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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 주일설교 _ 요한복음 17:12-19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
오늘 기도문을 읽어보면 거룩하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오죠. 거룩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하나님을 수식할 때 쓰는 가장 많이 나오는 형용사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은 원래 카디쉬, 코디쉬, 성소라는 말, 범접할 수 없는 곳, 그곳으로 가면 죽음을 초래하는 곳, 극단적 터부를 가리킵니다. 고대인들은 극단적 터부 의식이 있습니다. 그 행위를 하면 곧바로 죽는 것, 그런 것이 바로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행위, 그 행위가 죽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고대인들의 이런 유신론적 세계관에 대해서 대체로 인류 모두가 무신론자가 됐다고 할 만큼 터부에 관한 이해가 없습니다. 터부라는 말은 그 행위를 하면 공동체 전체가 멸망으로 치닫게 되는 치명적인 행위거든요. 터부가 없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전반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성이 하나님에 대한 유신론적 경건의식이 철저하게 땅에 떨어진 시대의 신자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어도 우리를 둘러싼 무신론적 무경건적인 분위기를 갑자기 벗어나기 힘듭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신자임에도, 우리 모두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영적 대기환경 영적수질환경 영적토질환경을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 속에 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떠는 경험, 이사야의 경험 예레미야와 에스겔 같은 전율하는 경험이 없고 우리 존재가 하나님과 한 번 접촉하고 나면 그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그 접점이 없는 겁니다. 제가 아무리 분투하고 애를 쓰지만 제 시대를 둘러싸고 있는 무신론적 무경건성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한계 안에서의 최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지 않습니다. 제가 의식적으로는 분투를 했습니다. 제 인생은 분투하는 인생입니다. 35, 6년 동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데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을 아는 영적 감수성이 압도적으로 성장했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요즘 어떤 고민을 하느냐? 내가 왜 이렇게 성장하지 못하는가? 그것 때문에 이번 방학 때 공자 맹자 최인호의 <유림>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이황 이퇴계, 이런 세계를 읽으면서 조선조 유학자들이 자기를 돌보고 수양했고 자기에게 닥쳤던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갔는가 연구한 겁니다. 53년간 40차례 이상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사임서를 쓴 사람이 이황선생입니다. 이황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공조판서를 했습니다. 선조대왕이 공조판서는 일이 없다, 도장만 찍으면 된다, 그래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기대성에게 쓴 편지에 공조는 일이 없다 하여 올라왔는데 일이 절대로 없는 게 아니다, 죽겠다, 빨리 장관 사임하고 싶다, 제일 마지막에 영의정으로 추종이 됐는데, 이황 같은 인격, 주자전서를 읽은 거죠. 주자전서를 요약해서 성학집요를 써서 17세의 선조에게 왕 매뉴얼을 써준 겁니다. 은퇴하는 퇴계 이황 선생님만큼 공부 많이 한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하니까 성질 좀 더럽지만 한 사람 추천하겠습니다, 광주 사람 고봉 기대성을 추천합니다, 성균관 대사서, 요즘말로 하면 국립대총장직을 물려주고 자기는 은퇴합니다. 이황 기대성 이율곡 조광조 이런 사람들은 사서삼경 7권과 주자전서 약 10권 정도의 책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는데 인격의 청렴도가 상상을 초월할 수 없이 높고 고매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면 얼마나 멋진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생각하는데, 저는 그런 기초가 없이 바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저는 구원실용론적인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자본주의적 거래양식이 지배하는 교회,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거래와 일종의 매매행위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구원을 매입하는 식의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아무리 읽어도 늘어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만큼 두렵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제 존재가 오그라들지 않고 멀쩡한 상태이고, 우리 교우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모두에게 무경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음이 체질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을 두렵게 느껴지기보다는 아무런 느낌이 안 들고 임팩트가 없습니다. 