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3일 주일설교 _요한복음 16장 1-12절
“죄, 의,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는 진리의 성령”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
16장에서 제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모드는 근심입니다. 14장부터 제자들은 계속 근심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한다는 말은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근심, 즉 마음의 근심은 피상적인 근심이 아니라 실족할 만큼 드센 근심, 실족한다는 말은 스칸달리조마, scandal이라는 말이 원래는 실족한다는 말이죠. 스칸달리조마 하면 실족시키다입니다. 실족이라는 말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끝내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3년 동안의 모든 꿈들이 일장춘몽이라고 정리하고 예수님을 더 이상 따르고 싶지 않은 상태가 실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실족한다는 말은 급격하게 신앙의 냉각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상태가 실족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걸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지만 가정 단위, 우리가 속한 작은 소그룹, 회사, 또는 한국 교회라는 큰 집단, 한국 사회라는 큰 집단, 전 세계, 확장을 해놓고 보면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지에 대해서 의심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실족 상태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지지 않고 마음이 냉각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실족한, 잠재적 실족 상태에 있는 겁니다. 실족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헐거워져서 진리의 결속과 강력하게 견인해주고 지지해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건 실족 상태거든요. 한국교우들이 잠재적으로 목사님들 때문에 실족 상태에 있고 정치지도자들 때문에 실족 상태에 있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은 부모님 때문에 실족 상태에 있고 회사의 종업원들은 사장님 때문에 실족 상태에 있습니다. 실족 상태라는 말은 존재가 헐거워져서 진짜 진리가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느슨해진 상태입니다. 넘어진 상태죠.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족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어서 보혜사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14-16장까지 길게 하는 이유는 실족하지 않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16장 1절에서 요한복음 14-16장 3장에 걸쳐 또 다른 보혜사, 알로스 파라클레토스, 오시는 보혜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타오타 갈리카, 메 스칸딜리조 테세, 너희가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너희가 실족함은 나와 지냈던 3년간의 모든 기간들이 없는 것처럼 여길 것이고 너희는 산산조각 나서 부서진 파편조각이 될 것이고, 너희는 삶의 무중력 상태에 빠져서 어떤 것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파편이 될 것이다, 사실 그렇거든요. 진리 안에 속박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인생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진리에 속박된 사람만 하루하루 삶을 살아간다는 누적적 보람이 생기는 겁니다. 진리에 속박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는 밥을 먹고 직장 가고 밥을 먹고 카페인 마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거든요. 전부 다 앞과 뒤가 전혀 연결이 안 되는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은 기업들이거든요. 진리에 속박되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바람에 흩날리는 도말하고 싶은 이력들, 도말하고 싶은 만남들,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말입니다. 진리 안에 살지 않은 사람들은요. 실족한 사람이거든요. 실족한 사람은 마음이 냉각된 사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싫어진 사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더 이상 지겨워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실족한 사람입니다. 공동체 구성원과 살가운 접촉을 유지하면서 서로 만나가면서 기도하면서 축복의 언어를 주고받기 싫은 상태, 이것이 실족한 상태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사실상 제자공동체는 산산조각 나 있습니다. 서로 손가락질 하면서 서로 탓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갈릴리 홈경기에서는 굉장히 실력이 좋았던 예수님이 예루살렘 반경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제사장의 홈그라운드, 예수님께 어려운 경기가 시작되니까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더 이상 기적도 행하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피땀 흘리며 기도를 하고, 발을 씻어주시고 낮은 포복을 하시고, 로키의 언어만 구사하면서 슬프고, 행진곡이 아니라 슬픈 단조로 빠지고 끝이 없는 요르단 협곡으로 빠지단 말이에요. 제자들은 실족한단 말이에요. 왜 이러지? 그 사이에 유다가 이슥한 밤에 팔러 나갔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마음이 산산조각 나니까 포도나무 이야기도 하시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렇게 계속 하는데도 제자들이 붙어 있을 생각이 없습니다. 16장 1절에 실족 상태에 있는 제자들을 보고 타우타 랄렐카 휘민 히나 메 스칸달리스데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고 죽이는 행위, 라 트레아스 토데오,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 구약 용어입니다. 거짓 예언자를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제단 앞에 원수를 바쳐서 제물로 도살해드리는 것을 라 트레아스 토데오, 하나님 제단에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적 전문용어가 여기 써 있습니다.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전문용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로마서 12장 1-2절에 나옵니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 트레아스 로미코스, 신령한 예배할 때 그 예배와 같습니다. 영어로 하면 service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는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죠. 예수 믿는 자를 잔멸하려고 죽여 없애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 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잖아요. 청년 사울이 바울 되기 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죽임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면 역설이잖아요. 내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박해를 당하고 돌을 맞고 직장을 박탈당하고 매를 맞고 쫓겨나면, 내가 구원 받은 거 맞아? 이런 느낌이 들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영생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그 제자들에게 현실적으로 와 닿는 경험은 박해 출교 매맞음 온갖 적대적 추방, 이런 것이 제자들에게 온다고 할 때 실족한다는 거죠. 이런 것이 올 때 실족하지 말라는 거죠. 진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예수님인지 예수님을 죽이는 자인지, 진짜 의를 성취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가서 독생자의 죽음을 완성한 예수님인지, 예수를 죽여 없애서 이단자를 박멸하는 유대인 종교권력자들이 의를 실천하는 것인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심판을 받은 것인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린 그 자들이 심판을 받은 것인지, 이 세 가지를 확실하게 알려줄 분이 또 다른 보혜사, 알로스 파라클레토스라는 거죠. 그런 게 온다는 겁니다. 제가 볼 때 참 답답했을 거예요. 제자들은 또 다른 보혜사를 말해줘도 아무런 감동이 없고 예수님의 육체적 현존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시야에 사라져서 타이어의 바람을 빼듯이 우리의 모든 용기에 바람을 쓱 빼버려서 축 쳐진, flat tire가 되게 만들어버리는 예수님의 떠남이 현안 문제입니다. 