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강) 이방인에게 보낸 사도 바울! (행 22:17-30)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간증을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 앞에서 아주 차분하게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⑴먼저 자신도 유대임을 밝혔습니다. 나의 신분이 너희들과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아주 강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지옥의 불쏘시개로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⑵자기 고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했다고 소개합니다. 다소는 당시 최고의 학문의 도시로서 그런 훌륭한 학문에 고장에서 태어났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⑶자기 스승이 바로 가말리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최고의 칭호를 수여 받은 일곱 랍비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문하생이 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⑷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있는 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너희들 못지않게 하나님을 섬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⑸당시 열렬한 기독교 박해자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4-5).
이토록 예수교에 대하여 핍박 자였다고 했습니다. 사람도 많이 죽이고 또 많은 예수쟁이들을 붙잡아 감옥소에 넣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도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에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가다가 정오 대낮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을 간증한 것입니다. 그는 큰 빛이 임하자 두 눈이 멀어버렸고, 겁에 질려 '주여 뉘시니이까?' 물었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때 바울이 깊이 깨달았습니다. 저 예수가 진정 생명의 구주이심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말씀하십시오, 제가 주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라고 신앙의 고백을 드리자 주님이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그는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하나님의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고 그가 안수하므로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때 세례를 받았습니다(9:12-).
이때 아나니아는 주님의 계시로 바울이 이방인의 전도자로 택한 그릇임을 알려주었습니다. 21절에서도 바울이 직접 고백하기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명령이 사도바울을 뒤집어 놓습니다. 온 세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주님의 이 명령을 듣고서 그냥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온 세계를 뒤집기는커녕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에게 붙잡히던지 유대인에게 붙잡혀서 큰 곤혹을 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을 살해한 살인자라고 비방할 것을 알면서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납니다. 그리고 기는 곳곳마다 임하시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장엄한 세계를 체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우리들도 '축복의 세계를 경험하고, 장엄한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믿/ ◀제목소개!▶
본문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안토니안 영문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 앞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17절 이하에서 다메섹에서 받은 사명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17절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안수 받고 눈이 회복된 뒤에 바울은 아라비아로 내려가 그곳에서 3년 간 하나님의 종으로 준비하고 훈련받고 있었습니다(갈1:17-18). 그러니까 아라비아 3년 후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회심한 뒤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왜 올라갔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기를 원했고, 직접 사도들과 만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행9:26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형제들과 교제하기를 진심으로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과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였습니다.
정말 이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인가? 본인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혹시 위장해서 우리를 체포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를 의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유일하게 한 사람이 나타나 바울을 도와줍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이 사람은 정말 예수 믿은 사람이다. 오해하거나 의심하지 말라' 바나바는 이렇게 사울의 입장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또 의심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럴 즈음에 사울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바로 계시 받은 장소가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이 거룩한 장소이므로 그곳에서 바울이 계시를 받았다면 어느 누구도 그 계시의 진실성을 시비하지 않습니다.
▶18절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지금 비몽사몽간에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의 음성을 듣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썬다씽은 인도가 낳은 대 전도자입니다. 그는 15세 때 어려운 철학서적과 종교서적을 다 읽었습니다. 1904년 12월 18일 그는 인생문제에 대하여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기독교 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나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인생의 해결책이 없다고 단정하고 모든 책과 성경까지도 불태우고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더디어 결단의 시간, 이른 새벽 5시에 목욕을 하고 급행열차가 지나갈 때 몸을 던질 것을 각오하고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전능자여! 힌두교이든 기독교이든 신이 계신다면 지금 이 순간 저에게 대답해 주세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입니다.'
이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이한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어째서 네가 나를 괴롭게 하느냐 나는 이미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이제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이다'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그가 성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나를 돕고 계시고 인도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인간의 말을 듣고 의사를 교환하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모습으로 들여오는가?