목사님이 그러니까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시청에서 모여도 파리 떼처럼 윙윙 거리긴 하지만 거룩의 광채가 안 나니까 기독교인들의 두려움 적수가 안 돼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너무나 없다는 겁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전율을 일으키고, 존재를 이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존재를 100% 통째로 바꾸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배척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 때는 먼저 배척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9장 24절 이 산 위에 올라오지 마라.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거룩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중심에서 죄인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죄를 참아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자기 수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다워지기 위해서 엄청나고 강력한 영적 방사능을 배출합니다. 하나님과 가장 닮은 것이 방사능입니다. 거룩한 방사능입니다. 하나님 가까이 가면 방사능 피폭을 입고 이전처럼 살지 못합니다. 무시무시한 배척의 힘을 갖는 겁니다. 그런데 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떤 모순에 있느냐? 하나님 성품 사이의 모순입니다. 지존무상하고 높고 거룩한데 거하시는 하나님이 죄를 참아보지 못하고 불결을 참아보지 못하고 돌격하고 충돌하고 분쇄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마음이 상하고 미천하고 심령이 상한 자의 마음 한복판까지 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배척의 힘을 가진 동시에 마음이 부서지고 상한 사람들의 한복판, 즉 죄의 힘에 휘둘려 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는 불쌍한 사람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자신도 화해시키지 못하는 요소가 있는 겁니다. 죄에 대한 무진장한 배척, 죄인에 대한 엄청난 사랑, 죄에 대한 무지무지한 분노와 좌절, 폭발하고 작열하는 화염 같은 분노가 있는 반면에 그 죄 때문에 쓰러지고 신음하고 죽어가는 죄인에 대한,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무한책임적인 연대와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거죠. 이 마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화해할 수 없고 공존이 안 되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용해시킬 수 없는 모순적인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인데 동시에 죄인을 끌어안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맞는 겁니다. 그래서 거룩의 뜻을 여섯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건 제가 정리해본 건데 맞는지 모릅니다. 제가 말로 정리했을 뿐이지, 이 정리가 비길 데 없이 높고 고결한 것은 아니죠. 어떤 피조물과도 동일시 될 수 없는,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무한히 크고 방대하심, 질적으로 전혀 다른, 지존무상하여 높은 데 거하시며 죄를 참아보지 않으시고 죄를 배척하는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심령이 상하고 부서진 자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 네 번째로 정의롭고 공의로운 하나님을 가리키는 형용사, 이사야 5장 16절입니다. 속되고 편중케 된 전체로부터 구별된, 그러나 속되고 편중케 된 그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구별된 것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여섯 번째로 자신은 변화되지 않지만 자신이 접촉한 존재를 변화시키는 강한 영적 삼투압 현상을 일으키는 하나님이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그런 거룩한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접촉을 많이 유지하지만 세상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하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지만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구별되었다는 거죠. 우리는 세상의 죄에 진노하고 죄를 배척해야 하지만 죄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없는 연대와 동정과 체휼을 보여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자기 공모적인 이기적인 자기 자아를 확장하는 이익을 탐하는 어떤 종교와도 다른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가 돼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신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어떤 종교와도 다른 종교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성을 깊게 가슴 깊이 영접할수록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변혁적이고 공세적이고 쇄신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배척합니다. 시편 7편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매일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 펴놓고 분노하십니다. 이 죄에 대한 분노를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통전적 이해입니다. 죄에 대한 분노를 경험하지 못하고 죄를 배척할 마음이 안 생기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이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구원을 주겠다고 약속하기만 하는, 마음씨 좋은 고모님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마음씨 좋은 고모님은 응석을 받아주고 용돈을 주지만 진리 안에 심판하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는 자기 자녀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심판하고 공권력을 발동해서 자녀에게 가택연금도 시키고 용돈도 끊고 온갖 별일을 다 하지만, 그러나 돌아가시기 직전에 할아버지 고모님 이모님 이런 분들은 대개 자비만 있고 공의가 없죠. 