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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7일 요한복음 16:25-33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한복음 15장 1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려면 예수님께 속해야 한다는 말이거든요.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되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와 적대를 경험할 수 있는데, 만일 세상이 우리를 설득하고 세상이 우리를 아무 저항감 없이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영적 친인척관계가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과 영적친인척 관계가 성립되면 세상은 우리를 편안하게 품지 못하고 우리로 하여금 돌출 분자가 돼서 배척당하게 만들거나 우리를 추방하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상품 매매 자본주의, 모든 것을 상품으로 다루는 시장 전체주의 세계 속에서 탈 없이, 시장전체주의라는 가이사의 큰 지배 아래서 탈 없이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전체주의와 교회와의 갈등과 긴장은 없습니다. 이런 자본주의에 속한 교회가 공산주의에 속한 교회를 보면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서 완전히 무신론과 짝하는 교회가 됐다고 비난합니다. 공산당을 인정하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WCC에서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있는 기독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60- 70년대 약 20년 동안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있는 교회가 WCC에 대표단을 파견하면서 어떤 교회, 시장전체주의 사회아래 자본주의체제 아래 있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움을 유지했는지, 공산체제 아래 들어간 교회가 기독교다움을 유지했는지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습니다. 1956-1959년 사이에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있는 교회를 WCC가 받아들이는 이 시점에 한국장로교가 WCC에 가입하느냐 마느냐로 심각한 갈등이 벌어집니다. 1959년입니다. 남산에 있던 평양장신을 계승했던 한국 장로신학교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갈라집니다. 합동측은 현금과 신학지남이라는 잡지 대부분을 가져가고, 통합측은 도서관 책을 대부분 가져갔습니다. 교수진의 대부분은 통합 측으로 갔습니다. 통합측은 끝까지 통합하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이고 합동은 우리가 직선 수직 모든 각도 모든 면에서 같아야만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해서 합동은 엄격하게 교리적으로 축자적인 마지막 순간까지도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합동측이 됐습니다. 합동측이 바로 시장전체주의 자본주의 한기총을 발생시키는 일종의 무저갱과 같은 곳입니다. WCC에 들어왔던 교회는 그 유명한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출신의 신학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기독교가 공산체제에 있는 신학교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얀 밀리치 로흐만, 로마베카 이런 사람들에게 충격을 받고 스위스에 모여서 공산주의 체제 신학자들과 자본주의 체제 신학자들이 공부를 했는데 공산주의 체제 아래 기독교가 원시기독교에 가까운 겁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 기독교는 사기업 이용하듯이 교회를 마음대로 운영하고 물건도 매입하고 부동산도 매입하고 종교인 면세라고 무한한 자유를 주는 자본주의가 훨씬 더 성경 기독교에 가깝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매각할 수도 없고 오히려 큰 건물에 따로 모여서 갈만큼 큰 권력기관이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최소한 장려했고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 없이 신앙의 순수성만 가지고 인민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정도로만 종교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북한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부동산을 교회가 매입하고 매각하는 자유는 없습니다. 주를 위해서 주기도문 읽고 기도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은 굉장히 신앙을 박해하는 것이고, 교회나 한기총 같은 무리들이 엄청난 해외 부동산을 매입하고 교회 헌금을 가지고 온갖 나쁜 일을 일삼고 MMF 같은 단기주식시장에서 돈을 던지고, 이런 모든 악행을 종교의 자유라고 용납하는 이 자본주의는 정말로 기독교와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다 틀린 겁니다. 지금 한국기독교가 말하는 종교의 자유는 타락의 자유이지, 종교의 본 자유가 아니거든요. 사회주의는 종교가 자기를 과잉되게 표현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진짜 신앙에만 골몰합니다. 사회주의 기독교의 특징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만 생각하는 기독교, 오늘날 자본주의 기독교는 종교이름으로 하는 모든 사기업 활동, 이익 창출하는 활동을 모두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 자유를 존중하는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하나님과 친화성이 있는 체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공산당은 스탈린과 레닌 체제 아래서 신실한 수녀를 많이 죽였습니다. 모택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야만적인 폭력이 있지만 레닌과 스탈린은 강제수용소나 굴락 같은데 집어넣어서 죽이고 박해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는 돈과 쾌락과 이 모든 악한 것들로 교회 영적지도자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악한 체제 아래서 교회를 사기업 운영하듯이 살아가는 이런 방식보다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노동하며 영성을 회복하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환난을 당한다는 말은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된 사람에게만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환난을 당하지 않고 세상과 유착 관계 때문에 오는 비본질적인 환난을 당합니다. 소돔성과 고모라성이 가까운 요단 들판에서 삶의 근거지를 찾았던 롯을 보세요. 요단 들판을 보고 여호와의 동산처럼 물이 풍성하게 공급되고 관개용수가 충만한 소돔 요단들판을 보고 근거지를 옮겼습니다. 롯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환난은 그돌라오멜의 동맹국과 소돔동맹국이 5대 4로 전쟁이 붙었는데, 그돌라오멜의 동맹군이 롯과 부녀와 인민을 잡고 저 먼 나라로 포로살이로 끌고 갔습니다. 이런 롯이 당한 환난은 요한복음 16장 13절이 말하는 그 환난이 아닙니다. 대부분 오늘날 기독교인의 환난은 소돔성과 유착돼 살면서 소돔성과 같이 망하는 환난을 당하지, 소돔성 때문에 소돔성을 고치기 위해서 소돔성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예수에게 소속된 자가 느끼는 자가 경험하는 환난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고 슬픔이고 이것이 오늘날 이 본문에게 깊이 공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일주일 내내 이 본문을 묵상했지만, 이것의 문자적인 뜻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총체적으로 몸이 전율하듯이 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위로 받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세속적입니다. 어떤 본문도 세속과 긴장이 되지 못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세상 안에서 환난을 당하는 이 경지를 맛볼 수 있을까요? 우리 예수님을 홀로 버려두고 뿔뿔이 도망치는 예수님이 경험했던 절대고독, 하나님 외에는 나에게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 절대적으로 버림받은 것 같은 이 고독,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예수와 함께 있는 자의 고독, 모두에게 버림받고 홀로 남겨진 자의 고독이 세상 안에서의 환난이거든요. 이 환난은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홀로 남겨 내버려둔 십자가의 시간, 버림받은 시간, 십자가에 매달려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슬픈 시간, 이 환난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지 못하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만해서 우리를 달랜다 했다면 그건 주님이 우리를 말로만 달래는 관념론적인 위로만 한 겁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우리를 위로한 게 아니라 진짜 세상 환난의 극적인 마지막 완성점인 십자가에 달려죽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죽음을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를 십자가에 매다는 이 시간, 우리를 절대결핍, 절대적인 고독으로 우리를 결박하는 이 시간이 두려울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이때 이 세상은 유대종교권력자들과 로마의 정치 권력자들의 담합체입니다. 이 세상은 기독교적 진리가 극댓값을 요구하지 않으면 박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일대에서 오순도순 목가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면 이렇게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의 홈그라운드인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시 갈릴리에서 자유농민들과 오순도순 사랑의 목가적 공동체를 이루었다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일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 진리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반드시 결승전에서 유대종교권력자들, 그 시대의 종교권력자들과 거짓종교와 담합하는 정치 권력자들과 만나게 됩니다. 