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제64강)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행 23:1-11)

by 【고동엽】 2022. 3. 11.

(제64강)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행 23:1-11)

 

지금도 인상 깊게 읽어지는 문학 작품 가운데 '진주 목걸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자존심이 강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화려한 파티에 부부가 참석하라는 초청을 받고 여인은 초라하게 가기가 창피했습니다.
생각 끝에 부자이며 친한 친구에게 가서 진주 목걸이를 빌려 목에 걸고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는 자기 과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빌린 진주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남편과 둘이서 잃어버린 진주 목걸이와 똑같은 것을 사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0여 년 간 뼛골 빠지게 고생을 하였습니다. 부부의 마음속에는 오직 진주 목걸이뿐이었습니다. 갖은 고생을 다 한 끝에 드디어 진주 목걸이를 10년 만에 살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흰 머리칼도 생겼습니다. 얼굴에는 주름살도 늘었습니다.
그 동안 여행도 못 하고, 먹지도 못 하고 진주 목걸이 스트레스에 쌓여 살았습니다. 진주 목걸이를 사 가지고 친구에게 갔습니다.
10년 만에 만난 친구를 보며 그 친구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너 왜 이렇게 늙었니?'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친구야! 미안해. 10년 전에 빌려준 진주 목걸이를 사실은 그 때 잃어 버렸어. 그 동안 똑같은 것을 네게 사다 주려고 10년 간 남편과 고생하느라고 이렇게 늙었다. 늦게 주어서 미안해. 받아 줘'
이 말을 들은 친구는 놀라며 한마디하였습니다. '친구야! 이렇게 비싼 진주 목걸이를 왜 가지고 왔니? 그 때 내가 네게 빌려준 진주 목걸이는 가짜였어!'
이 말을 들은 친구는 기절할 뻔하였습니다. 가짜 진주 목걸이 하나 때문에 10년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짜에 생명을 걸어서는 안됩니다. 진짜 참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진짜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도바울의 위대한 신앙세계를 접목할 수 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결박되어 붙잡혀 가는 영문 길에서도 담대히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본 장으로 넘어와서도 유대교의 최고 법정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 하는 일에 담대했습니다. 동족들에게 핍박을 받고 매를 맞고 죽을 뻔했을 때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로마의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당할 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담대함이 어디서 왔습니까? 한마디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예수님의 능력이 그렇게 담대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도 예수님처럼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게 된 것을 보고 역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구나 생각됩니다. ◀제목소개!▶

 

