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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강)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행 21:15-26)

by 【고동엽】 2022. 3. 11.

(제60강)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행 21:15-2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가치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고, 그 가치를 깨닫고 이 땅에서도 묵묵히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 들이 세 가지 길을 간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마귀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살아가는 것은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가니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며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던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가니 그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을 팔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세상 사람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따라 갑니다. 유행 따라 갑니다. 인본주의로 빠집니다. 자기주의에 모든 것을 맞추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제일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아니하십니다. /믿/
세 번째는 '하나님의 길,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써 사명의 길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행전의 주역 바울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제 3차 선교여행을 은혜롭게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도중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했습니다. 이유는 환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일사각오는 대단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의 그리스도를 향한 단호한 결단은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말리던 성도들도 '주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바울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15절에서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제목소개!▶

 

▶15-16절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쌔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이 여러 날 후'란 말은 가이샤라 성에 있는 빌립 집사의 집에서 있었던 날들로 그곳에서 상당한 동안 지내면서 기도로 로마의 선교를 준비했습니다.
'행장을 준비했다'는 말은 짐을 샀다는 의미로 '짐을 뿌리다.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한 성금을 챙기다. 말의 안장을 꾸리다' 등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00Km인데 그 길은 도보로 가기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당시 교통수단에 쓰였던 말을 타고 갔을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예루살렘을 위하여 가는 길은 죽음을 각오한 길이요, 그의 인생 길에 마지막 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마지막 길을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이샤라의 몇 제자와 나손'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말렸던 사람들입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 테면 혼자 가시오! 사람이 고집을 부려도 분수가 있지!' 기분이 나빠서 돌아서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혼자 잘 해보시오!' 무관심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샤라 성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들도 역시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길이 험한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십자가에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따라 나서고 있습니다. 얼마나 충성스러운 일꾼들입니까?
그런데 또 한 분이 바울과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동행하신 줄 믿습니다. 바울은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절대로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마28:20절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할/ 여러분, 참으로 능력의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걸음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늘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요14: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두렵지도 않습니다. 사도바울과 동행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기 '오랜 제자 나손'에서 오랜 제자라는 표현은 그가 예수 믿는 자가 오래 되었다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그를 70인의 제자 혹은 120문도 중의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보다 훨씬 앞선 사람입니다. 직접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바울을 따랐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항상 제자로서 배우는 자세로 산 자입니다. 그의 이름은 '회상함'이란 뜻입니다. 그는 주님 생존시의 사람이요, 다락방 기도에 참가해서 오순절 역사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겸손히 한 시대의 하나님의 종인 바울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그의 겸손함에서 온 것입니다.
그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섬기기 위해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주님 앞에 쓰임 받는 일꾼이요, 주님에 고난에 동참하는 자요, 마지막 바울의 선교사역에 충성스럽게 봉사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나손을 보면서 주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시 무명인의 나귀를 타시고 올라간 사건이 연상이 됩니다. 예수님이 무명인의 나귀를 쓰신 것처럼 주님은 나손과 그의 집과 재물과 그의 믿음까지도 바울을 위하여 쓰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나손은 ⑴'오랜 제자'였습니다. 그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사도들과 함께 오래 동안 사역한 신실한 복음의 동역자였습니다.
⑵그는 바울과 그 일행을 대접했습니다. 그의 집은 바울과 그의 일행이 기숙할 만큼 넓었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정치자금도 후원하는 것도 귀합니다. 교육을 위해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도 귀합니다. 불우한 자들을 위해 복지 사업에 헌신하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선교를 위해서 직접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⑶그는 환란 중에 헌신했습니다. 평온하고 시절이 좋을 때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때는 바울 곁에 있으면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불이익을 당할 때입니다. 이러한 때 바울과 그 동역 자들을 돕는 것은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이 있는 것처럼 바울과 동일한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17절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바울사도는 영적인 개선장군이 되어 예루살렘교회를 향하여 힘차게 입성하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선교 현지 인들이 자원하여 충성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친 헌금이 들려 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가 정복한 땅을 역으로 나아가 소아시아는 물론 로마의 동남부 통치구역인 그리스까지 왕 중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권을 확보하였습니다. 남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알렉산더가 사용했던 칼과 같은 무기도 그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이란 유대인들의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의 복음을 들고 나아가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그 복음의 정복자가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을 한 것입니다.
여기 '예루살렘에 이르니'란 말은 마침내 바울과 그의 일행은 예정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다섯 번째 되는 예루살렘 방문이요, 아울러 최후의 예루살렘의 방문입니다.
성령은 당신의 종을 당신의 뜻대로 예루살렘까지 무사히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형제들이 와서 기쁘게 저들을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예수 믿는 사람의 지칭이 첫째가 '그리스도인'이요, 둘째가 '제자'요, 셋째가 '형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또 '제자'는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금 많은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제자도'라는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제자라고 하면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 모두는 다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형제'입니다. 이 말이 초대교회에 상당 기간 계속 쓰입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특별히 강조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다 형제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형제입니다.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까 형제입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다 하나님 앞에 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니까 형제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먼저 믿었든 나중에 믿었든 다 형제입니다. 특별히 여기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형제라고 부르는 데는 보다 더 높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처음에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했을 때를 기꺼이 영접해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예수님 믿기 전에 항상 악독함을 알고 두려워했고, 경계했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잘 설득하여 사귀게 되었습니다(행9:26-27).