내가 떠나면서 하는 말,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하나님께 떠나가지 아니하면 또 다른 보혜사가 오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육체적 인격적 현존과 결별하는 것 자체가 갖는 상실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조만간 우리에게 오게 될 하나님의 압도적 위로와 함께 하심의 임재의식이 지금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 너무 크나큰 슬픔을 당한 사람들은 너무나 큰 상실감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위로가 온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 지상의 생애는 영생,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그 생애까지 우리 삶의 차원을 쫙 펼쳐놓지 않으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자기를 입증할 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의 확신이 우리 삶 속에 부활은 분명히 죽음 저편에서 경험되는 건데, 부활할 것을 미리 믿어서 유익을 누리는 것, 부활은 죽음 저편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죽음 저편에서 일어나는 그 부활을 지금 믿음으로 죽음의 권세 안에 있는 우리가 죽음의 권세를 무효화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활신앙이거든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부활신앙이 필요한 거거든요. 그런데 부활신앙이 없다면 하나님도 억울하게 오해당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펼치셔서 이걸 해결할 길이 없는 겁니다. 9시 27분부터 11시 45분까지 대통령이 뭐했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국정조사를 하면 대통령이 뭐했는지 밝히는데, 대통령이 사우나를 갔는지 누구와 차를 마셨는지 모릅니다. 이걸 밝히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통령 장관들의 동선을 분초 단위로 재구성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에 오불관원으로 대했습니다. 이것만 밝히면 됐습니다. 탄핵감이지만 용서해주겠다,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이 말을 듣고 싶은 겁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했다는 말도 안 했기 때문에 용서한다는 마음도 안 일어나고 계속 거짓말로 협박 공갈치면서 세월호 유가족의 입을 막기 때문에 또 다시 거짓의 바다에 익사시키려고 합니다. 방송을 통하여, 지금 jtbc만 약간 저항하려고 하는데 우리 모든 국민 방송이 거짓의 바다에서 익사상태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우리 하나님은 바다가 그 죽은 자를 내어주고, 약속하신 것처럼 불의에 비명횡사한 모든 사람들을 다 살려내십니다. 비명횡사한 사람들을 다 살려내실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공평과 자비로 당신의 공의를 입증하실 것입니다.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좁은 머리로 정의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쓱싹 신비에 속했다고 넘어가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문창극스러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짜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정확하고 수학적 기하학적 완전함 보다 더 완전하게 우리의 정의를 만족시키실 것입니다. 내 작은 공의 질문도 만족 못하시는 게 아닙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부활신앙이 나옵니다. 우리가 분노에도 동참해야 하지만 또한 그들도 부활신앙, 세월호 희생자 중에서 은정양이 있습니다. 박예슬 같은 경우는 전시회를 열어서 부분적으로 부활정신을 경험했습니다. 이민혁 전도사님, 제 제자입니다. 숭실대 제자이고 장신대 제자인데 17명 중 16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전도사는 완전히 멘붕 영붕 상태에 빠져서 과제물을 일체 내지 않아도 학점을 주었습니다. 과제물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요구할 수도 없고, 멍하니 있습니다. 신혼 초입니다. 결혼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 전도사님과 앉아 있으면 제가 같이 물에 빠집니다. 그 은정양 이모가 결국 자살했습니다. 은정양 오빠도 자살을 준비하고 있고 엄마도, 불행이 계속 용솟음칩니다. 세월호 연쇄적 파산적 아직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아이들도 끝이 나지 않았고, 이걸 깊이 생각하면 나까지 분노에 가득 찹니다. 제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제가 청와대로 달려갈 생각이 듭니다. 이것만 계속 생각하면 중앙청에 올라가서 뭔가 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타인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자들, 비명횡사한 자들,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다 살려주십니다. 부잣집 대문 앞에서 비참한 비렁뱅이로 죽었던 나사로도 품어주신 하나님이라면 나머지 모든 인생도 책임지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난맥상들, 해석할 수 없는 난맥상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닫게 만드는 시사적인 상태들, 전부 다 의 죄 심판 등과 관련된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관련된 이런 사태, 예수님 자신도 자기에게 일어난 사태가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있는 높은 수준의 교감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니까 실족한 겁니다. 예수님은 I lay down my life, 내가 내 목숨을 내려놓는 것이지 누가 빼앗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는 것, 이스라엘의 1500년 동안 누적된 불순종을 일괄 정산하여 순종모드로 바꾸려면 1500년 동안 아브라함부터 지금까지 누적된 불순종을 무효화하기 위해서, 위대한 순종을 바치기 위해서 목숨 바쳐 가면서 까지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받아들이겠다, 고도의 교감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가는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이 박힌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1500년 동안 누적된 죄를 일괄 무효화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이 순종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죄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죄지,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신명기 21장 22-23절 보면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라고 돼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다, 죄인으로 죽은 것이라는 확신을 시키기 원했습니다. 로마제국의 형틀인 십자가를 빌려서 정확하게 신명기 21장 23절의 뜻을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이 저주 받아 죽는 죽음임을 믿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음모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저주의 십자가를 지기로 하고,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하나님께 거짓 예언자로 심판 받아 죽었다고 믿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예언자가 나무에 달려 죽었거든요. 다른 신을 믿었던 사람이요. 다른 신을 믿자고 설득했던 자가 나무에 달려 죽었다고요.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 죽인 이유는 구약의 역사에서 예수가 다른 신을 믿자고 설득하여 죽임 당한 거짓 선지자라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사울입니다. 원래 사울은 예수를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진멸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서 영광중에 있는 것을 보고 예수를 저주 받아 죽은 것이 맞지만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죄 때문에 저주 받아 죽었다는 ‘우리를 위하여’ 라는 말을 추가함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 겁니다. 어디서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저주 받아 죽었다고 선전하려는 자들을 역설적으로, 그래 저주 받아 죽었는데 내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와서 그걸 해명해줍니다. 