⑴꿈과 환상으로! 구약에 보면 요셉에게 꿈을 주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는데 자기 볏단은 일어나고 형제들의 볏단은 모두 자기 볏단에게 절을 합니다. 요셉은 때론 시련과 고난이 있었지만 이 꿈대로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⑵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적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엘리 제사장에게 찾아갔습니다. 또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지나갈 때에 '사울아! 내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변화 받아 예수님을 믿고 죽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⑶지혜와 계시를 통해서! 엡1:17-1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구약의 솔로몬의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주신 지혜입니다.
⑷양심을 통해서! 롬9:2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⑸성경을 통하여! 성경을 읽다가 깨닫게 됩니다. 또 기도하다가도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또 설교를 통하여 깨달음이 옵니다.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은 '하나님은 내가 성서를 연구하는 것만큼 말씀하십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만큼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⑹환경을 통하여! 기도하면서 환경이 변하는 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어떤 것은 환경을 통해 막아지기도 하고 내가 갈 길이 없었는데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⑺뜨거운 소원을 통하여! 빌2: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본문에서 바울이 들은 주님의 음성은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나가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 땅으로 향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을 보내십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속히 떠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사역 지를 예루살렘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실력도 있고, 야심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멋지게 수도 예루살렘에서 목회를 해 보려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의 생각과는 완전 다르게 이곳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이유에 대하여 '저희는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간증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많은 형제들이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때문에 처음에는 굉장히 섭섭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많이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자기 과거를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라고 19-20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19-20절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바울은 얼만 전까지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섭게 가두고 회당에서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다고 시인했습니다.
사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기 이전에는 교회를 핍박할 때, 어느 누구보다도 포악하고 잔인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사울 같은 사람은 마치 포도원에 들어간 산돼지처럼 모든 신자의 가정을 파멸시켰다'고 했습니다.
행8:3절을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의 잔인한 핍박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또 스데반을 죽일 때 자기가 주동자였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지은 죄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스데반 순교의 사건입니다. 그때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사울이 크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죽으면서 누구도 원망하거나 비겁하거나 살려달라고 애걸함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천사의 웃음을 머금고 순교했던 그 장면을 보면서 무엇인가 느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죽음은 아직 예루살렘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고백입니다.
지금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왜 자기의 과거를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겠지만 자신도 과거에는 유대인들과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같이 말한 것은 내 의지대로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내가 이렇게 되었음을 그들에게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21절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본문에서 언뜻 보면 주님의 생각과 바울의 생각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전하겠느냐? 그런 생각이 비슷한 것 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더 깊게 생각해보면 주님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동기는 바울이 생각한 동기와 달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주님도 먼저 말씀하셨듯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어서 자기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만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지 그것 때문에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21절 말씀대로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기 위함'입니다. 즉 주님은 바울을 향한 놀라운 계획과 섭리를 갖고 계셨기 때문에 그를 부르시고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멀리 이방인에게로 가야한다. 내가 너를 그곳에 보내려고 택하였다' 이것이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다를 때도 있습니다.
사55:8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은 깊고 더 높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머리칼까지 다 세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상황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향한 더 큰 일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라! 내가 너로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관심이 온통 복음이 모든 민족과 열방에게 전달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이 전달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바울이라는 사람을 쓰기 원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멀리'와 '이방인에게로' 라는 단어는 행1:8절의 말씀과 맥이 같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만 머물기를 원치 않으시고 땅 끝까지 멀리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기를 바라셨습니다.
▶22절 "이 말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본문에 보면 다시금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오히려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마자 더 이상 듣지 않고 흥분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민의식이 아주 강합니다. 그들이 멸시하는 것 중에 '죄인, 세리, 창녀, 이방인'은 가장 멸시 천대합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은 견딜 수 없이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메시야가 어찌 이방인의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 그들은 이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전도하지 말고 이방에 가서 전도하라고 했다하여 이러한 놈은 살려둘 수가 없다고 아우성을 친 것입니다.
한마디로 배타적이며 완고한 선민 의식과 이방인에 대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감당할 수 없어 하는 장면'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 편이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 편이다.' 그러므로 '살려둘 자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깨닫지 못한 몰지각에서 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는 유대인의 모습입니다.
▶성경에는 분명 인간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부분이 나타납니다.