 

▶18절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여기서 바울은 제3차 선교여행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하여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를 찾아갔습니다. 혼자 간 것이 아니라 일행과 함께 갔습니다.
그 일행 중에는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도 포함되었으며 구제 헌금을 모은 자들도 포함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야고보가 있었는데 그 야고보는 이미 순교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본문의 이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초대감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베드로보다 더 권위가 있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지혜롭게 잘 지도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일반 유대인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일반 유대인들은 그에게 '의인 야고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교회의 최고 지도자를 방문한 것입니다.
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겠으나 먼저 교회를 찾고 지도자를 찾아갑니다. 이는 교회에 덕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왜 덕스럽습니까?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초청하여 하나님의 권속(가족)으로 삼으시고, 이곳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셔서 사역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라고도 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가진 특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특권과 함께 소명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에 사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십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이십니다. '모든 족속, 전 세계를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부름 받은 특권이 있으면 보냄 받은 소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멘!/ 바울 일행이 그곳에 도착하자 장로들이 따뜻하게 영접했습니다. 이것은 공적인 보고를 하기 위해 간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영접을 한 것입니다.

 

▶19절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바울이 문안하고' 먼저 예의를 갖추어서 인사를 정중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당시 교회지도자들의 서열로 본다면 바울은 12제자 밑입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깍듯이 예절을 갖추어 인사를 올린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선교보고를 합니다. 제3차 선교여행 중에 교회를 세우고 또 세워졌던 교회들을 돌본 보고, 그 보고 가운데는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 교회' 등에서 나타난 기적과 이적을 보고했을 것이고, 또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의 감격은 체험한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또 모 교회를 돕고자 성금을 거두었을 때, 그들은 어려웠지만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동참해 준 성도들의 고마움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밀레도의 마지막 고별설교도, 보고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바울은 자기가 사역한 일을 '봉사'(디아코니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봉사는 '종', '일꾼'을 뜻하는 '디아코노스'에서 파생된 말로 '사명'(20:24), 또는 '직분'(롬11:13) 등으로 번역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교회와 사람들에게 봉사했습니다. 그것을 '사명' 또는 '직분'을 감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 말은 '나의 봉사생활, 나의 수고, 나의 봉사를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알 것인즉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나를 통해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내 입을 통하여, 내 말을 통하여, 내가 하는 설교를 통하여, 그리고 내 지혜를 통하여, 내 건강을 통하여, 내가 하는 수고를 통하여, 내가 뿌린 눈물을 통하여, 나아가서는 내가 당한 많은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것뿐입니다. 그 시작도, 그 과정도, 그 결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요, 나는 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낱낱이'란 말은 '각각에 따라서, 항목 별로'란 뜻으로 여러 곳에서 일어난 가지 각종의 하나님의 성령 역사를 세밀하게 보고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고한다'는 말은 '헤아린다'는 뜻으로 선교사역의 회상과 그 내용들을 보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보고 속에 자기가 무엇을 했다고 보고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보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했다고 떠벌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내가 몇 사람에게 전하고, 내가 몇 사람을 세례 주고 어느 어느 교회를 세우고…' 이렇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하고 보고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것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역사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역, 하나님께서 놀랍게 이루신 일, 그것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되어 진 사건 전부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겸손을 발견할 수 있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도의 덕목을 만납니다. 바울은 자기가 이방 가운데서 사역한 그 모든 일들의 주체(主體)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세상에 보냄 받은 '소명자'이므로 그가 행한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자신은 보냄 받은 자로 봉사한 것이라는 고백이요, 자신이 최선을 다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최선을 다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차원 높은 덕(德)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거짓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농부가 농사를 다 짓습니다.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추수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농부의 땀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키우셨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절대로 결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농사는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농부의 수고를 빌리셨을 뿐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십시오. 그러나 늘 마침 부호를 잘 찍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아멘!/
여기서 덕(德)이란 그리스도인이 생활 중에 갖추어야 할 품성입니다. 노자(老子)는 덕을 우주의 원칙인 도(道) 다음에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볼 때 말씀(道)이 단연 위이고, 사람이 말씀을 따라 갖추어야 할 인격이 믿는 자의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벧전2: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