기독교 진리의 마지막 궁극적인 실천에는 종교권력과 정치권력, 종교 정치 경제 권력의 종합적인 수혜자들과 기득권자들과 반드시 만나게 돼 있습니다. 결승전에서 만나서 이 땅을 지배하는 신들과 정면으로 알몸으로 조우하는 것을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작은 사무실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작은 마을에서 경험할 수 있고 작은 읍내 단위의 교회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읍내 단위의 교회가 읍내단위의 유흥업소와 갈등을 빚을 수 있습니다. 작은 도시의 폭력조직들이 장악하는 유흥업소들을 성도들을 아무도 가지 못하게 감화시키면, 주류 소비량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유흥업소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게 만들면 유흥업소는 망해버립니다. 그러면 그때 로마제국과 같은 작은 세계 안에서의 권력자들이 등장하여 우리를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우리를 궁극적으로 지배하는 가이사, 예루살렘 성전 종교권력의 거짓됨과 악함을 폭로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교회를 비판하려고 하지 않아도 제대로 된 복음을 계속 선포하면 자신도 모르게 지금 한국교회가 매우 잘못하고 있다는 말을 해버린 셈이 됩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대부분 잘못하고 있다, 특히 종교권력자들은 잘못하고 있다, 라는 말을 하는 셈이 됩니다. 기독교 복음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자애로움을 설명하고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하신 분인가를 계속 강조하고 선포하면, 이 세상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악마적인 권력의 소유자이며 그들이 얼마나 도착된 자들인가를 말하는 셈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신앙, 십자가에 달리는 왕이 됨으로 모든 세상 신하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왕들이 거짓 왕임을 예수님은 폭로한 겁니다. 왕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백성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도자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결핍의 십자가 비천의 십자가에 매달려서 일반 제자들과 백성들을 살려내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로마제국과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자들은 지도자인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평민과 인민과 노예들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갈릴리에서 2천 명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2천 명이 갈릴리에서 십자가에서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하자마자 갈릴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2천명이 십자가에 처형된 사건을 금방 아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말을 할 때 예수님을 궁극적으로 죽일 세력이 로마제국인 것을 예수님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한 순간 자기가 유대인의 왕으로 즉 로마제국의 체제에 반발하는 자로 오해받아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을 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 역사적 맥락을 보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말이 얼마나 인화성이 높은 강력한 폭발성을 가진 언어인지 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와 있느냐? 로마제국 출장소가 와 있는 안토니오 수비대, 로마의 거대한 종교권력의 본산지 예루살렘 성전 앞에 와 있는 겁니다. 지금 적진에 와서 이야기한 겁니다. 적진에 와서 포위됐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내버려져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아무도 예수님을 도와줄 수 없는 시간이 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 혼자 내 버려둠을 당하는 때가 온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어서 대부분 사람들에게 포기하고 싶은 진리라는 말이에요. 대부분 사람들은 기독교 진리를 가지고 십자가에 뚜벅뚜벅 걸어가기 보다는 뿌리치고 도망가고 싶은 것이 기독교 진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걸 인정해야만 애통하는 마음이 들고 하나님께 진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한민국 같은 세상에 살면서 기독교 신앙으로 살면 왜 기도해야 합니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한시도 살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너무 허무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일 한 달 동안 기도하지 않으면 무신론자가 됩니다. 멀쩡한 사람이지만 한 달간만 찬양과 기도를 쉬고 말씀을 덮어버리고 마음대로 주일날 11시에 기원에 가서 바둑을 두고 있으면 신앙을 잃습니다. 심지어 두 달 동안 제가 성경보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만약 당구장에 가서 당구를 친다? 말보로를 피우면서 맥주를 마시면 실족할 만큼 딴 사람이 됩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놀라지 말고, 지금 김회권이란 사람의 신앙이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경향신문을 읽고 JTBC를 보면서 믿음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이 효자동에 역사하지 않는가? 정부종합청사에 왜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는가? 왜 대한민국 검찰에는 이렇게 인간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는가? 대구경북지역에는 왜 인간성이 나쁜 사람들이 많은가? 결국 검찰 안기부 군인조직은 TK PK권력, 호남 사람들은 집어넣자마자 내부고발자가 되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진입하지 못합니다. 생물학적인 호남인맥은 어쩔 수 없이 TK PK에 박해당함으로 내부고발자가 됩니다. 검찰과 경찰 군부 내 80%입니다. 저는 호남 사람들이 전부 다 대구 부산으로 이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호적상으로는 영남 사람이지만 가치적으로는 호남사람처럼 행동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검찰 차관급 이상으로 가려면 PK, 빨리 영남으로 가야합니다. TK PK가 이렇게까지 나누어가지려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우리 아니면 자유대한민국 누가 지키냐? 이것이 바로 조갑제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구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공산당이 영구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는 땅, 낙동강은 넘지 못했다, 낙동강은 우리가 지켰다, 그러나 서부경남부터 호남은 전부 다 6개월 전부 치하에 있어서 공산당 물이 들었다, 이것이 TK PK 사람 생각입니다. 호남 사람들은 왜 틀렸냐? 공산당과 6개월 9개월 함께 살았다, 그러나 우리 대구 사람은 한 번도 공산당에게 몸과 마음을 맡긴 적이 없다, 그런데 대구전투에서 실제로 낙동강을 넘지 못했습니다. 나는 김일성에 대해서 유감이 많습니다. 대구부터 공격하지 않고, 이렇게 했는가? 제가 살던 서부경남, 순천 진주 호남같이 다 공산 적산 치하였습니다. 경남 하동 북천 진주 이쪽에 하씨와 엄씨 부족지파가 공산당과 갈려서 40여명을 서로 죽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아베노믹스, 왜 아베는 다시 부활재림해서 저렇게 나쁜 짓을 할까? 이스라엘의 네탄야후와 리쿠르드는 왜 재림해서, 리쿠르드는 두 번째입니다. 네탄야후와 아베는 똑같이 재림한 겁니다. 재림한 수상들은 훨씬 더 강화된 악화된 우익권력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 우리가 얼마나 더 괴로워하고 피눈물을 짜내야만 얼마나 저항하고 얼마나 애가를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정의를 주시려고 우리를 이렇게 능욕하실까? 이렇게 모멸하고 못살게 구실까? 이런 간절한 애가가 든다 말이죠. 어쨌든 제가 신앙을 유지하는 길은 애가를 유지하는 길밖에 없다, 지금 내가 읽을 성경은 애가밖에 없다, 예레미야애가만이 유일한 성경이다, 나는 잠언서는 못 믿겠다, 결신한 사람 잘 산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런 세상이 출연할 줄 몰랐죠? 하늘에서 지상이 보이겠습니까? 이런 생각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창조할 때 상상도 못한 세상입니다.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습니다. 청해진과 유병언은 세월호의 핵심 고리가 아닙니다. 간단하게 민사소송 처리하면 됩니다. 유병언은 적어도 세월호 침몰과는 직접적인 범죄적 인과관계가 안 됩니다. 대통령이 2시간 30분 동안 대통령 국정원장 해수부장 네 기관장이 침몰하는 그 순간 동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기 어려워합니다. 그것만 밝히면 진상조사가 끝납니다. 대통령은 2시간 반 동안 뭐했길래 이렇게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그것만 밝혀주면 되는데 말하지 않습니다. 온 국민이 그걸 기다리고 있는데 온 국민이 열망하고 있는데, 공중파는 7.30 재보선 선거 일분도 할애하지 않습니다. 장마가 계속되겠습니다, 오늘 나들이 갔는데 태안 앞바다로 헬기를 타보고 가봤습니다, 뉴스가 끝입니다. 공중질서에 관한 뉴스가 일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KBS MBC 뉴스입니다. 