청년사도 바울이 해명해줍니다. 만일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 다메섹 도상에서 엄청난 진리의 반전에 이르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끝까지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되는 거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죄가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오순절 성령이 오면 깨닫게 해준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의를 성취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성실성이 아니라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성실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거짓 예언자 예수를 배척하는 것이 의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서 기꺼이 죽음도 감수하는 이 행위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경결하게 결속시키는 일종의 의를 창조하는 행위입니다. 이사야 46장 12-13절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마음이 완악하여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예수님을 통하여 가까이 가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끌어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특징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다시 하나님께로 다시 가서 재계약체결을 해주는 것이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지 않았다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120문도에게 뜨거운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 것이고,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전 세계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도적 파송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죽음의 파문은 오순절 성령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쏟아부어주신 거죠.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아름다운 순종을 드리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그 한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은밀한 사랑 때문에 오순절 성령과 맞먹는 사랑의 큰 경결한 에너지가 공동체로 막 쏟아진다는 말이에요. 이건 여러분이 아마 알겁니다.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가는 그 주변에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의 강력한 인력이 흡인력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끌어들이는 영적 구심력이 역사하게 되거든요. 누군가가 기도한 것이고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누군가가 사랑의 행위, 의로운 삶을 끊임없이 누적시킨다는 말이거든요. 그런 영적 에너지 장이 형성된다는 말은요. 구역장님이 사랑의 실천을 자꾸 하다보면 구역장 중심으로 구역원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구심력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하나님의 진리의 견인과 속박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신도 모르게 신령한 그룹이 형성되고 그 신령한 그룹은 교회가 될 만큼 뜨겁게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거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누군가가 계속 기도를 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계속 사랑을 하고, 누군가가 계속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 누가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교회 오면 교회 같은 느낌이 들고, 서울역 대합실 같지는 않잖아요. 무언가 따뜻해지고 포근해지고 말없이 쉴 새 없이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 하나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자기 신앙의 궤도를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 거죠. 가정도 마찬가지죠. 집이 너무 좋은 이유는 엄마 아빠의 십자가 때문이거든요. 저도 어릴 적 기억해보면 청소년 시기에 윤리적 갈등이 심했어요. 저희 세 살 위 형 그때가 노동인력, 저보다 세 살 많은 형까지를 일하러 아버지가 데려가시고 저를 놔주세요. 형이 저에게 정죄의 눈빛을 보내요. 그럼 저는 축구가 너무나 하고 싶고 개울물에 고기 잡으러 가고 싶고 투망 던지고 싶은데 풀 베러 가자고 하면 이때 굉장히 양심의 갈등이 일어요. 아버지가 나를 오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과 누나가 하는 것은 속박이 약해서 도망갔거든요. 실컷 밤이슬 맞도록 놀고 가면 그렇게 놀았는데도 집에 가면 따뜻한 밥이 있고 환영을 하거든요. 형과 누나가 약간 불만을 가지고, 형과 누나의 핍박 말고는 없거든요. 내가 무슨 힘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가? 그렇게 깨달았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에게 준 사랑 같은 것, 정말로 느꼈던 그 순간은 부모와 자녀 간의 언약적 연대가 크다는 거죠. 가정이 좋다는 것은 자녀가 웬만해도 심판받지 않거든요. 공권력으로 검사처럼 우리 가정의 규칙 1조 3항에 의해서 용돈 20% 감축, 학점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퇴, 하지 않거든요. 이번에 성적 1점 떨어지면 감축이고 2점 떨어지면 자퇴다, 바로 봉제공장 출발, 가정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정이 있긴 있더라고요. 가끔 그런 가정이 있는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그냥 건강하기만 해도 좋잖아요. 가정은 정말 은혜로 유지되거든요. 교회도 그렇거든요. 어떤 사람은 느슨하게 슬리퍼신고 농땡이치고 예배 늦게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도 몇 년 만 참아주면 인간이 돼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계속 핍박하고 못 살게 굴면, 사고 칠 기회도 없이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교회는 무시무시하게 위험한 현행범이 아니면 참아줘야 해요. 동성연애자가 와도 참아줘야 하고, <투갑스>처럼 뇌물 먹는 경찰이 와도 참아야하고, 오래 참아야 해요. 그걸 보자마자 최후통첩을 해서 피를 몸에서 빼내듯이 하기는 힘듭니다. 은혜가 큽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커서 그 큰 은혜 때문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은혜의 산소가 율법의 질소보다 훨씬 적어지면 질식합니다. 산소는 질소보다 5분의 1, 대기의 5분의 1이 산소잖아요. 20% 만 산소가 돼도 Love is like oxygen, 사랑은 산소와 같거든요. 40%는 질소가 있을 수 있고 메탄도 있고 암모니아도 있을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메탄적 존재가 돼서 냄새가 나는데, 크롬 망간, 우리 교회가 20%만 산소가 돼도 굉장히 광릉 수목원처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다, 우리 사회에 격정과 분노가 너무 많기 때문에 정말 성자와 같은 자비와 온유가 넘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저는 참 많이 하거든요. 왜 홍명보 감독을 그렇게 미워하는가? 4대 2로 지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았어요. 브라질은 7대 1로 졌어요. 저는 그때 홍명보를 다시 이해했습니다. 저렇게 잘하는 브라질도 7골을 먹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주님 제가 브라질 축구를 볼 수 있도록 새벽 5시에 깨워달라고 기도하고 잤거든요. 4대 2로 지는 이 과정도 굉장히 복잡한 것이고 굉장히 분투에 분투를 거듭하고 한 건데 엿을 던지고 핍박하고 못살 놈 죽일 놈, 이건 인간성이 타락해도 보통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네티즌이 바로 지옥 갈 사람이 너무 많다, 타블로 사건이라든지, 최진실을 죽음으로 몰아낸다는지, 네티즌이 드라큘라적 익명성으로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분노의 격정, 증오심, 참지 못함, 이 원인은 있습니다. 대다수 공공영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게 격정과 증오와 분노를 일으키는 게 맞습니다. 우리 모두가 분노의 격정 속에 빠지면 우리가 최후심판자적 이름으로 심판하는 것을 일사분란하게, 남을 심판하는 일에, 남을 십자가에 매다는 일에 앞장서면 은혜가 상실돼 버립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쪽이 낫지 매다는 일, 십자가에 매다는 언어, 최후통첩의 언어, 그를 죽여서 더 이상 존재감을 박탈해버리려는 언어가 십자가에 매다는 겁니다. 