바울은 지금 안토니오 성체, 그 병영의 높은 계단 위에 서서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세 가지 자랑거리인 '율법과 성전과 그들이 선민'이라고 하는 그 세 가지에 대하여 바울이 모독했기 때문에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자기를 변호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철저한 유대인입니다. 성전도 사랑하고 율법도 존중하고 그리고 나 자신이 유대인입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마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깨어지면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율법을 온전히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이며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구약의 핵심이요 율법의 완성임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방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알리기 위하여 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에 뜻에 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시니 난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
이 소리를 듣고 흥분한 군중이 '저 놈을 살려둘 수 없다'고 외치면서 다시 죽이려고 합니다. 왜 죽이려고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레벨로 놓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경건하고 의로운 선민을 저 이방의 개 같은 죄인과 똑같이 평가하다니, 우리들도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니' 그들은 이를 갈면서 유대인의 특권과 자랑을 배격한 복음에 대하여 반발을 하게 됩니다. 과연 이 내용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사는 자기들의 자랑 자기들의 특권 자기들의 의가 무너지는데 대한 분노가 가슴속에서 끓어올랐을 뿐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믿음도 없고 오직 그들 선민의식에 붙들린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과 바울이 대립을 일으키고 자꾸 죽인다고 하자, 로마 천부장이 이제 막아서 바울을 일단 살려놓고, 자기는 로마인으로서 히브리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저 군중들이 저렇게 분노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바울을 고문해서 죄가 뭔가를 자백 받으려고 시도합니다.
그 때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를 이렇게 해도 되느냐?'고 하자 천부장이 깜짝 놀라서 고문을 하지 못하고 하고 생각하기를 '지금 이렇게 군중들에게 시달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유대인들의 일이니까 유대인의 최고 높은 기관인 산해드린 공회에 가서 정정당당하게 이 사람을 변호할 기회를 주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산해드린 공회로 그를 끌고 갑니다. 공회란 72명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국회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산해드린 공회에 서서 바울이 변호한 그러한 내용입니다.
산해드린 공회는 유대의 최고의결기관입니다. 그런데 아주 무서운 기관입니다. 예수를 죽이라고 거짓 증인을 매수해서 빌라도에게 보낸 곳입니다. 스테반을 때려죽이라고 판결한 곳도 바로 산해드린 공회입니다. 특별히 복음에 관한 문제에는 가장 적대적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를 대표하는 기득권 측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절대로 복음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너그럽게 판단할 수 없는 기관입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이 자리에 서서 담대하게 자기를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1절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보십시오! 바울이 얼마나 담대합니까? 보통사람 같으면 국회의원들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서 말을 제대로 못할 것인데 바울은 공의회를 주목하고, 정면을 내려다보면서 당당한 모습으로 말을 합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설교자는 당당합니다. 전도자는 당당해야 합니다. 믿음은 능력이기 때문에 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들아' 바울의 설교의 특징입니다. 언제나 중요한 대목에서는 '형제들아' 이렇게 부릅니다. 이것은 같은 피가 흐르는 동족임을 나타내는 말이요, 더욱 더 친근미를 주려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바울의 양심선언을 돌볼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형제들아!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양심선언은 한 인간의 진실을 고백하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내게 계시하였고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나는 그 진리 가운데서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려고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양심에 부끄러움 없습니다. 더구나 억지로 하지 않고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그 뜻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양심에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런 내가 왜 죄인이 되어서 죽도록 몰매를 맞아야 하고 당신들 앞에 이렇게 서야 하는 것입니까?' 아마 그런 뜻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양심선언은 마땅히 존중되고 경청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아마도 공적으로 '양심선언'을 한 최초의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행24:16절을 보면 후에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도 이런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한마디로 바울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아니하고 담대한 힘이 나옵니다.
우리들은 바울처럼 양심을 따라 범사에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겨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울처럼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노라. 이런 양심을 가진 바울이기에 우리를 향하여 지금도 권면합니다.
딤전1:19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선한 양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파선한 배와 같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재판소입니다.
유명한 작가 '빅터 유고'가 이런 말했습니다. '바다보다 위대하고 장관인 것이 하늘이다. 하늘보다 위대하고 장관인 것은 인간의 양심이다.' 이 세상에 양심이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바다보다 하늘보다 위대한 그 양심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양심은 언제나 성경에 비판을 받고 양심이 성경을 따라가야 합니다.
2절은 사도바울의 양심선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갑자가 대 제사장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말합니다.

 

▶2절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대제사장 바나바가 바울의 양심선언을 듣다가 '그 입을 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저 방정맞은 입을 때려라'는 것인데 무슨 뜻입니까? 들을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일단은 증인으로 불렀으니 그 말을 다 들어봐야 하고, 들은 다음에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판단해야 될 것이고 그리고 거기서 죄가 정해진 다음에 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마디 하자마자 기분 나쁘다고 딱 때렸습니다. 이것 자체가 불법재판입니다.
여기 '아나니아'는 주후48-58년 약 10년 간 대제사장으로 군림했으며 잔인함과 탐욕으로 유명했습니다. 요세푸스는 그는 분반 제사장들로부터 십분의 일 세를 몰수하여 재산을 축적했고, 로마 고관들에게는 아낌없이 뇌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입을 치라'는 말은 말을 못하도록 하라는 뜻이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뺨이나 입을 때리는 행위는 사람의 인격을 극도로 모독하는 행위로서 아나니아의 폭력적 성격이 잘 나타난 행위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바울이 증거 하는 복음을 폭력으로 막으려는 마귀의 역사임이 분명합니다.
요세푸스는 주후66년경 로마정부에 반기를 든 유대인들이 저항이 있었는데 이때 아나니아의 집은 불을 질러 버렸고, 아나니아는 헤롯대왕의 궁전으로 피신하여 궁전 뜰에 있는 하수도관속에 숨어 있다가 그의 형 히스기아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3절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여러분! 입을 얻어맞으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이런 모욕을 받고 바울이 화가 났습니다. 바울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나니아의 불법적이고도 인격 모독적인 행위에 대해 조금도 굴하지 않고 강력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⑴'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일찍이 주님도 마23:27절에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여기 '회칠한 담'은 다른 말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에 많이 모이게 되는데 시내에 묶을 여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도 자야 되고 사람들이 이렇게 산에서도 잠을 자는데 그 이스라엘에는 산마다 동굴이 매우 많습니다. 그 동굴 중에는 빈곳이 있는데 서민들에게는 잠자리로서는 최고입니다. 그런데 동굴 중에는 무덤이 또한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모르고 시체가 누워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 그러면 성전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서 예루살렘 시 당국에서 명절 전에는 산을 싹 돌아다니면서 무덤인 동굴 앞에는 회벽을 칠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칠한 무덤이요 회칠한 담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겉은 깨끗한 것 같으나 속은 썩어빠진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겉으로는 경건한 채 하지만 속은 썩어버린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을 한 것입니다.
바울의 위선은 책망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예언적인 말을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의 예언대로 주후 66년 9월에 열심당원들에 의해 암살되므로 슬픈 인생으로 인생을 끝낸 자입니다.
⑵'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신25:1-2/레19:15절을 보면 율법에는 죄를 정하지 아니하고는 때리지 못하게 되어있고, 재판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하며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절대로 정죄할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의 위선을 책망한 것입니다. 법대로 판단한다고 하는 자가 법을 어기고 있으니 법의 권위가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고 항의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바울도 성격이 대단합니다.
그뿐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는 법정도, 재판도, 권력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1절에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입니다. /아멘!/