우리를 지적 난장이들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지금 몰라서 바보처럼 당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점점 기도의 동력을 잃어갑니다. 하나님께 저항하고 절규하고 부르짖는 기도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한다는 말,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환난을 당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같이 타락해버리면 됩니다. 같이 지구를 황폐하게 하고 같이 대지를 오염시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환난을 당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심어주신 빛 때문에 주님이 심어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 때문에 타락할 수 없고, 타락하는데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해가고 오염돼 가는 세상을 막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 버려둠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진짜 왜 악한 자들, 이세벨과 니골라당을 쫓아가는 자들이 기독교신앙을 대변하고 정당한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대변 못하고, 기독교 신앙은 가장 안티 기독교적인 가치를 표방하는 자들이 기독교의 대변인이 되는가? 이것이 환난입니다. 저도 가만히 생각해봤습니다.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뭘까? 대한민국에 살지 않는다면 이 괴로움을 피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애착감만 없으면 이 괴로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민 갈 나라도 없습니다. 중국도 갈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길 말고는 어떤 지구상에도 이민 갈 나라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이 많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내 옆에 아무도 동지가 없다는 환난, 절대고독, 내가 이 세상의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절대 무기력감, 한국기독교의 한 주먹의 작은 소수 가지고는 한국기독교를 올바르게 회복할 길이 없다는 절대무기력감, 자기회의, 이것이 바로 환난입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저는 이것이 위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로만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면 안 되고, 결국 제가 보니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게 아니었습니다. 이긴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이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해서 관중들 집에 가고 나서 혼자 몰래 부활하셨잖아요. 다 있을 때 부활하셔야지, 제가 기대하는 건 이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혔을 때, 로마의 제 삼창 군이 창을 던졌을 때 창이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예수님의 식스팩을 뚫지 못하고 예수님은 강철처럼 용감한 사람이 돼 껄껄껄 웃으시며 가이사를 조롱하셨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관중들 다 집에 가고 나서 가이사 앞에서도 아니고 빌라도 앞에서도 아니고 안나스와 가야바도 아니고 몰래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서 유령이라고 오해 받으시고, 귀신 나타났다, 오해 받으십니다. 너무 예수님께서 scandalous 애매모호하게 부활하셨습니다. 확실하게 부활하셔야 하는데, 예수님도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귀신소동을 네 번이나 당했어요. 예수님께서 할 수 없이 나 귀신 아닌데, 생선을 와작와작 드시고, 귀신 아닌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너무 코믹하잖아요. 개콘 수준이죠. 예수님이 자기가 귀신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생선을 드셔야 하니 얼마나 웃긴 상황이에요. 이 상황이 우리에게 진짜 믿어야 해? 이거 세상을 이긴 게 맞아? 빌라도 앞에 부활해야 하는 거 아니야? 최소한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 나타나야지, 안나스 가야바, 햄릿처럼, 새벽 4시에 노크를 기대하라, 나 예수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예수 부활 21일 후에 서서히 말라 죽었더라, 이렇게 가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시고 겁 많은 베드로에 부활, 7번 정도 부활을 증거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어요. 세상을 이겼다는 말은 한 번 죽고 나서 부활하신 거에요. 우리는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우리는 죽지 않고 십자가상에서 죽음이 종료되기 전에 이기고 싶은데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거친 후에 이기길 원하시니까 이것이 힘듭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십자가에 못이 박힌 경험 후에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그 죽음의 과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두려운 겁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많이 소속되고 배타적으로 소속되면 될수록 우리는 이 세상이 총체적인 매력덩어리처럼 보이고, 엄청난 활기차고 그 자체가 생명력 넘치는 이 세상 공동체가 나와 너무 낯설다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 소속된 사람만이 예수님은 내가 세상 이겼다는 말뜻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돼 본 사람만이 예수님 때문에 나 혼자 버려둠을 당했다는 느낌이 든 사람만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과 유착돼 살고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고, 야고보서 4장이 말한 것처럼 ‘세상과 벗된’ 사람들, 지금 예수님의 언어가 갖는 무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흩어져 살기 때문에 우리가 각자 어떤 삶의 동선을 가지고 사는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 격려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됐기 때문에 혹독한 환난 당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분들을 위한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혼자 내버려둠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제 나 외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 외에는 나밖에 없다, 라는 말이 드는 역설적 고독의 순간에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된 후에 죽음이 종료된 후에 우리는 반드시 부활할 게 분명합니다. 우리의 부활은 이 땅에서의 부활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흘 만에 잠시 죽는 것처럼 보여도 순식간에 우리의 대적자 앞에서 원수 앞에서 진수성찬을 받는 그런 부활을 합니다. 예수님께 더 배타적으로 소속돼야만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기 전에 우리가 세상을 거룩하게 도발해야 합니다.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세상이 하나님을 반역중이라는 것을, 세상이 영광의 왕을 배척중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부단하게 상기시켜야만 세상이 우리를 미워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중립적으로 반응하면 세상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누가 세상을 도발합니까? 빛과 소금으로 살면 도발합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처럼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삶을 살면 도발하는 겁니다. 내가 뇌물 받는 공동체에서 뇌물 받지 않겠다면 단호하게 결심하면 도발하는 겁니다. 내가 회사공금을 마음대로 쓰는 사람들 한복판에서 회사공금을 일절도 쓸 수 없다고 정직을 사수하면 도발하는 겁니다. 내가 미움 받습니다. 네가 뭔데? 이렇게 미움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전해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십일조를 내게 한다, 이런 십일조는 정상적으로 말해서 구약십일조 만큼 안 됩니다. 등등 이렇게 해서 십일조에 관해 진실 논문을 쓰면 바로 돌팔매 맞습니다. 네가 다 아냐?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기득권을 조금만 훼손하면 바로 미움을 받습니다. 불교에도 상당히 고급한 윤리가 있습니다. 불교에도 정말 사람을 고뇌하게 만드는 감화력이 있습니다. 이렇게만 말해도 종교다원주가 나왔네, 이렇게 말합니다. 마호메트 종교도 코란과 칼의 종교가 아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독 이슬람을 칼과 코란을 앞세워서 캐리커쳐 했습니다. 진짜 이슬람도 종교가 굉장합니다, 라고 말하면 이슬람교도가 났네, 이렇게 말이 나옵니다. 기독교교인들이 갖는 배타적 권리를 침해하면 바로 시비를 당하자마자 비난이 옵니다. 공산당 북한 약간만 좋게 말해도 종북주의자가 됩니다. 조갑제 종북사전에 나옵니다. 조갑제 종북사전에 제 이름이 아직 없어요. 조만간 누가 고발하면 올라갈 것 같습니다. 종북발언, 발언순서까지 다 있고 논문 이름까지 다 있어요. 북한에 대해서 약간만 좋게 말해도, 우리가 힘든 시대에 삽니다. 진짜 한국교회가 활황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엄청난 인파를 끌어들이고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적 고난이 오면 이 모든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에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배에서 성경을 던지는 종교 같습니다. 