그런 언어들이 너무 살벌하게 파도가 높다는 거죠. 제가 지금 제일 눈물이 잘 나는 것은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입니다. 슬픈 사람들보다 더 빨리 나를 울게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들의 생애 앞에 눈물이 빨리 납니다. 착한 사람들은 사나운 인간성과 세상에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현존을 조금도 못 느끼다가 갑자기 그 사람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하게 만드니까 그런 사람을 보면 내가 마음이 착해지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마음도 같이 공감합니다. 일주일 내내 착한 사람, 여러분 마음을 순식간에 하나님의 언약적 유대관계로 초청할 수 있는 사람과 많이 어울리길 바라고 최소한 한 번 이상 식사하길 바라고 문자 주고받고 이메일 주고받고 사랑의 유대를 일삼길 간절히 바랍니다. 목사님 누가 그런 사람 있습니까? 본능적으로 자기가 찾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찾아야 해요. 제가 보기에 꽤 많이 있는데 실명으로 추천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분명히 보입니다. 우리 교회 안팎에도 있고 교회 바깥에도 있고, 8월에는 운영위원회 모임이 식사를 하지 않고 환대와 우정의 식사를 각자 할 생각입니다. 8월에 누가 진리의 속박에 머무는지 우리를 눈물 나게 할 착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날 아마 드러날 것 같습니다. 돈이 안 되면 몸으로라도 하시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근심이 과도하면 영적 냉각에 빠지고 영적 냉각에 빠지면 실족한다는 것을 아시고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냉각에 빠졌고 잠재적 실족 상태에 있다면 우리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치유의 영이 오셔서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순식간에 알려 주실 것이고, 지금 여러분의 삶에 얽혀 있는 부조리하고 해명할 수 없는 고난의 신비들을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 안에서 자라길 원하는 성도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시시때때로 보내주셔서 반드시 진리 안에서 강고하게 붙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냉각되기를 원치 않고 근심에 쌓이는 걸 원치 않고 우리가 실족하고 느슨해져서 이탈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7,8월 한가할 때 시간이 많을 때 편지도 쓰시고 사랑의 교제도 나누시고 만남도 가지시고 부디 여러분 있는 모든 곳에서 실족 상태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돕고,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의 위로를 만끽하고 성령이 주시는 위로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7,8월에 우리 모두 얼굴을 살피면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 사랑이 필요한 사람 순식간에 결단하여 즉시 결단하여 사랑을 나누는 형제자매들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유현미 집사님이 관여하는 입양단체에서 7월말부터 고아들을 입양할 수 있는 기회, 입양아들을 집에서 호스트 할 수 있는 행사를 합니다. 이윤구 사회자님께서 광고하시겠지만 이런 행위도 해주시기 바라고, 여러분 집에 혹시 방이 하나 남이 있다면 꼭 초청해서 친교 하는 것을 포함해서 극한 친절을 나누시기 바라고 여러분이 식사초대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을 개방해서 식사초대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지금 구역예배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역장님들이 리포트를 쓴 것을 보니 너무 살갑고 잘 섬겨주십니다. 참 감사합니다. 구역을 뛰어 넘어 복된 교제 은혜가 지배하는 인간관계 진리가 속박하는 자유로운 관계가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은 자신의 고난을 제자들에게 설득시키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조여 오는 죽음의 순간을 두려움으로 맞이하면서 근심에 찬 제자들을 끝내 설득하는데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가 와서 흩어진 파편화된 제자들의 마음을 묶어줄 때까지 우리 주님은 끝내 제자들을 붙잡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우리 주님도 실패했고 지상의 마지막 생애가 그렇게 요한복음 14-16장까지 또 다른 보혜사로 진리의 속박을 그토록 강조했건만 제자들은 주님을 두고 흩어져버렸습니다. 주님은 실패했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의 너머에서 오시는 보혜사 성령이 주님의 실패를 대성공의 반전으로 일으켰습니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내 인생,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내 일터,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반전 일으켜 주시기 바랍니다. 느슨해져버린 인간관계, 멀어져버린 친구들, 다시 한 번 강력한 진리의 속박으로 재창조해주시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가향교회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진리의 속박이 되게 하시고 진리의 속박 속에 자유를 누리는 자유의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이 땅의 위정자들과 정치가들이 너무나 심각하게 부패하고 타락하여 공공의 영역에서 서비스를 하도록 위임 받은 공무원들과 정치지도자들과 모든 사회 리더십들이 타락하여 애써서 수고하고 토목공학적 부조리의 가장 밑에서 애쓰는 모든 국민들을 시민들을 이웃들을 절망시키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극한 회개로 몰아주시고 청와대를 극한 회개로 몰아주시고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을 고쳐주소서. 국회를 고쳐주시고 내각을 고쳐주시고 법관과 검찰과 판관들의 세계를 고쳐주시고 기업가들을 고쳐주시고 언론과 종교개혁의 썩어빠진 것들을 고쳐주셔서 탄식하지 않고 조용히 말만 해도 정의가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가 애가처럼 탄식하지 않고도 지상에서 민주적 절차를 거쳐서 정의가 회복되는 상식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세월호 때문에 죽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안산제일교회를 축복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이민혁 전도사님과 단원고 학생들을 축복해주시고 생존자들을 위로해주시고 조속히 세월호 가족들이 위로 받을 수 있을 만큼 진상이 규명되게 도와주시고 대통령의 철저한 회개와 자기 단죄가 일어나게 도와주소서. 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이 후안무치함이 사라지게 도와주시고 우리 국민을 감동시키는 죄책이 일어나게 도와주시고 고백이 일어나게 도와주소서. 주님 이 땅이 너무나 무자비하고 잔혹하여 경쟁에서 뒤진 자는 살 가치가 없다고 요구하는 허버트 스펜서가 말하는 사회진화론으로 진화됐습니다. 주님 장애인은 살 가치가 없고, 연약한 자, 나쁜 대학 나온 사람들은 취업도 할 가치가 없다고 소리치는 악한 신자유주의를 우리가 격파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인자와 사랑과 자비가 무자비한 경쟁보다 앞서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억조창생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가족으로 친절하게 응대하는 기독교 세상 복음세상 성서한국 이룩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형제자매들 중에 삶이 어렵고 고달파서 몸이 아파서 직장이 힘들어서 애쓰는 아들딸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를 살려주시고 먹여주시고 공궤하여 주소서. 귀한 헌물을 바친 하나님 자녀들 축복하여 주소서. 이 헌물이 하님 백성 앞에 귀하게 쓰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모든 근심과 영적냉담과 실족의 위기에 처해 있는 제자들을 단번에 성령으로 감화시켜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근심과 염려와 실족위기에 빠져 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파송해주신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실족위기에 빠진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영적 귀소 의식을 일으키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헐거워지고 느슨해진 하나님 언약적 유대의식을 되새기기 원하고 재강조하기를 원하는 교우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자녀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죄, 의,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는 진리의 성령”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