▶조선 중종 때 반석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은 겸손하고 청렴하여 덕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원래 종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격과 학문을 갖추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주경야독을 합니다. 이를 아름답게 생각한 주인 이 참판이 그의 종 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어느 몰락한 양반 집의 수양아들로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형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거지 몰골을 하고 있는 옛 주인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李 五成)을 보았습니다. 그는 즉시 그 앞에 넓죽 엎드려 큰절을 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란 놈입니다'
그는 관례에 따라 자신의 옛 노예 신분이 노출됨으로 모든 특권이 박탈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에 감동한 신하들과 임금의 배려로 그의 사표는 반려되고 그가 추천한 이 오성도 사옹원(司饔院) 별좌(別座)라는 좋은 벼슬을 얻었다 고 합니다.
덕이 있는 한 사람이 존재함으로 온 나라를 훈훈하게 하고, 덕이 있는 한 사람이 가정에 존재함으로 온 가정이 훈훈하게 되고, 덕이 있는 한 사람이 교회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온 교회가 훈훈하게 됩니다. /믿/
사도 바울은 믿음의 용장입니다. 인류 역사에 그를 추월할 거목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를 통하여 감화를 받는 까닭은 믿음에 덕을 세우는 그의 인품 때문입니다. /할/

 

▶20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저희가 듣고' 예루살렘교회의 감독과 지도자입니다. 그들은 정중히 보고를 받았습니다. 우리 합동정통 총회 때 보면 각 선교사들이 나와서 교회의 총대들 앞에서 선교보고를 합니다. 보고가 끝나면 총대들은 격려의 박수를 아낌없이 쳐줍니다.
본문에도 바울의 보고가 끝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린 것처럼 예루살렘 공동체도 모든 감사를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종이란 모든 영광을 주인에게 돌리는 법입니다. 즉 모든 수고는 내가 하고, 모든 영광은 주인에게 돌리는 것이 바로 종의 자세입니다.
보고가 끝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뒤에 예루살렘교회는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바울에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교회 성도 가운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신자 수만 명이 바울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수만 명'으로 표현한 신자는 예루살렘 시내와 그 근동에 있는 성도들이 오순절 절기 예배로 드리러 온 모든 성도들을 지칭한 숫자로 그들이 바울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하지만 몇 가지 약점들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모세 율법에 열심히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바울에게 오해를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할례를 하지 못하게 하고 유대인들의 관습을 행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의식 법으로써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함을 주장했지만 그 율법은 폐지 한 것이 아니고 '몽학선생' 역할로서 율법이 죄를 드러나게 함으로 인간의 연약함으로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선생 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할례문제도 그렇습니다. 유대교에서 거짓 이단들이 기독교에 들어와 할례 받지 않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 그들을 충동질함으로 한 때 교회들이 시끄러웠습니다. 그때 바울이 할례의식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른 복음 관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16:19), 베뢰아에서(17:4), 고린도에서(18:1-2), 특히 에베소에서(19:26) 유대인들의 고의적이고, 계획적이고 집단적인 박해로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선교지에서 바울은 언제나 유대인의 공격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와서는 바울은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 형제들에게 또 공격과 핍박의 대상이 되는 장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마는 아직까지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잘못된 선민의식의 우월감에 빠져 참된 복음의 진수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21절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성도들이 바울을 오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모세를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배반했다는 말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버리라고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소문은 바울에게 반감을 받고 그를 비방하던 자들이 만들어낸 소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외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 자신이 무 율법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모세의 율법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을 망각하고 단지 그 형식만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의 삶을 경고한 것입니다.
롬2:17절 이하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그들은 율법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즉 21-21절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이 여기는 네가 신사(우상숭배 시 제물)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책망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짓기를 28-29절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러니까 무늬만 율법주의자지 지키지 않는 너희는 율법주의자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담긴 정신을 망각하고 단지 그 형식만 추구하는 유대인들을 경고한 것입니다.