아직까지 기독교가 충분히 한국에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 안에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돼 있기 때문에 홀로 내버려둠을 당하는 진짜 기독교적 박해경험, 기독교적 고난경험이 많을 때 성령의 역사가 이곳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여정에서 홀로 내버려둠을 당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 사람 주변에 영적 아우라가 나타나고 그 사람 주변에 영적인 재능과 은사가 나타납니다. 여기가 기독교의 총본산입니다. 1897년에 일본 우찌무라 간조는 무시무시한 군국주의, 메이지 유신의 열풍과 광풍이 지배하던 그 때에 일본 국민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드는 국민교육헌장을 보았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은 1897년에 교육칙어라는 이름으로 일본 천황이 일본 모든 국민에게 가한 교육입니다. 1968년 12월에 박정희가 국민교육헌장을 그대로 합니다. 1897년 교육칙어를 보자마자 무슨 이따위가 다 있어? 그걸 반박했습니다. 반박하자마자 우찌무라 간조는 비국민, 매국노, 역적, 그때부터 이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에 대한 모든 생물학적 애착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때 나온 책이 <그리스도의 위로> 라는 책과 <구안록>이라는 책입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에 나와 있는데 매우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기독교적 진리를 사수하다가 홀로 내버려둠을 당하고 기독교적 진리를 실천하다가 버림 받고 홀로 내버려둠을 당하는 신적 유기감에 시달리는 오늘 이 시간 위로해주시기 바라고, 내일도 위로해 주시기 바라고, 영원토록 위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이 세상과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서 찰나적이고 없어져버릴 하급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발버둥 하다가 환난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진짜 기독교가 얼마나 고상한가를 마음껏 과시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뜻은 보혜사 성령이 나와 함께 한다, 기독교적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애쓰다가 홀로 내버려둠을 당하는 그 순간은 나에게 진짜 기독교 시간이고, 성령의 시간이고, 예수가 왕 노릇하는 시간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내 인생의 주가 되는 시간이다, 기독교적 진리를 실천하다가 절대고독감을 느끼고 절대 결핍을 느끼는 그 어둡고 우중충한 시간에 기독교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이 힘든 사람, 나는 이 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은 뭘까? 결혼해서 당하는 순간, 이거 진짜 내 남편 맞아? 이 인간이 내 직장상사 맞아? 애매모호한 고난이 있어요. 일단 애매모호할 때는 기독교적 고난이라고 믿고 기도하세요. 현저하게 자기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 놀음하다가 빚을 져서 뺨을 맞고 유치장에 가서 갇혀서 고난을 당했다, 나는 오늘 유치장에서 도를 닦는다, 구류 7일 당했는데 목사님 말씀이 생각났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러면 안 됩니다. 특별히 유치장에 갇혀서 제 이름을 인용하면 안 됩니다. 그냥 감옥 갈 때, 나쁜 일 하고 갈 때는 무신론자라고 해야 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 성도들은 비영리적이긴 하지만 기독교적 원리와 가치와 기독교적 뜻을 추구하다가 고난당하는 일이 상당히 많습니다. 괴팍한 성품 때문에 고난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고집스러운 성격 + 기독교 진리 합성을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고집이 엄청 세서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니까 고난을 자초 하는 거지, 굉장히 순한 사람이면 고난을 자초 안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 매인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매를 맞은 겁니다. 저는 독재자를 참지 못합니다. 관여하는 걸 좋아합니다. 관여하다가 맞은 겁니다. 관여하기 싫고 노자처럼 살면 그냥 지나갑니다. 관여적 성격과 기독교 복음 하나님 나라, 이건 굉장히 무서운 결합입니다. 자기가 관여적 성격이고 참견하기 쉬운 성격이면 굉장히 순교자가 되기 쉬우니까 조심해야 해요. 자기가 노자 도자 이런 식이면 웬만하면 박해 안 당합니다. 기독교적 원리 때문에 당하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으로 위로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보호 받으면서 세상 거짓된 시장 전체주의 지배의 숭배를 받으면서 보호감을 느끼는 가운데 예수님께 소속됐다는 배타적 소속감이 주는 평안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예수님께 소속된 자가 느끼는 절대 평안감이 세상이 주는 품보다 더 넉넉해야 하는데 우리는 주님에게 배타적으로 소속된 자가 느끼는 신적 고독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세상의 풍요로부터 보쌈을 당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느끼는 절대고독감, 홀로 내버려둠을 당하는 이 고독감이 주님의 시간이고 성령의 시간이고 십자가 동참의 시간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환난당하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위로하여 주시고, 일주일도 이주일도 주님 재림하시는 시간까지 위로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개인의 삶속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보여도 약간만 범위를 확산 시켜도 세상은 무정부 상황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신론을 강요하는 상황으로 빠져듭니다. 900명을 순식간에 죽여 버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과 하마스의 역공격을 하나님 보고 계시는지요? 아버지 하나님 언제 유혈의 사악한 보복의 악순환을 멈추게 하실지, 세상 만민앞에 당신의 역동적인 임재를 보여주소서. 4월16일 9시 40분부터 11시 47분까지 304명의 우리 동포가 해경이 왔다고 좋아하면서 구조될 순서를 기다리겠다고 정부를 믿고 대통령을 믿고 해경청장을 믿고 있는 그 순간에 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명령을 대신할만한 명령도 내리지 않고, 산채로 5천만 동포가 물에 빠지는 참담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국민의 마음을 시원케 할 만한 죄책고백이 나오지 않고 생존자와 유족들을 악하게 대우하는 이 참혹한 야수의 시절이 왔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나라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가득 품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정의의 팔을 보여주소서. 검찰과 청와대와 내각을 정신 차리게 하여주시고 야당과 여당을 정신 차리게 하시고 썩어빠진 언론과 부패해버린 이 땅의 종교권력자들을 하나님 쓸어버리시고 새 살이 자라게 하여주시기 원합니다. 악당들은 철옹성처럼 삶의 모든 영역에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절대적으로 질식될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급격하게 냉담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도 냉담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빙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살려주소서. 신앙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 정의의 팔을 드러내 주소서. 북한 동포들을 4차 핵실험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애송이 지도자로부터 건져주시기 바랍니다.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하나님 강권적으로 간섭하여 주소서. 주님 이 땅이 41조를 풀어서 될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탐욕적인 국민들이 회개하여 산을 깎아 골짜기를 메우는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도와주시고, 구멍가게를 살려주시고 내수를 살려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22조가 강바닥에 퍼질러져 잠자고 있는데 왜 정의로운 재판은 없고 엉뚱한 경제정책이 남발됩니까? 하나님 살려주소서. 살려주소서. 이 땅의 양심을 살려주시고 이 땅의 지식인들을 새롭게 하여주소서. 민주주의 때문에 두려움 없이 거리로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을 정의의 영을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이 땅의 백성들이 삼포세대들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아동친화적인 세상, 부부친화적인 세상, 청년친화적인 세상 만들어주시고 그런 세상 만드는데 저희를 써 주소서. 주님 정말로 절대고독감에 시달리는 저희에게 우리 혼자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두려움 속에 있는 저희에게 성령을 부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홀로 내버려둠을 당한 그 십자가의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경험했던 절대고독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 한복판에 파송하셔서 세상의 미움을 당하게 하시고 박해를 당하게 하신 후에 마침내 세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이 놀라운 성부와 성자의 사랑 드라마를 완성시켜주신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교통하심이 세상에서 환난당하는 모든 가향교회 교우들과 유학 간 모든 형제자매들 위에, 출장 중인 교우들 위에, 군에 간 교우들에게, 해외여행중인 교우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한복음 15장 1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려면 예수님께 속해야 한다는 말이거든요.