16장에서 제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모드는 근심입니다. 14장부터 제자들은 계속 근심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한다는 말은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근심, 즉 마음의 근심은 피상적인 근심이 아니라 실족할 만큼 드센 근심, 실족한다는 말은 스칸달리조마, scandal이라는 말이 원래는 실족한다는 말이죠. 스칸달리조마 하면 실족시키다입니다. 실족이라는 말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끝내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3년 동안의 모든 꿈들이 일장춘몽이라고 정리하고 예수님을 더 이상 따르고 싶지 않은 상태가 실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실족한다는 말은 급격하게 신앙의 냉각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상태가 실족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걸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지만 가정 단위, 우리가 속한 작은 소그룹, 회사, 또는 한국 교회라는 큰 집단, 한국 사회라는 큰 집단, 전 세계, 확장을 해놓고 보면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지에 대해서 의심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실족 상태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지지 않고 마음이 냉각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실족한, 잠재적 실족 상태에 있는 겁니다. 실족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헐거워져서 진리의 결속과 강력하게 견인해주고 지지해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건 실족 상태거든요. 한국교우들이 잠재적으로 목사님들 때문에 실족 상태에 있고 정치지도자들 때문에 실족 상태에 있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은 부모님 때문에 실족 상태에 있고 회사의 종업원들은 사장님 때문에 실족 상태에 있습니다. 실족 상태라는 말은 존재가 헐거워져서 진짜 진리가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느슨해진 상태입니다. 넘어진 상태죠.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족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어서 보혜사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14-16장까지 길게 하는 이유는 실족하지 않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16장 1절에서 요한복음 14-16장 3장에 걸쳐 또 다른 보혜사, 알로스 파라클레토스, 오시는 보혜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타오타 갈리카, 메 스칸딜리조 테세, 너희가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너희가 실족함은 나와 지냈던 3년간의 모든 기간들이 없는 것처럼 여길 것이고 너희는 산산조각 나서 부서진 파편조각이 될 것이고, 너희는 삶의 무중력 상태에 빠져서 어떤 것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파편이 될 것이다, 사실 그렇거든요. 진리 안에 속박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인생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진리에 속박된 사람만 하루하루 삶을 살아간다는 누적적 보람이 생기는 겁니다. 진리에 속박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는 밥을 먹고 직장 가고 밥을 먹고 카페인 마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거든요. 전부 다 앞과 뒤가 전혀 연결이 안 되는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은 기업들이거든요. 진리에 속박되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바람에 흩날리는 도말하고 싶은 이력들, 도말하고 싶은 만남들,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말입니다. 진리 안에 살지 않은 사람들은요. 실족한 사람이거든요. 실족한 사람은 마음이 냉각된 사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싫어진 사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더 이상 지겨워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실족한 사람입니다. 공동체 구성원과 살가운 접촉을 유지하면서 서로 만나가면서 기도하면서 축복의 언어를 주고받기 싫은 상태, 이것이 실족한 상태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사실상 제자공동체는 산산조각 나 있습니다. 서로 손가락질 하면서 서로 탓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갈릴리 홈경기에서는 굉장히 실력이 좋았던 예수님이 예루살렘 반경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제사장의 홈그라운드, 예수님께 어려운 경기가 시작되니까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더 이상 기적도 행하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피땀 흘리며 기도를 하고, 발을 씻어주시고 낮은 포복을 하시고, 로키의 언어만 구사하면서 슬프고, 행진곡이 아니라 슬픈 단조로 빠지고 끝이 없는 요르단 협곡으로 빠지단 말이에요. 제자들은 실족한단 말이에요. 왜 이러지? 그 사이에 유다가 이슥한 밤에 팔러 나갔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마음이 산산조각 나니까 포도나무 이야기도 하시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렇게 계속 하는데도 제자들이 붙어 있을 생각이 없습니다. 16장 1절에 실족 상태에 있는 제자들을 보고 타우타 랄렐카 휘민 히나 메 스칸달리스데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고 죽이는 행위, 라 트레아스 토데오,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 구약 용어입니다. 거짓 예언자를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제단 앞에 원수를 바쳐서 제물로 도살해드리는 것을 라 트레아스 토데오, 하나님 제단에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적 전문용어가 여기 써 있습니다.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전문용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로마서 12장 1-2절에 나옵니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 트레아스 로미코스, 신령한 예배할 때 그 예배와 같습니다. 영어로 하면 service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는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죠. 예수 믿는 자를 잔멸하려고 죽여 없애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 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잖아요. 청년 사울이 바울 되기 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죽임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면 역설이잖아요. 내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박해를 당하고 돌을 맞고 직장을 박탈당하고 매를 맞고 쫓겨나면, 내가 구원 받은 거 맞아? 이런 느낌이 들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영생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그 제자들에게 현실적으로 와 닿는 경험은 박해 출교 매맞음 온갖 적대적 추방, 이런 것이 제자들에게 온다고 할 때 실족한다는 거죠. 이런 것이 올 때 실족하지 말라는 거죠. 진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예수님인지 예수님을 죽이는 자인지, 진짜 의를 성취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가서 독생자의 죽음을 완성한 예수님인지, 예수를 죽여 없애서 이단자를 박멸하는 유대인 종교권력자들이 의를 실천하는 것인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심판을 받은 것인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린 그 자들이 심판을 받은 것인지, 이 세 가지를 확실하게 알려줄 분이 또 다른 보혜사, 알로스 파라클레토스라는 거죠. 그런 게 온다는 겁니다. 제가 볼 때 참 답답했을 거예요. 제자들은 또 다른 보혜사를 말해줘도 아무런 감동이 없고 예수님의 육체적 현존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시야에 사라져서 타이어의 바람을 빼듯이 우리의 모든 용기에 바람을 쓱 빼버려서 축 쳐진, flat tire가 되게 만들어버리는 예수님의 떠남이 현안 문제입니다. 