 

▶4절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이때 주변 사람들이 바울을 제재합니다. <저분이 누군지 알고 그렇게 욕하느냐? 하나님의 대제사장에게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려서 되느냐?>
사람들은 그 대제사장이 한 말과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대제사장에게 어떻게 욕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사회에서는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자로써 대단한 권위와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감히 대제사장의 권위에 맞설 수는 없습니다.

 

▶5절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놀라운 말입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오리발 같습니다. 본문의 해석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문자 그대로 보는 견해입니다.
①바울이 지난 20년 간 예루살렘을 자주 방문하지 못한데다 방문을 했다 해도 그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누가 대제사장인지를 물었다는 것입니다.
②바울은 눈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③지금 모인 공의회를 정기적인 산헤드린의 모임이 아니라 로마관리에 의해 긴급히 소집된 회의이므로 대제사장이 자기의 직위를 나타내는 옷을 입지 않았고 공식좌석에도 앉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고 있으면서도 빈정대는 말로 무시해 버렸다는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순식간에 자기 잘못을 깨닫고 그 권위에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대제사장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백성의 관원들을 비방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잘 못했습니다.' 바울이 당장 사과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경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실수와 단점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은 용기 중에 용기입니다. 특히 지도자가 자기 잘못을 인정할 때, 그의 인격이 더 위대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감추고 변명하고 자기 합리화에 열을 올립니다. 속이 다 보이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대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출22:28절의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 권위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까지 잘못을 인정한 것을 보면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 것을 분명히 몰랐을 것이라는 학설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위를 받은 사람이 그 권위를 바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부모의 권위를 주셨고, 학생들에게는 교수라는 권위를 주셨고, 또한 하나님은 정부에 권위를 주었습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그 권위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 권위가 잘못 사용될 때, 그 권위가 타락하거나 권위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6절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당시 유대나라는 네 개의 큰 종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파, 엣세네파, 헤롯당'입니다.
본문에 보면 재판을 하는 사람들이 두 그룹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그룹은 사두개인, 또 한 그룹은 바리새인입니다. 사실 이들은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정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할 때도 한 패가 되었고, 지금 복음의 기수인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한패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교리를 보면 이렇습니다.
①사두개파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의 사후세계도 믿지 않았습니다.
일체의 구전도 인정치 않고, 오직 모세의 율법서만 인정하고 철저히 지켰던 무리입니다. 이들은 종교를 하나의 수신적 도덕률로 생각하는 극히 정치적인 사람들이요, 인본주의자들이고,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②반대로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고, 천사도, 영계도 사후세계도 믿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주의자들로 '바리새'란 말 자체가 '구별'이란 말로서 자신들이 구별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이 정치적이었다면 바리새인들은 극히 종교적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인본주의자들이라면 바리새인들은 신본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큰 잘못은 그 교리 속에 부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가 바리새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 때문에 바리새파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출신을 말하고 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전하다가 이렇게 심문을 받게 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바리새파의 교리가 옳다고 손을 들어준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심문을 받는다는 말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나 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나는 바리새파 사람으로써 부활이 있다고 믿는 것 때문에 이 고생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적어도 바리새인들은 자기 말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부활이라니?' 이렇게 나올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빌미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사고 방식과 사두개인의 사고방식을 다 이해했기 때문에 바울은 바리새인은 부활을 철저하게 믿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중시했고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대단히 종교적입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고 천사나 악마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 철학자들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바리새인들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믿었으면 두 파가 싸움을 안 하고 구원을 얻어 생명 길에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7-8절입니다.