하나님은 마음씨가 좋은 삼촌 같은 이모 같은 구원 효용론적인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죄에 대한 배척이 없기 때문에, 죄에 대해 진노하고 죄에 대해서 역겨움을 가진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공평과 정의에 관련된 모든 쟁점에 대해서 우상화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을 말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말해야 하는 순간에도 왜 사랑의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할 때는 세상을 무한책임적으로 품고 그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뜻이지, 세상에 보쌈당하여 세상의 일부가 되어 동화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 같은 사람만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은 변화되지 않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거룩의 에너지를 축적한 사람만이 세상 사랑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파송당해야 합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된 사람만이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보존된 사람이 세상에 나가야만 세상과의 접점을 유지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점을 유지합니다. 진리로 거룩하지 못한 사람, 하나님 말씀을 축적되게 암송하고 순종하고 내면화시키지 못한 사람이 세상과 접촉하면 세상에 보쌈을 당하고 세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 논리를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받자마자 세상에 미움을 받았다는 말은 세상과 적대적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4장 4-5절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간음한 여인은 중성으로 봐야 합니다. 여성으로 보면 안 됩니다. 성령도 우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세상도 우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차지하려고 할 때 성령이 시기합니다. 김회권을 세상한테 빼앗길 때 내 안에 있는 성령은 시기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내가 빼앗겨가는 상태가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몰라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합니다. 우리가 애인을 빼앗길 때 애인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에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그 시기심이 사모하는 마음까지 동반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기를 원하고, 우리를 갖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세상과 짝하면 세상과 벗하면 세상에 보쌈당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접점이 없기 때문에 세상과 우리 사이의 경계선과 긴장점을 도저히 발견하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 아침에 진짜 예배드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한 번 부복하고 절하고 찬미하고 나면 세상에 나가자마자 내 안에 경계선이 설정되고 세상과 창조적 긴장상태가 유발됩니다. 자동으로 되는 겁니다. 아침에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터치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나가더라도 어떤 경고음도 일어나지 않고, 세상의 어떤 논리도 감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파송당한 자가 아니라 세상에 보쌈당한 자, 세상에 소유된 자입니다. 세상과 창조적 불화상태, 긴장상태를 경험하는 방법은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내 안에 하나님 말씀이 아침마다 살아 있으면 세상과 나 사이에는 긴장이 발생하고 창조적 불화가 발생합니다. 이 불화는 창조성이 있습니다. 좋은 것을 창조하기 위한 불화입니다. 내가 아버지 말씀을 내 제자에게 주었더니 세상은 아버지 말씀대로 사는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그랬기 때문입니다. 속했다는 말은 굉장히 주석이 필요합니다. 노래방 한 번 가는 것이 세상에 속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룸살롱 한 번 선배 따라 간 것, 한 번의 행위가 세상에 속한 겁니까? 아닙니다. 세상에 속했다는 말의 예를 저한테 물으면 제가 답변할 수 없는데, 숱한 백과사전적 예를 들 수 없습니다. 세상에 속했다는 말은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세상의 논리대로 아무 거침없이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새누리당 국회의원 연찬회에 몰래 앉아 있다가 왔습니다. 제가 새누리당에 속했습니까? 새누리당이 주는 스타킹 하나 받고 새누리당이 주는 부채 하나 받고 내가 새누리당에 속한 거 아니죠?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새누리당으로부터 돈을 받고 몰래 몰래 설교에다 새누리당에 우호적인 내용을 집어넣어서 세월호가 무엇이냐? 교통사고다, 이러면서 설교를 하면 제가 새누리당에 속한 거죠. 