내가 떠나면서 하는 말,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하나님께 떠나가지 아니하면 또 다른 보혜사가 오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육체적 인격적 현존과 결별하는 것 자체가 갖는 상실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조만간 우리에게 오게 될 하나님의 압도적 위로와 함께 하심의 임재의식이 지금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 너무 크나큰 슬픔을 당한 사람들은 너무나 큰 상실감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위로가 온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 지상의 생애는 영생,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그 생애까지 우리 삶의 차원을 쫙 펼쳐놓지 않으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자기를 입증할 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의 확신이 우리 삶 속에 부활은 분명히 죽음 저편에서 경험되는 건데, 부활할 것을 미리 믿어서 유익을 누리는 것, 부활은 죽음 저편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죽음 저편에서 일어나는 그 부활을 지금 믿음으로 죽음의 권세 안에 있는 우리가 죽음의 권세를 무효화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활신앙이거든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부활신앙이 필요한 거거든요. 그런데 부활신앙이 없다면 하나님도 억울하게 오해당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펼치셔서 이걸 해결할 길이 없는 겁니다. 9시 27분부터 11시 45분까지 대통령이 뭐했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국정조사를 하면 대통령이 뭐했는지 밝히는데, 대통령이 사우나를 갔는지 누구와 차를 마셨는지 모릅니다. 이걸 밝히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통령 장관들의 동선을 분초 단위로 재구성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에 오불관원으로 대했습니다. 이것만 밝히면 됐습니다. 탄핵감이지만 용서해주겠다,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이 말을 듣고 싶은 겁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했다는 말도 안 했기 때문에 용서한다는 마음도 안 일어나고 계속 거짓말로 협박 공갈치면서 세월호 유가족의 입을 막기 때문에 또 다시 거짓의 바다에 익사시키려고 합니다. 방송을 통하여, 지금 jtbc만 약간 저항하려고 하는데 우리 모든 국민 방송이 거짓의 바다에서 익사상태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우리 하나님은 바다가 그 죽은 자를 내어주고, 약속하신 것처럼 불의에 비명횡사한 모든 사람들을 다 살려내십니다. 비명횡사한 사람들을 다 살려내실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공평과 자비로 당신의 공의를 입증하실 것입니다.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좁은 머리로 정의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쓱싹 신비에 속했다고 넘어가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문창극스러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짜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정확하고 수학적 기하학적 완전함 보다 더 완전하게 우리의 정의를 만족시키실 것입니다. 내 작은 공의 질문도 만족 못하시는 게 아닙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부활신앙이 나옵니다. 우리가 분노에도 동참해야 하지만 또한 그들도 부활신앙, 세월호 희생자 중에서 은정양이 있습니다. 박예슬 같은 경우는 전시회를 열어서 부분적으로 부활정신을 경험했습니다. 이민혁 전도사님, 제 제자입니다. 숭실대 제자이고 장신대 제자인데 17명 중 16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전도사는 완전히 멘붕 영붕 상태에 빠져서 과제물을 일체 내지 않아도 학점을 주었습니다. 과제물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요구할 수도 없고, 멍하니 있습니다. 신혼 초입니다. 결혼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 전도사님과 앉아 있으면 제가 같이 물에 빠집니다. 그 은정양 이모가 결국 자살했습니다. 은정양 오빠도 자살을 준비하고 있고 엄마도, 불행이 계속 용솟음칩니다. 세월호 연쇄적 파산적 아직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아이들도 끝이 나지 않았고, 이걸 깊이 생각하면 나까지 분노에 가득 찹니다. 제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제가 청와대로 달려갈 생각이 듭니다. 이것만 계속 생각하면 중앙청에 올라가서 뭔가 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타인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자들, 비명횡사한 자들,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다 살려주십니다. 부잣집 대문 앞에서 비참한 비렁뱅이로 죽었던 나사로도 품어주신 하나님이라면 나머지 모든 인생도 책임지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난맥상들, 해석할 수 없는 난맥상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닫게 만드는 시사적인 상태들, 전부 다 의 죄 심판 등과 관련된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관련된 이런 사태, 예수님 자신도 자기에게 일어난 사태가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있는 높은 수준의 교감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니까 실족한 겁니다. 예수님은 I lay down my life, 내가 내 목숨을 내려놓는 것이지 누가 빼앗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는 것, 이스라엘의 1500년 동안 누적된 불순종을 일괄 정산하여 순종모드로 바꾸려면 1500년 동안 아브라함부터 지금까지 누적된 불순종을 무효화하기 위해서, 위대한 순종을 바치기 위해서 목숨 바쳐 가면서 까지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받아들이겠다, 고도의 교감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가는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이 박힌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1500년 동안 누적된 죄를 일괄 무효화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이 순종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죄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죄지,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신명기 21장 22-23절 보면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라고 돼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다, 죄인으로 죽은 것이라는 확신을 시키기 원했습니다. 로마제국의 형틀인 십자가를 빌려서 정확하게 신명기 21장 23절의 뜻을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이 저주 받아 죽는 죽음임을 믿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음모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저주의 십자가를 지기로 하고,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하나님께 거짓 예언자로 심판 받아 죽었다고 믿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예언자가 나무에 달려 죽었거든요. 다른 신을 믿었던 사람이요. 다른 신을 믿자고 설득했던 자가 나무에 달려 죽었다고요.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 죽인 이유는 구약의 역사에서 예수가 다른 신을 믿자고 설득하여 죽임 당한 거짓 선지자라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사울입니다. 원래 사울은 예수를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진멸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서 영광중에 있는 것을 보고 예수를 저주 받아 죽은 것이 맞지만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죄 때문에 저주 받아 죽었다는 ‘우리를 위하여’ 라는 말을 추가함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 겁니다. 어디서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저주 받아 죽었다고 선전하려는 자들을 역설적으로, 그래 저주 받아 죽었는데 내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와서 그걸 해명해줍니다. 청년사도 바울이 해명해줍니다. 