⑴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우리 인간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1;6절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⑵다윗은 자기 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38:4절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백부장처럼 탕자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
⑶백부장은 믿음으로 예수님이 자신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분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마8:8절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⑷탕자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에 안깁니다. 눅15:21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영국 여왕이 위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의 하나는 대관식이 행해지기 바로 직전이라고 합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당 안에서 동서남북 각 방향의 청중들을 향하여 네 번 소리를 지릅니다. '귀빈 여러분! 저는 이분이 틀림없는 영국 여왕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분에게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대주교가 물을 때마다 위스트민스터 성당 안에 모인 청중들이 큰 소리로 네 번 승인의 대답을 해야 비로소 왕관이 여왕의 머리에 씌워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저도 오늘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틀림없는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이 분께 기꺼이 충성을 다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절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유대인들의 날리니"
당시 상황을 설명하겠습니다. 한마디로 폭도들이었습니다. 떠들고, 던지고, 날리니 이 세 가지 동작만 봐도 그들의 격렬한 분노와 흥분된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떠들며' 아우성을 쳤다는 것이고, '던지고' 유대인들의 겉옷은 홑이불 같은 것이어서 일을 할 때도 벗어 놓고 합니다만 극단적인 혈기가 올라올 때도 겉옷을 벗어 던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화가 나면 웃통을 벗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7:58절에서도 보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치기 전에도 무리들이 옷을 벗어 증인인 바울의 발 앞에 던졌다고 했습니다. 티끌을 공중에 날리는 것은 흥분하고 분노할 때 일어나는 유대인들의 풍속입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들은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면서 이런 놈은 죽여야 한다, 살려둘 수가 없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내가 곧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옷을 찢으며 '참람하도다'라고 탄식했던 것과 아주 비슷한 모양입니다.
▶24절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바울을 데리고 갔던 천부장이 그 소란에 깜짝 놀랐습니다. 천부장은 로마의 정규 사관학교를 나온 고급 장교로써 그의 휘하에 백부장이 있고, 많은 로마 병정들이 있습니다. 그의 권세는 막강합니다.
예루살렘의 치안을 담당할 정도니 아마도 시경 국장 정도 되는 위치였을 것입니다. 그는 히브리말을 모르기 때문에 떠들고, 던지고, 날리는 소동을 보면서 아마도 바울이 큰 죄를 저지른 죄인인 줄 알고 직접 신문하려고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고 말합니다.
영문 안은 부대 안의 경찰서입니다. 괜히 죄가 없어도 경찰서에 가면 떨리는 곳입니다. 백부장이 '채찍질하며 신문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신분에 따라 매의 형태에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인이 범죄 하면 누릅나무나 자작나무 막대기로 때렸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사람이 로마 사람이 아니거나 노예인 경우 본문에 나오는 본문에 나오는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여기서 채찍은 가죽끈에다 쇳조각과 망치를 매단 것이며 이것으로 심하게 맞을 경우 불구자가 되거나 죽기까지도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고후11:24-25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를 채찍질하여 신문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25절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그 당시에는 죄인들을 채찍으로 때리기 위해서는 먼저 기둥이나 말뚝에 채찍질하기 좋은 위치에 묶었습니다. 이때 채찍질의 표적은 대게 등입니다.
천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백부장이 졸병을 데리고 가서 바울을 묶었습니다. 이때 로마 병정들이 때리는 채찍이 굉장히 아픕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채찍 중간 중간에 뼛조각이나 쇠가 박혀 있기 때문에 한번 때리면 살점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때 바울사도가 그들을 향해 '내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인데 재판도 하지 않고 때릴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세계 최고의 시민으로서 정당한 법을 통해 재판하지 않고는 형벌을 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밝힘으로서 부당한 처벌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행16장에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서는 실컷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찬미했지만 본문에서는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 바울이 대처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참았습니다.