세상에 속했다는 말은 진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할 만큼 확실하게 그쪽 논리, 즉 모세혈관 핏줄 수준까지 그 논리에 동화될 때 속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대부분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속한 건 아니지만 무소속, 즉 우주적 무중력 상태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제가 볼 때 80% 정도는 하나님께 속하고 20% 정도 세상에 속한 사람이 제일 교회에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성도들 80%는 진짜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20%는 결정적으로 돈과 관련된 모든 것, 돈과 관련되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나 돈과 관련된 건 전부 다 세상에 속했으니까 전체적으로 하나님은 손해가 많죠. 거룩한 대의명분, 몸과 돈과 관련됐을 때는 세상에 속했고, 정신과 관념과 헛된 이념과 관련돼서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별 소득이 없는 거죠. 헛된 이념만 계속 모이고 있는 거예요. 입만 보이고 몸은 딴 데 가 있는 거예요. 몸은 하와이 가 있고 정신만 교회에 와 있는 거죠. 반대가 되면 더 좋은데, 정신은 하와이에 있어도 돈은 여기 오면 좋은데, campus ministry할 때 그 생각을 했습니다. 목자님 제가 지금 클럽에 와 있는데 제 정신은 두 번째 앉아 설교 듣고 있습니다. 정신은 그대로 두고 몸은 오면 안 되겠냐? 나는 몸이 필요하다, 네 몸은 헛된 정신이라 하더라도, 사실 몸을 가지고 오는 것 자체는 헛된 정신을 가지고 오더라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헛된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몸을 가지고 있는 게 중요합니다. 몸을 여기에 가지고 오면 정신보다 더 크게 여깁니다. 아무리 정신이 연약한 몸이라 하더라도 몸이라는 것은 굉장한 정신을 갖는 겁니다. 세상과 교회 안에는 80대 20 정도의 부분 소속감, 소속감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우리 교우들이 거룩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충분히 세상을 뒤집을 만큼 거룩하지 않은 것이고, 세상으로부터 보쌈 당해서 내가 끝났다, 성 어거스틴 만큼 참회록을 쓸 만큼 죄를 많이 못 지었습니다. 진성 죄를 못 지어서 죄란 무엇일까? 항상 묵상만 하고 있지, 대개 큰 인물은 두 진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한때 큰물에서 놀아본 사람, 이 사람은 마지막에 회고록을 씁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잠을 자본 사람들은 위대한 믿음대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왔다 갔다 한 사람은 책을 못 쓰는데 참회록도 못 쓰고, 회고록도 못 쓰고, 아무 것도 못 씁니다. 간증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인질로 잡혀서 별로 감동이 없습니다. 세상에 진짜 죄도 짓지 못하고, 지을까 말까 바운더리에서 죄 지은 사람 간증만 듣고 뭘까? 실제로 죄를 지으면, 진짜 세상에 극한 경험을 해서 어거스틴처럼 사생아도 낳아보고, 참회록을 쓰면 말이 됩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는 우리 성도들의 몸과 정신을 산호초처럼 흔드는 무지무지한 힘이 있는 겁니다. 세상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절대로 악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유사한 단체가 굉장히 많고, 거의 하나님을 대신한다 할 만큼 세상은 좋은 것이 있습니다. 도덕이 있고 윤리가 있고, 다만 십자가의 진리가 없는 것뿐이지, 십자가의 진리가 없는 것 빼고는 도덕도 있고 사랑도 있고 희생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려고 하지, anti christ 할 때 anti는 대적한다는 뜻도 있지만 대신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이단교주가 말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려고 할 때 적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은 적그리스도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즉 세상은 구원을 약속한 구세주적 장치가 많다는 말이에요. 불로장생 약, 예를 들어서 장기를 이식하는 심장병 환자나 신체 장기 전문가들은 200세 까지 생명연장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지금 어떤 신약개발이 되고 있느냐? 타인의 장기, 또는 동물의 장기를 인간 몸에 이식할 때 오는 부작용만 극복하는 신약만 개발해도 200세까지가 충분히 가능하다, 앞으로 삼성회장이나 우리 죽고 나서 200년 동안 살 수 있습니다. 진시황 계열의 유사영생 층도 고 진시황 계열의 유사영생을 약속한 과학도 있고 첨단대학이 있습니다. 진짜 영생은 다른 사람 다 죽었는데 혼자 약 먹고 사는 게 아닙니다. 돼지 장기, 원숭이 장기 이식해서 온 몸이 동물 백화점 비슷하게 된 상태가 아닙니다. 에이즈 환자 아무도 돈을 주고 사먹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치명적인 병이지만 돈을 주고 약을 사먹을 사람이 없는, 돈 주고 개발하면 금방 개발할 수 있는데, 아무도 에이즈 백신을 개발하지 않습니다. 왜? 에이즈는 썩어 문드러진 아프리카의 함족의 후손들이 걸린 병이고, 아무도 병 걸린 사람이 돈 주고 사먹지 않기 때문에 스폰서가 안 들어갑니다. 그러나 원숭이 신장 이식, 곰 간 이식은 전부 천문학적 돈이 들어갑니다. 유사영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부자들이기 때문에, 그게 바로 세상에 영생추구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세상의 정서에 빠지면 우리도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영생보다 훨씬 실감나는 영생을 맛 볼 수 있죠. 종교적으로 깊은 경지에 들어가서 바람처럼 신선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높은 경지에 오르면 하나님이 없더라도 인간 정신이 극단적으로 진화하고 개발되면 신처럼 자기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 일종의 자기진화, auto evolution, 자기 스스로 진화한 겁니다. 정신의 진화, 정신을 진화해서 컨트롤 하면 육체가 온전히 정신에 종속되고, 이러면 먹지 않고도 살 수 있고 신선화 되는 것, 이것도 일종의 영생입니다. 세상에는 돈이 성령의 역할과 거의 비슷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평안하고 성령충만한 사람도 평안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너그럽고 성령 충만한 사람도 굉장히 너그럽습니다. 