만일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 다메섹 도상에서 엄청난 진리의 반전에 이르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끝까지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되는 거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죄가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오순절 성령이 오면 깨닫게 해준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의를 성취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성실성이 아니라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성실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거짓 예언자 예수를 배척하는 것이 의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서 기꺼이 죽음도 감수하는 이 행위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경결하게 결속시키는 일종의 의를 창조하는 행위입니다. 이사야 46장 12-13절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마음이 완악하여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예수님을 통하여 가까이 가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끌어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특징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다시 하나님께로 다시 가서 재계약체결을 해주는 것이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지 않았다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120문도에게 뜨거운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 것이고,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전 세계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도적 파송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죽음의 파문은 오순절 성령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쏟아부어주신 거죠.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아름다운 순종을 드리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그 한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은밀한 사랑 때문에 오순절 성령과 맞먹는 사랑의 큰 경결한 에너지가 공동체로 막 쏟아진다는 말이에요. 이건 여러분이 아마 알겁니다.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가는 그 주변에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의 강력한 인력이 흡인력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끌어들이는 영적 구심력이 역사하게 되거든요. 누군가가 기도한 것이고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누군가가 사랑의 행위, 의로운 삶을 끊임없이 누적시킨다는 말이거든요. 그런 영적 에너지 장이 형성된다는 말은요. 구역장님이 사랑의 실천을 자꾸 하다보면 구역장 중심으로 구역원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구심력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하나님의 진리의 견인과 속박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신도 모르게 신령한 그룹이 형성되고 그 신령한 그룹은 교회가 될 만큼 뜨겁게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거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누군가가 계속 기도를 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계속 사랑을 하고, 누군가가 계속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 누가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교회 오면 교회 같은 느낌이 들고, 서울역 대합실 같지는 않잖아요. 무언가 따뜻해지고 포근해지고 말없이 쉴 새 없이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 하나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자기 신앙의 궤도를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 거죠. 가정도 마찬가지죠. 집이 너무 좋은 이유는 엄마 아빠의 십자가 때문이거든요. 저도 어릴 적 기억해보면 청소년 시기에 윤리적 갈등이 심했어요. 저희 세 살 위 형 그때가 노동인력, 저보다 세 살 많은 형까지를 일하러 아버지가 데려가시고 저를 놔주세요. 형이 저에게 정죄의 눈빛을 보내요. 그럼 저는 축구가 너무나 하고 싶고 개울물에 고기 잡으러 가고 싶고 투망 던지고 싶은데 풀 베러 가자고 하면 이때 굉장히 양심의 갈등이 일어요. 아버지가 나를 오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과 누나가 하는 것은 속박이 약해서 도망갔거든요. 실컷 밤이슬 맞도록 놀고 가면 그렇게 놀았는데도 집에 가면 따뜻한 밥이 있고 환영을 하거든요. 형과 누나가 약간 불만을 가지고, 형과 누나의 핍박 말고는 없거든요. 내가 무슨 힘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가? 그렇게 깨달았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에게 준 사랑 같은 것, 정말로 느꼈던 그 순간은 부모와 자녀 간의 언약적 연대가 크다는 거죠. 가정이 좋다는 것은 자녀가 웬만해도 심판받지 않거든요. 공권력으로 검사처럼 우리 가정의 규칙 1조 3항에 의해서 용돈 20% 감축, 학점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퇴, 하지 않거든요. 이번에 성적 1점 떨어지면 감축이고 2점 떨어지면 자퇴다, 바로 봉제공장 출발, 가정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정이 있긴 있더라고요. 가끔 그런 가정이 있는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그냥 건강하기만 해도 좋잖아요. 가정은 정말 은혜로 유지되거든요. 교회도 그렇거든요. 어떤 사람은 느슨하게 슬리퍼신고 농땡이치고 예배 늦게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도 몇 년 만 참아주면 인간이 돼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계속 핍박하고 못 살게 굴면, 사고 칠 기회도 없이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교회는 무시무시하게 위험한 현행범이 아니면 참아줘야 해요. 동성연애자가 와도 참아줘야 하고, <투갑스>처럼 뇌물 먹는 경찰이 와도 참아야하고, 오래 참아야 해요. 그걸 보자마자 최후통첩을 해서 피를 몸에서 빼내듯이 하기는 힘듭니다. 은혜가 큽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커서 그 큰 은혜 때문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은혜의 산소가 율법의 질소보다 훨씬 적어지면 질식합니다. 산소는 질소보다 5분의 1, 대기의 5분의 1이 산소잖아요. 20% 만 산소가 돼도 Love is like oxygen, 사랑은 산소와 같거든요. 40%는 질소가 있을 수 있고 메탄도 있고 암모니아도 있을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메탄적 존재가 돼서 냄새가 나는데, 크롬 망간, 우리 교회가 20%만 산소가 돼도 굉장히 광릉 수목원처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다, 우리 사회에 격정과 분노가 너무 많기 때문에 정말 성자와 같은 자비와 온유가 넘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저는 참 많이 하거든요. 왜 홍명보 감독을 그렇게 미워하는가? 4대 2로 지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았어요. 브라질은 7대 1로 졌어요. 저는 그때 홍명보를 다시 이해했습니다. 저렇게 잘하는 브라질도 7골을 먹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주님 제가 브라질 축구를 볼 수 있도록 새벽 5시에 깨워달라고 기도하고 잤거든요. 4대 2로 지는 이 과정도 굉장히 복잡한 것이고 굉장히 분투에 분투를 거듭하고 한 건데 엿을 던지고 핍박하고 못살 놈 죽일 놈, 이건 인간성이 타락해도 보통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네티즌이 바로 지옥 갈 사람이 너무 많다, 타블로 사건이라든지, 최진실을 죽음으로 몰아낸다는지, 네티즌이 드라큘라적 익명성으로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분노의 격정, 증오심, 참지 못함, 이 원인은 있습니다. 대다수 공공영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게 격정과 증오와 분노를 일으키는 게 맞습니다. 우리 모두가 분노의 격정 속에 빠지면 우리가 최후심판자적 이름으로 심판하는 것을 일사분란하게, 남을 심판하는 일에, 남을 십자가에 매다는 일에 앞장서면 은혜가 상실돼 버립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쪽이 낫지 매다는 일, 십자가에 매다는 언어, 최후통첩의 언어, 그를 죽여서 더 이상 존재감을 박탈해버리려는 언어가 십자가에 매다는 겁니다. 그런 언어들이 너무 살벌하게 파도가 높다는 거죠. 제가 지금 제일 눈물이 잘 나는 것은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입니다. 슬픈 사람들보다 더 빨리 나를 울게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들의 생애 앞에 눈물이 빨리 납니다. 