과 영혼입니다. /믿/

 

▶30절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 성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의 폭력적인 행동과 격양된 감정의 상태를 표현한 말로 당시 분위기가 바울을 죽일 상황인 것을 의미합니다.
일부가 아니라 온 성이 다 소동하고 흥분했습니다. 바울을 잡아 가지고 성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성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죽일 분위기입니다. 뒤에 보면 다 나옵니다만 그냥 두면 바울은 죽습니다.
이때 천부장이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바울을 잡았습니다.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알고 보니 바울을 잡은 것이 아니라 바울을 보호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마치 다니엘이 모함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사자 굴속에 들어간 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다니엘을 잡은 것이 아니라 다니엘을 보호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일곱 배나 뜨거워진 풀무 불 속에 던져진 것은 그들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불 시험이 와도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아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믿/
본문에 '바울을 잡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이 말은 문학적으로 보면 바울을 사정없이 끌고 나가는 행위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엄청난 비정함이 들어있습니다.
먼저 문을 닫은 것은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는 문을 닫을 것을 가리키는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노한 군중들이 성전으로 밀고 들어와 그곳에서 바울을 살해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살인사건이 나면 이것은 곧 성전을 더럽히는 큰 사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울에게 변호의 자유와 신변안전 보장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전의 지성소 안에는 다윗의 뿔들이 있는데 이것을 제단 발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뿔로서 어떠한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성전 안에 있는 이 제단 뿔만 잡으면 그에게 일단 변호의 자유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즉 구약의 도피성과 같은 것입니다. 민35:1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도피성을 정하여 피의 보복을 막게 했습니다.
도피성은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식구들을 위하여 방주를 예비하신 것과, 기생 라합의 가정을 위하여 구원의 붉은 줄을 허락하심같이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같이 구약의 도피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도피성입니다. 신19:2-3절에 보면 도피성의 위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지역의 중앙에 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서나 가까운 곳으로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도피성은 높은 산간에 두고 그 길은 항상 잘 닦아 두게 했습니다. 쉽게 찾고, 쉬게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큰 글자로 써서 이정표를 만들어 두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눈에 띄게 하기 위함입니다.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제단 뿔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도피성에 들어온 사람은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죽습니다.
본문에서 문을 닫아 버린 것은 바울 사도에게 변호의 기회를 막은 것이고, 신변보장을 불허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어떠한 죄인에게도 허락한 이 은혜의 뿔을 유대인들이 막음으로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이 막아버린 것입니다.

 