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되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와 적대를 경험할 수 있는데, 만일 세상이 우리를 설득하고 세상이 우리를 아무 저항감 없이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영적 친인척관계가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과 영적친인척 관계가 성립되면 세상은 우리를 편안하게 품지 못하고 우리로 하여금 돌출 분자가 돼서 배척당하게 만들거나 우리를 추방하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상품 매매 자본주의, 모든 것을 상품으로 다루는 시장 전체주의 세계 속에서 탈 없이, 시장전체주의라는 가이사의 큰 지배 아래서 탈 없이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전체주의와 교회와의 갈등과 긴장은 없습니다. 이런 자본주의에 속한 교회가 공산주의에 속한 교회를 보면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서 완전히 무신론과 짝하는 교회가 됐다고 비난합니다. 공산당을 인정하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WCC에서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있는 기독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60- 70년대 약 20년 동안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있는 교회가 WCC에 대표단을 파견하면서 어떤 교회, 시장전체주의 사회아래 자본주의체제 아래 있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움을 유지했는지, 공산체제 아래 들어간 교회가 기독교다움을 유지했는지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습니다. 1956-1959년 사이에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있는 교회를 WCC가 받아들이는 이 시점에 한국장로교가 WCC에 가입하느냐 마느냐로 심각한 갈등이 벌어집니다. 1959년입니다. 남산에 있던 평양장신을 계승했던 한국 장로신학교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갈라집니다. 합동측은 현금과 신학지남이라는 잡지 대부분을 가져가고, 통합측은 도서관 책을 대부분 가져갔습니다. 교수진의 대부분은 통합 측으로 갔습니다. 통합측은 끝까지 통합하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이고 합동은 우리가 직선 수직 모든 각도 모든 면에서 같아야만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해서 합동은 엄격하게 교리적으로 축자적인 마지막 순간까지도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합동측이 됐습니다. 합동측이 바로 시장전체주의 자본주의 한기총을 발생시키는 일종의 무저갱과 같은 곳입니다. WCC에 들어왔던 교회는 그 유명한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출신의 신학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기독교가 공산체제에 있는 신학교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얀 밀리치 로흐만, 로마베카 이런 사람들에게 충격을 받고 스위스에 모여서 공산주의 체제 신학자들과 자본주의 체제 신학자들이 공부를 했는데 공산주의 체제 아래 기독교가 원시기독교에 가까운 겁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 기독교는 사기업 이용하듯이 교회를 마음대로 운영하고 물건도 매입하고 부동산도 매입하고 종교인 면세라고 무한한 자유를 주는 자본주의가 훨씬 더 성경 기독교에 가깝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매각할 수도 없고 오히려 큰 건물에 따로 모여서 갈만큼 큰 권력기관이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최소한 장려했고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 없이 신앙의 순수성만 가지고 인민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정도로만 종교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북한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부동산을 교회가 매입하고 매각하는 자유는 없습니다. 주를 위해서 주기도문 읽고 기도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은 굉장히 신앙을 박해하는 것이고, 교회나 한기총 같은 무리들이 엄청난 해외 부동산을 매입하고 교회 헌금을 가지고 온갖 나쁜 일을 일삼고 MMF 같은 단기주식시장에서 돈을 던지고, 이런 모든 악행을 종교의 자유라고 용납하는 이 자본주의는 정말로 기독교와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다 틀린 겁니다. 지금 한국기독교가 말하는 종교의 자유는 타락의 자유이지, 종교의 본 자유가 아니거든요. 사회주의는 종교가 자기를 과잉되게 표현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진짜 신앙에만 골몰합니다. 사회주의 기독교의 특징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만 생각하는 기독교, 오늘날 자본주의 기독교는 종교이름으로 하는 모든 사기업 활동, 이익 창출하는 활동을 모두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 자유를 존중하는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하나님과 친화성이 있는 체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공산당은 스탈린과 레닌 체제 아래서 신실한 수녀를 많이 죽였습니다. 모택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야만적인 폭력이 있지만 레닌과 스탈린은 강제수용소나 굴락 같은데 집어넣어서 죽이고 박해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는 돈과 쾌락과 이 모든 악한 것들로 교회 영적지도자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악한 체제 아래서 교회를 사기업 운영하듯이 살아가는 이런 방식보다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노동하며 영성을 회복하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환난을 당한다는 말은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된 사람에게만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환난을 당하지 않고 세상과 유착 관계 때문에 오는 비본질적인 환난을 당합니다. 소돔성과 고모라성이 가까운 요단 들판에서 삶의 근거지를 찾았던 롯을 보세요. 요단 들판을 보고 여호와의 동산처럼 물이 풍성하게 공급되고 관개용수가 충만한 소돔 요단들판을 보고 근거지를 옮겼습니다. 롯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환난은 그돌라오멜의 동맹국과 소돔동맹국이 5대 4로 전쟁이 붙었는데, 그돌라오멜의 동맹군이 롯과 부녀와 인민을 잡고 저 먼 나라로 포로살이로 끌고 갔습니다. 이런 롯이 당한 환난은 요한복음 16장 13절이 말하는 그 환난이 아닙니다. 대부분 오늘날 기독교인의 환난은 소돔성과 유착돼 살면서 소돔성과 같이 망하는 환난을 당하지, 소돔성 때문에 소돔성을 고치기 위해서 소돔성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예수에게 소속된 자가 느끼는 자가 경험하는 환난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고 슬픔이고 이것이 오늘날 이 본문에게 깊이 공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일주일 내내 이 본문을 묵상했지만, 이것의 문자적인 뜻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총체적으로 몸이 전율하듯이 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위로 받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세속적입니다. 어떤 본문도 세속과 긴장이 되지 못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세상 안에서 환난을 당하는 이 경지를 맛볼 수 있을까요? 우리 예수님을 홀로 버려두고 뿔뿔이 도망치는 예수님이 경험했던 절대고독, 하나님 외에는 나에게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 절대적으로 버림받은 것 같은 이 고독,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예수와 함께 있는 자의 고독, 모두에게 버림받고 홀로 남겨진 자의 고독이 세상 안에서의 환난이거든요. 이 환난은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홀로 남겨 내버려둔 십자가의 시간, 버림받은 시간, 십자가에 매달려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슬픈 시간, 이 환난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지 못하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만해서 우리를 달랜다 했다면 그건 주님이 우리를 말로만 달래는 관념론적인 위로만 한 겁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우리를 위로한 게 아니라 진짜 세상 환난의 극적인 마지막 완성점인 십자가에 달려죽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죽음을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를 십자가에 매다는 이 시간, 우리를 절대결핍, 절대적인 고독으로 우리를 결박하는 이 시간이 두려울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이때 이 세상은 유대종교권력자들과 로마의 정치 권력자들의 담합체입니다. 이 세상은 기독교적 진리가 극댓값을 요구하지 않으면 박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일대에서 오순도순 목가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면 이렇게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의 홈그라운드인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시 갈릴리에서 자유농민들과 오순도순 사랑의 목가적 공동체를 이루었다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일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 진리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반드시 결승전에서 유대종교권력자들, 그 시대의 종교권력자들과 거짓종교와 담합하는 정치 권력자들과 만나게 됩니다. 