착한 사람들은 사나운 인간성과 세상에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현존을 조금도 못 느끼다가 갑자기 그 사람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하게 만드니까 그런 사람을 보면 내가 마음이 착해지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마음도 같이 공감합니다. 일주일 내내 착한 사람, 여러분 마음을 순식간에 하나님의 언약적 유대관계로 초청할 수 있는 사람과 많이 어울리길 바라고 최소한 한 번 이상 식사하길 바라고 문자 주고받고 이메일 주고받고 사랑의 유대를 일삼길 간절히 바랍니다. 목사님 누가 그런 사람 있습니까? 본능적으로 자기가 찾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찾아야 해요. 제가 보기에 꽤 많이 있는데 실명으로 추천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분명히 보입니다. 우리 교회 안팎에도 있고 교회 바깥에도 있고, 8월에는 운영위원회 모임이 식사를 하지 않고 환대와 우정의 식사를 각자 할 생각입니다. 8월에 누가 진리의 속박에 머무는지 우리를 눈물 나게 할 착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날 아마 드러날 것 같습니다. 돈이 안 되면 몸으로라도 하시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근심이 과도하면 영적 냉각에 빠지고 영적 냉각에 빠지면 실족한다는 것을 아시고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냉각에 빠졌고 잠재적 실족 상태에 있다면 우리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치유의 영이 오셔서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순식간에 알려 주실 것이고, 지금 여러분의 삶에 얽혀 있는 부조리하고 해명할 수 없는 고난의 신비들을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 안에서 자라길 원하는 성도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시시때때로 보내주셔서 반드시 진리 안에서 강고하게 붙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냉각되기를 원치 않고 근심에 쌓이는 걸 원치 않고 우리가 실족하고 느슨해져서 이탈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7,8월 한가할 때 시간이 많을 때 편지도 쓰시고 사랑의 교제도 나누시고 만남도 가지시고 부디 여러분 있는 모든 곳에서 실족 상태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돕고,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의 위로를 만끽하고 성령이 주시는 위로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7,8월에 우리 모두 얼굴을 살피면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 사랑이 필요한 사람 순식간에 결단하여 즉시 결단하여 사랑을 나누는 형제자매들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유현미 집사님이 관여하는 입양단체에서 7월말부터 고아들을 입양할 수 있는 기회, 입양아들을 집에서 호스트 할 수 있는 행사를 합니다. 이윤구 사회자님께서 광고하시겠지만 이런 행위도 해주시기 바라고, 여러분 집에 혹시 방이 하나 남이 있다면 꼭 초청해서 친교 하는 것을 포함해서 극한 친절을 나누시기 바라고 여러분이 식사초대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을 개방해서 식사초대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지금 구역예배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역장님들이 리포트를 쓴 것을 보니 너무 살갑고 잘 섬겨주십니다. 참 감사합니다. 구역을 뛰어 넘어 복된 교제 은혜가 지배하는 인간관계 진리가 속박하는 자유로운 관계가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은 자신의 고난을 제자들에게 설득시키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조여 오는 죽음의 순간을 두려움으로 맞이하면서 근심에 찬 제자들을 끝내 설득하는데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가 와서 흩어진 파편화된 제자들의 마음을 묶어줄 때까지 우리 주님은 끝내 제자들을 붙잡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우리 주님도 실패했고 지상의 마지막 생애가 그렇게 요한복음 14-16장까지 또 다른 보혜사로 진리의 속박을 그토록 강조했건만 제자들은 주님을 두고 흩어져버렸습니다. 주님은 실패했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의 너머에서 오시는 보혜사 성령이 주님의 실패를 대성공의 반전으로 일으켰습니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내 인생,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내 일터,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반전 일으켜 주시기 바랍니다. 느슨해져버린 인간관계, 멀어져버린 친구들, 다시 한 번 강력한 진리의 속박으로 재창조해주시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가향교회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진리의 속박이 되게 하시고 진리의 속박 속에 자유를 누리는 자유의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이 땅의 위정자들과 정치가들이 너무나 심각하게 부패하고 타락하여 공공의 영역에서 서비스를 하도록 위임 받은 공무원들과 정치지도자들과 모든 사회 리더십들이 타락하여 애써서 수고하고 토목공학적 부조리의 가장 밑에서 애쓰는 모든 국민들을 시민들을 이웃들을 절망시키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극한 회개로 몰아주시고 청와대를 극한 회개로 몰아주시고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을 고쳐주소서. 국회를 고쳐주시고 내각을 고쳐주시고 법관과 검찰과 판관들의 세계를 고쳐주시고 기업가들을 고쳐주시고 언론과 종교개혁의 썩어빠진 것들을 고쳐주셔서 탄식하지 않고 조용히 말만 해도 정의가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가 애가처럼 탄식하지 않고도 지상에서 민주적 절차를 거쳐서 정의가 회복되는 상식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세월호 때문에 죽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안산제일교회를 축복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이민혁 전도사님과 단원고 학생들을 축복해주시고 생존자들을 위로해주시고 조속히 세월호 가족들이 위로 받을 수 있을 만큼 진상이 규명되게 도와주시고 대통령의 철저한 회개와 자기 단죄가 일어나게 도와주소서. 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이 후안무치함이 사라지게 도와주시고 우리 국민을 감동시키는 죄책이 일어나게 도와주시고 고백이 일어나게 도와주소서. 주님 이 땅이 너무나 무자비하고 잔혹하여 경쟁에서 뒤진 자는 살 가치가 없다고 요구하는 허버트 스펜서가 말하는 사회진화론으로 진화됐습니다. 주님 장애인은 살 가치가 없고, 연약한 자, 나쁜 대학 나온 사람들은 취업도 할 가치가 없다고 소리치는 악한 신자유주의를 우리가 격파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인자와 사랑과 자비가 무자비한 경쟁보다 앞서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억조창생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가족으로 친절하게 응대하는 기독교 세상 복음세상 성서한국 이룩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형제자매들 중에 삶이 어렵고 고달파서 몸이 아파서 직장이 힘들어서 애쓰는 아들딸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를 살려주시고 먹여주시고 공궤하여 주소서. 귀한 헌물을 바친 하나님 자녀들 축복하여 주소서. 이 헌물이 하님 백성 앞에 귀하게 쓰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모든 근심과 영적냉담과 실족의 위기에 처해 있는 제자들을 단번에 성령으로 감화시켜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근심과 염려와 실족위기에 빠져 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파송해주신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실족위기에 빠진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영적 귀소 의식을 일으키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헐거워지고 느슨해진 하나님 언약적 유대의식을 되새기기 원하고 재강조하기를 원하는 교우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자녀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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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한복음 15:16-23 “ (0) | 2022.02.14 |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장 7-15절- “ (0) | 2022.0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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