▶31-32절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여기서 생각해보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몇 년 전에 자신이 스데반을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바울은 조용히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 심은 대로 거두는구나, 참으로 정확하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죽는구나.' 어쨌든 얼마 전에 스데반을 죽인 바로 그 방법으로 이제는 바울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정식 재판도 없이 바울사도를 죽이겠다고 요란을 떠니 그 소요가 온 성에 퍼졌나갔습니다. 급기야는 공권력을 가진 치안담당자인 천부장에게도 그 소문이 들렸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오순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폭동이나 소요를 대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움직임을 철저히 주시하던 터라 그 소식은 매우 신속하게 보고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보통 천여 명의 명령을 통솔하는 로마군의 장교를 가리키며 이 부대의 구성은 보병 760명과 마병 240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행23:26절에 의하면 이 천부장은 '글라우디오 루시아'입니다. 이 군대의 본부는 성전 북서쪽의 언덕 위에 세워진 안토니아 성에 있었습니다.
그 천부장이 직접 백부장들을 대동하고 현장에 갔다고 했는데 적어도 2-3백 명 이상 출동한 것 같습니다.
바울 한 사람만 붙잡으려면 한 10여명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데모나 폭동 때에는 몇 사람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많은 군사가 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 천부장의 군대가 오기까지 계속 얻어터지고 있었습니다. 천부장 군대가 도착하자마자 바울을 치기를 그쳤다고 했습니다. 왜 그쳤습니까? 바울을 죽이려던 그들의 행위가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일차의 착오도 없습니다. 빈틈이 없으십니다. 이대로 두면 바울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로마 백부장과 천부장을 보내어 보호하십니다.
백부장과 천부장이 오니까 흥분한 사람들이 죽이지 않습니다. 죽이려고 하다가 멈추었습니다.
왜 멈추었는가? 만일에 백부장이 보는 데서 돌로 쳐죽였다면 이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돌을 든 사람이나 처형한 사람들은 로마법에 의해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바울을 죽이려던 행동을 멈추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로마당국의 재판에 의하지 않고서는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산헤드린 유대 종교재판에 의하여 사형 판결을 받은 후에도 빌라도에게 다시 끌고 가 재판을 받게 했던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33절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드디어 바울은 로마 군인에게 체포됩니다. 하지만 로마 군인 백부장과 천부장이 바울을 체포하려고 체포한 것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냥 놓아두면 바울이 죽겠으니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체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아시겠지만 2년 동안을 재판도 없이 가이사랴에 가두어둡니다.
왜 바울을 2년 동안 재판도 없이 가두어 놓았을까요? 왜냐하면 내놓기만 하면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기로 맹세한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좌우간 바울을 죽이려고 벼르고 벼르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2년이 흘러갑니다. 바울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자 같이 그야말로 소리소리 지르면서 복음 전해야 할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재판도 없이 이렇게 갇혀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로마에 상소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긴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는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체포될 때에 왜 그렇게 체포되어야 했는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왜 그렇게 갇혀 있어야 했는지, 왜 거기서 그렇게 썩어야 했는지'를 말입니다.
그가 후에 빌1:12절에서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내가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갇혀 지내는 그 파란을 겪으면서 로마까지 왔고, 감옥에서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당한 일, 이 많은 고통과 긴긴 시간, 이것은 잘못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쇠사슬로 결박한 바울을 보면서 끝장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잡은 것이 아니라 바울을 보호한 것입니다. 폭도들로부터 보호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방 군대도 동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결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바울을 도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②바울을 폭도들에게서부터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③사실을 심문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바울은 결박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고,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그만큼 로마 시민권의 권위가 큰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땅히 쓸 수 있는 권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절제한 것입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묶어 놓고는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며, 무슨 일 때문에 너희들이 죽이려고 했느냐?'고 묻습니다.

 

▶34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천부장의 질문에 무리들이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전을 더럽혔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율법을 범했다'고도 하고, 별별 소리를 다 하니까 천부장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고 또 너무 시끄러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해서 부대 안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부르짖거늘' 이 단어는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흥분한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할 때 쓰는 단어로 큰 고함소리로 미친 듯이 부르짖는 것을 뜻합니다.
천부장이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합니다. '영문'안은 군대의 주둔지인 안토니아 명문을 가리키는데 광적으로 흥분하여 외쳐 되는 무리들의 소란 때문에 제대로 심문을 할 수가 없어서 일단 부대 안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35-36절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데려가는 군인들을 좇아가며 바울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군사들은 성난 군중들의 폭행을 피해 바울을 들고 가야만 했습니다.
'층대에...들어가니' 이 층대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안토니아 영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말합니다. 이 계단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판 받을 때, 오르내리신 층계입니다. 예수님 당시 그러니까 본문의 사건의 27년 전에 그 장소에서 성난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던 그 자리에서 오늘은 사도바울을 죽이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37절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여기서부터 바울의 변론이 시작됩니다. 지금 로마 안토니아 부대가 있는 계단으로 쇠사슬에 묶여 군인들의 손에 끌려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가 현재 있는 위치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곳이라 자기를 죽이려고 따라오는 폭도들의 모습이 잘 보이는 장소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장소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는 강단으로 선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에게 변론의 기회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사명감을 보게 됩니다. 그의 관심은 매를 맞든 안 맞든 좋은 형편에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관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오직 우리들의 관심은 출세요, 성공이요, 세상적 쾌락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관심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에게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천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쇠사슬에 결박된 죄인의 몸에서 너무나도 세련되고 교양이 넘치는 헬라어의 악센트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깜짝 놀란 천부장은 '당신이 헬라 말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에 헬라어는 로마 제국권 내에서는 공통언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문화인에게 국한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무식한 폭동인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천부장의 관심은 치안 책임자로서 치안을 방해하는 사람을 체포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래 전에 쿠데타를 일으켜 4천명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갔던 애굽 사람이 아직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을 보고 혹시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들어서 그에게 묻습니다.