 

▶7-8절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바울이 '나는 바리새인으로써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 그랬더니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바울의 말은 효력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바울을 죽이려는 일에는 한 마음이 되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의견 대립으로 인하여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여기 '다툼이 생겨'다는 말은 서로 다른 입장을 옳다고 주장하면서 맞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종파는 기독교에 대해 그토록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들만에 대립되는 신학적 노선에 있어서는 큰 분열 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 두 종파는 신분상으로도 갈등 관계에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세속적인 권력에 아부하여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상류층에 속해 있었으며 바리새인들은 평민출신으로 신분상의 갈등이 컸습니다.
가장 큰 갈등은 뭐니 뭐니 해도 신학적인 갈등입니다. 교리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사후에 생명을 인정했으며 천사의 존재도 인정하고 육신의 부활도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부인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신분과 주장이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교리문제로 그들은 다시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저들은 바울과 충돌해야 하고, 대립해야 하고,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싸우고 맙니다.
하나님은 선인의 손으로 악인을 죽이시지 않습니다. 악인의 손에 악인이 죽게 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너희가 악으로 악을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다. 기도가 이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9절 "크게 훤화가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그들은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크게 헌화가 일어날 새' 이 말속에 '큰 소리, 고함소리'로 그들의 논쟁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산헤드린 공의회가 열렸던 원래의 목적은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서였지만 바울의 말 한마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공의회가 소집된 원래의 목적을 읽고 서로 자신들의 교리만을 주장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심문 받은 이유가 인간의 사후의 문제, 즉 육신의 부활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말이 자기들의 주장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의 적은 바울이 아니라 그들의 교리를 비방하는 사두개인들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 중 몇몇 서기관들은 바울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찾을 수 없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말이 그 배후에 있는 천사나 영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영의 존재는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은 노골적으로 공격할 것을 자기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바울에게 유리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울을 '살리라'하고 사두개인들은 '안 된다, 우리 교리에 대하여 정면으로 공격하므로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고 난리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심문하기 위하여 모인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바울을 돕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 어디서 어떠한 문제에 봉착하더라도 하나님 안에 바로 서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보십시오! 서기관이 말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서기관은 율법 전문가입니다. 그가 지금 바울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10절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큰 분쟁이 생겼습니다. 처음 분쟁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합작하여 바울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분쟁은 자기들끼리의 분쟁입니다. 처음부터 그들의 작태를 누가 보고 있었습니까? 바로 천부장이었습니다.
원래 공회 소집은 천부장이 소집한 것으로 바울을 심문하다고 소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태가 이상히 흐릅니다. 잘못하다가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 그의 손에 찢어질까 겁이 났습니다.
본문에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이 말은 '깨뜨려 버리자, 산산조각을 내라'는 뜻으로 천부장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바울의 신상에 큰 위험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빼앗아' 라는 표현은 사두개인들이 바울을 붙잡고 폭력을 가하려했기 때문에 강제로 떼 내어 데려가야만 했던 급박한 상황임을 보여줍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천부장의 마음을 움직여 바울을 건지려는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자는 천부장을 통해서 보호하고 계십니다. /믿/

 

▶11절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절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사명이 끝난 자만이 죽습니다.
여기 '그 날 밤'은 어떤 밤입니까? 몸도 마음도 지쳐 있는 그런 밤입니다. 바울도 사람인지라 불안하고 용기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런 바울에게 우리 주님이 직접 나타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15: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일찍이 사도바울은 고린도에서도 위기를 겪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주님은 환상 가운데서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곁에 계신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와 이 자리에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먼저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 주님이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바울아 바울아 힘내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네 눈에는 안 보여도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 칭찬해 주십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같이' 사실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울은 증거 한 것이 없습니다. 증거 하려다가 죽도록 얻어맞았고 죽을 뻔했으며 역효과만 일어났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주님은 너는 예루살렘에서도 나를 증거 했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십니다.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지금 사도바울은 선교 1, 2, 3차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의 선교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로마로 가는 것이 바울의 목표였습니다(행19:21). 하나님은 꿈을 가진 자는 쓰십니다. 목표와 계획을 가진 자를 쓰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크게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⑴주님은 놀라운 계획을 세우시고 바울을 연단시키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을 연단시키시고 축복하십니다.
⑵하나님의 계획은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로마에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구원 받은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런 영혼들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⑶주님이 왜 이렇게 환상 속에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에 가더라도 담대하라는 것은 그곳에 더 큰 환란과 핍박과 위기가 있을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너와 함께 한 것처럼 그곳에서도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입니다.
바울은 주님이 힘주시므로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히13:5-6절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산헤드린 앞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있는 외로운 바울의 모습에서 오늘 이 현실 앞에 서 있는 고독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위로하셨고 더 큰 소망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위로와 큰 소망을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