돈 많은 사람의 너그러움, 기분 나쁠 정도입니다. 예의도 아주 바릅니다. 너무 센스 있고, 돈이 없으면 성격이 좋아도 굉장히 사람이 비루해보이고, 그 만큼 돈은 성령을 대신하는 풍요로운 영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절대로 악 그자체로 폐기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것들이 많아 보이기 때문에 세상과 긴장을 일으킨다고 할 때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과 창조적 불화를 일으키는 것, 하나님 말씀, 진짜 구원, 진짜 영생, 진짜 생명을 맛 본 사람만이 세상의 기초 없음, 유사 짝퉁 영생추구 분위기를 적절하게 비판할 수 있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영접하면 세상과 창조적 불화상태가 되고 창조적 불화상태임에도 우리 존재가 위축되지 않고, 우리 수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위축되지 않고 점점 우리가 확산돼 가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다른 방식의 삶,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이 세상 안에서 작동시킬 수 있는 원리가 실현가능한 것이죠. 다시 말해서 술 먹지 않고도 항상 행복하고 충만하게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 숭실대 기독교학과는 술 먹지 않고도 늘 행복하다고 아이들이 소문냈다고 합니다. 술 먹지 않고도 마음속의 깊은 대화가 되고 엄청 너그러워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 영생, 성령 충만함입니다. 반항하지 않고, 겁박하지 않고도 시간과 재산과 몸과 모든 재능을 기꺼이 양도하고 위탁하고 공탁하는 제도,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영생의 선물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는가 보세요. 150명이 십일조를 꾸준히 내면 웬만한 가난한 사람 다 살립니다. 교회는 풍요 그자체입니다. 우리가 내는 헌금이 그 사람들한테 다 가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 오는 순간 어떻게 이렇게 풍요로운가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변 사람을 전부 도와야 합니다. 중앙정부가 돕지 말고 교회가 속한 작은 society, 교회가 속한 마을을 교회가 도우면 사회경제 불의가 아무리 있더라도 교회만 오면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목사님과 악수하고 나면 장로님의 기도 한 번 받으면 해결된다고 믿으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영생입니다. 창조적 불화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착해지지 않고 자본주의적 종교 사기업처럼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면 지금처럼 악해지는 교회가 됩니다. 이익집단화됩니다. 내가 속한 지역, 강남에 속한 지역, 강남의 이익을 도모하고 강남의 정치적 아젠다를 출중하게 수행하는 교회가 돼버립니다. 지난번에 어떤 교회에서 모 총리후보자가 나왔습니다. 이 후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교회와 동일시되고, 예수님이 오해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커야 하는데 자기 출신 장로 총리 후보자가 여론의 몰매를 맞으니까 온 교회가 거기에 대해 결사저항을 했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거거든요. 여러분 말씀을 받으면 세상과 창조적 불화를 경험하고, 창조적 불화를 경험한 교회는 존재가 위축되고 오그라들어서 기독교적 삶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는 회의론과 냉소가 지배합니다. 기독교적 삶은 불가능해, 그것은 몇 사람 신학교 간 사람, 독신자, 독종들 광신도 몇 사람 빼고는 안 돼, 이런 냉소가 우리 안에 넘치면 지금처럼 돼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사촌 동생인가? 저 사람 왜 저래? 광신도로 몰아 부칩니다. 자기가 뜨뜻미지근하게 살면 부지런한 사람을 보면 은근히 저 사람 죄를 많이 지었나? 뭐가 눈물이 많아, 오히려 눈물이 없는 인간들은 예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결국 말씀으로 보존된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 거룩한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파송당할 때 세상은 경천동괘하면서 소동하면서 세상은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든지 교회를 핍박하든지 교회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거룩하게 변화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공세적으로 압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라는 존재가 있어도 교회는 아무렇지도 않고 태평스럽게 지나갑니다. 교회 메시지가 거룩한 공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교회를 이 세상에 파송했습니다. 뭐하러 파송했을까요? 누가복음 4장 18-19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사회적으로 널부러진 이 비참한 사람들과 연대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생명잔치, 천국잔치로 초청하기 위하여 교회를 보냈습니다. 교회가 활동하면 인간정치는 왜소해집니다. 거대한 자발적 사랑이 사회 지배적인 정책이 되면, 강압적인 국세청 검찰 경찰 재판하는 행위가 주도하는 사회가 시민단체들의, 교회의 성령충만한 신자들의 자발적인 희생행위가 압도하면 영적인 NGO활동이 정부의 활동을 대신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 세상 등고의 세력을 급격하게 약화시키면서 세상은 누구한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됩니까? 강한 자발성을 가진 시민단체적, 자율적, 이걸 우리는 협치라고 합니다. governance, government가 아닙니다. 중앙집권적 권력을 가지고 지시하는 정책보다는 자발적으로 각성된 시민들의 높은 사랑이 주도하는 사회가 되는 거죠. 시민 협치사회입니다. 