기독교 진리의 마지막 궁극적인 실천에는 종교권력과 정치권력, 종교 정치 경제 권력의 종합적인 수혜자들과 기득권자들과 반드시 만나게 돼 있습니다. 결승전에서 만나서 이 땅을 지배하는 신들과 정면으로 알몸으로 조우하는 것을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작은 사무실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작은 마을에서 경험할 수 있고 작은 읍내 단위의 교회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읍내 단위의 교회가 읍내단위의 유흥업소와 갈등을 빚을 수 있습니다. 작은 도시의 폭력조직들이 장악하는 유흥업소들을 성도들을 아무도 가지 못하게 감화시키면, 주류 소비량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유흥업소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게 만들면 유흥업소는 망해버립니다. 그러면 그때 로마제국과 같은 작은 세계 안에서의 권력자들이 등장하여 우리를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우리를 궁극적으로 지배하는 가이사, 예루살렘 성전 종교권력의 거짓됨과 악함을 폭로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교회를 비판하려고 하지 않아도 제대로 된 복음을 계속 선포하면 자신도 모르게 지금 한국교회가 매우 잘못하고 있다는 말을 해버린 셈이 됩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대부분 잘못하고 있다, 특히 종교권력자들은 잘못하고 있다, 라는 말을 하는 셈이 됩니다. 기독교 복음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자애로움을 설명하고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하신 분인가를 계속 강조하고 선포하면, 이 세상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악마적인 권력의 소유자이며 그들이 얼마나 도착된 자들인가를 말하는 셈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신앙, 십자가에 달리는 왕이 됨으로 모든 세상 신하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왕들이 거짓 왕임을 예수님은 폭로한 겁니다. 왕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백성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도자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결핍의 십자가 비천의 십자가에 매달려서 일반 제자들과 백성들을 살려내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로마제국과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자들은 지도자인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평민과 인민과 노예들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갈릴리에서 2천 명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2천 명이 갈릴리에서 십자가에서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하자마자 갈릴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2천명이 십자가에 처형된 사건을 금방 아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말을 할 때 예수님을 궁극적으로 죽일 세력이 로마제국인 것을 예수님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한 순간 자기가 유대인의 왕으로 즉 로마제국의 체제에 반발하는 자로 오해받아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을 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 역사적 맥락을 보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말이 얼마나 인화성이 높은 강력한 폭발성을 가진 언어인지 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와 있느냐? 로마제국 출장소가 와 있는 안토니오 수비대, 로마의 거대한 종교권력의 본산지 예루살렘 성전 앞에 와 있는 겁니다. 지금 적진에 와서 이야기한 겁니다. 적진에 와서 포위됐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내버려져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아무도 예수님을 도와줄 수 없는 시간이 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 혼자 내 버려둠을 당하는 때가 온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어서 대부분 사람들에게 포기하고 싶은 진리라는 말이에요. 대부분 사람들은 기독교 진리를 가지고 십자가에 뚜벅뚜벅 걸어가기 보다는 뿌리치고 도망가고 싶은 것이 기독교 진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걸 인정해야만 애통하는 마음이 들고 하나님께 진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한민국 같은 세상에 살면서 기독교 신앙으로 살면 왜 기도해야 합니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한시도 살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너무 허무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일 한 달 동안 기도하지 않으면 무신론자가 됩니다. 멀쩡한 사람이지만 한 달간만 찬양과 기도를 쉬고 말씀을 덮어버리고 마음대로 주일날 11시에 기원에 가서 바둑을 두고 있으면 신앙을 잃습니다. 심지어 두 달 동안 제가 성경보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만약 당구장에 가서 당구를 친다? 말보로를 피우면서 맥주를 마시면 실족할 만큼 딴 사람이 됩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놀라지 말고, 지금 김회권이란 사람의 신앙이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경향신문을 읽고 JTBC를 보면서 믿음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이 효자동에 역사하지 않는가? 정부종합청사에 왜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는가? 왜 대한민국 검찰에는 이렇게 인간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는가? 대구경북지역에는 왜 인간성이 나쁜 사람들이 많은가? 결국 검찰 안기부 군인조직은 TK PK권력, 호남 사람들은 집어넣자마자 내부고발자가 되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진입하지 못합니다. 생물학적인 호남인맥은 어쩔 수 없이 TK PK에 박해당함으로 내부고발자가 됩니다. 검찰과 경찰 군부 내 80%입니다. 저는 호남 사람들이 전부 다 대구 부산으로 이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호적상으로는 영남 사람이지만 가치적으로는 호남사람처럼 행동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검찰 차관급 이상으로 가려면 PK, 빨리 영남으로 가야합니다. TK PK가 이렇게까지 나누어가지려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우리 아니면 자유대한민국 누가 지키냐? 이것이 바로 조갑제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구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공산당이 영구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는 땅, 낙동강은 넘지 못했다, 낙동강은 우리가 지켰다, 그러나 서부경남부터 호남은 전부 다 6개월 전부 치하에 있어서 공산당 물이 들었다, 이것이 TK PK 사람 생각입니다. 호남 사람들은 왜 틀렸냐? 공산당과 6개월 9개월 함께 살았다, 그러나 우리 대구 사람은 한 번도 공산당에게 몸과 마음을 맡긴 적이 없다, 그런데 대구전투에서 실제로 낙동강을 넘지 못했습니다. 나는 김일성에 대해서 유감이 많습니다. 대구부터 공격하지 않고, 이렇게 했는가? 제가 살던 서부경남, 순천 진주 호남같이 다 공산 적산 치하였습니다. 경남 하동 북천 진주 이쪽에 하씨와 엄씨 부족지파가 공산당과 갈려서 40여명을 서로 죽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아베노믹스, 왜 아베는 다시 부활재림해서 저렇게 나쁜 짓을 할까? 이스라엘의 네탄야후와 리쿠르드는 왜 재림해서, 리쿠르드는 두 번째입니다. 네탄야후와 아베는 똑같이 재림한 겁니다. 재림한 수상들은 훨씬 더 강화된 악화된 우익권력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 우리가 얼마나 더 괴로워하고 피눈물을 짜내야만 얼마나 저항하고 얼마나 애가를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정의를 주시려고 우리를 이렇게 능욕하실까? 이렇게 모멸하고 못살게 구실까? 이런 간절한 애가가 든다 말이죠. 어쨌든 제가 신앙을 유지하는 길은 애가를 유지하는 길밖에 없다, 지금 내가 읽을 성경은 애가밖에 없다, 예레미야애가만이 유일한 성경이다, 나는 잠언서는 못 믿겠다, 결신한 사람 잘 산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런 세상이 출연할 줄 몰랐죠? 하늘에서 지상이 보이겠습니까? 이런 생각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창조할 때 상상도 못한 세상입니다.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습니다. 청해진과 유병언은 세월호의 핵심 고리가 아닙니다. 간단하게 민사소송 처리하면 됩니다. 유병언은 적어도 세월호 침몰과는 직접적인 범죄적 인과관계가 안 됩니다. 대통령이 2시간 30분 동안 대통령 국정원장 해수부장 네 기관장이 침몰하는 그 순간 동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기 어려워합니다. 그것만 밝히면 진상조사가 끝납니다. 대통령은 2시간 반 동안 뭐했길래 이렇게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그것만 밝혀주면 되는데 말하지 않습니다. 온 국민이 그걸 기다리고 있는데 온 국민이 열망하고 있는데, 공중파는 7.30 재보선 선거 일분도 할애하지 않습니다. 장마가 계속되겠습니다, 오늘 나들이 갔는데 태안 앞바다로 헬기를 타보고 가봤습니다, 뉴스가 끝입니다. 공중질서에 관한 뉴스가 일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KBS MBC 뉴스입니다. 우리를 지적 난장이들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지금 몰라서 바보처럼 당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점점 기도의 동력을 잃어갑니다. 