▶26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사람이라 하니"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가서 보고하기를 이 사람이 로마사람인데 정식 재판도 없이 두들겨 때리고 묶었으니 곤란하게 되었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27절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백부장의 보고를 들은 천부장이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우라면 피의자인 바울을 자기에게 불러 사실 여부를 묻는 것이 상식이지만 지금은 그가 직접 바울에게 달려와서 '네가 로마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는 뜻밖의 상황에 직면한 천부장의 당황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천부장이 '네가 로마 사람이냐?' 왜 이런 말을 하느냐하면 그가 방황하기도 했지만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으면서 로마 사람으로 사칭을 하면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진짜로 로마 시민권을 가졌느냐? 만약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발각되면 너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때 바울의 대답이 담담합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애써 증명하려 하거나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단지 간단하게 '그러하다'고만 대답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단호한 대답에 대해 더 이상 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어떤 절차도 밟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의 대답이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짜로 대답했으면 떨리는 음성으로 자신 없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 시민들은 토가라는 긴 망토를 걸침으로 로마 시민권을 나타냈는데 토가는 착용이 불편하기 때문에 어떤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만 입는다고 주석 가는 말합니다.
▶28절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천부장이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많은 돈을 주고 시민권을 샀는데 너는 어떻게 그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나는 나면서부터 시민권 자'였다고 대답합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은 원래 로마인이 아니고서는 몇몇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매우 중요한 자격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은 정부 고위층이나 로마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했던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 만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상당한 명예와 권리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이 시민권이 뇌물에 의해 주어지기도 했고, 로마 황제들이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시민권을 공개적으로 팔기도 했습니다.
특히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는 그의 아내까지도 이 시민권을 팔아 개인적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로마가 썩었습니다.
여기 천부장은 이 시기에 시민권을 얻은 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면서부터라고 했습니다.
▶바울 가문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게 된 배경을 학자들은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①B.C 171년 경 다소가 헬라의 시로 편입될 때 그 도시의 엘리트들이 로마 시민으로 인정되었는데 바울의 선조도 그 엘리트 중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설입니다.
②바울의 선조 중 누군가가 로마의 형정관이나 장군에게 지대한 공헌을 하여 그 대가로 시민권을 얻었다는 설입니다.
③바울의 선조가 돈을 주고 취득했을 것이라는 설입니다.
만약 바울이 그 당시 토가를 입고 있었다면 로마 군대에 의해 연행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들은 백부장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무고한 로마 시민을 결박하여 채찍질을 가한 것은 명백한 범법행위였습니다.
당시에 로마 사람들은 발레리안 법(Lex Valeria)과 포르시안 법(Lex Porcia)에 의해 보호를 받았습니다. 정당한 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채찍질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이 법을 어기고 함부로 채찍질을 가할 때는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처벌이 어떤 것인지는 백부장 본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의 보고를 들은 천부장 또한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그가 직접 바울에게 달려왔습니다. '네가 로마 사람이냐'는 물음에 바울의 대답은 담담하고 간단하게 '그러하다'고만 대답했습니다. 왜 그렇게 싱겁게 대답했습니까? 바울에게는 더 귀중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 빌3:20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연고지는 하늘입니다. 모든 관심사가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계21-22장에 있어야 합니다. /믿/
▶29절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바울을 묶고 채찍질하던 사람들이 다 물러갔습니다. 이제 천부장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 임을 알고 그를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한 이유는 당시에는 로마 시민의 경우 재판 없이 처벌하면 위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재판 과정도 없이 바울을 가죽 줄로 묶고 때렸으니 법을 어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굉장히 당황하고 두려워했습니다.
후에 23:26-27절을 보면 천부장이 뒤에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허위보고서를 총독에게 보냈습니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 주었다고 허위보고를 했습니다.
▶30절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바울은 로마인이었고 로마법에 의하면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만 심문할 수 있었으므로 고소 자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함부로 바울을 심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결박을 풀어주었지만 그러나 지금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원인규명을 해야 했고 또 그 문제가 종교적인 문제이므로 천부장이 산헤드린 공회로 소집한 것입니다.
사실 산헤드린 공회는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응모가 있었지만 천부장은 그런 깊은 상황을 모르고 그 사건에 조심성 있게 다루기 위해 유대 종교재판 기관인 산해드린 공회의에 그를 인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공회를 통해서 정식 재판을 해 달라고 해서 로마로 후송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로마선교의 위대한 비전이 열리게 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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