시민이 자율적으로 자기를 통치합니다. 서초동 방배동 경찰서보다는 시민들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그 동네를 지배하는 겁니다. 교회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마무리합니다. 세상에 교회를 파송한 목적은 교회가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무장한 집권국가로 분열된 세상을 하나 되게 만들고, 절대로 칼과 총과 살상용 무기로 무장된 주권국가들이 사랑과 봉사정신으로 가득 찬 자애로운 시민들로 가득 차서 시민들의 사랑의 일상적 행위가 중앙집권적 권력행위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에 우리를 파송한 목적입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 할 일이 진짜 많은데, 목사님은 너무나 기독교인 역할을 대단히 여기는 것 아니에요? 처음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원래 책에 다 있습니다. 저한테 처음 들었다는 사람은 진짜 무식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다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 있습니다. 이번 토요일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심층강좌로 오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뜻을 좀 더 이해할 것입니다. 오실 때 진리로 거룩하게 된 성도들은 자기 명찰을 다 갖고 오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함도 다 모르고 영혼 없는 악수만 하고 헤어지잖아요. 성함을 알고 악수하면서 진리로 거룩하게 도전을 받으면서 사랑과 우애가 훨씬 더 깊어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거룩한 말씀으로 받지 못해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고 우리는 세상과 창조적 긴장과 불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기 보다는 세상과 짝하고 벗하여 세상에 보쌈당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전파하지 못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가 우리를 전율케 하신가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고, 이 세상에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사자가 포효하는 것처럼 느끼고 전율을 감추지 못했던 예언자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진짜 참다운 지식을 이해를 앎을 획득할 수 있도록 저희의 가슴을 불꽃처럼 되게 하시고 점화시켜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저희의 무심하고도 아무 일 없이 지내는 듯한 일상을 감찰하시고, 특별히 이 나라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위정자들과 지도자들의 죄책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심판의 폭풍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합니다. 거짓으로 거짓을 감추고 악행으로 악행을 감추고 사기로 사기를 감추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알고 자신만 모르는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지도자들이 이 땅에 백주를 종횡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왜 죄책감이 없고 미안함이 없는지, 기본적인 미안한 마음 측은한 마음이 없는지, 아버지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어찌하여 잘못했다고 소리치고 용서해달라고 소리치는 화해와 치료를 일구는 지도자가 하나도 없는지 우리는 답답합니다. 주님, 이 억울한 일을 당사자가 해결하기 위해서 유가족들이 핏빛 아우성을 가지고 드러누워 죽음과 분초를 다투며 결각을 다투며 대명하고 있습니다. 김영오 형제를 붙들어주시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가 40조를 풀어서 부양시킬 경기는 무엇이며, 더 크게 성장시켜야 할 파이는 무엇입니까? 이미 충분히 큰 파이를 나누지 못하는데, 파이를 나누는 일은 제쳐놓고 파이가 모자란다고 소리치는 이 악행과 거짓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 우리는 애가처럼 부르짖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의 신앙이 가짜라면 우리의 신앙을 앗아가시고 우리가 진짜 하나님 믿는 백성이라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가짜 기독교인이라면 대한민국이 영적 빙하기가 오도록 도와주시고, 거룩한 그루터기들의 아우성이 들리신다면 역사하여 주시고 간섭하여 주시고 일괄 정산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42조를 풀어서 엉터리 부동산 경기를 부양시키고 금리를 낮춰서 부동산을 사게 만드는 이 악한 정부를 심판하여 주소서. 검찰과 경찰에 양심 내부 고발자가 나타나게 하시고 언론인들 가운데 영적 지도자 가운데 목숨을 걸어놓고 말하는 예언자적 지성인들이 나타나게 하여주시고, 대학 지성사회를 변화시켜주소서. 가난하고 어려운 백성들이 오늘도 일터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감사함으로 바쳤습니다. 이 귀한 물질이 아낌없이 거룩하게 즉시 낭비되게 도와주시고, 하나님 백성 살리는데 쓰임 받는 물질 되게 도와주소서. 직장을 위해서 기도하는 아들딸들에게 새 길을 열어주시고 정의가 바른 경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떳떳하게 노동의욕이 있는 형제자매들이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어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거룩하게 보존하심의 역사가 100% 하나님께 소속되며 100% 세상을 변혁시키는 선교사로서 역할을 하는 모든 교우들 위에 지금도 하나님을 향해서 아벨의 핏소리로 절규하는 세월호 유가족들 위에, 이 땅의 모든 억울한 민초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희권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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