하나님께 저항하고 절규하고 부르짖는 기도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한다는 말,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환난을 당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같이 타락해버리면 됩니다. 같이 지구를 황폐하게 하고 같이 대지를 오염시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환난을 당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심어주신 빛 때문에 주님이 심어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 때문에 타락할 수 없고, 타락하는데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해가고 오염돼 가는 세상을 막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 버려둠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진짜 왜 악한 자들, 이세벨과 니골라당을 쫓아가는 자들이 기독교신앙을 대변하고 정당한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대변 못하고, 기독교 신앙은 가장 안티 기독교적인 가치를 표방하는 자들이 기독교의 대변인이 되는가? 이것이 환난입니다. 저도 가만히 생각해봤습니다.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뭘까? 대한민국에 살지 않는다면 이 괴로움을 피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애착감만 없으면 이 괴로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민 갈 나라도 없습니다. 중국도 갈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길 말고는 어떤 지구상에도 이민 갈 나라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이 많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내 옆에 아무도 동지가 없다는 환난, 절대고독, 내가 이 세상의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절대 무기력감, 한국기독교의 한 주먹의 작은 소수 가지고는 한국기독교를 올바르게 회복할 길이 없다는 절대무기력감, 자기회의, 이것이 바로 환난입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저는 이것이 위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로만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면 안 되고, 결국 제가 보니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게 아니었습니다. 이긴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이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해서 관중들 집에 가고 나서 혼자 몰래 부활하셨잖아요. 다 있을 때 부활하셔야지, 제가 기대하는 건 이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혔을 때, 로마의 제 삼창 군이 창을 던졌을 때 창이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예수님의 식스팩을 뚫지 못하고 예수님은 강철처럼 용감한 사람이 돼 껄껄껄 웃으시며 가이사를 조롱하셨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관중들 다 집에 가고 나서 가이사 앞에서도 아니고 빌라도 앞에서도 아니고 안나스와 가야바도 아니고 몰래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서 유령이라고 오해 받으시고, 귀신 나타났다, 오해 받으십니다. 너무 예수님께서 scandalous 애매모호하게 부활하셨습니다. 확실하게 부활하셔야 하는데, 예수님도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귀신소동을 네 번이나 당했어요. 예수님께서 할 수 없이 나 귀신 아닌데, 생선을 와작와작 드시고, 귀신 아닌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너무 코믹하잖아요. 개콘 수준이죠. 예수님이 자기가 귀신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생선을 드셔야 하니 얼마나 웃긴 상황이에요. 이 상황이 우리에게 진짜 믿어야 해? 이거 세상을 이긴 게 맞아? 빌라도 앞에 부활해야 하는 거 아니야? 최소한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 나타나야지, 안나스 가야바, 햄릿처럼, 새벽 4시에 노크를 기대하라, 나 예수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예수 부활 21일 후에 서서히 말라 죽었더라, 이렇게 가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시고 겁 많은 베드로에 부활, 7번 정도 부활을 증거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어요. 세상을 이겼다는 말은 한 번 죽고 나서 부활하신 거에요. 우리는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우리는 죽지 않고 십자가상에서 죽음이 종료되기 전에 이기고 싶은데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거친 후에 이기길 원하시니까 이것이 힘듭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십자가에 못이 박힌 경험 후에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그 죽음의 과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두려운 겁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많이 소속되고 배타적으로 소속되면 될수록 우리는 이 세상이 총체적인 매력덩어리처럼 보이고, 엄청난 활기차고 그 자체가 생명력 넘치는 이 세상 공동체가 나와 너무 낯설다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 소속된 사람만이 예수님은 내가 세상 이겼다는 말뜻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돼 본 사람만이 예수님 때문에 나 혼자 버려둠을 당했다는 느낌이 든 사람만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과 유착돼 살고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고, 야고보서 4장이 말한 것처럼 ‘세상과 벗된’ 사람들, 지금 예수님의 언어가 갖는 무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흩어져 살기 때문에 우리가 각자 어떤 삶의 동선을 가지고 사는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 격려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됐기 때문에 혹독한 환난 당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분들을 위한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혼자 내버려둠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제 나 외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 외에는 나밖에 없다, 라는 말이 드는 역설적 고독의 순간에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된 후에 죽음이 종료된 후에 우리는 반드시 부활할 게 분명합니다. 우리의 부활은 이 땅에서의 부활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흘 만에 잠시 죽는 것처럼 보여도 순식간에 우리의 대적자 앞에서 원수 앞에서 진수성찬을 받는 그런 부활을 합니다. 예수님께 더 배타적으로 소속돼야만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기 전에 우리가 세상을 거룩하게 도발해야 합니다.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세상이 하나님을 반역중이라는 것을, 세상이 영광의 왕을 배척중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부단하게 상기시켜야만 세상이 우리를 미워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중립적으로 반응하면 세상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누가 세상을 도발합니까? 빛과 소금으로 살면 도발합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처럼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삶을 살면 도발하는 겁니다. 내가 뇌물 받는 공동체에서 뇌물 받지 않겠다면 단호하게 결심하면 도발하는 겁니다. 내가 회사공금을 마음대로 쓰는 사람들 한복판에서 회사공금을 일절도 쓸 수 없다고 정직을 사수하면 도발하는 겁니다. 내가 미움 받습니다. 네가 뭔데? 이렇게 미움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전해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십일조를 내게 한다, 이런 십일조는 정상적으로 말해서 구약십일조 만큼 안 됩니다. 등등 이렇게 해서 십일조에 관해 진실 논문을 쓰면 바로 돌팔매 맞습니다. 네가 다 아냐?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기득권을 조금만 훼손하면 바로 미움을 받습니다. 불교에도 상당히 고급한 윤리가 있습니다. 불교에도 정말 사람을 고뇌하게 만드는 감화력이 있습니다. 이렇게만 말해도 종교다원주가 나왔네, 이렇게 말합니다. 마호메트 종교도 코란과 칼의 종교가 아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독 이슬람을 칼과 코란을 앞세워서 캐리커쳐 했습니다. 진짜 이슬람도 종교가 굉장합니다, 라고 말하면 이슬람교도가 났네, 이렇게 말이 나옵니다. 기독교교인들이 갖는 배타적 권리를 침해하면 바로 시비를 당하자마자 비난이 옵니다. 공산당 북한 약간만 좋게 말해도 종북주의자가 됩니다. 조갑제 종북사전에 나옵니다. 조갑제 종북사전에 제 이름이 아직 없어요. 조만간 누가 고발하면 올라갈 것 같습니다. 종북발언, 발언순서까지 다 있고 논문 이름까지 다 있어요. 북한에 대해서 약간만 좋게 말해도, 우리가 힘든 시대에 삽니다. 진짜 한국교회가 활황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엄청난 인파를 끌어들이고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적 고난이 오면 이 모든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에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배에서 성경을 던지는 종교 같습니다. 