할례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를 행함이 구원의 목적이 아닌데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잊어버리고 할례 의식만을 중요시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은 만약의 사태를 염려한 것 같습니다. 바울의 선교 보고를 통해 유대인들의 난동을 보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중의 유대교 개종자들이 바울을 좋게 보지 않고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지금 의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바울 사도를 보호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꾀를 짜낸 것 같습니다. 그런 꾀보다는 오히려 '당신이 이방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그 복음을 전하시오!' 했더라면 더 빛났을 테인데 그곳 지도자들은 오는 소나기를 피해야 된다고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22절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바울 사도가 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당장 달려들어 쥐어뜯을 것이니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뒤에 나옵니다만 사도바울이 잡혀갈 때, 그들이 마구 바울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번쩍 들고 들어갑니다. 잘못 하다가는 맞아죽겠다 싶어서 군인들이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번쩍 들고 부대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순간까지 마구 두들겨 팼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미리 알고 그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어찌할꼬!' 이 말은 그들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3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야고보가 지도자로서 바울보다는 선배입니다. 그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대로 따라 달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마음이 꺼림직 했지만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 그들의 제안에 따른 것 같습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가 없는 바울입니다. 갈1장에서 보면 '내가 전한 복음 외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할 만큼 그는 털끝만큼도 양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윤리 문제나, 혹은 생활 문제나, 의식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넓게 양보를 합니다. 내가 양보해서, 내가 누명을 써서 전체가 평안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대단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양보합니다. 타협합니다. 그는 말씀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또 고전9:22-23절에서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여기서 서원이란 나실인의 서원을 말합니다. 나실인은 '억제하다, 성별 하다'라는 뜻입니다.
민6:1-21절을 보면 나실인의 기원이 나옵니다. 나실인의 규정을 보면 ⑴죽은 자의 몸과 접촉하지 않고 ⑵포도주나 그 밖의 독주를 마시지 않고 ⑶삭도를 머리에 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관습이 초대교회에서는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머리를 깎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나실인의 서원입니다. 6개월 동안 서원하기도 하고 1년 동안 서원하기도 하고 삼손과 세례요한 같은 사람은 평생 나실인이었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이런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이 네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24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민6:9-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에 따르면 한때 서원하여 나실인이 된 자들이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결례의 기간이 지난 후 머리를 밀고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때 드리는 예물은 번제물로 일년 된 수양 한 마리나 속죄 제물로 어린 양 한 마리, 화목 제물로 수양 한 마리, 그리고 그에 따르는 소제물과 전제물이 필요했는데(민6:13-15), 가난한 자들에게는 이것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난한 서원자를 대신하여 부자들이 그 비용을 보상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제안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결례의식에 참석하여 서원한 네 사람의 예물을 대신 부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아! 바울이 우리의 결례를 무시하지 않고 그도 행하는구나!' 안심을 주자는 제안입니다.

 

▶25절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이 말은 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 때, 결의된 것으로 이방인 중에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할례문제를 논하면서 결론을 내리기를 '우상의 제물을 멀리하고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은 멀리할 것과 음행을 피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결례에 참석하여 유대인들 앞에서 율법을 지켜 행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가로 야고보가 바울의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정책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것입니다.

 

▶26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
서원한 기한이 끝난 그 네 사람의 모든 비용을 대주고 또 제단에다 머리칼까지 태우는 제사까지 다 끝내고는 서원한 나실인의 기한이 끝났음을 공포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이 복음이 후퇴된 것 같지만 교회의 화평과 또 자신으로 인해 복음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언약한 유대인 성도들의 약함을 담당하고 복음의 확장을 위해 적극적인 전도 자세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바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고 무리를 충동하여 붙잡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 길이 아직도 멉니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25절의 강조는 '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너희들도 지키지 못하는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라고 그 목에 멍에를 씌우느냐?' 그들에게 자유를 주자는 의미에서 바울이 각 교회에 편지한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입니다. /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여기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로는, 번제물로 일 년 된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 일 년 된 어린 암 양 하나, 화목제로 수양 하나, 그 외에 무교병 과자 등이었으므로(민6:1-21) 그 비용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용을 바울에게 부담하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서원 자를 위하여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것은 매우 경건한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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