 

▶38절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여기에 나오는 애굽인은 주후 54년 경 네로황제 때, 3만 명을 거느리고 감람산에 웅거하여 로마정부를 정복하려고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의 명령 한마디로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고, 또 로마군대를 내어쫓고 유대를 독립시킨다고 호언장담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항상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며 군중 속에 섞여 다니다가 저명인사들을 암살하는 로마정부를 깜짝 놀라게 했던 거짓 선지자입니다.
본문에는 사천 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반란군의 인원은 삼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총독 벨릭스 군사에 의해 일부는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생포되고 그러다가 이리저리 흩어져서 광야를 거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때에는 한 사천 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천부장은 바울이 그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여 물었습니다. 바울은 즉시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이 물음에 사도 바울은 '아니요 나는 유대사람입니다'하고 자기의 정체를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39절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나는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천부장이 '난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니냐?'는 물음에 분명히 대답한 것입니다. 그 난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라' 바울은 자기가 시골 촌놈이 아니고 다소성의 시민권자라고 했습니다.
당시 다소는 소아시아 지방의 헬라사상의 중심지로 교양 높은 도시로서 훌륭한 대학이 있고, 큰 도서관이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은 다소성에서 출생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의 고향이나 문화의식을 자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천부장의 오해를 빨리 풀고 자기가 서 있는 이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선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알리면 즉시 풀어 주어 그를 안전한 곳에 피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현장 복음 증거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기 때문에 천부장에게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청원입니다. /할/

 

▶40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말로 말 하니라"
천부장이 허락을 했습니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바울이 계단을 강단 삼아 지금까지 헬라 말을 하던 것을 히브리말로 유대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고국어로 말을 합니다.
지금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반 유대주의자로, 신성모독 자로, 반 율법주의자로 오해를 받고 저들에게 붙잡혀 성전 밖으로 끌려나와 반 죽도록 구타를 당했습니다. 지금 바울 앞에는 자기를 죽이려고 발광하는 유대인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전도자 바울은 그 동족들을 구원하고 갈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의 복음 전도에는 언제나 순서가 있습니다. '유대인 다음에 헬라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심정은 바로 동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말로입니다. 오늘 본문은 22:1절로 이어집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여기 '부령들'이란 말은 '형제들과 선배여러분!'이라는 말로 매우 정중한 표현으로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연설할 때 사용한 호칭과 동일한 것입니다.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말로 말 하니라' 본문은 천부장의 보호 하에 바울이 성난 유대군중 앞에서 자기변명을 하는 내용입니다. 자기변명인 동시에 변증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곧 설교요 전도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귀중한 시간에 전도를 하려듭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 섰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나 한 몸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마는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느냐, 사느냐'하는 것은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 성난 군중들도 다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바울은 그 점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그 옛날, 자기가 돌로 쳐죽였던 스데반의 죽던 장면을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죽으면서 일장 설교를 했습니다. 긴 설교를 합니다. 그것을 누가 듣겠습니까? 들을 사람 없을 것 같은데도 성난 군중 앞에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설교를 하고, 그리고 돌에 맞아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충격이 바울에게 되살아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때에 받은 충격으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에 사도 바울은 아무리 저들이 성난 얼굴을 하고, 자기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고, 찢어 죽이려고 대들어도 오히려 저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저들 가운데에는 모르고 행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하는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 시간에 저들을 향해서 설교를 합니다. 자기변명을 합니다. 담대한 마음으로 성난 군중들을 향해서 일장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행22:1절부터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평양의 대동 강변에 가면 옛날에 토머스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배를 타고 전도하러 왔다가 순교를 당했던 순교 유적지가 있다고 합니다.
토머스 선교사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쪽복음(마가복음) 성경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횃불을 던지고, 불덩이를 던지는 바람에 배가 그만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토머스 선교사는 성경책을 계속해서 강물에 던졌습니다. 자기는 죽지만 이 성경책은 받아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성경을 몰래 주어다가 읽고 예수 믿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민족이 복음을 받는 맨 처음 사건입니다.
'나는 이대로 전도하고 갑니다. 그러나 이 복음만은 믿으세요' 이것이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만히 보니까 지금이 성난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무사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맞아 죽어도 좋소,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들으시오' 하고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께 위탁하고 종말론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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