아직까지 기독교가 충분히 한국에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 안에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돼 있기 때문에 홀로 내버려둠을 당하는 진짜 기독교적 박해경험, 기독교적 고난경험이 많을 때 성령의 역사가 이곳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여정에서 홀로 내버려둠을 당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 사람 주변에 영적 아우라가 나타나고 그 사람 주변에 영적인 재능과 은사가 나타납니다. 여기가 기독교의 총본산입니다. 1897년에 일본 우찌무라 간조는 무시무시한 군국주의, 메이지 유신의 열풍과 광풍이 지배하던 그 때에 일본 국민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드는 국민교육헌장을 보았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은 1897년에 교육칙어라는 이름으로 일본 천황이 일본 모든 국민에게 가한 교육입니다. 1968년 12월에 박정희가 국민교육헌장을 그대로 합니다. 1897년 교육칙어를 보자마자 무슨 이따위가 다 있어? 그걸 반박했습니다. 반박하자마자 우찌무라 간조는 비국민, 매국노, 역적, 그때부터 이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에 대한 모든 생물학적 애착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때 나온 책이 <그리스도의 위로> 라는 책과 <구안록>이라는 책입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에 나와 있는데 매우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기독교적 진리를 사수하다가 홀로 내버려둠을 당하고 기독교적 진리를 실천하다가 버림 받고 홀로 내버려둠을 당하는 신적 유기감에 시달리는 오늘 이 시간 위로해주시기 바라고, 내일도 위로해 주시기 바라고, 영원토록 위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이 세상과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서 찰나적이고 없어져버릴 하급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발버둥 하다가 환난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진짜 기독교가 얼마나 고상한가를 마음껏 과시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뜻은 보혜사 성령이 나와 함께 한다, 기독교적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애쓰다가 홀로 내버려둠을 당하는 그 순간은 나에게 진짜 기독교 시간이고, 성령의 시간이고, 예수가 왕 노릇하는 시간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내 인생의 주가 되는 시간이다, 기독교적 진리를 실천하다가 절대고독감을 느끼고 절대 결핍을 느끼는 그 어둡고 우중충한 시간에 기독교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이 힘든 사람, 나는 이 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은 뭘까? 결혼해서 당하는 순간, 이거 진짜 내 남편 맞아? 이 인간이 내 직장상사 맞아? 애매모호한 고난이 있어요. 일단 애매모호할 때는 기독교적 고난이라고 믿고 기도하세요. 현저하게 자기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 놀음하다가 빚을 져서 뺨을 맞고 유치장에 가서 갇혀서 고난을 당했다, 나는 오늘 유치장에서 도를 닦는다, 구류 7일 당했는데 목사님 말씀이 생각났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러면 안 됩니다. 특별히 유치장에 갇혀서 제 이름을 인용하면 안 됩니다. 그냥 감옥 갈 때, 나쁜 일 하고 갈 때는 무신론자라고 해야 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 성도들은 비영리적이긴 하지만 기독교적 원리와 가치와 기독교적 뜻을 추구하다가 고난당하는 일이 상당히 많습니다. 괴팍한 성품 때문에 고난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고집스러운 성격 + 기독교 진리 합성을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고집이 엄청 세서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니까 고난을 자초 하는 거지, 굉장히 순한 사람이면 고난을 자초 안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 매인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매를 맞은 겁니다. 저는 독재자를 참지 못합니다. 관여하는 걸 좋아합니다. 관여하다가 맞은 겁니다. 관여하기 싫고 노자처럼 살면 그냥 지나갑니다. 관여적 성격과 기독교 복음 하나님 나라, 이건 굉장히 무서운 결합입니다. 자기가 관여적 성격이고 참견하기 쉬운 성격이면 굉장히 순교자가 되기 쉬우니까 조심해야 해요. 자기가 노자 도자 이런 식이면 웬만하면 박해 안 당합니다. 기독교적 원리 때문에 당하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으로 위로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보호 받으면서 세상 거짓된 시장 전체주의 지배의 숭배를 받으면서 보호감을 느끼는 가운데 예수님께 소속됐다는 배타적 소속감이 주는 평안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예수님께 소속된 자가 느끼는 절대 평안감이 세상이 주는 품보다 더 넉넉해야 하는데 우리는 주님에게 배타적으로 소속된 자가 느끼는 신적 고독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세상의 풍요로부터 보쌈을 당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느끼는 절대고독감, 홀로 내버려둠을 당하는 이 고독감이 주님의 시간이고 성령의 시간이고 십자가 동참의 시간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환난당하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위로하여 주시고, 일주일도 이주일도 주님 재림하시는 시간까지 위로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개인의 삶속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보여도 약간만 범위를 확산 시켜도 세상은 무정부 상황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신론을 강요하는 상황으로 빠져듭니다. 900명을 순식간에 죽여 버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과 하마스의 역공격을 하나님 보고 계시는지요? 아버지 하나님 언제 유혈의 사악한 보복의 악순환을 멈추게 하실지, 세상 만민앞에 당신의 역동적인 임재를 보여주소서. 4월16일 9시 40분부터 11시 47분까지 304명의 우리 동포가 해경이 왔다고 좋아하면서 구조될 순서를 기다리겠다고 정부를 믿고 대통령을 믿고 해경청장을 믿고 있는 그 순간에 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명령을 대신할만한 명령도 내리지 않고, 산채로 5천만 동포가 물에 빠지는 참담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국민의 마음을 시원케 할 만한 죄책고백이 나오지 않고 생존자와 유족들을 악하게 대우하는 이 참혹한 야수의 시절이 왔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나라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가득 품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정의의 팔을 보여주소서. 검찰과 청와대와 내각을 정신 차리게 하여주시고 야당과 여당을 정신 차리게 하시고 썩어빠진 언론과 부패해버린 이 땅의 종교권력자들을 하나님 쓸어버리시고 새 살이 자라게 하여주시기 원합니다. 악당들은 철옹성처럼 삶의 모든 영역에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절대적으로 질식될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급격하게 냉담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도 냉담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빙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살려주소서. 신앙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 정의의 팔을 드러내 주소서. 북한 동포들을 4차 핵실험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애송이 지도자로부터 건져주시기 바랍니다.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하나님 강권적으로 간섭하여 주소서. 주님 이 땅이 41조를 풀어서 될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탐욕적인 국민들이 회개하여 산을 깎아 골짜기를 메우는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도와주시고, 구멍가게를 살려주시고 내수를 살려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22조가 강바닥에 퍼질러져 잠자고 있는데 왜 정의로운 재판은 없고 엉뚱한 경제정책이 남발됩니까? 하나님 살려주소서. 살려주소서. 이 땅의 양심을 살려주시고 이 땅의 지식인들을 새롭게 하여주소서. 민주주의 때문에 두려움 없이 거리로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을 정의의 영을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이 땅의 백성들이 삼포세대들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아동친화적인 세상, 부부친화적인 세상, 청년친화적인 세상 만들어주시고 그런 세상 만드는데 저희를 써 주소서. 주님 정말로 절대고독감에 시달리는 저희에게 우리 혼자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두려움 속에 있는 저희에게 성령을 부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홀로 내버려둠을 당한 그 십자가의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경험했던 절대고독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 한복판에 파송하셔서 세상의 미움을 당하게 하시고 박해를 당하게 하신 후에 마침내 세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이 놀라운 성부와 성자의 사랑 드라마를 완성시켜주신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교통하심이 세상에서 환난당하는 모든 가향교회 교우들과 유학 간 모든 형제자매들 위에, 출장 중인 교우들 위에, 군에 간 교우들에게, 해외여행중인 교우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희권 목사 설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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